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 라틴어: Quintus Aelius Tuberō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아버지) 툴리아(어머니?) 술피키아(아내)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아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재무관, 역사가 |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재무관, 역사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아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는 동맹시 전쟁 시기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이후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기원전 61년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밑에서 레가투스 직책을 맡았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기원전 49년, 그는 아프리카 총독으로 선임된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로 향했다.그러나 아프리카 전임 총독 가이우스 콘시디우스 롱구스의 레가투스인 퀸투스 리가리우스는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받들었고, 투베로 부자가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하는 걸 저지하고 식수 공급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 투베로가 "아들이 아프니 육지에 잠시 상륙해서 병이 나을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리가리우스는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투베로 부자는 에페소스로 이동해 폼페이우스와 합류한 뒤 리가리우스의 행위를 고발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리가리우스를 용인하기로 했다. 이후 투베로 부자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폼페이우스가 무너진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귀순해 사면을 받고 로마로 돌아갔으며, 아들 투베로는 기원전 47년 또는 46년에 재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46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퀸투스 리가리우스의 형제인 티투스 리가리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퀸투스 리가리우스를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이려 했다. 이에 지난날 리가리우스에게 수모를 당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아들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카이사르에게 접근해 리가리우스가 누미디아 국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반기를 들려 했다고 고발했다.
카이사르는 그 말을 믿고 기원전 46년 10월 리가리우스를 체포한 뒤 재판에 회부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공개적으로 리가리우스를 악당이자 국가의 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이에 맞서 리가리우스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투베로 부자가 과도하게 잔인하다고 비난하고 피고를 애꿎은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라고 옹호했으며, 유바 1세와 동맹을 맺은 책임은 그가 아니라 이미 사망한 폼페이우스 측 고위 인사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연설에 설득되어 리가리우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기로 했다.
리가리우스가 무죄 판결을 받자,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는 정치 활동을 접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국가법과 민법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고어체로 쓰여 있어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최소 14권으로 구성된 <로마 역사> 연대기를 집필했다. 이 연대기는 로마 건국부터 투베로가 살았던 시대까지의 역사를 망라한다. 그의 저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의 저서를 참고 자료로 인용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투베로는 기원전 51년 집정관이자 당대 로마 최고의 법학자로 명성을 떨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딸이자 저명한 여성 시인이었던 술피키아와 처음으로 결혼해 기원전 11년 집정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기원전 4년 집정관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