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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04 11:51:30

살비아누스

이름 살비아누스
(라틴어: Salvianus)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서로마 제국의 사제, 역사가

1. 개요2. 행적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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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세기 서로마 제국의 사제, 역사가.

2. 행적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속주 북동쪽에 자리잡은 쾰른 또는 트리어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440년경 로마 제국의 쇠망을 다룬 저서를 집필했을 때 두 도시가 이민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장면을 감정적으로 서술했다. 일찍이 우수한 교육을 받아 수사학자로서 갈리아에서 명성을 날렸다고 하며, 이교도 부모인 히파티우스와 퀴에타의 딸 팔라디아와 결혼하여 딸 길드키올라를 낳았다. 그러다 아내를 설득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뒤 함께 속세를 떠나 수도자가 되었다. 이 일로 장인의 분노를 사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7년 후 히파티우스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때 그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427년 아를의 초대 대주교가 된 성 호노라투스와 교분을 나눴다. 호노라투스는 그를 가장 소중한 동료 중 한 사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430년경 사제가 되어 마르세유 수도원에 지내다가 470년 이후에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에 "나는 웃으며 죽는다(perit ridendo)"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3. 저서

겐나디우스 스콜라스티우스는 저명한 기독교인들의 전기인 <데 비리스 일러스트리부스(De Viris Illustribus)>에서 그가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2개의 저서와 9개의 서신 뿐이다. 첫번째 저서는 <신의 정부(De gubernatione Dei)>로, 그는 이 책에서 이민족들이 갈리아와 아프리카로 쳐들어오면서 벌어진 약탈과 파괴가 벌어지는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그러면서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는 이유는 신이 도덕적 타락을 처벌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로마 세계가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은 전적으로 십계명을 무시하고 모든 사회 계층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바가우다이 폭동에 가담하고 이민족 침략자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도시는 방탕과 유흥에 빠졌고, 고대의 거짓 신들에 대한 숭배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맹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면서, 신은 이렇듯 부패한 로마 세계에 벌을 내렸다고 봤다. 하지만 신은 절대로 신자들을 버리지 않으며, 항행하는 조타수가 키를 절대로 잃지 않는 것처럼 신도 세상을 올바르게 이끄는 사명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이민족들이 타락한 로마인들에 비해 한결 낫다고 주장했다. 반달족은 순결하며 고트족은 경건하고, 프랑크족과 섹슨족은 이단인 아리우스파이거나 불신자이지만 역시 순수하다는 것이다.

두번째 저서는 <교회에 대하여(Ad Ecclesiam)>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탐욕과 도시의 무분별한 사치와 타락을 규탄했으며,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말라면서,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결핍으로 고통받는 게 부모로부터 저주스러운 재산을 물려받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순결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수녀, 사제, 수도자들의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끝까지 준수할 것을 강조했다. 그 외에도 친구 및 가족과 주고받은 서신 9통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