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arie Dentière (1495 ~ 1561)프랑스의 투르네[1] 출신의 여성 종교개혁가. 관점에 따라서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 생애
투르네의 프랑스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되자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마르틴 루터가 교회와 대적할 즈음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수녀로서의 직위를 포기하여 수도원을 나왔다. 그녀는 슈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시몽 로베르와 혼인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마리 당티에르는 1528년 프로테스탄트 기욤 파렐을 따라 제네바로 향하였는데, 5년 후인 1533년에 시몽 로베르가 사망하였다. 마리 당티에르는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중에 기욤 파렐과 함께 일하던 앙투안 프로망과 재혼하였다.
당티에르는 여성의 몸으로 선술집이나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여성의 설교를 인정하던 장 칼뱅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는 당티에르와 갈등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티에르는 여성들에게 차별을 극복하여 목소리를 낼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그녀가 1539년에 남긴 소책자 <편지>에는 그녀의 사상과 주장이 담겨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한편 성서에 기초하여 어성의 말할 책임과 권리를 변호했다. 성서가 여성들이 공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증언하고 있음을 주장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