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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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의 역대 부족, 국가 및 지도자 연표 |
만주 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정보들을 정리해놓은 곳입니다. 인물은 가나다 순으로, 사건은 연대 순으로 배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2. 접근
오늘날 주로 쓰이는 "만주"라는 명칭은 일본 등 열강 식민제국들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중국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상한 것이지만, 용어 자체는 누르하치가 적대 여진들과 대비하여 건주여진을 자칭할 때 처음 만들어진 말이다. 예컨대 구러산 전투 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가리켜 각각 "만주"와 "후룬"이라고 칭하였다. 그랬던 것이 여러 여진족을 통합하고 일대를 제패하면서 여진족 및 그 영토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무엇보다도 현재 "만주" 또는 "동북"으로 여겨지는 영역은 이미 전근대에도 중국(화북, 강남)과는 이질적인 지역이었다.[1] 전통적으로 만주는 만리장성 바깥에 위치한 새외(塞外)로 여겨졌으며, 중원의 한족들은 이 일대를 근거로 삼은 왕조를 자신들과는 다른 이민족 정복왕조로 여겼다. 근대 중화민국 수립 당시에도 그러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한족들 사이에서도 한족 18성을 제외한 동북3성(만주)이나 내·외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은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오히려 전근대에는 만주와 한반도가 연계될 때가 많았다. 남북국시대까지는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었고, 역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인접지역의 여진족이 조선에 복종하면서 번호(藩胡)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완전히 나뉘게 된 건 이들 번호를 구성하던 여진 부족들이 건주여진에 완전히 흡수된 청대부터이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 침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을 고착시켰다.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이때 축적된 역사 연구 덕에 말갈,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 중 한 명이다. 다만,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동북공정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만주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한중 둘 다 자국을 중심으로 만주를 변경 취급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한규 교수는 그의 저서 『천하국가』 및 『요동사』에서 만주 역사의 주도 세력을 크게 예맥계, 동호계, 숙신계로 정의했다.[2] 이 구분에 따르면, '예맥'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까지 이어졌으며 한반도 북부 및 압록강 ~ 두만강 인근의 만주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이후 타 세력에 흡수되었다. '동호'계는 산융, 동호 - 오환, 선비 - 거란, 해, 습,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3] 주로 요하(랴오허) 강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숙신'계는 숙신 - 말갈/물길 - 여진 - 만주로 이어졌으며, 본래 만주 동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나 두 세력이 소멸한 이후에는 전 만주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본래 수렵 및 약탈을 주로 하고 농업과 가죽 교역 등으로 생활을 보조하는 삶을 살았으나, 점차 타국의 영향을 받아 농경 사회의 역량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주의 토착 3종작 외에 한족계도 만주 에 진출하여 요동-요서를 중심으로 간간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족에 거의 동화된 근현대 청나라 베이징시 지배층의 만주 개방 및 동북삼성 설립, 한족과 조선인들의 만주 유입, 그리고 일제의 만주국, 중국공산당의 민족평등대우 등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살던 토착민들은 자기 삶을 보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그 주도권을 한족에 많이 빼앗겼으며, 만주어로 대표되는 고유 문화도 자발적 동화로 거의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정리해보자면, 전근대 만주를 주름잡은 4대 종족인 동호/예맥/숙신/한족은 각자 현재 몽골(동호)[4]/한국(예맥)/중국(숙신, 한족)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선비,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발해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는 것처럼 요나라 역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다만 몽골은 동시에 선비와 거란보다는 오히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만주족은 청 시기에 몽골과 중국을 지배하고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청 붕괴 후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해 중국으로 흡수되어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현실.
이렇게 만주에서 여러 종족이 교류하며 역사를 써갔다 보니 이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몽골족과 한민족이 동족이니 만주족와 한민족이 동족이라 하는 역사 왜곡과 오해를 하기도 한다.
3. 전개
>만주에는 역사적으로 세 계통의 종족이 살아왔다. 중부는 예맥족의 터전이었고, 그 동쪽으로 숙신 계통의 종족이 자리를 잡았으며, 서부 지역에는 동호 계통이 활약했다.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부에는 옥저 세력도 있었다.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수-당 시기에는 말갈, 요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는 여진,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현재 만족(滿族)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2000년 인구조사 기준 1,068만 명이다. 물길족은 부여국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말갈족은 고구려 유민과 더불어 발해를 건국했고, 여진족과 만주족은 각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동호 계통은 다싱안링 산맥 서부의 초원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유목민족으로서,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거란 , 실위가 있다. 동호족이 흉노에게 격파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뒤에 오환산과 선비산을 근거지로 삼음에 따라 오환, 선비라는 새로운 종족 명칭이 등장했다. 특히 선비족은 세력을 크게 일으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모용부는 전연(349~370), 후연(384~409), 서연(385~394), 남연(398~410)이라는 연나라들을 건국했고 우문부는 북주(556~581), 걸복부는 서진(385~431), 독발부는 남량(397~414), 탁발부는 대(338~376), 북위(386~534), 동위(534~550) 서위(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송기호, 『동아시아의 역사분쟁』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부에는 옥저 세력도 있었다.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수-당 시기에는 말갈, 요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는 여진,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현재 만족(滿族)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2000년 인구조사 기준 1,068만 명이다. 물길족은 부여국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말갈족은 고구려 유민과 더불어 발해를 건국했고, 여진족과 만주족은 각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동호 계통은 다싱안링 산맥 서부의 초원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유목민족으로서,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거란 , 실위가 있다. 동호족이 흉노에게 격파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뒤에 오환산과 선비산을 근거지로 삼음에 따라 오환, 선비라는 새로운 종족 명칭이 등장했다. 특히 선비족은 세력을 크게 일으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모용부는 전연(349~370), 후연(384~409), 서연(385~394), 남연(398~410)이라는 연나라들을 건국했고 우문부는 북주(556~581), 걸복부는 서진(385~431), 독발부는 남량(397~414), 탁발부는 대(338~376), 북위(386~534), 동위(534~550) 서위(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송기호, 『동아시아의 역사분쟁』
시대구분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에 나와있는 것을 큰 줄기로 취했다.
3.1. 고대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 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논란이 있었으나 논란과 논란을 거친 끝에 결론적으로 고조선계 문화의 지표유물로 간주된다. 가장 오래된 비파형 동검은 적봉시 일대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되는데 하가점 하층 문화의 유민들이 남하해서 대릉하 일대의 차오양시 즈음에 정착해 십이대영자 문화 유적을 남겼고 다시 비파형 동검을 남겼다.어찌 되었건 청동기시대 만주의 구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설이 있다.
기원전부터 산융-동호, 숙신, 예맥 등의 집단이 존재했다. 이 중 산융-동호 계통의 경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요서 인근에 등장해 중국과 대립하였으나 제나라에 의해 토벌된 이래 위축되었다가, 동호로 재등장해 인근 지역을 통솔했으나 흉노가 성장하여 묵특선우의 대에 토벌당했다. 숙신은 싸리나무 화살, 가죽 등을 판매하는 모습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 한편 예는 부여 등의 국가를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예맥도 서서히 중국 북방에서 동북방인 만주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모르나[5], 적어도 춘추전국시대 중반기인 기원전 6~5세기를 전후하여 고조선이 요동 일대를 호령하는 국가가 되었고 기원전 322년경에 천자의 호칭인 왕을 칭하고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일부,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하여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넒은 영토를 보유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기원전 280년경을 전후하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며 연나라에게 요녕지역을 내주었고 한 동안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 일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기에 연나라와 진나라가 잇따라 멸망하고 초한쟁패기가 들어서자 고조선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세를 회복하게 되고 위만이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세운 위만조선도 옥저와 동예 등 주변국가들을 잇따라 복속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결국 한나라가 팽창정책을 펴서 고조선을 공격하자 꼬박 1년간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기원전 108년 전한에게 멸망당했으며 중국 한족계는 전한, 후한, 공손연, 조위, 서진 때까지 요서-요동에서 남쪽으로는 한반도 전체로 볼 때 중부지방이라 할 수 있는 황해도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다.
흉노의 쇠퇴로 기원후 2세기 이후 동호의 후신인 오환과 선비족이 등장하여 몽골과 화북지방까지 영역을 넓혔다. 오환은 일찍이 중국쪽으로 남하했으며, 선비의 여러 부 중에서도 탁발부와 모용부가 두각을 나타내어 모용부는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처 전연과 후연이 되어 요하 유역과 화북을 장악했다. 탁발부는 내몽고에서 웅거하고 있다가 화북으로 내려가 북위를 건국하고 후연을 격파하고 5세기에는 화북을 통일했다.
숙신에서는 읍루가 갈라져 나왔다가 5세기 이후 물길이 갈라져 나왔으며, 5세기 말에 부여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6세기 말에 이르러 말갈 7부가 되었다. 한편 4세기 이후부터는 동호의 후신인 거란과 해가 등장하여 주변 강호들인 유연-돌궐, 북위-수-당, 고구려 사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3.2. 중세
5세기에는 고구려가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7세기까지 만주를 거의 석권하게 된다. 만주 역사상 최초로 한 왕조가 만주 전체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독주가 5세기 이후 꾸준한 것은 아니었고 북만주 방면에서 5세기 말에는 물길, 6세기에는 돌궐에 의해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를 모두 극복했다.수나라와 당나라는 통일 이후 자신들의 세계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고구려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고구려는 668년 당에 의해 멸망하고 만주는 일정기간 당의 지배하에 놓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강한 저항과 거란의 반란으로 당의 만주 지배는 붕괴된다.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은 698년에 만주 동부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고, 9세기까지 만주 동북부를 장악하고 예맥과 말갈 등을 피지배층에 편성하였다[6](단, 흑수말갈은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이후 여진족으로 이어진다). 한편 만주의 서부에서 거란이 송막(요서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3.2.1. 정복 왕조 시대
거란은 자신들과 근접한 적렬, 오고, 해족, 습[7]과 북만주의 실위까지 정복하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를 장악했다. 한편 거란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이용해 중국 진입을 시도했으나 연운 16주를 획득하는 선에서 침투를 마무리한다.허나 요는 여진 중 일부만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고,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1125년 북송과 함께 요를 협공하여 멸망시켰으나, 요나라 공격 당시 송이 이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을 요구하며 남하하여 끝내 화북을 완전히 석권하고 중원 대륙을 남송과 양분한다.
한편 요나라가 망하고 일부 요나라 사람들이 서역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도망쳐 서요를 세운 후, 만주는 금의 영역이 되었고 금은 또한 12세기 동안 몽골 지역을 분할통치 정책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몇 차례의 실패 이후 칭기즈 칸에 의해 통합 국가를 건립하게 된 몽골 제국의 폭발력에 휩쓸리고 만다. 이후 몽골 제국의 정통 왕가는 스스로를 원나라로 개칭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여진인들을 부용 세력으로 삼아 금나라를 화북으로 밀어내고(최종적으로는 정복) 만주를 장악했다. 이 지역은 칭기스칸의 형제들에게 분봉되어 동방 3왕가의 주된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과 고려인들의 통제를 위해 심양왕을 설치하기도 했다.
3.3. 근세
만주청치시기 지도. |
명나라는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여진 및 우량카이의 지배를 위해 요동도사, 대녕도사, 누르칸도사를 만주 지역에 설치했으나, 실제로는 요동도사만이 군사 기능을 할 수 있었고 대녕도사나 누르칸도사는 책봉-조공관계의 도구로만 작용하였다. 명은 수백 개로 분열된 여진족, 우량카이족을 개별적으로 책봉하면서 분할 통치를 꾀했지만, 오히려 조공권을 통합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여진 공동체가 성립되면서 만주에는 국가가 다시 태동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 만주와 만주족의 마지막 독립 국가인 청나라의 시조 |
마침내 건주좌위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의 가계가 후금을 일으켜 만주 통합에 성공하고, 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요동, 요서, 산해관을 놓고 힐항하며 중국 진입을 시도했다. 청태종의 대에는 특히 당시 후금의 구성원들을 '만주'로 총칭하고 청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역사 구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숭환 등의 분전으로 청의 입관은 최대한 저지되었으나, 이자성에 의해 명이 멸망하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청은 중국에 진입한다. 이후 남명, 삼번의 난, 정성공 등을 제압하며 청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즉 팔기군 휘하 제도로 편성하여 농장을 마련해 주었고, 17세기 후반 이후 만주 지역을 만주인 외의 다른 민족이 들어갈 수 없는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또한 만주족들의 대부분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중원으로 이주해 나갔기에 만주의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영토는 광활한데 사람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원에 있던 가난한 한족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의 땅인 만주로 몰래 넘어갔다. 여기에 백두산정계비 설치가 무색하게 조선인도 몰래 만주로 이주하고 이는 후에 간도 분쟁의 배경이 된다. 물론 만주족들이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봉금정책을 항상 강경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해 남하하고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을 통해 청의 영토를 강탈하자 만주를 보험지역으로 두고자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청은 국토 방어를 위해 봉금 정책을 폐지하였고 이에 한족들은 대거 유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틈관동 참조.
3.4. 근현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수습 과정에서 베이징 조약에 따라 외만주 및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1898년에는 뤼순과 다롄시를 조차지로 삼았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요동으로 쳐들어왔다. 1899년 제정 러시아가 의화단의 난에서는 20만의 대군을 진주시켜 전 만주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만철도가 있는 북만주와 하얼빈시를 차지하고 송화강과 고비 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8]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만주 전역을 세력권으로 두려는 전략은 실패하고 만주 횡단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만주에서의 영향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1906년 신정으로 청은 만주 지역을 '동북 3성(동3성)' 체제로 전환한다. 이는 만주가 더 이상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지 못한 채 중국의 일부로 전환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주의 인구는 1812년(가경제 연간) 170만, 1842년에(도광제 연간) 인구가 300만, 봉금 정책이 풀린 1897년 700만 등으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한족이 봉금을 뚫고 대거 들어가 정착한 탓이 크다.[9] 그러나 청 건국 이후 만주인들이 순식간에 한화되어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꽤나 잘 유지해서 청말에도 서양인들이 청에 접근할 때 한자보다 쉬운 만주어를 배울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군벌들의 할거와 일본의 만주사변 등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중국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10만~20만명의 백군이 만주로 도망쳐 왔고, 이들은 봉천군벌 밑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국공내전 종결 후 대다수 소련으로 압송되었으나 극소수는 남아 아직까지도 만주에 살고 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중국 전역이 군벌로 갈라지고 만주 지역은 마적단 출신의 군벌 장쭤린이 장악하여 사실상의 봉천군벌의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수차례나 관내로 진출하여 안국군 대원수로 취임하는 등 한때 중국 천하를 거의 지배할 뻔 했으나 1925년 쑨촨팡의 오셩연군의 손봉전쟁과 맞닥뜨렸으며 그해 11월 측근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켜서 하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를 어찌어찌 극복하나 이번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벌로 중국 통일에 실패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통해 화중, 화남을 장악하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언, 베이징으로 진격했고 장쭤린은 훗날을 도모하여 본거지인 만주로 피신했으나 관동군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여 폭살당하고 만다. 그 뒤는 장쭤린의 여섯 번째 아들 장쉐량이 이었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통해 중화민국 합류와 국민당 가입을 결정했고 반장전쟁에서 장제스의 편을 들어 장제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함으로 국민당의 손꼽히는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허나 장쉐량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소유의 철로를 압류하려고 시도했다가 분노한 소련군의 명장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끄는 소련군에게 개발살이 나는데 이를 중동로 사건 혹은 봉소전쟁이라고 한다. 장쉐량은 이후로도 계속 무리한 관내 진출을 시도하는 등 내부적인 불만을 샀고 그 와중에 관동군의 참모 이시와라 간지 등은 만주 병탄을 획책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을 구실로 장쉐량을 핍박했고 급기야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탈취했다. 장쉐량은 일본군의 의도에 대해 오판하고 부저항주의를 취해다가 몰락했고 이은 1933년의 열하사변에서도 참패하면서 근거지를 잃은 군벌로 전락했다. 일본은 동북 3성과 열하성을 병합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으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국은 붕괴하고 일본의 지배도 종식되고 소련이 군정을 시작했다(소련 점령하 만주).
소련은 원래 1946년에 만주를 국민정부에 반환해야 했다. 그러나 화북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영도하는 홍군은 소련군의 협조를 통해 만주로 진입, 만주의 대다수 지역을 장악하고 관동군의 무기로 무장했다. 장제스는 최대의 중공업 지대이자 엄청난 양의 식량을 생산하는 만주를 공산당의 손아귀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6년 국공내전을 재개했으나 열악한 병참선과 미국의 저지로 인해 진격이 정지되었다. 홍군은 한때 위기에 몰렸으나 국민혁명군이 정지한 틈을 타 반격을 시작, 만주의 주요 대도시들을 포위 공격하여 국민혁명군의 정예부대를 섬멸하였고 이어 중국 본토로 진격해, 중국 통일에 성공,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공 치하 1949년 7월, 가오강이 만주를 소련에게 바치려다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오강은 스탈린에게 만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고 만주를 소련의 새로운 공화국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그 말을 듣고 "농담으로 알겠소. 장쭤린 동지."라고 차갑게 씹어버렸으며 이 일을 마오쩌둥에게 통보하기까지 했다. 이 일로 가오강은 마오쩌둥에게 제대로 찍히고 말았고 마오쩌둥과 가오강 사이의 불화는 1953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분열활동'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가오강을 제명했고 "당의 규율을 위반하고 당의 단결을 파괴하는 활동"을 반드시 반대하고 제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중국 공산당사에서는 둥베이 지구의 공산당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실은 1940년대부터 은밀하게 반당 행위를 해 왔고, 이를 적발했으나 두 사람 모두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1969년 3월에는 만주와 연해주 사이에 있는 전바오다오 섬(러시아명 다만스키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다행히 중소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중소결렬은 최정점에 치달아 공산주의 혈맹이었던 중소관계는 급격히 틀어져버리고 만다. 또한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분쟁은 2004년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현재 만주는 중국의 영역으로 산업, 경제의 주요 중심지중 하나이다. 옥수수로 유명한 비옥한 곡창지대와 풍부한 철광을 자랑하는 공업지대는 물론 각종 자원이 풍부하게 깔려있다. 다만 중국에서는 만주라고 부르기보단 둥베이(東北) 혹은 동북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으로 지칭한다.[10] 한편 이 지역에는 동북공정이 실시되어, 중국의 역사공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만주인 인구는 1,000만 명 정도 되고, 그 외에 200만 정도의 조선족(중국 한민족)과 몽골인, 몽골계인 다우르인, 퉁구스족 등이 있다. 흔히 한국에서 인식하는 바와 달리, 만주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 2번째, 조선족은 3번째로 많은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11]
4. 존재했던 세력
자세한 내용은 만주 종족 계보 문서 참고하십시오.- 맥
- 예
예족은 압록강 중부에도 살았고 강원도 해안가에도 살았는데, 예국은 동예를 의미한다. 압록강의 예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 예맥
퓨전 - 산융
- 동호
- 한족
- 연(춘추전국시대)
- 진나라
- 전한, 후한
- 신나라
- 고조선
- 부여
- 옥저
지역으로 본다면 북옥저 지역에만 한정. 다른 옥저는 함경도 해안에 있었다. - 숙신(식신)
- 읍루
- 동연
- 조위
- 오환
- 선비족
- 전연
- 후연
- 북연
- 고구려
- 북위
훗날 서위와 동위로 나누어진다. 서위는 내몽골 서부와 신장 지역 일부, 화북 서부가 영역이었기에 서위는 만주사에 해당되지 않고 반면, 동위는 요동, 요서, 내몽골 동부를 가졌기에 여기에 해당된다. - 북제
- 북주
- 수나라
- 당나라: 안동도호부
- 거란
- 실위
- 오라혼
- 지두우
- 두막루
- 해족
- 습족
- 말갈
- 발해
- 호연
- 유연
- 여진족
- 만주족
- 퉁구스
- 요나라
- 고려
- 몽골족
- 원나라
- 금나라
- 명나라
- 조선
- 청나라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극동총독부
- 일본 제국: 관동주, 만주국. 일본의 괴뢰국이다.
- 중화제국
- 중화민국
- 소련: 소련 점령하 만주
- 러시아: 연해주, 아무르 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 통칭 외만주(외동북)
-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3성
5. 사건
6. 사료
7. 인물
7.1. 퉁구스계
- 퉁구스/인물
엄밀히 말하자면 퉁구스족 = 만주족으로 보긴 어렵지만 많이 겹치기는 한다. 시베리아 남부에서 살던 퉁구스 제족들이 아무르강이나 동해, 만주 및 한반도 동북부로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7.2. 몽골계
- 몽골계 인물: 동호 등 만주 지역에 거주했던 몽골계 민족들이 해당된다.
7.3. 기타
7.4. 왕조
8. 참고 도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한국사의 메이저 국가인 고구려, 발해, 고조선에 대한 책은 그럭저럭 많이 나와있으나 그외 만주 국가에 대한 책은(...) 개설서나 있으면 다행인 수준. 다만 요나라, 금나라에 대해서는 나름 비중이 좀 있는 편이다. 그래도 요동사의 주창자 김한규가 만주에 대한 책을 두 종이나 내놓았다.-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 (동북아역사재단 저): 만주사의 개괄서 정도 되는 책.
- 만주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저): 만주의 정치사가 아니라 언어, 지리, 종교, 풍습 등을 다루고 있다.
- 한중관계사 (김한규 저): 요동사의 디딤돌이 되는 저술로 요동사를 중심으로 한중관계를 다루고 있다.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한자의 압박을 감당해야 한다(...).
- 요동사 (김한규 저): 본격적으로 요동을 독립된 역사공동체로 주창한 저술.
- 천하국가 (김한규 저): 현 중국 전체를 독립된 역사공동체들을 다루면서 요동사의 서머리가 들어있다.
9. 관련 문서
[1] 기실 이들 지역도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구 조성이 바뀐 다음에야 비로소 한족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다. 강남은 한나라까지도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크라다이어족 모어 집단이 주류였었고, 화북 또한 산둥의 동이(東夷)나 서안(西安)의 서융 등 중원의 변방에는 여전히 한족으로 동화되지 않은 집단들이 있었다.[2] 이외에 김한규 교수는 현재까지 '만주'로 불려오던 지역 구분을 '요동'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하고 '민족'이라는 단어를 '역사 공동체'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또한 김한규 교수는 예맥계와 한(韓)계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인물 중의 한 명이다.(다만, 이러한 견해들은 과거 일제가 만선사관을 주장하며 고구려, 발해 등을 다수의 조선인들이 속하는 한반도 세력과 구분되는 만주 세력으로 분류하고, 이들이 한반도 세력을 영향력 하에 두었다는 식민사관을 펼친 전력이 있는 터라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더불어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중국과 '요동(만주)'도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의는 한국 사학계와 중국 사학계 모두에게 거부당하고 있는 형편.[3] 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4] 일부 선비, 거란은 한족에 동화되기도 했다.[5] 애초에 청동기 시대들어서 요동지역에 고조선의 기원이 된 성읍국가가 설립되었다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나 고조선 초중가에 대해 제대로 된 사료자체가 전해지지 않으며 그나마 전해져 내려오는 사료도 전설과 신화가 섞인 형태로 조금 내려오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역사는 남아있는 마을-도시 유적이나 비파형 동검, 고인돌 등으로 추측하고 있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하여 요서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하가점 상층 문화 혹은 십이대영자 문화) 즉, 단군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2000년 넘게 까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매우 오래 존속된 나라인 셈이다.[6]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예맥화된 말갈, 절대다수의 피지배층이 말갈족이었음.[7] 습족(霫): 만주 서북쪽에 있었던 유목민족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습(白霫)이라고도 부른다.[8] 제정 러시아가 북만주를 빼앗았다면 중국의 만주 국경은 절반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9] 더불어 한민족도 이때 남만주로 이주하여 간도에 정착하고 현 조선족의 기원이 된다.그리고 간도 떡밥도[10] 중국에서 만주는 만주국은 '위만(僞滿)'으로 부른다. 거짓(가짜) 만주라는 의미.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권이라는 점에 기인한다.[11] 단 만주족들은 거의 한화된 상태로 모어로서 만주어는 거의 구사되지 않고 있다.[12] 북요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에, 서요는 지금의 카자흐스탄 남부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남부, 페르가나 계곡 일대(우즈베크, 키르기스, 타지크) 및 몽골 서부에 세워져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