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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16:49:28

구러산 전투

구러산 전투
古勒山之戰
시기 1593년 음력 9월
장소 랴오닝성 푸순(撫順)시 신빈 만주족 자치현
원인 건주여진의 성장으로 인한 해서여진의 견제
교전국 건주여진 후룬 4부
코르친 몽골
시버족
구왈차부
건주의 너옌, 주셔리부
지휘관 누르하치
어이두
안퍙워
나림부루
부자이†
멍거부루
바인다리
만타이
부잔타이
밍안
병력 10,000 여명 30,000 여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4,000 여명 이상
결과 건주여진의 대승
영향 건주여진의 본격적인 확장과 해서여진의 쇠퇴

1. 개요2. 배경
2.1. 누르하치의 건주장악2.2. 천재일우의 기회, 임진왜란2.3. 예허부의 협박과 누르하치의 대응
3. 전개
3.1. 훕차-풀갸치성 전투-전초전3.2. 누르하치, 출병하다3.3. 구러산에서 격돌하다
4. 결과 및 영향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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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러산전투(고륵산 전투, 9부 연합전투)는 음력 1593년 9월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현 랴오닝성 신빈 만주족 자치현에 있는 구러산(gure산)에서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부 및 9부 연합군을 대파하여 여진 통일의 기틀을 잡은 전투이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에 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이 전투는 한반도 주변 역사에 있어서는 당시 여진 정세, 나아가 동북아 정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2. 배경

2.1. 누르하치의 건주장악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는 1583년 할아버지 교창아와 탁시를 명군의 손에 여의고 13벌의 갑옷과 100여명의 병력으로 거병한다. 그러나 이때는 함부로 명나라에 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기오창가와 탁시 사후 명나라의 비호아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니칸 와이란(尼堪外蘭)을 조부와 부친을 살해한 원흉으로 규정하고 니칸 와일란과 사이가 좋지 않은 세력을 규합하여 니칸 와일란의 성인 투룬성(圖倫城)을 점령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세력을 계속 확장한 누르하치는 거병한지 고작 3년만에 니칸 와이란을 척살하고, 5년째 되는 해에는 건주3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한편 1587년에는 현 랴오닝성 신빈현에 퍼알라성(佛阿拉城)을 축조, 도읍으로 삼았고, 1589년에는 스스로 ‘영명한 버일러(귀족)’이라는 뜻의 ‘수러 버일러(sure beile)’라 칭하며 나머지 건주 부족들중 왕야, 저천부를 복속시킨다.

누르하치는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으로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에게는 계속 저자세를 유지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전략으로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대한 경계를 느슨히 하게 되고, 심지어 그에게 건주좌위도독첨사라는 작위를 내리게 된다.

2.2. 천재일우의 기회, 임진왜란

그 와중에 누르하치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바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대대적으로 조선에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원군을 파병하게 되는데, 누르하치는 여기에 자신도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겠다고 명나라에 제안한다. 비록 이 제안은 실현되지는 않지만, 이 제안으로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 신임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요동의 명나라 병력이 조선으로 파병되면서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는데 장애물이 거의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3. 예허부의 협박과 누르하치의 대응

이러한 누르하치의 성장은 하다(哈達 hada)부, 호이파(輝發 hoifa)부, 예허(葉赫 yehe)부, 우라(烏拉 ula)부로 구성된 해서여진의 후룬(扈倫 Hūlun) 4부는 점차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룬 4부는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를 자처하였으니 건주여진 숙수후부의 누르하치 ‘따위’는 미천한 촌뜨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텐데, 이러한 누르하치가 급성장하니 후룬 4부의 입장에서는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허부의 여자들을 누르하치에게 시집 보내기도 했으나, 1591년 누르하치가 압록강 일대의 야루걍(鴨綠江)부를 병합하자 이내 태도를 바꿔 누르하치를 제압하기로 한다. 그 중 세력이 가장 강력한 예허부의 버일러 나림부루(納林布祿)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어 영토할양을 요구한다.
우라, 하다, 예허, 호이파, 만주는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는데, 어찌 왕이 5명이나 있어야 하는가? 너희는 사람이 많고, 우리는 사람이 적으니 얼민과 자쿼무의 두 곳 중 하나를 우리에게 양보해야 마땅할 것이다.[1]

누르하치는 이에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곧 만주이며, 너희는 곧 후룬이다. 너희의 나라가 크다 한들 우리가 취할 수 없으며, 우리 나라가 크다 해도 너희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나라는 가축에 비할 수 없는데,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너희는 정치를 집행하는 신하들인데 주군에게 힘써 간하지 못하고 어찌 낯짝도 두껍게 내게 와서 그 말을 전하는가?[2]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 당시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컬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던 듯 하다. 즉 이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여진의 5부족인 것이다. 그러면서 예허부 등 후룬4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예허부는 우라부, 호이파부와 함께 한차례 사신을 더 보내서 영토를 할양하라고 하며 누르하치에게 다음과 같이 도발한다.
일찍이 땅을 달라 해도 주지 않고, 항복하라 해도 따르지 않았는데, 양국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군대가 너희의 땅을 짓밟을텐데, 너희 군대는 우리 땅에 발이나 들여놓을 수 있겠는가?[3]

누르하치 또한 이에 격분하여 칼을 뽑아 책상을 내리쳐 반으로 가르며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 주인 형제는 적과 말과 칼을 맞대고 싸워본 적은 있으며, 갑옷과 투구가 부서지는 싸움을 해본 적은 있는가? 일찍이 하다의 멍거부루와 다이샨 숙질(숙부와 조카)이 서로 다투는 것이 마치 두 아이가 장난을 하는것과 같았으나, 너희는 이때를 틈타 습격하여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그들과 같이 쉽게 보는가? 너희 땅의 주위에 담장처럼 막을 수 있는 것이 있긴 한가? 내가 낮에는 너희에게 가지 못할지라도 밤에는 능히 갈 수 있거늘, 그 때가 되면 너희는 우리를 어찌하려고 함부로 큰 소리로 망령되게 구느냐? 일찍이 우리 선친께서 명나라에게 오살 당하셨으나, 이에 칙서 30개, 말 30필과 함께 유체를 송환받았으며, 좌도독의 칙서를 받았고, 이어 용호장군에 봉한다는 칙서까지 받아 매년 은 800냥과 망단(용의 무늬가 들어간 비단) 15필을 받는데,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가 명나라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 시체로 뭐 얻은 것은 있느냐?[4]

누르하치의 이와 같은 발언은 사실상 분노에 찬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고, 이제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3. 전개

3.1. 훕차-풀갸치성 전투-전초전

1593년, 서예허의 부자이와 동예허의 나림부루가 건주여진 중 누르하치에게 아직 복속되지 않은 주셔리(朱舍里 Jušeri)부, 너옌(訥殷 Neyen)부를 끌어들여 누르하치의 영역에 있던 둥성(洞寨)을 약탈하고, 그해 6월에는 하다의 멍거부루, 호이파의 바인다리, 우라의 만타이와 연합하여 누르하치의 훕차성(戶布恰寨 户布察寨)을 함락한다. 이에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그 중 귀환중이던 하다부의 군대를 추격, 풀갸치성(富兒家奇寨, 富爾佳齊寨)을 함락 후 하다부의 추격대와 싸워 수십명을 사살한다.

3.2. 누르하치, 출병하다

그해 9월, 후룬4부를 중심으로 시버족, 구왈차부, 몽골 코르친부의 밍안 및 주셔리부와 너옌부의 9부 연합군이 3만 군대를 모은 후 병력을 셋으로 나눠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퍼알라 성을 향해 진군한다. 공격소식을 접한 누르하치는 우리칸(兀里堪 武里堪)을 척후로 보내 정탐케 하고, 이내 후너허(혼하) 북안에 적의 병력이 포착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누르하치는 이튿날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군대를 이끌고 출발한다. 출병시에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무거운 장비를 버리고 경장으로 전투에 나갈 것을 명령한다. 무거운 갑옷을 벗어 병사들의 몸을 가볍게 할 뿐 아니라 두꺼운 갑옷을 벗어던짐으로써 전투시에 적과 필사적으로 싸울 일종의 배수진 효과도 노렸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우선 전투가 벌어졌던 자카성(加哈城)에 이르러 수하 나이후(奈虎)와 산탄(山坦)의 보고를 받는다. 그들은 9부 연합군과 이미 교전을 벌였으며, 적은 자카를 떠나 허지거성(赫濟格城)으로 향했고, 적의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하였다. 누르하치의 병사들이 이에 동요하자 자카성의 랑타리(狼塔裏)라는 사람이 적을 살피고 와서 “적이 비록 많으나, 우리의 수도 적지 않습니다.[5] 예전에 우리가 명나라와 싸울 때 우리는 2~300명에 불과하였으나, 많은 적을 죽이고 패주시켰습니다. 지금 아군은 모두 용감하고 날랜 병사들이니 능히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이기지 못하면 저를 군법으로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하여 군대를 진정시킨다.

누르하치는 정찰병을 파견한 후 숙영을 준비하는데, 그날 밤 예허부에서 도망쳐온 포로로부터 부자이, 나림부루의 예허부 병력 1만, 하다부의 멍거부루, 우라부의 부잔타이와 호이파의 바인다리의 병력이 1만, 그 외 코르친, 시버족, 구왈차부, 주셔리부, 너옌부의 병력이 1만으로 총 3만의 군대가 집결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누르하치의 군대는 매우 당황하지만, 누르하치는 병사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고전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험지에서 적을 유인하여 맞서 싸울 것이다. 적의 수가 비록 많다 하나, 우두머리가 여러 명이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군율은 엉망이고 싸우기를 두려워할 것이니 우리가 적의 전위를 깨부수어 그 우두머리를 베면 적은 패주할 것이고, 그 기회를 틈타 적을 치면 우리가 이길 것이다. 우리가 병력은 적지만 하나가 되어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6][7]

라고 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3.3. 구러산에서 격돌하다

이튿날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허지거성으로 진격하여 허지거성 인근 구러산에 진영을 세운다. 이때 연합군은 연일 허지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는데, 누르하치가 구러산에 진을 치고 장수 어이두(額亦都)에게 100여 명의 군사로 적진을 공격하게 한다. 이에 적군은 허지거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어이두와 구러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연합군은 초반에는 구러산의 누르하치 군대의 예상보다 완강한 저항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내 예허부의 부자이를 선봉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한다.

그런데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중 선봉에 섰던 부자이가 누르하치 군대의 함정에 걸려 낙마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누르하치 휘하의 우탄(吳談)이라는 병사가 부자이를 향해 돌진하여 참살한다. 이 모습을 본 예허부의 군대는 크게 동요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건주여진의 군대는 예허부의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 모습을 본 호륜의 나머지 3부랑 코르친을 비롯한 9부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여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승기를 잡은 건주여진은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한다. 건주여진의 추격대는 퇴각하는 연합군을 쫓아 호이파부 영내까지 진격하였으며, 날이 저물고 나서야 비로소 병력을 거두었다.

연합군이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연합군 중 코르친 몽골의 버일러 밍안은 알몸으로 말안장도 없는 말을 겨우 타고 도주할 정도였으며, 퇴각하던 연합군 병력은 도처에 매복해있거나 추격하던 누르하치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 시체가 도랑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고 한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기록상으로만 연합군 4000여명을 사살하고 말 3000여필과 갑주 1000여벌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뿐만 아니라 우라부 버일러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를 생포하게 되는데, 누르하치는 부잔타이(布占泰)를 사위로 삼고 우라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나, 부잔타이는 이후 여러 차례 예허와 연합하고 동해여진 문제로 건주여진과 격돌하는 등 누르하치와 죽을때까지 대립하게 된다.

한편, 누르하치는 동년 10월 마지막까지 귀순하지 않던 건주여진의 주셔리부를, 11월에는 너옌부를 정복하여 건주여진 전체를 손에 넣게 된다. 한편 해서여진의 후룬4부는 전략적으로 점점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세력면에 있어서도 점차적으로 건주여진에게 열세에 처하게 된다. 반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해서여진 등 외부에 있어서도 방어적에서 공세적으로 전환하게 되고, 계속된 확장을 거듭하여 1599년에 하다부, 1607년에 호이파부, 1613년에 우라부를 차례로 병합하고, 이후 사르후 전투를 거쳐 1619년에 예허부까지 병합하게 되며, 1606년에는 몽골의 내할하 5부가 누르하치에게 귀부하여 존경하는 한이라는 뜻의 쿤둘런 한(kundulen han)이라는 존호를 바친다.

뿐만 아니라 구러산 전투의 승리로 세력의 기틀을 잡은 누르하치는 1599년 어르더니(額爾德尼)와 가가이(噶蓋)에게 명령하여 몽골 문자를 본떠 만주 문자를 창제하고, 1615년 팔기제를 정립하였으며, 1616년 아마가 아이신 구룬(amaga aisin gurun), 즉 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5. 여담

누르하치가 전투에 나서기 전 예허 군대가 후너허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드는데 그의 아내 푸차씨(富察氏)가 그를 깨우며 ‘적의 대병이 앞에 왔는데 두렵지도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태평하게 주무십니까?’라고 하자 누르하치는 아내에게 ‘내가 저들을 두려워했다면 잠을 쉽게 들 수 없었을 것이오. 내가 예허의 출병 소식을 듣고 오직 두려웠던 것은 그들이 언제 오는지였으나, 그들이 당도한 이상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소.’라고 대답하고 다시 잠에 든다. 이성량 휘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누르하치의 노련한 모습이 보여지는 대목이다.

또한 구러산은 일찍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아타이의 구러성이 있었던 곳으로, 교창아와 탁시가 살해된 장소이기도 하다.

[1] 兀喇、哈達、夜黑、輝發、滿洲總一國也,豈有五王之理?爾國人眾,我國人寡,可將額兒泯、架孔木二處,擇一讓我。[2] 我乃滿洲,爾乃虎倫,爾國雖大,我不得取,我國雖大,爾亦不得取。況國非牲畜可比,焉有分給之理? 爾等皆執政之臣,不能極力諫主,奈何忝顏來相告耶?[3] 昔索地不與,令投順不從,兩國若成仇隙,只有我兵能踐爾境,諒爾兵敢履我地耶?[4] 爾主弟兄,何常與人交馬接刃,碎爛甲胄,經此一戰耶?昔孟革卜鹵、戴鄯叔侄自相擾亂,如二童爭骨,爾等乘亂襲取,何故視我如彼之易也,爾地四周果有邊垣之阻耶?吾即晝不能往,夜亦能至彼處,爾其奈我何,徒張大言胡為乎?昔我父被大明誤殺,與我敕書三十道,馬三十匹,送還尸首,坐受左都督敕書,續封龍虎將軍大敕一道,每年給銀八百兩,蟒段十五匹,汝父亦被大明所殺,其尸骸汝得收取否?[5] 실제로 누르하치의 병력 1만명 또한 그가 이전까지 동원해본 적이 없는 큰 규모였다.[6] 爾眾無憂,我不使汝等至於苦戰。吾立險要之處,誘彼來戰,彼若來時,吾迎而敵之,誘而不來,吾等步行,四面分列,徐徐進攻。來兵部長甚多,雜亂不一,諒此烏合之眾,退縮不前,領兵前進者,必頭目也,吾等即接戰之,但傷其一二頭目,彼兵必走。我兵雖少,並力一戰,可必勝矣。[7] 烏合之衆,其志不一,敗其前軍,軍必反走,我師乘之,靡弗勝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