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십자군을 이끄는 은자 피에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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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ierre l'Ermite(1050? ~ 1115?)
프랑스의 은수자.
민중 십자군을 주도하였으며 제1차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하여, 십자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핵심인물이다. 때문에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논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지만,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 일생은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
2. 일생
2.1. 초기 생애
은자 피에르가 십자군 전쟁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기록에서는 1050년 경, 오베르뉴에서 출생했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 외에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미앵 출신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기록에서는 그의 이름 뒤에 붙은 "은자( l'Ermite : 隱者)"가 별명이 아닌 성씨라고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오베르뉴의 르노 레미리트와 피카르디의 알리데 드 몬타이구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이후 군인이 되어 고드프루아의 아버지인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의 휘하에 들어가 경력을 쌓았다. 그 와중에 플랑드르의 카셀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베아트리체 드 루시와 혼인하여 아들과 딸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3년 만에 아내가 죽자 여생을 은둔 수도승으로 살게 되었다.
안나 콤네나의 기록에 따르면, 은자 피에르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러 가던 중에 셀주크 투르크의 훼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들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당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의 내용은 비록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만일 사실이라면 은자 피에르가 훗날 십자군 운동을 선동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2.2. 십자군 선도
기베르 드 노장은 은자 피에르가 프랑스 북부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1095년, 우르바노 2세가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였을 때에도 참여하였다고 하였다.[1]기베르의 묘사에 따르면, 은자 피에르는 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체격은 삐쩍 말라서 앙상했고, 늘 맨발이었으며, 양모로 만든 수도복과 두건이 달린 망토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당나귀를 탄 채로 프랑스 베리에서부터 여러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설교를 하고 다녔다.
은자 피에르의 카리스마와 열변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빈민들과 농부들로부터 귀족과 영주들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같이 십자군 원정을 외치기 시작했으며, 흉악한 범죄자들도 그의 말을 듣고 나면 금세 감화되었다고 한다. 피에르는 자신이 하느님이 내려준 편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내용은 모든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투르크인들과 맞서 싸우게 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마귀 들린 이들과 병에 걸린 이들을 고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2.3. 민중 십자군
1096년 4월, 은자 피에르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동한 채 프랑스를 거쳐 독일의 쾰른 지역까지 도달했다. 그곳에서도 피에르의 십자군 전도는 계속되었고 많은 이들이 꾸역 꾸역 몰려들었다. 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해 8월 15일로 정해졌던 출병 일자를 무시하고 자신들끼리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피에르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귀족과 기사들도 있었지만[2] 절대다수는 가난한 빈민들이었기에, 피에르와 그가 이끌던 무리들을 이른바 민중 십자군이라 부른다.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은 그 수가 수 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귀족 출신인 고티에 생자부아가 선발대인 1대를 거느리고 앞서 십자군의 집결지가 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3]로 향했고, 피에르의 후발대는 그 뒤를 따랐다.
문제는 피에르의 민중 십자군이 말 그대로 기도와 찬송을 무기로 삼은 허수아비 군대였다는 점이다. 기사나 귀족들이 일부 섞여 있기는 하였으나 절대 다수는 농민들과 빈민들이었고, 싸울 수 없는 노인과 아녀자들도 있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여비나 식량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가는 곳마다 현지의 지원에 의존하거나 약탈을 일삼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군대로서 갖춰야 할 무장과 장비, 훈련과 질서는 기대하는 것이 사치인 상황이었다. 민중 십자군은 가는 곳 마다 피와 약탈을 불러왔고, 특히 가장 주된 표적은 돈이 많은 유대인들이었다.[4] 더욱이 대부분이 무지한 농민들이었기에 지리를 잘 몰라서 헝가리 땅을 거치면서는 가는 곳 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이냐"(…)라고 묻고 다녔다고 한다.[5]
고티에 상자부아가 거느린 민중 십자군 1대는 5월 8일, 헝가리를 통과하여 6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으나, 뒤를 따르던 일부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국경지대인 셈린에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도둑질을 일삼는 등 소요를 일으켰다가 몰매를 맞았다. 그러다가 뒤이어 은자 피에르가 거느린 2만의 본대가 셈린에 도착하자 겉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터졌다. 피에르와 민중 십자군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셈린을 점령하여 4천 명에 달하는 헝가리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분개한 헝가리 측도 반격을 퍼부어 많은 민중십자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헝가리의 분노를 피해 살아남은 민중십자군들은 보복을 피해 서둘러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예정 일자보다 훨씬 앞서 꾸역 꾸역 콘스탄티노플로 몰려드는 민중 십자군을 보고는 경악하였다. 동로마 측은 십자군이 추수기를 거쳐 충분한 식량과 병참을 확보한 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미처 추수기도 되기 전인 6~7월에 돈도 식량도 없는 거지떼들이 십자군이랍시고 들이닥친 것이다. 게다가 머릿수도 많았기에 동로마 측으로서는 이들을 먹여 살릴 길조차 막막했다. 민중 십자군은 자신들을 저지하는 동로마 군대를 무찌르고 니시까지 들어와 행패를 부렸고, 결국 알렉시오스 1세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뜨거운 맛을 보고 달아난 피에르는 자신의 뒤를 따라 질서없이 몰려들던 민중 십자군들과 합류하여 다시 군세를 회복한 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는데, 이미 한번 거하게 깽판을 친 터라 알렉시오스 1세가 자신을 내쫓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알렉시오스 1세는 피에르를 환대하였고, 이에 피에르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였다.[6]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한 민중 십자군은 십자군 본대와 합류할 것을 권하던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뿌리치고 소아시아로 건너가 룸 술탄국과 싸우게 되었으나, 제대로 된 군대도 아니었던 민중 십자군이 정규군과 싸워 이길리가 만무했다. 민중 십자군은 잠시 동안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 인근까지 약탈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술탄인 킬리치 아르슬란이 몸소 투르크족 기병을 거느리고 반격에 나서게 되자 9~10월에 걸쳐 수차례 참패를 당하고 궤멸당하였으며 선봉에 섰던 고티에 생자부아도 전사하였다. 그나마 알렉시오스 1세가 원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덕분에 소수의 패잔병들이 살아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민중 십자군 항목을 참조.
한편 이 때의 피에르의 행적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안나 콤네나는 상술하였듯이 피에르가 몸소 소아시아로 건너갔다가 룸 술탄국에게 대패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돌아왔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기베르 드 노장은 민중 십자군이 궤멸당할 당시에 피에르는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며 알렉시오스 1세와 전략을 논의하느라 참화를 면했다고 기록하였다.
2.4. 1차 십자군
민중 십자군이 궤멸당한 후, 피에르는 1096년 겨울부터 1097년 4월까지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발이 묶인 채 십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드프루아와 보두앵, 레몽, 보에몽 등을 비롯한 십자군에 참여한 영주들이 차례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고, 교황이 파견한 대리인인 주교 아데마르의 지휘하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1097년 5월, 은자 피에르는 1차 십자군과 함께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얼마전에 무참히 털렸던 피에르가 다시 떨거지들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에 룸 술탄국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1차 십자군은 엄연히 뛰어난 지휘관들과 잘 훈련된 전문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숫자만 많을 뿐 오합지졸이었던 민중 십자군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결국 룸 술탄국은 1차 십자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방심의 댓가를 치르었다.
이처럼 1차 십자군은 지휘관들의 뛰어난 능력과 타고난 운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민중 십자군이 궤멸당하는 바람에 은자 피에르는 이전과 같은 권력과 발언권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의 역할은 십자군 전도를 하고 다닐 때 처럼 열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설교를 통해 십자군들의 사기를 고취시켜 주는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1098년 초,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였으나, 모술의 아미르인 카르부가에게 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거의 고사당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절박해지자 많은 이들이 탈영을 시도했는데, 그 중에는 피에르도 끼어 있었다(…). 피에르로서는 굴욕적이게도, 그는 그때까지도 품속에 하느님이 내려 주었다는 그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다시 붙들려온 피에르는 눈물을 흘리며 십자군들에게 자신이 신앙을 잠시 잃은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다만 포위된 안티오키아 내에서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십자군 병사들은 피에르의 설교로부터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십자군은 카르부가를 격퇴하고 안티오키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성지 예루살렘 또한 십자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1차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세력의 승리로 끝이 맺었다.
2.5. 후기 생애
1차 십자군 원정이 성지 예루살렘 탈환으로 끝을 맺은 1099년 이후로 피에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명확히 알 수 없다. 기록마다 그의 행적이 심하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성지 탈환을 완수한 후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리라는 추측이 우세하다.혹자는 그가 안티오키아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으나 그 진위여부를 논하던 와중에 시죄법 재판을 받고 죽었다고도 말하지만,[7] 이는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한 사람이 피에르와는 이름이 같은 "피에르 바르톨로뮤"라서 생긴 혼동으로 보인다.
기베르 드 노장의 기록에 따르면, 은자 피에르는 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에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벨기에 남서부의 누후무스티에(Neufmoustier) 수도원을 세웠다고도 한다. 또한 그 수도원의 연대기에 따르면, 피에르는 1115년 7월 8일에 죽었다고 전한다. 또다른 기록에서는 1131년에 죽었다고도 전한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김태권의 만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초반부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1권에서는 사실상 주인공이며, 2권에서도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비중을 자랑한다. 원래 잘 나가는 사교계 인사였으나 어느날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맛이 간다. 부시를 풍자한 '부시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전쟁을 선동하다가 군중 십자군에서 죽을 뻔하고 정신을 차려 교양인이 되지만, 부시나귀의 선동에 1차 십자군 전쟁에 동참한다. 다만 대놓고 죽이고 약탈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기사들과 달리 기사들이 죄없는 민간인을 죽이자 항의하는 등 최후의 양심은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후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탈영하다가 발각되어 보에몽과 탕크레드의 추격을 받는다. 결국 성당에서 농성하다가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하고 극적으로 카르부카에게 사절로 보내지는 처벌을 모면한다. 2권에서는 피에르 바르톨로뮤와 은자 피에르가 다른 사람인 것을 김태권이 자료 수집 중 알아냈으나 극적인 묘사를 위해 피에르 바르톨로뮤처럼 성창의 신성함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불의 재판을 받다가 끔찍한 화상을 입고 죽는다. 죽고 나서 천국에서 아데마르와 재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평화주의자로 개심한다.
- 살리흐 앗딘(글쓴이)과 압둘와헤구루(그림)의 만화《전쟁으로 보는 세계사》에서는 32p, 제목 <트롤이 제일 쉬웠어요>에서 주인공이자 제목 그대로에 인물로 표현 된다.[8]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잘하는 것이 있는데, 설교와 언변 능력, 행운(?) 그리고 살아남기이다. 그리고 61p, 제목 <신께서 원하신다!>에서는 가끔식 등장하긴 하지만, 역시 ㅁㅊㄴ으로 표현 된다.
솔직히 수도승이 아니라 사기꾼일 수도...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민중에 의한 십자군이라는 퀘스트로 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칼레 교회에서 은자 피에르의 지팡이를 발견할 수 있다.
[1] 십자군 원정이 시작점이 된 바로 그 공의회이다.[2] '고티에 생자부아'가 대표적이다. 일명 "무일푼의 고티에", "무일푼의 월터"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이는 잘못된 이름이다.[3]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할 예정이었다.[4] 민중 십자군과 마주친 유대인들은 재산 몰수 정도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상황이었고, 대부분은 가차없이 학살당했다.[5] 중세 유럽은 지금과는 달리 전 국민 의무 교육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6] 물론 알렉시오스 1세가 피에르를 환대한 것은 곧 이어 콘스탄티노플에 들이닥칠 십자군 본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했을 것이다.[7] 정확히 말하자면, 롱기누스의 창의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이를 발견한 사람이 불로 달군 돌맹이 위를 걷는 시련을 거쳤는데, 피에르가 이때 입은 화상이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8]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