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 |
이름 | <colbgcolor=white,#191919>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
출생 | 1713년 10월 5일 |
프랑스 왕국 랑그르 | |
사망 | 1784년 7월 31일 (향년 71세) |
프랑스 왕국 히슐리유 |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파리 대학교 |
직업 | 철학자, 소설가, 수필가[1] |
사조 | 백과전서파, 유물론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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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백과전서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극작가, 소설가, 미술평론가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의 실체는 물질이라는 유물론에 근거하여 무신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교와 교회의 비이성적 행동들을 비판했다. 그의 유물론은 무생물도 감성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생물학적 유물론'이다. 도덕에 있어서는 유물론이 가져올 결정론적 사고의 위험성을 인지하고[2]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고자 하였다.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라해도 20여 년간 수많은 계몽철학자들을 모아서 함께 저술한 《백과전서》이다.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인 《백과전서》는 과학적 유물론에 입각한 새로운 지식을 프랑스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지식인들로 하여금 계급사회의 위계적 권위에 대해 도전하게 하고 종교와 교회의 무용함을 깨닫게 하여, 프랑스 대혁명 전에 그 혁명이 촉발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문학에도 뛰어나 《운명론자 자크》, 《라모의 조카》 등의 소설을 집필했고, 철학에서는 《달랑베르의 꿈》, 《부갱빌 여행기 보유》 등을 저술했으며, 미술평론에서는 『문예통신』지에 수십년간 《살롱》을 게재하며 유럽 철학과 문학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생애
1713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에서 칼을 제조하는 장인[3]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예수회에 입회해서 교육을 받고 12살에는 삭발례[4]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5살에 파리로 올라가 교육을 받으면서, 신앙심을 잃고 성직과는 거리가 먼 일생을 살게 된다. 19세 때인 1732년에는 파리대학교에서 문학 학사(maître-ès-arts) 학위를 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법학을 공부하면서 소송 대리인의 사무실에서 서기일도 하고, 징세 청부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도 하다가 1734년부터 작가의 길을 택한다.28살 때, 앙투아네트 샹피옹이라는 여성 직공과 사귀었는데 그녀가 가난하고 낮은 신분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디드로를 수도원에 감금해버린다. 이전부터 아버지는 성직자나 법률가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아들 디드로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런 극단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디드로는 수도원에서 맨발로 도망쳐 나와 1743년 11월에 앙투아네트와 파리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생빅토르가에 살림을 차린다.
그러다가 1746년 어느 출판업자가 디드로에게 영국의 체임버스 백과사전의 번역을 의뢰한다. 이때 디드로는 아예 새로운 백과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하곤 친하게 지내던 볼테르, 루소, 달랑베르 등 저명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모아서 《백과전서》를 집필했고, 1751년에 1권을 완성했다. 이후 《백과전서》는 1765년까지 2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교회, 전제 정치, 신분제 등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1752년에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고, 도중에 동료들이 이탈하는 등[5] 우여곡절이 많았다. 게다가 디드로는 백과전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에[6] 대부분의 작업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작업 도중 시력에 손상을 입었다. 1772년, 마침내 백과전서의 마지막 권이 출간되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부 내용은,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한 출판업자들에 의해 삭제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백과전서》를 집필하는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서 1745년 샤프츠베리의 저서를 번역했고, 이를 통해 이신론을 믿게 되었다. 1749년에 쓴 《맹인 서간》에서는 이신론에서 더 나아가 무신론적인 성향을 보인다. 게다가 《백과전서》에서는 당시의 종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과 프랑스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들의 고발로 몇 년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다.
《백과전서》를 완성한 후에도 그의 생계는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디드로는 애지중지하던 딸 앙젤리크가 방될(Vandeul) 집안과 결혼하자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장서 대부분을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에게 판다. 다행히 그녀는 디드로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그의 모든 장서를 인수하고 후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장서의 파리 관리인 자격으로 매달 월급을 보내주었다. 그는 이런 인연으로 1773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에 머무르기도 한다.
이후 1784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마련해준 프랑스 히슐리유(Richelieu)의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7]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의 시신은 생 로크(Saint Roch) 교회에 묻혔다. 하지만 지금에는 그곳에도 그의 관은 존재하지 않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교회를 점령한 혁명군들이 탄알을 만들기 위해 납으로 만들어진 그의 관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게 가장 믿을 만한 추측이라고 한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의 육체는 그가 주장한 유물론대로 혁명의 작은 일부분이 된 것이다. 참으로 디드로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아닐 수 없다.[8]
3. 사상
3.1. 유물론
디드로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의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철학의 궁극적 원리로 삼았던 "실체(신)"라는 명제 자체가 틀렸음을 지적한다. 그들이 말하는 실체(신)란, "어디엔가 존재하면서 공간상의 어느 지점에도 해당하지 않는 어떤 존재, 면적이 없으면서도 면적을 차지하고 그 면적의 어느 부분에서나 완전한 전체의 상태로 있는 존재, 본질적으로 물질과 다른 것이면서 물질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물질을 따라다니고 물질을 움직이는 존재, 물질에 영향을 주면서 그 물질의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는 존재"[9]인데, 그러한 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의 근원인 '신'을 부정한다면, 인간의 능력과 정신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디드로는 그것을 물질의 '감성(sensibilité)'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당시에 감성의 뜻은 '외부 대상의 인상들을 지각하고 그 결과로 이러한 지각의 강도에 적합한 움직임을 생산하는 것'[10]을 말했지만, 디드로가 생각하는 감성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서 모든 물질의 보편적 본질이며, 변화하고 반응하며 움직이는 물질의 일반적인 성질이자 상호작용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의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성질이라면, 돌도 '감각(sensation)'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디드로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를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 진공상태에 놓아두면 그것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런 즉, 떡갈나무는 평상시에 힘과 자극에 둘러쌓여 있으며, 떡갈나무 내부에도 그 힘에 저항하는 힘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11]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단순한 물질에도 외부의 힘과 자극에 대응하는 내부의 감성적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운동의 차이일 뿐이라고 디드로는 말한다. 그러나 대리석 조각과 사람이 아무리 닮아 보인다고는 해도 그 둘의 내부 조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는가? 아주 솜씨 좋은 조각가의 끌이라 할지라도 피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 않는가? 하지만 디드로는 대리석이 우리의 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자신한다. 우선 대리석 조각상을 절구로 빻아 가루로 만든다. 이 가루에다 부식토를 섞어서 잘 혼합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화학적 결합을 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이후 거기에다 완두콩, 양배추 등의 채소의 씨를 뿌린다. 그러면 식물은 토양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인간은 다시 그 식물을 섭취함으로써 비로소 대리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생물이 생물로 되는 과정이다. 인간의 생식 과정도 비슷하다. 분자들이 결합하여 자궁 안에서 배아가 성장하고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생명 현상은 다음 네 마디로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소화하고, 허락된 용기 안에 분비하라, 그러면 규칙에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진다." (in vasi licito fiat homo secundum artem)[12]
따라서 생명이란 무생물과 다를 바 없이, 단지 작용과 반작용의 연속일 따름이다. 살아 있을 때는 한 개체로서 작용-반작용하고 죽어서는 분자 상태로 작용-반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나나 다른 어떤 존재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단지 형태를 바꾸는 일일 뿐이다. 이런 형태를 갖든 저런 형태를 갖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형태를 가지든 모든 존재는 평등하며, 각각의 존재는 코끼리나 진딧물, 그리고 분자에 이르기까지 감각에 따른 나름의 행복과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13]
이러한 '감각'하는 존재에게서 그 자신의 '삶'이란, 절대적인 신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지금 현재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이었다는 의식"이다.[14]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생겨난다. 기억이 없는 사람은 단지 느끼는 순간에만 자기 실존을 느낄 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떠한 역사도 갖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장하고, 쇠약해지고 때로는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생체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만약 감각을 느끼고 기억에 적합한 생체 조직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자신이 받아들이는 인상들을 연결시키고 그 연결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역사를 형성하고 자신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삶을 가진 '나'라는 존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15]
디드로는 종교, 권력, 인간 사이의 불평등과, 특히 도덕을 창안해낸 사회를 인간불행의 원천으로서 맹렬히 공격한다. 디드로에게 기존의 도덕이란 하나의 사회적 제도에 불과한 것으로, 인간의 자연적 기능으로부터 유래되는 정당한 기쁨을 금지하는 위선적 속박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체의 종교적, 금욕적, 사교적 덕목들을 사회의 편견이나 억압으로 일축해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엄격주의를 거부하고, 육체의 기본적 욕구를 긍정하기도 한다. 디드로는 성적 욕망에는 어떤 잘못도 없으며 게다가 "순수한 사랑의 가장 숭고한 감정들에도 성욕이 스며들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디드로가 모든 도덕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기적 동기에 근거한 일체의 기존 도덕관들을 파괴하고는, 자연에 대한 존중에 의거하여 '인류' 전체에 유용한 것을 '선'으로 두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도덕관을 지향했다.
이러한 유물론에서 디드로의 결정론적 운명론이 도출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존재'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디드로는 인간을 단순히 생리의 문제나 교육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던 라 메트리와 다르게,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정짓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연결고리를 '모두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우연적(우발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그 모든 연결고리들을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디드로는 주장한다. 즉, 그의 유물론적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는 단정지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세상을 파악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주장은 엄밀히 말해서 '단언'해서는 안되고, 다만 그것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뿐인 것이다.
"나는 선언하지 않는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 인간 : 엘베시우스 작품에 대한 반박 (Réfutation de l'ouvrage intitulé l'HOMME) 』
『 인간 : 엘베시우스 작품에 대한 반박 (Réfutation de l'ouvrage intitulé l'HOMME) 』
4. 영향과 평가
디드로의 작업은 동시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로 하여금 계급의 위계적 질서와 종교의 비이성적 행위에 의문을 품게하여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의 최신 과학지식들을 누구보다도 먼저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화하여 지식인들에게 알리는 문학적 소양도 매우 뛰어났다.장 프랑수아 마르몽텔과 자크 앙리 마이스터는 디드로와 함께 지적인 대화들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으며, 돌바크의 살롱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앙드레 모를레는 "디드로는 철학과 예술, 문학과 관련된 질문들을 풍부한 표현들을 통해 능숙하게 다루면서 장시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박식했고 달변이었다. 심지어 디드로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장 자크 루소는 말년에 그의 자서전에서 "몇 세기 후에 디드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어지는 만큼의 많은 존경을 후대 사람들에게 받게 될 것이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독일에서는 괴테, 실러, 레싱 등의 뛰어난 문학가들이 디드로의 글쓰기에 존경을 표했다. 괴테는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두고 "뛰어난 사람의 클래식한 작품"이라고 말하면서, "디드로는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사람이다. 그와 그의 작품에 투덜거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양없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그를 높게 평가했다.
지난 세기에 디드로는 발자크, 들라크루아, 스탕달, 에밀 졸라, 쇼펜하우어 등 이름만 대도 알만한 수많은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오귀스트 콩트에 따르면, "디드로는 흥미진진한 시대에 태어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역사가 쥘 미슐레는 그를 "진정한 프로메테우스"로 묘사했으며, 디드로의 아이디어는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마르크스 역시, 제일 좋아하는 산문작가로 디드로를 선택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를 오마주한 작품을 내기도 했다. 책이름은 『자크와 그의 주인』. 쿤테라는 도스토옙스키보다 디드로의 소설을 더 좋아한다고 밝히면서, 특히 지성과 유머와 환상의 향연인 『운명론자 자크』는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라고 추켜세운다.
또한 디드로의 소설 『라모의 조카』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영감을 부여하고 미셸 푸코의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쪽에서도 디드로는 자크 리베트나 루이스 부뉴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리베트의 영화는 디드로의 철학이 짙게 반영되어 있으며, 아예 디드로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5. 어록
마지막 성직자의 내장으로 마지막 왕이 목 졸려 죽을 때까지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광신에서 야만까지는 단지 한 걸음일 뿐이다.
인민만이 진정한 주권자이며, 인민만이 진정한 입법자이다.
『나카즈[16]에 대한 논평 (Observation sur le Nakaz)』
『나카즈[16]에 대한 논평 (Observation sur le Nakaz)』
법은 한 사람의 자의적 바람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과 안전에 관하여 서로 자문하는 다수인들의 바람이다.
『나카즈에 대한 논평』
『나카즈에 대한 논평』
누구도 자연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지 않았다.
『백과전서』 제1권 「정치적 권위 (Autorité politique)」편
『백과전서』 제1권 「정치적 권위 (Autorité politique)」편
모든 개인은 이성을 향유하는 동시에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정치적 권위」
「정치적 권위」
열정, 위대한 열정만이 영혼을 위대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인생은 오해의 연속이다.
6. 저서
제목 | 집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철학단상 Pensées philosophiques | <colbgcolor=#fff,#1f2023> 1746년 |
회의론자의 산책 Promenade du sceptique | 1747년 |
맹인에 관한 서한 Lettres sur les aveugles | 1749년 |
백과전서 Encyclopédie | 1751년 ~1772년 |
살롱 Salon | 1759년 ~1781년 |
라모의 조카 Le Neveu de Rameau | 1761년 |
달랑베르의 꿈 Le Rêve de d'Alembert | 1769년 |
배우에 관한 역설 Le Paradoxe sur le comédien | |
수녀 La Religieuse | 1770년 |
운명론자 자크 Jacques le fataliste et sonmaître | 1771년 |
여성에 대하여 Essai sur les Femmes | 1772년 |
이것은 콩트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 conte | |
부갱빌 여행기 보유 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yille | |
생리학 요강 Eléments de physiologie | 1774년 |
러시아를 위한 대학 설계 Plan d'une université pour la Russie | 1775년 |
두 개의 인도사 Histoire de deux Indes | 1779년 |
6.1. 『백과전서』
출판인인 르 브르통으로부터 처음에 제안을 받은 것은 당시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던 체임버스 출판사의 두 권짜리 『백과전서 또는 예술과 과학의 보편 사전』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동으로 이 일을 맡은 수학자 달랑베르와 디드로는 곧 번역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백과사전을 기획한다. 체임버스의 백과사전이 기존의 프랑스 사전들을 번역하여 옮긴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백과사전 편찬의 정신이나 체계도, 비판적 의식도, 편찬을 담당한 작가들의 역량이나 사전에 담긴 도판들의 질적 수준도 그들의 이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1747년 디드로가 계약서에 서명을 한 날부터 1772년 마지막 도판본들이 출판되어 종료될 때까지 25년 동안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돌바크, 튀르고 등 당대 프랑스 최고의 지식인 140여 명이 이 작업의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본권 17권, 도판본 11권으로 구성된 이 사전은 71,818개의 항목을 담고 있고 그 페이지만 18,000페이지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고려할 때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4,500여 질이 선 예약으로 판매되었는데, 당시 일반적인 출판 부수가 1,500부를 넘지 않았던 상황이나 전집의 규모와 가격을 고려해볼 때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후에 판형을 달리하여 출판된 재판본을 합치면 대략 25,000질이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으니 이 사전이 유럽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지식인들이 『백과전서』의 편찬 작업에 참여한 것은 바로 이 사전이 당시 계몽주의의 이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빛을 통해 모든 편견, 절대 권력의 억압, 광신과 미신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이 퍼져나가 세상을 밝히듯 지식과 사상이 전파되어 세상을 계몽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의 결정체가 바로 『백과전서』였다. 디드로는 출판에 앞서 사전의 의미를 홍보하는 것과 동시에 예약자를 모집하기 위해 쓴 「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학문의 쇄신 이후 우리 사회에 퍼져나갔던 보편적인 광명들은 부분적으로는 사전들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이 과학의 씨앗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인간 정신은 더 깊은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또한 이 사전의 출판은 인류 역사에서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거대한 사건이기도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지식 분류에 영향을 받아 『백과전서』는 인간의 정신 기능을 기억, 이성, 상상력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을 이 세 가지 정신 기능에 따라 분류한다. 즉 예를 들어 기억에는 역사를, 상상력에는 시를, 이성에는 철학을 가장 대표적인 학문으로 나눈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모든 학문의 절대적 기준이었던 신학의 지식 체계를 뒤집어 엎은 것이었다. 더불어 『백과전서, 또는 과학, 예술, 직업의 체계적 사전』이라는 원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사전은 그 당시에는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 못했던 기술과 직업 분야에 많은 몫을 할애했다. 특히 11권에 달하는 도판본은 공장과 작업장들 그리고 그곳에서 사용된 도구들을 세세히 묘사한다. 이는 과학의 발전이 이끌어온 기술의 발달 상황, 실용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으로 낡은 구체제의 계급들을 대신하여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던 부르주아의 시대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당연히 이 사전은 출판 과정에서 정치권력과 교회의 끊임없는 감시와 박해 대상이 되었다. 1752년 두 번째 권이 출판된 이후, 교회는 필자 중 하나인 프라드 신부의 이론을 문제 삼아 이단재판소에 이 사전의 출판금지를 요청한다. 결국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출판된 두 권을 매매하거나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다행히 『백과전서』에 우호적이었던 검열감독관 말제르브의 노력으로 이듬해에 취소되었다. 그러나 1757년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기도 이후 검열과 탄압의 강도는 더욱 거세지며 결국 제7권이 출간된 1759년 또 다른 필자인 엘베시우스가 『정신론』을 출간하자, 이를 빌미로 정부는 출판을 금지하고 백과전서파 철학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게 된다. 위기를 느낀 공동편집자 달랑베르가 떠난 후, 해외에서 출판 작업을 계속하라는 볼테르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디드로는 혼자서 불법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계속하여 스스로 5,000개 이상의 항목을 집필했고 다른 필자들의 수많은 글들을 수정했다. 이렇게 25년에 걸친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백과전서』는 탄생되었다.
7. 여담
- 국내 인지도는 낮지만, 유럽 문학/철학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드니 디드로의 작업들은 괴테라던지 귄터 그라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파리 제7대학의 이명인 '디드로'도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 《수녀》는 1968년 자크 리베트가 영화화한 적이 있다.
- 20세기 초,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자인 줄리엣 쇼어는 그의 저서 《과소비하는 미국인들》에서 디드로의 일화를 언급하며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바로 "디드로 효과" 이다. 이는 새로운 물건을 가진 후 그에 어울리는 물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심리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현상을 말한다. 디드로는 자신의 에세이 《나의 오래된 가운을 버림으로 인한 후회 (Regrets on Parting with My Old Dressing Gown)》에서 한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날 친구가 디드로에게 고급스러운 붉은 가운 하나를 선물했다. 디드로는 이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뻤다. 그런데 그가 이 화려한 가운을 입었을 때 갑자기 집 안에 있는 가구들이 낡아 보였다. 색도 유행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지금 입고 있는 가운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운에 어울리기 위해 그는 새 가구를 구입했고, 결국 주위의 모든 환경을 가운의 품격에 맞췄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고 나니 오히려 디드로는 왠지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충동이 지나간 후에 그는 "내가 가운에게 휘둘렸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디드로 효과는 하나의 물건을 갖게 되면 그것에 어울리는 다른 물건들을 계속해서 사게 되는 과소비의 양상을 뜻한다. 비슷한 뜻을 지닌 고사성어에 상저옥배가 있다.
- 수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의미없는 수식을 제시하며 '그러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증명해 보시오!'라고 외치자 무신론자인 디드로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는 실제론 일어나지 않은 일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오일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며 막나가는 성품은 결코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일러 문서에 나와 있다.
- 1753년 '자연의 해석'이라는 책에서 수학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까지 모든 게 밝혀진 상황이며 더이상의 수학적 발전은 없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볼 때 현실과 매우 어긋난 예측이 되었다.
[1] 이 외에도 미술평론가, 극작가, 문학 평론가, 역사가, 번역가, 정치학자 등 매우 많았다.[2]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열심히 살든 아무렇게 살든 상관없으므로, 윤리와 도덕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3] 외과의사들이 선호하는 수술용 메스를 만들어낼 정도로 유명한 장인이었다고 한다.[4] 가톨릭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받는 신학생들이, 교육과정 중에 치르던 예식. 1972년에 폐지되었다.[5] 특히 친구인 달랑베르가 이탈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6] 특히 그가 지은 책들이 강제로 압수당해서 소각되기도 했다.[7] 디드로는 식도락가답게 저녁 식사로 수프와 삶은 양고기, 치커리 차를 마시고 후식으로 살구와 설탕에 졸인 체리를 먹다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뇌출혈로 추측된다.[8]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p.188[9]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44[10] 『백과전서』 15권 「감성」 항목.[11] "그래도 사실인걸요. 움직이지 않고 있는 물체가 장소를 이동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해보세요. 그러면 그 물체는 이동하겠지요. 거대한 떡갈나무 줄기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급격히 희박하게 해서 제거해보세요. 그러면 나무 속의 수분이 갑자기 팽창해서 나무가 산산조각 날 겁니다. 당신의 육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47)[12]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50~54[13]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117~118[14] 여기서 '의식'은 뇌와 신경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쳐놓은 거미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식하는 거미와 같다. 인간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을 의식함으로써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21~22)[15]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62[16] 예카테리나 2세가 모스크바 법전을 현대 법전으로 대체할 목적으로 1767년에 소집한 전 러시아 입법 위원회의 지침서.[17]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옮김, 한길사, 2006, p.137[18] 유물론적 사유에서 오는 평등사상의 출발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