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12-16 23:29:11

심왕


만주의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92em; letter-spacing: -.8px"
<colbgcolor=#fff,#1c1d1f>


산융
동호
고조선 예맥 숙신
고조선 고리국
흉노
~
4
세기초
고구려 {{{#!wiki style="margin:30px -10px -160px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 {{{#!wiki style="margin:-165px -10px 40px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6a5445>   }}}}}}부여
오환
선비
서진 읍루
4
~
6
세기
물길
   
거란 실위 고구려 두막루
7
~
9

발해
10
~
12세기
{{{#!wiki style="margin:-5px -10px -25px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 발해부흥운동 여진
오국부
{{{#!wiki style="margin:-25px -10px 0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 {{{#!wiki style="margin:0px -10px -25px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82647> }}}}}}
13세기
동요
후요
동하
몽골 제국

요양행성 · 동방 3왕가 · 접경 고려인 (심왕)
14
~
16세기
북원 여진족
고려 요동 군벌 우량카이 삼위
17
~
18
세기
후금
 
 
 
 
19세기
{{{#!wiki style="margin:-60px -10px -15px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100%"
}}}}}}
20세기
일본 제국 관동주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봉천군벌
러시아 공화국
<keepall>
중화제국 <keepall>
중화민국
봉천군벌
극동 공화국
중화민국 소련
만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keepall>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 동북3성
러시아 연방 | 극동 연방관구
}}}}}}}}}


1. 개요2. 배경3. 역사4. 역대 심왕 목록5. 심왕 관련 학술연구

1. 개요

심왕(瀋王)원나라왕작(王爵) 중 하나이다. 명목상의 봉토가 현대의 랴오닝성 선양시 일대였기 때문에 선양의 한국식 독음인 심양(瀋陽)에서 따온 심양왕(瀋陽王)으로 불렸다가, 심양왕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이를 줄인 '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1] 초기의 봉호인 심양왕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3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만 심양왕으로 불렸을 뿐이며, 심왕으로 불린 기간이 훨씬 길다.[2]

당시 심양과 요양(遼陽) 일대에는 여몽전쟁 기간 동안 몽골에 투항하거나 피랍당한 요동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원나라에서는 1260년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하여 관리했다. 고려가 항복한 이후에는 심양로(瀋陽路)로 개편되었는데, 이 구역은 정동행성이 정식 운영되던 기간 중에는 정동행성 소속이었으나 이후 정동행성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요양행성의 관할이 된다.[3]

충선왕이 고려국왕에서 물러나 충렬왕이 복위한 뒤, 원나라로 돌아간 충선왕은 제위계승 분쟁에 관여해 1307년에 카이산아유르바르와다의 즉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대가로 심양왕에 책봉되었다. 충선왕이 고려국왕 출신이었던 만큼, 원나라 직할령 중에 고려와 연관성이 깊은 심양을 봉호로 삼게된 것이다. 원나라의 실세가 된 충선왕은 이내 정동행성을 통해서 고려의 실권까지 장악했고, 정식으로 정동행성 좌승상을 겸하게 된다.[4] 이름 뿐인 고려국왕이 되어버린 충렬왕이 승하한 뒤에는 다시 고려국왕에 복위하면서 동시에 심양왕을 겸하게 되었다. 1310년에 심양왕 작위가 격상되었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겸작을 지적받는 일이 잦았고, 특히 고려로 귀국해 고려국왕의 직무에 집중하라는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1313년에 고려국왕 지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했고, 1316년에는 혈연상 조카인 양자 왕고에게 심왕 작위를 양위했다. 이후로는 고려국왕과 심왕은 별개로 운영되었는데, 특히 실권이 없던 심왕은 자신이 고려국왕을 겸하고자 원나라 조정을 자극하여 분쟁을 벌였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이 분쟁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2. 배경

윤은숙 교수(강원대학교)가 저술한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고려국왕이 심왕에 임명된 데에는 매우 복잡한 당대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13∼14세기 동북 만주 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도의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경 왕씨 부마(쿠르겐)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했다.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태조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즈 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막내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 신생 제국의 국정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 그 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제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였다. 타가차르는 세조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리크부카(阿里孛哥)를 툴루이 내전에서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제5대 카안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내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항상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옷치긴 울루스는 원 세조(쿠빌라이 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왕 제도도 옷치긴 울루스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왕위를 요동에 설치해 양자가 서로 충돌하여 옷치긴 울루스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훗날에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이 원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했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의 제25대 충렬왕은 장인인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 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카다안의 침입).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요약하면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동방 3왕가들은 만주의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원나라대칸들은 원 간섭기 당시 고려 부마을 분봉왕으로 내세워 옷치긴 왕가 등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기 위해 명예직으로서 심왕 작위를 신설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에 대한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중앙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3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자리로 이용하기보다는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주로 이용하였다.

참고로 고려심왕의 경우, 심왕은 작위로서의 왕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작위가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를 동군연합이라 볼 수는 없으며, 참고로 제26대 충선왕 이후에 고려국왕과 심왕 작위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므로 이를 함께 겸한 것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역사

상술한 바와 같이 원 간섭기 요동에는 접경 고려인들로 구성된 행정구역인 심양로(瀋陽路)가 설치되어 있었다. 본래 이 지역은 부원배인 홍복원의 남양 홍씨 가문이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을 겸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이었으나,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진 고려 왕족 영녕공이 원나라의 부마가 되면서 그 영향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홍복원은 영녕공에게 도전했다가 끔살당했으나, 그 아들인 홍차구는 원나라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녕공을 무고하여 실권을 되찾는데 성공해 고려와 심양로가 소속된 정동행성을 기반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홍차구가 죽은 뒤로 남양 홍씨는 원나라 조정에서 중용되지는 않았다.

이 무렵 고려국왕이었던 충선왕은 아내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 끝에 사실상 폐위당하고 원나라에 소환된 뒤로는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1307년에 올제이투 칸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몽골 제국의 계승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 당시 몽골 황족들 중에서도 나름 항렬과 명망이 높은 편에 속했는데, 아유르바르와다가 주축이 되어 일어난 쿠데타로 그의 친형인 카이산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카이산을 지지하면서 원나라 조정에서 실세가 되었다. 당시 계국대장공주의 친정과 고려국왕에 복위한 충렬왕은 아유르바르와다와 대립하던 올제이투 칸의 외척 세력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반전으로 정치력을 상실했고 고려의 실권 또한 충선왕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카이산은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하여 보답했고 이어서 정동행성의 좌승상을 겸하게 하여, 충선왕은 명실상부한 고려와 심양로의 실권자가 되었다. 1308년에 충렬왕이 죽은 뒤로는 고려국왕에 복위하게 되었는데, 한자 문화권에서는 그 전례가 없던 2개의 왕을 겸작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홍차구의 아들인 홍중희(洪重喜)가 충선왕을 무고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역관광을 당하여 남양 홍씨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홍중희는 입성책동을 일으켰으나 무산되었고, 1310년에는 심양왕 작위가 금인수뉴 등급으로 격상되어 '심왕(瀋王)'이 되면서 충선왕의 정치적 위상은 정점을 찍었다. 충선왕이 고려국왕과 심왕을 겸하던 시절에는 그의 두 왕작을 한데 합쳐서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적들에게 전례가 없는 겸작을 빌미로 공격을 당하게 되었고, 특히 고려와 원나라 양쪽에서 고려로 돌아가 고려국왕의 직무에 전념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충선왕 자신도 원나라 조정에서 정치력을 잃는 상황을 극히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심왕으로 격상되기 이전에도 고려국왕을 세자에게 양위하려는 소동을 일으킨 바가 있었고, 심왕으로 격상된 직후에는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세자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고려로의 귀국 요구가 격화되자 결국 1313년에 고려국왕 지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했다. 이 무렵에 충선왕은 이복형 강양공의 차남이자 본인의 양자로 들였던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를 원나라의 볼모로 불렀는데, 1316년에 왕고에게 심왕 작위를 양위하여 분할 상속이 이뤄졌다. 이후 원나라의 태위직을 역임했던 충선왕 자신은 태위왕(太尉王)을 자칭했는데, 공식적으로는 고려에선 상왕으로 호칭되었고, 원나라에서는 노심왕(老瀋王)으로 불렸다.

심왕이 된 왕고는 명목상의 봉작에 불과한 심왕 작위에 만족하지 못했고,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심복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려국왕을 겸작하려 시도했다. 할머니의 복수[5] 영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전 세대의 실세였던 충선왕이 숙청되기는 했으나 심왕 왕고가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되었는데, 왕고는 이를 기회로 삼아 충숙왕을 공격하여 잠시나마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나라 조정에서는 충숙왕과 왕고 양자를 시험해보는 태도를 유지하며 정쟁을 부추겼으며, 충숙왕이 최종 승자가 되면서 심왕이 고려 내정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왕고가 죽은 뒤에는 왕고의 손자인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가 심왕 작위를 이었다. 공민왕 재위 시절에 기철을 위시한 부원배들이 숙청당할 위기에 몰리게 되자 심왕 토크토아부카를 새로운 고려국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이에 기황후와 부원배 세력은 덕흥군을 내세웠다가 실패했다.[6] 1375년에 공민왕이 죽은 직후, 당시 고려에는 적법한 계승권자가 없었기 때문에 북원에서는 심왕 토크토아부카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여 고려에 들여보내려 시도했다. 그러나 토크토아부카는 국경 인근에 주둔하기만 했을 뿐 국경을 넘지는 않았으며, 이 시도는 이듬해에 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토크토아부카가 죽으면서 무산되기는 했으나, 이에 자극받은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은 북원과의 국교 회복을 추진하게 되었다. 다만 고려에서 토크토아부카와 밀통했던 고려의 승려 소영은 처형당했다.

비록 충선왕이 실각한 이후 심왕 작위 자체는 실권없는 명예상의 봉작에 불과했다고는 하지만, 심왕은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금씨족의 외손이자 부마로써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고려에서도 국왕과 촌수가 가까운 종실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정치적 위상이 결코 낮진 않았으며, 고려 후기 정치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 역대 심왕 목록

순서 휘(이름) 재위 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왕장(王璋) /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
1307년 혹은 1308년 ~ 1316년 1275년 ~ 1325년 고려 제26대 충선왕
02 왕고(王暠) /
왕올제이투(王完澤禿)
1316년 ~ 1345년 ? ~ 1345년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손자
03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 / 王脫脫不花) 1354년 ~ 1376년 ? ~ 1376년 제2대 심왕이었던 연안군 왕고의 손자
원사》 제왕표와 《고려사》 예지에선 충렬왕이 심왕으로 서술되는데, 이는 오류이다. 《원사》 제공주표에선 복국장공주가 심왕 왕도(王燾)의 적실이 된 것으로 기록했는데, 왕도는 충숙왕의 개명 전 이름으로 '고려국왕 왕만'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특히 《원사》 제왕표의 금인수뉴를 받는 왕작 목록에 39번이 심왕이고 41번이 부마·고려국왕인 점을 두고, 이를 서열로 간주해 심왕이 고려국왕보다 높은 지위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성왕인 잘리아르 씨족의 연왕(兖王)은 22번이고 무종의 장남인 쿠살라가 본래 약속받았던 황태자 지위를 강탈당하고 받은 왕작인 주왕(周王)은 25번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이 순번은 시봉(始封) 순서대로 정렬된 것일 뿐이지 서열 순번이 아니다. 심왕과 고려국왕 사이인 40번은 《원사》 편찬자들이 정확한 책봉 시점과 봉호를 확인하지 못한 왕작이고, 고려국왕 이후는 면국왕(緬國王)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원나라의 왕작이 아닌 외국 군주로 취급된 지위였다. 특히 충선왕이 겸작하던 시점에는 고려가 우선되어 '고려심왕'으로 불렸던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서열론은 잘못임이 확인된다.

5. 심왕 관련 학술연구

고려 충선왕의 심양왕 피봉과 재원 정치활동, 이승한, 역사학연구 2권, 1988
14 세기 전반 고려 , 원관계와 정치세력 동향 - 충숙왕대의 심왕옹립운동을 중심으로 -, 이익주, 한국중세사연구, 2000
고려후기 對元관계 --입성책동과 상인-, 이정신, 만주연구 3권, 2005
忠宣王의 요동회복 의지와 高麗王·瀋王의 분리 임명, 한국인물사연구 21호, 2014
몽골제국의 동방 경영과 요동 고려인 세력, 오기승, 중앙사론 43권, 2016
왕고(王暠)와 고려 정치 -심왕옹립운동에 관한 검토-, 박수현, 윤미소, 김영서, 경북사학, 2020
[1] 원나라의 왕작은 크게 국왕(國王)과 군왕(郡王) 두 종류로 구분되고, 국왕 작위는 책봉 시 수여하는 인장의 재질과 형태에 따라 5등급으로 구분되었다. 국왕 중 가장 높은 등급은 순금으로 된 맹수 형태의 인장이라는 의미인 금인수뉴(金印獸紐)를 받는 왕이었는데, 이 등급에 속하는 왕작은 봉호를 1글자로 썼다. 때문에 심양왕의 지위가 금인수뉴 등급으로 높아지면서 봉호가 '심왕'으로 줄은 것이다. 명나라에서 봉호가 2글자인 왕이 군왕인 점에 비춰 심양왕이 원래 군왕 등급이었던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명나라의 제도일 뿐이며 북주 이후 중국에서 군왕의 봉호는 '○○군왕' 형식이었다.[2] 드라마 <기황후>에서도 심양왕으로 등장하는데, 시기상 이미 '심왕'으로 격상된 뒤이므로 고증 오류이다. 경칭도 '전하'가 아닌 '저하'로 쓰이는데, 중국에는 원래 '저하'라는 경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고려에서도 원래는 작위를 받은 신하에게 썼던 경칭이었다가 작중 시점에는 왕세자 부부의 전용 경칭으로 쓰이고 있었으므로 잘못 쓰인 것이다.[3] 심양로의 정식 명칭은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高麗軍民總管府)인데, 언제부터 요양행성의 관할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서 실각한 뒤로 추측된다.[4] 흔히 이 구조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여, 심양왕(심왕) 또는 심왕부가 심양로를 직접 다스린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충선왕이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와 심양로를 동시에 장악했던 것에 가깝다.[5] 제27대 충숙왕은 왕고의 할머니인 정화궁주 왕씨를 괴롭힌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의 손자이다. 둘 다 제25대 충렬왕의 왕비이며, 따라서 왕고와 충숙왕도 같이 충렬왕의 손자이다. 또한 왕고의 친부인 강양공은 원래 충렬왕의 적장남이었으나, 충렬왕이 몽골 출신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서자로 격하된 사례이기도 했다. 게다가 고려국왕보다는 원나라 황족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던 충선왕과 달리 그 친아들인 충숙왕은 고려인 정체성을 갖고 있던 것으로 확인되며, 충숙왕이 즉위한 뒤에도 충선왕이 고려에 간섭하며 실질적인 정적이 되어버린 점에 비춰 보면, 사실 친부자 간의 관계도 그다지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6] 본래 고려 왕실에선 혼인관계에 따른 출생이 아닐 경우엔 국왕의 친자녀라 할지라도 왕족으로 대우하지 않았다.(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소군 문서 참조.) 때문에 덕흥군은 충선왕의 친아들이라고는 하지만 고려에서 왕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덕흥군의 세자는 아예 기황후의 조카인 기삼보노를 내세워 사실상 역성혁명을 시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국내에서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결과만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