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립왕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한 카를 4세 |
현임 국왕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왕이라고 자칭한 후 왕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것이다.
국왕이면 대립왕(對立王)이라고 하고 황제면 대립황제(對立皇帝)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선거군주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특히 신성 로마 제국에서 자주 등장하였다.예시
비슷한 개념으로 대립교황이 있다.
2. 명칭
독일어 | Gegenkönig |
프랑스어 | antiroi |
이탈리아어 | Anti-re |
체코어 | protikrál |
영어 | Anti-king |
한자 | 對立王 |
일본어 | 対立王 |
다만 독일어로 대립황제(對立皇帝)를 의미하는 Gegenkaiser는 약간 의미가 다르다. 독일어로 대립왕(對立王)을 의미하는 Gegenkönig가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립왕을 의미하는 고유 용어로 사실상 정착되었으므로 Gegenkaiser는 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중국의 당나라와 같은 통일 제국에서 황제라고 스스로 주장할 정도의 역적, 그 중에서도 일부 지역을 확보하거나 일시적으로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거나 그럴 능력이 있는 강력한 역적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예시
3. 넓은 의미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왕권이나 귀족 작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모든 사람들 중 현임이나 현직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대립왕이 가능하다. 사실상 작위 요구자의 대부분이 포함된다.그리고 왕위 계승 분쟁의 대상이 된 국가에만 한정한 개념이므로 인접한 국가의 국왕이 해당 국가의 국왕을 겸직하려고 하면 대립왕에 포함될 수 있다.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국왕들은 잉글랜드 국왕임과 동시에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왕조의 현임 국왕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대립왕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서유럽 지역에만 국한한 개념은 아니며 일본의 남북조시대의 남조와 북조의 대립같은 경우나 고려의 고려 국왕과 심왕의 대립같은 경우도 대립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역적도 대립왕에 포함이 가능하다.
4. 일반적인 의미
일반적으로는 선거군주제를 실시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사례 정도만 대립왕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며 나머지의 경우에는 작위 요구자나 역적 정도로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신성 로마 제국의 사례가 대립왕의 대표적인 이유로 나타나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선거군주제를 실시할 정도로 각각의 국왕 후보간의 왕위 계승 정통성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국왕처럼 인접 국가의 군주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출마하는 사태도 발생할 지경이었다.[1]
- 신성 로마 제국의 선거군주제 자체가 허술한 점이 많아서 선거 과정이나 선거 결과에 대한 항의나 부정이 가능했다. 당장 투표권을 가진 선제후 선정에도 잡음이 많아서 13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금인 칙서를 공포하여 7명의 선제후를 명시하기 전까지는 선제후의 숫자나 누가 선제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다.[2]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후보자가 될 정도이니 각각의 후보자가 자신들이 직접 보유한 광대한 영지 + 지지세력들이 보유한 영지 + 외국의 지원을 합하면 현임 황제에게 충분히 대적이 가능하며 원래부터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 겸 영주이므로 버티기에 들어가도 상당기간을 버틸 수 있다.
-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된 자도 일단 독일왕이 된 후 교황에게 정식으로 대관식을 받은 후에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존재하므로 대립왕도 충분히 세력을 길러서 내전을 통해 실력으로 독일왕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카를 4세가 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식 황제로 등극한 대표적인 사례다.
-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 사람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후 내부 반대파를 모조리 제압한 후에도 교황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교황이 현임 황제를 파문한 후 황제 반대파중 적당한 자를 골라서 대립왕을 세울 수 있으며 현임 황제가 이런 난관을 극복했다고 해도 반대파의 본거지를 직할 영지로 삼는 것은 봉건제의 특성 및 당시의 열악한 기술적 문제로 인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잘 해봐야 현지 지도층 중에서 황제파 인물을 새로운 영주로 임명하는 게 고작이었으며 그 때문에 본질적인 해결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문제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대립왕이 자주 발생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사람은 대립왕과 지지세력을 때려잡거나 협상으로 종속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게 된다.
그리고 대립왕이 꼭 1명이라는 법칙도 없고 대립왕으로 추대된 자가 인접 국가나 강대국의 군주일 경우도 있는데 이러면 장기간의 전쟁과 외교적 협상이 필요해지며 성과도 별로 좋지 않다. 교황같이 황제의 통치나 간섭을 싫어하는 세력이 있다면 협잡질을 벌여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대립왕을 처리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우므로 종종 있는 일이지만 간신히 내부 안정을 해놓은 상태에서 황제가 아무것도 못한 채 사망함으로서 후계자가 다시 황위에 올라가서 대립왕과 지지세력을 진압하는 도돌이표같은 일이 벌어지거나 아예 현임 황제가 내부 안정도 제대로 못해보고 사망했고 대립왕도 제국 전체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하거나 아예 후임자가 될 사람이 없어서 대공위시대가 열리는 막장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나중에 제위를 사실상 세습하게 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라는 제국 전체의 문제 때문에 어렵지 않게 선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출마 등에서 나타나듯 100% 보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선거 기간에 선제후들에게 엄청난 돈을 뿌려서 매수하거나 선제후들의 이권을 보장하는 과정을 거쳐 제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4.1. 유사 사례
선거군주제를 채택한 유럽의 국가라면 비슷한 경우를 겪는 일이 많아서 그러한 경우에도 대립왕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3]이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경우에는 보헤미아 국왕이 곧 선제후여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선거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했다.프랑스 왕국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위그 카페가 선거군주제를 통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카페 왕조가 일부일처제에도 불구하고 계속 적장자들이 탄생했고 현임 국왕의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강화하면서 사실상 선거군주제가 유명무실화되고 세습군주제가 정착하였다. 그래서 대립왕이 나온 적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은 그냥 잠시 등장한 역적 취급한다.
백년전쟁 기간에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한 잉글랜드 국왕은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대립왕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잉글랜드의 정식 국왕이라는 것이 더 강했으며 전쟁기간중에 점점 프랑스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외국의 침략자로 간주되었으므로 그냥 타국의 국왕이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대립왕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스코틀랜드 왕국이나 아라곤 왕국에서도 대립왕이 나온 적이 있으나 그냥 왕위 계승 과정에서 벌어진 역적 사건 정도로 취급한다.
5. 문제점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신성 로마 제국이 중세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강력한 황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고 대공위시대가 도래하면서 혼란에 빠지는 상황 정도는 당시 유럽의 국가라면 1번에서 2번 정도는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서 국가를 다시 추스리려고 할 때마다 대립왕이 출현하여 국가 내부에서 내전과 대립과 할거가 벌어지는 사태가 일상화되면서 점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실추되었다. 유럽 여러 국가에서 점차 중앙집권제로 나아갈 때 신성 로마 제국은 여전히 7선제후에 의한 선출제를 유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는 최전선이라는 입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제위를 준세습화 할 수 있었다.[4] 그러나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 수준에 돌입하게되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들도 사실상 제국은 포기하고[5] 자신들의 영토인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강화하는 방침으로 전환하면서[6] 18세기에 이르면 위에 언급한 볼테르가 말한 대로 주변 왕국들을 휘어잡지도 못하고 종교계에서도 영향력이 약해지는데다가 나라로서의 명분마저 빈약해 여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무시하는 여론이 조성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신성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대립왕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의 책임은 대립왕에게 존재하며 덕분에 대립왕 하면 신성 로마 제국이 떠오르는 정도가 되고 만다.
[1] 필리프 4세는 자신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필리프 6세의 아버지)와 차남 필리프(필리프 5세)를 후보자로 내세우기도 했고, 프랑수아 1세는 아예 직접 출마를 했다. 앙리 3세나 루이 14세도 출마를 원했으나 선제후들의 부정적인 견해로 최종적으로는 포기했다.[2] 성직 선제후의 경우 폐위되었던 전임 선제후가 투표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아스카니아 가문이 통치하던 시절 작센의 경우 비텐베르크와 라우엔부르크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둘 다 자신이 적법한 후보라면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막장의 극단이었다.[3] 크로아티아 왕국 포함.[4] 역대 황제선거를 보면 거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만장일치 선출이었다. 심지어 프랑수아 1세의 출마때도 결국은 더 많은 돈을 뿌렸던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5] 30년 전쟁이 끝나고 바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페르디난트 3세와 레오폴트 1세만 하더라도 신성 로마 제국 통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는 제국 통치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통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이 터지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 통치를 거의 포기했다.[6] 오스만 제국과의 대튀르크 전쟁 끝에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 슬라보니아 지역을 수복하였고,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소폴란드와 갈리치아를 얻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창설하였으며, 폴란드 분할로 얻은 영토와 에르데이 대공국을 육상으로 연결하기 위해 몰다비아 공국의 서북부를 빼앗아 부코비나 공국을 창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