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1:22

십자군 전쟁/연표/1199년 이후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십자군 전쟁/연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십자군 전쟁/연표/1198년 이전
, 십자군 전쟁/연표/1292년 이후
,
,
,
,

1. 4차 십자군
1.1. '라틴 제국'1.2. 알비 십자군
2. 5차 십자군
2.1. '내부 정화'
3. 6차 십자군
3.1. '롬바르드 전쟁'3.2. 세 요한의 전쟁
4. 귀족 십자군
4.1. 시리아 vs 이집트
5. 7차 십자군
5.1. 성왕 루이
6. '프레스터 존'
6.1. 현지인의 승리6.2.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7. 8차 십자군
7.1. 협상과 내분
8. 추방
8.1. 아라곤 십자군8.2. 사이프 앗 딘 칼라운8.3. 최후

1. 4차 십자군

1.1. '라틴 제국'

1.2. 알비 십자군

2. 5차 십자군

2.1. '내부 정화'

War at home. 이른바 '본토 십자군'. 랑그도크, 프러시아, 에스토니아, 테살리아 등지 대상 십자군

3. 6차 십자군

3.1. '롬바르드 전쟁'

3.2. 세 요한의 전쟁[293]

4. 귀족 십자군

앗 살리흐 아이유브 (다마스쿠스 → 카이로) / 앗 나시르 다우드 (케라크) / 앗 살리흐 이스마일 (바알벡 → 다마스쿠스) / 알 만수르 이브라힘 (홈스)

4.1. 시리아 vs 이집트

5. 7차 십자군

5.1. 성왕 루이

6. '프레스터 존'

6.1. 현지인의 승리

'Infidels of yesterday had defeated the muslims of tomorrow'

6.2.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7. 8차 십자군

9차 십자군이란 없음. 5차 십자군 때 헝가리, 독일-북유럽 병력이 따로 행동했어도 묶인 것 처럼 잉글랜드, 프랑스 병력도 하나의 십자군 간주

7.1. 협상과 내분

겉으론 십자군-맘루크-앙주 동맹과 교황청-동로마-일칸국 동맹으로 안정되어 보였지만 그 속에선 대립이 심화됨

8. 추방

8.1. 아라곤 십자군

8.2. 사이프 앗 딘 칼라운

8.3. 최후



[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피에르 드 앙굴렘,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와 바그라스 성채를 템플러에게 반환할 것을 협상하나 실패[2] 당시 알 아딜은 마르딘 원정 중이었음[3] 이후 알베르트는 북독일 일대를 순회하며 십자군 설교하고 모병[4] 그는 예루살렘 국왕 앙리의 동생. 그해 7월 1일 나바라 왕국의 상속녀 블랑슈와 결혼한 상태. 테오발드는 1198년부터 십자군 설교하던 뇌이 출신 떠돌이 사제 풀크에게 설교를 맡겼는데 먹혔는지 루이 드 발루아 등 여려 귀족과 기사들 종군 서약[5] 1199년 12월이라는 기록도. 마르딘 함락할 뻔 했으나 모술의 장기 왕조가 개입해 실패. 다만 모술 측 역시 마르딘 노리며 아르투크 왕조와 대립하는 틈에 하란 점령하고 남하[6] 2월 6일이라는 기록도. 카이로 인근 비르카트 알 줍 주둔하다가 협상 후 입성한 것. 한편 이후 봄에 앗 자히르가 알 아프달과 연합해 다마스쿠스 공격했는데 알 아딜이 후자에게 마야파리킨 약속해 이탈시키자 앗 자히르 역시 철수했다고도 한다.[7] 교황의 지지로 아르놀드 폰 북소호프덴이 이끄는 독일 십자군과 한자 동맹의 도움. 이듬해 그들 주축으로 리보니아 기사단이 리가 본부로 세워짐.[8] 알 아프달, 알 아딜의 아들 알 아흐와드의 마야파라킨 할양 거부에 반란 모의하던 상태[9] 4월. 제노바 측은 이집트와의 무역 지속하고 싶어 거절. 기사 4천 5백, 9천 종자들, 2만 보병으로 구성된 병력. 본래 9만 4천 마르크에 계약하였으나 발라르두앵이 시민들 앞에 무릎 꿇고 흥정. 8월까지 1만 5천 마르크, 11월 1일까지 추가로 1만 마르크, 1202년 1월까지 또 1만 마르크, 그리고 남은 5만 마르크는 1202년 4월까지 납부하는 것으로[10] 필리프 2세의 주선으로 프랑스에 망명해온 전 시칠리아 국왕 탕크레드의 딸 일비라와 결혼하고 상속권 주장. 교황, 자신이 프리드리히 2세 후견인임으로 왕위 대신 타란토와 레체 공국 제안. 고티에, 수용하고 4월까지 영지 다 매각, 필리프 2세의 자금 지원 받아 60명의 기사와 40명의 종자들과 상륙.[11] 그리고 앗 자히르가 다마스쿠스 점령하면 그에 복속하겠다는 조건. 이후 홈스의 알 무자히드와 바알벡의 알 암자드 등도 같은 조건 합의. 이후 연합군이 남하하자 살칸드의 알 자피르 키드르와 마리얌 알 카스리, 그리고 바니야스의 후삼 앗 딘 비샤라 등이 동참. 자인 앗 딘 카라자와 파크르 앗 딘 자라카스는 각각 알 아프달로부터 살칸드를 이크타로 하사받고 2만 디나르를 받은 후에야 동참.[12] 요안니스 악수흐의 손자이자 모계를 통해 요안니스 2세의 증손자[13] 한편 알 아딜은 이집트 군대와 나블루스 당도. 연합군 측의 보급 차단과 기습으로 지치게 하는데 주력. 한편 다마스쿠스의 아들 알 무아잠에게는 일단의 지원군 파견. 포위되기 며칠 전 당도. 앗 자히르와 알 아프달은 알 카담에 진영 설치[14] 본래 다마스쿠스 점령하면 알 아프달이 통치하고 더 나아가 이집트까지 점령된다면 알 아프달은 다마스쿠스를 앗 자히르에게 넘기고 이집트 통치한다고 합의되어 있었는데 앗 자히르가 변심하여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다마스쿠스 통치할 것이라 하자 알 아프달이 토사구팽 의심. 알 아딜이 두 형제에게 각각 편지 보내 이간질했다고도 함. 어쨋던 간에 이런 분위기에서 알 아딜은 아프달에게 연간 10만 디나르의 보조금과 사모사타와 하니, 자발 주르의 통치권 인정하고 마야파리킨에 대한 보상으로 사루즈와 라스 알 아인을 영지에 더해준다는 조건 제시. 이에 알 아프달은 전의 상실하고 군대를 해산, 아미르들에게 알 아딜 혹은 앗 자히르 진영으로 떠나라고 통보[15] 9월 말 ~ 10월 사이. 동로마 측의 검문 통과하고 이리니와 결혼한 필립 황제의 독일로 향함.[16] 추정 시기. 보니파시오, 알렉시오스의 복위 돕는 안 고려. 필립 역시 친독일 황제 옹립 지지.[17] 베네치아에게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 등에 상관 설치 등 이집트와의 무역 허가 / 가을.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니노스의 딸과 결혼한 기사 보두앵, 예루살렘 국왕 애므리에게 자신에게 양위하라고 주장했으나 실패 / 연말. 툴루즈 백작 레몽 6세, 이사키오스의 딸과 이혼 / 시돈 영주 르노 사망, 아들이자 발리앙 드 이벨린의 조카인 발리앙 그르니에 계승[18] 1월 말에 앗 자히르가 하마로 와서 알 아딜에게 복속했다고도 함. 한편 자인 앗 딘과 파크르 앗 딘 등의 각각 살칸드, 바니야스 통치 인정 등 현상유지. 한편 폐위된 알 만수르는 에데사 (우르파) 영지로 은퇴. 나머지 제국령은 알 아딜의 아들들 사이에 분할됨. 장남 알 카밀은 이집트, 차남 알 무아잠은 다마스쿠스, 삼남 알 아슈라프는 하란, 사남 알 무자파르는 마야파리킨. 알 아프달 역시 약속된 영지 받음[19] 교황의 명으로 알자스 지방에서 십자군 모집한 후 알프스 따라 인스뷔르크 지나 베네치아 향함. 출항 지연되자 베로나에서 기다리다가 8월 13일 이전에 베네치아 당도. 하지만 자라 함락 이후 이탈리아 귀환, 교황 특사 생 장다크레와 아크레 직항 택함[20] 자라에서 겨울 날 생각으로 천천히 항해하며 트리에스테와 풀라 복속시킴. 한편 알렉시오스 3세는 위협 느끼고 교황에게 도움 청함[21] 르노 2세는 베네치아에서 이탈. 이후 자라에서도 일부 제후들 이탈, 이탈리아 돌아가거나 아크레 향함.[22] 11월 10일이라는 기록도. 또 이날 함락했다는 기록도. 시민들이 십자가 깃발 내걸자 시몽 드 몽포르 등의 일부 귀족들이 포위 참가 거부.[23] 르노 드 몽미라유가 자라에서 아크레 당도하여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함으로 몇달 이상 혹은 아예 지원군 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 전함. 이에 열정적인 기사들이 홀로 출정하려 하자 예루살렘 국왕 애므리가 휴전 깨지 말라며 만류. 당피에르의 르노 2세는 애므리를 겁쟁이로 치부하고 보에몽 4세를 위해 싸우겠다고 북진. 주군 앗 자히르의 영토 진입하기 전에 허가 구하라는 자발라 아미르의 경고도 무시하고 진군하다가 타르투스와 라타키야 사이 마르가트 인근에서 라타키아 아미르의 군대에 압도되어 패배. / 알폰소 디 나폴리가 구호기사단장 취임[24] 이후 달마티아 해안 따라 이탈리아 남부 향해 바리에서 아크레 향해 직항[25] 현지 정교회 주교와 만찬 도중 교회 통합 문제 놓고 분쟁. 이에 시민들이 십자군 함대 공격. 한편 십자군이 성지 당도 미루어지는 것에 대해 불만 표하자 지도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최대 한달만 머물기로 약속.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는 십자군에 대한 보급, 군대 (5백명은 아크레 상주), 교회 통합 약속 재확인. 이에 지도부는 이사키오스 2세 복위 합의, 알렉시오스는 수월히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26] 조프루아 드 발라르두앵에 의하면 십자군은 도시의 규모에 압도되어 경외감 느낌. 당시 50만 가까이 거주하던 대도시[27] 블라케르나이 성벽 밖의 코스마스 & 다미아노스 수도원은 1차 십자군 당시 보에몽이 주둔했던 곳.[28] 조프루아 드 발라르두앵과 2명의 베네치아인 동행. 이사키오스는 즉위하자마자 아들 알렉시오스가 십자군과 맺은 협정 서명해야 함. 맹인인 알렉시오스 대신해 공동 황제 된 아들 알렉시오스가 실권 장악, 십자군의 입성 허가. 하지만 알렉시오스 3세가 보물 챙겨 도망가는 바람에 약속한 자금 마련 힘든 상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이리니는 배타고 트라키아의 데벨투스 향함.[29] 한편 블라케르나이의 십자군이 동로마측 배신 방지하기 위해 육지 성벽에 구멍 뚫음. 알렉시오스 4세, 이듬해 3월까지 4차 십자군의 수도 체류비용을 대고 이후 함께 성지로 향하여 9월까지 그 경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하여 수용됨. 한편 알렉시오스 3세가 지방 군대를 모아 아드리아노폴리스 당도[30] 무슬림 함대가 키프로스 근해에서 기독교도 선박 2척 나포하자 십자군 측 역시 아크레 인근 지나던 무슬림 선박 6척 나포하며 맞섬[31] 이후 알렉시오스 4세는 지지율 회복 위해 반라틴 파벌과 친하게 지내고 알렉시오스 3세의 관료들인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를 복직시키는 등의 정책을 취했지만 이미 여론은 더 '국가주의적인'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주플로스로 기운 상태. 이에 알렉시오스 4세는 그를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재무 장관)에 임명하고 동맹 제시함[32] 하지만 망명했던 숙부 카이쿠스라우의 위협. / 봄, 펠로폰네소스 북부의 그리스계 군벌 레오 스구로스가 코린토스를 넘어 아티카를 정복하자 주교 미카일이 에우보이아로 피신. 알렉시오스 3세는 라리사로 남하하여 스구로스와 회동하고 딸 에우도키아와 결혼시켜 동맹으로 삼음[33] 이후 테오도로스 1세의 사령부인 부르사를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34] 12-4년 라틴 제국의 분봉에 실망하여 아르타 영주인 친척 센나케림에게 망명, 그가 사망하자 세력 계승한 것. 이후 사촌 알렉시오스 3세 몸값 납부해 데려옴. 알렉시오스, 아르타 머물다 아내 두고 룸 술탄국의 콘야로 향해 복위 지원 요청[35] 3명의 다니슈멘드 왕자들의 도움. 한편 카타리파 대한 선교 명령받은 교황 특사단의 피에르 드 카스텔누와 라울 드 프롱프루아드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라곤 출신의 성 도미니코 데 구즈만이 합세 (1206년이라는 기록도) / 테오도로스 1세, 본부를 부르사에서 니케아로 옮김[36] 이후 룸 셀주크의 도움으로 삽바스와 모노테오도로스 등의 군벌들 복속시키고 소아시아 대한 지배력 강화 (~ 5월). 한편 토마스 모로시니는 베네치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함[37] 마침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디디모티콘의 영주 위그 드 생 폴의 부고가 닿자 시민들이 프랑크 수비대에 봉기[38] 이에 보두앵은 더이상의 전진 포기하고 진영 설치, 나머지 군대 기다림. 불가리아 측은 참호 파고 보병대, 그 뒤에 기병대 배치[39] 응전하지 말라는 보두앵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미사 도중 쿠만 기병대가 재차 공격하오자 분노한 기사들이 블루아 백작 루이와 함께 출격. 참호에 빠져 혼란, 보두앵이 2백 기사 이끌고 지원오나 이미 포위된 상태. 불가리아 군대는 올가미와 밧줄로 기사들 낙마시켜 살해. 루이 전사, 보두앵 잡혀 벨리코 투르노보로 이송되어 '보두앵의 탑'에 갇힘. 비보를 듣고 앙리는 비티니아에서 마르마라 해 건너 테키르다 상륙. 단돌로가 인솔해온 패잔병 수습하고 섭정으로 선포됨. 한편 보두앵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으며 해골이 술잔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는 반면 그 동생인 앙리는 교황에게 칼로얀이 십자군 포로들을 명예롭게 대해주고 있다고 보고[40] 지오프리 드 발라르두앵의 동맹이던 모돈의 아르콘이 사망, 아들들은 동맹 거부. 이에 지오프리는 보니파시오의 나플리아 포위 동참했다가 펠로폰네소스 정복 결심하곤 기욤 드 셩플리트 설득하여 함께 1백의 기사와 4백 보병으로 파트라이, 안드라비다, 폰디코 카스트로 점령. 카이파리사 포위[41] 미카엘, 펠로폰네소스 총독 칭호 포기. 이후 카이파리사, 칼라마타, 코론 함락되나 모넴바시아는 항전[42] 6월 1일이라는 기록도. 이후 마리노 제노가 포데스타로 선출됨[43] 세레스의 십자군은 부근에서 불가리아 군과 맞섰으나 패배. 후퇴하는 과정에서 불가리아 군대 입성, 나머지 수비대는 시타델에서 농성. 칼로얀, 시타델의 수비대와 주민들에게 안전 귀로 보장한 약속 깨고 기사들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아감. 베로이아에선 주민들 학살. 로마토녹스.. 한편 필리포폴리스의 파울리키아파 신자들이 칼로얀과 내통하자 영주 르니에르가 그리스 주민들과 그들 구역 불태움. 이후 도시를 점령한 칼로얀은 항복 시의 약속과 달리 라틴인들과 협조한 혐의로 귀족들 처형하고 나머지 포로로 잡아감. 그리스인들이 옹립한 황제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테스는 제일 먼저 처형되고 토막나 산중에 독수리 밥으로 던져짐[44] 자코모 모로시니 지휘. 한편 본국에서 새 도제로 선출된 피에트로 지아니는 마리노에게 디라키움과 코르푸를 직할령으로 내놓게 함[45] 독일 병사들이 그의 막사 줄을 끊자 무너져 다침. 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사망. 이후 아내 일비라 사생아 고티에 4세 낳음. 숙부 장이 브리엔 백국 섭정[46] 이러한 칼로얀의 잔혹함에 그가 라틴인들보다 더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드리아노폴리스와 디디모티콘의 시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표단 파견해 앙리에게 복속. 앙리, 이를 수용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과부인 프랑스 공주 안나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아스피아테스의 부관 테오도로스 브라나스를 그 지배자로 임명하고 지원해줌. 테오도로스는 명목상의 주군인 베네치아가 원할 때마다 5백 기병 지원하는 의무 짐[47] 정확히는 파트라스 대주교직 선출 인정하는 교황 서신에서 그를 아카이아 왕공으로 언급한 것[48] 봄. 칭기즈칸, 몽골 대칸으로 즉위 (몽골 제국) / 베네치아, 디라키움에서 반란 일으킨 베트라노 축출 /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 아르메니아 측과 모의한 혐의로 총대주교 피에르 폐위시키고 그리스인 시메온 2세 옹립 / 카이사레아의 상속녀가 튜튼 기사단에게 성채 몇개 임대해줌 / 지오프리 드 라트가 포르투갈의 아폰수에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 가을무렵 앙리, 니코메디아 포위하나 실패. 그전에 불가리아 군에 포위된 스테니마코스의 르니에르 구원 / 테오도로스 1세, 메안데르 협곡의 통치자 마브로조메스를 패배시키고 봉신으로 삼음. 이후 황제 칭하고 망명 중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초대주교 요안니스 10세에게 대관식 부탁하나 거절됨 /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장군 보부르크의 디트리히, 시칠리아 상륙. 섭정 빌헬름으로부터 프리드리히 2세 후견권 넘겨받고 아풀리아 반란군 일소하며 중앙 권력 재확립[49] 120명의 기사들과 수복하러 나왔으나 이미 요새 버려진 것 보고 후퇴. 그러나 루시온까지 7km 남기고 7천 불가리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수천의 보병들과 함께 괴멸됨. 10명의 기사만이 루시온 생환. 나머지 수비대와 함께 로도스토로 피신[50] 베네치아 수비대는 서둘러 배 타려 하다가 뒤엉켜 대부분 익사[51] 추정 시기[52] 이무렵 테살로니카의 보니파시오는 세레스 수복[53] 1206년이라는 기록도 / 몽레알에서 카타리파와 가톨릭, 카타리파와 발도파간의 토론회 열림. 가톨릭 측은 도미니코 구스망이 나옴 / 보니파시오, 낙소스 공국 승인 / 아르메니아의 가톨릭 주교 요안니스, 국왕 레오의 사촌이자 경쟁자인 시필리케의 콘스탄티누스와 놀페르트의 앙리를 지지하며 주교구가 위치한 흐롬글라를 요새화하고 국왕군의 입성 거부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리보니아에 테라 마리아나 (성모 마리아의 영토) 설정.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교황청에 복속 / 연말 무렵, 안티오크의 전 총대주교 피에르를 지지하는 이들이 안티오크 외성 장악. 보에몽 4세, 시타델에서 시민들 모아 반격해 진압. 피에르는 공모 혐의로 투옥된 후 램프 기름 먹고 사망 / 알레포령 라타키아의 아미르가 시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 하사 / 구아린 드 몽테규, 구호기사단장 취임[54] 앙리, 키보토스 수비대 피신시키며 포기. 테오도로스, 해적 요안니스 스티리오니 휘하 17척의 함대로 키지쿠스 봉쇄. 앙리, 니코메디아와 키지쿠즈 구원하나 칼로얀이 포위한 아드리아노폴리스의 구원 요청 받음[55] 거대 투석기까지 배치하였으나 테오도로스 바르나스 휘하 그리스인들과 40명의 라틴 기사들이 버텨냄[56] 카타리파 열성파의 방해와 현지 제후들의 냉랭한 태도. 피에르, 론 강 건너 가톨릭에 더 친근한 프로방스에서 교황에게 비협조적이고 방해까지 일삼는 레몽 6세 비난. 친카타리파 주교들 임명 방관하고 미사 시에 카타리파 사제 대동한다는 의혹. 트헝카벨 백작이자 카르카손 및 알비 자작인 레몽 로제르 역시 의심받음[57] 한편 인노첸시오 3세가 라틴 제국과 평화 체결 지시하나 거절[58] 7월이라는 기록도. 두 도시는 라틴 제국령으로 남음. 트라키아 복귀한 앙리가 불가리아 군에게 대패했다고도 한다.[59] 성 데메트리오스의 천벌이었다는 전승. 칼로얀은 딸 마리아만 남김. 과부된 쿠만 공주는 보릴과 재혼. 다른 조카 이반 아센은 러시아로 도피. 테살로니카에선 섭정으로 선출된 움베르토 디 비안드라테가 롬바르드 파벌 형성해 라틴 제국으로부터 독립 꾀함[60] 에피로스의 친왕 미카일 앙겔로스의 동생 테오도로스가 이어 수비 이끔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패색 짙어진 오토 대신 필립을 황제 적격자로 인정하는 조약 맺음. 안코나와 스폴레토 그에게 양도 / 예루살렘 여왕 마리의 부군 모색 위해 아크레 주교 플로렌츠와 카이사레아 영주 아모리 등의 사절단이 필리프 2세의 궁정으로 파견됨 / 구호기사단이 아이유브 왕조 약탈, 키프로스 함대가 무슬림 상선 공격. 이에 알 아딜이 트리폴리 공격. 보에몽 4세가 트리폴리 구원 위해 남하하자 아르메니아의 레오는 빈 안티오크 공격.. 이후 안티오크와 아르메니아간 전쟁 재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레포의 앗 자히르에게 안티오크의 정교회 대신 라틴 교회 지지해달라는 서신 보냄. 이에 보에몽 4세, 교황 지지 얻기 위해 그리스인 총대주교 시메온 축출. 레오, 시메온 망명 수용하고 니케아의 테오도로스와 동맹. 보에몽 4세는 룸 술탄 카이카스라우와 동맹하고 아르메니아 후방 공격하게 함. 결국 교황 인노첸시오가 예루살렘 총대주교 알베르에게 중재 맡김. 알베르, 레오에게 교황의 봉신으로서 템플기사단에게 바그라스 돌려주게 하여 관철시킴. 로세도가 안티오크의 라틴 총대주교로 선출되고 쫓겨난 그리스 사제들은 아르메니아 향함. 레오, 종손 레몽 루벤과 키프로스 국왕 위그의 친동생 엘비스 결혼시킴. 한편 위그는 계모 이사벨라와 앙리 1세 사이의 딸 알리스와 결혼. 알리스의 할머니인 마리아 콤니니가 결혼 주선, 친가인 샹파뉴 측이 지참금 준비 / 리보니아 기사단이 기독교 개종한 리보니아인 수장 카우포와 함께 에스토니아 원정 시작 / 시칠리아의 반란 분쇄되자 14세의 프리드리히 2세 성년 선포됨. 섭정 종료, 친정[61] 1217년 말엽? 피에르는 재차 생 질의 레몽 6세 궁정으로 향하여 그에게 교황명 따르지 않는 것과 반이단 운동에 불참시의 결과 경고함[62] 교황, 몰수된 툴루즈 영지 십자군 측에 제공하기로 하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참전 유도하나 그는 대신 최대 5백명의 제후들 참전케함. 프랑스 교회가 십자군 준비. 시토회 수도원장 아르노 아모리가 십자군 설교 맡음. 네트워크 이용해 모병. 여름-가을에 걸쳐 영토와 약탈 탐내는 북프랑스 제후들 호응. 1209년 봄 출정하기로[63] 특히 불가리아 궁수들이 아직 갑옷 못입은 이들 사냥함. 앙리 역시 올가미에 걸렸으나 한 기사가 줄 끊고 갑옷으로 화살 버텨내며 왕 지킴.[64] 6월 9일이라는 기록도.[65] 6월 30일, 7월 8일 혹은 9월이란 기록도. 보릴, 아드리아노폴리스 때처럼 십자군 유인해 격파하려 계획하고 1600명의 기병들과 매복해 있었는데 역으로 앙리가 매복조를 강타해오자 패주. 나머지 군대 산악지방 통해 철수. 괴멸적인 패배는 아니었음. 다만 마케도니아 남부의 군벌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앙리에게 복속. 이후 앙리는 테오도로스와의 휴전 끝났음으로 비티니아 귀환. 니케아의 경쟁자인 시노페의 다비트 콤니노스와 동맹[66] 악천후와 블라크 인들의 공격에 시달림. 섭정 움베르토, 앙리에게 디라키움에서 바르다스 강가, 그리고 흑해로 이어지는 회랑 영토 인정 요구. 앙리, 포위 지속하기 힘들어지자 태후 마가렛에게 결정 맡긴다고 답장 후 그녀에게 거부하라고 설득. 한편 움베르토는 몽페라토 통치하는 보니파시오의 장남 굴리에모에게 그리스 와서 도움 요청[67] 움베르토는 섭정직 유지했으나 곧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되고 앙리의 동생 외스타슈가 섭정 등극. 앙리, 롬바르드 파벌로부터 세레스 점령.[68] 라미아 근처에 60여명의 제후들 모임. 마침 그해 초엽 기욤 드 셩플리트의 후계자이자 사촌인 로베르 사망. 앙리, 아카이아 공국을 직할 봉토로 삼음. 한편 롬바르드 파벌 지지한 대가로 템플러에게 주어졌던 라베니카와 시도니오스 성채 몰수됨[69] 섭정 움베르토, 재판 피해 에우보이아 영주 라바노 델레 카르체리에게로 망명했으나 앙리는 추격해와 끝내 둘다 복속시킴. 이에 에피로스의 미카일 역시 복속해옴. 에피로스 남부 통치권 인정받음[70] 본래 모레아 전부가 베네치아에 할당되었음으로 형식상으로나마 그 봉신 자처, 베네치아의 모돈 및 코로네 지배 인정[71] 보르도 대주교가 이끄는 제2군은 케르시 경유하여 랑그도크 향함[72] 밀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 채찍질 받음. 토마스 베켓 살해 이후 헨리 2세의 참회와 같은 방식[73] 2만여 십자군이 베지에 포위하자 그 주교가 십자군과 협상. 십자군이 카타리파 모두 양도할 것을 요구하자 222명의 명단 작성해 보냄. 하지만 시내 지도부가 인도 거부. 이에 십자군의 시토회 수도원장은 가톨릭교도들은 학살 피하도록 성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십자군 불신, 성 안이 안전하다 여김. 주교와 일부 신도들만 성 나옴. 이후 함락되자 알비 십자군 이끈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는 '모두 죽여라. 신께서 구별하실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김[74] 알비 십자군을 대표하는 삽화 중 하나인 알몸으로 성을 나서는 시민들이 바로 이때를 묘사한 것. 시민들 재산권 박탈되고 무일푼으로 쫓겨남[75] 레몽 6세는 규율상으로 요구되는 40일 종군 채워진 직후 이탈. 그의 영지 노리는 시몽의 부추김 있었다고도. 한편 부르고뉴 공과 대립하던 느베르 백작은 부르고뉴측 봉신인 시몽의 명령받길 거부하고 역시 이탈. 늦가을까지 시몽에게 남은 기사는 46명[76] 가을 무렵 앙리가 테살로니카 당도하자 그에게 재차 봉신 서약 / 필리프 2세, 샹파뉴의 장 드 브리엔을 예루살렘 여왕 마리의 부군으로 선택. 교황과 함께 지참금 마련해줌 / 키프로스 국왕 위그 1세가 15세 성년 이르자 섭정 고티에 드 몽벨리아르 물러남. 하지만 얼마후 횡령 혐의로 추방됨[77] 애초에 중세 봉건 사회에서 영지 압수는 교황이나 십자군이 아닌 주군인 필리프 2세의 권한. 한편 이후 밀로가 사망. 교황은 그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오 파견. 다른 특사 위그 드 레이츠는 ?[78] 수비대장 테오도로스 앙겔로스는 아르타의 형 미카일에게로 피신. 지오프리 드 발라르두앵, 안드라비다 의회에서 봉신들로부터 아카이아 왕공으로 추대됨. 지오프리, 공국을 12개 봉토로 분할하고 파트라스와 코린트 대주교 하에 서방 교회 주교구 설립. 그의 부인이 후계자인 아들 지오프리와 샹파뉴로부터 당도[79] 코 베이고 입술 잘리고 눈 도려낸 상태로. 오직 1명만 눈 하나 남겨 무리 인도하게함. 한편 알리스와 함께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뢰 백작과 퐁티외 백작이 십자군 합류[80] 토지세 납부 외에는 세속법에 구애받지 않음. 다만 십일조와 세습 (서임권)등은 분쟁의 소지로 남음. 이번엔 지오프리 드 발라르두앵 불참[81] 섭정 장 드 이벨린과 구호기사단장, 튜튼기사단장은 평화 연장에 동의했으나 결국 템플기사단장 필립의 다음 왕의 결정권 제한하지 말자는 주장에 설득됨. 이에 알 아딜은 아들 알 무아잠에게 아크레 인근 습격하게함[82] 레몽, 출석 거부하고 자신이 피에르 드 카스텔누의 살해와 관련 없다는 증거 제시하나 레몽에게 적대적인 사제들은 그가 이단과의 전쟁에 소극적이라는 것을 내세워 파문시킴 답정너[83] 10월 30일이라는 기록도. 섭정이던 장 드 이벨린은 내무대신으로서 권력 어느정도 유지. 대관식 하는 틈에 알 무아잠이 습격. 장 드 브리엔, 아크레 돌아간 후 보복으로 습격[84] 사로잡힌 영주는 3년 후 카르카손에서 옥사[85] 기사단들의 주도해 나일 강 하구 공격하지만 결국 철수, 보복으로 아크레 습격당함 / 인노첸시오 3세, 이탈리아 원정 온 오토 4세의 후방에서 반란 선동해 아풀리아 원정 포기하고 철수하게 만듦.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 테라 디 라보로 (가에타 ~ 카푸아 일대) 교황령에 할양하고 황제가 되는 즉시 시칠리아 왕국을 1살 아들 하인리히에게 넘긴다는 조건으로 동맹 성사됨 / 여름. 에스토니아 인들이 리보니아 기사단의 현지 동맹인 투라이다의 카우포 공격하나 격퇴됨. 이후 기사단이 에스토니아의 빌잔디 요새 공격하나 역시 격퇴됨 / 가을. 시몽 드 몽포르, 복무 기간 다 된 십자군 귀환하자 툴루즈 공격 포기하고 케르시로 북상해 현지 이단 찾아나섬 / 아라곤의 페드로 2세, 교황에게 시몽 드 몽포르가 사리사욕 위해 십자군 남용하고 있으며, 조카이자 검증된 가톨릭 교도인 레몽 6세의 아들 레몽을 툴루즈 백국 주어야 한다고 설득. 연말 무렵.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그가 이듬해 안달루스 원정 나설 수 있도록 알비 십자군 모집 잠정 중단[86] 페드로 2세, 자신의 조카 레몽 7세의 계승 좌절된 것에 불만이었지만 시몽의 봉신 서약 승인함[87] 앙리, 정보 입수하고 인근 성채에 군대 집결시키자 보릴 철수. 한편 보릴의 동생이자 마케도니아의 부왕인 스트레츠가 테살로니카 왕국 침공했으나 에피로스의 미카일이 개입해 격퇴됨[88] 여성주는 우물에 던져진 후 비명 멈출 때까지 돌 부음. 90여명의 기사들 교수형당함. 1명 개종, 나머지는 찬송가 부르며 화형장 향함. 30명 처형되었다는 기록도[89] 에피로스에서 니케아로 와서 황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후 콘야로 망명해온 알렉시오스 3세와 그의 조카 마누일 (이사키오스 2세의 막내아들) 복위를 명분으로 메안데르의 안티오크 포위. 이에 테오도로스는 라틴 용병들이 반을 차지하는 군대 편성하여 맞섬. 전세는 셀주크 측에 유리했으나 술탄이 말에서 내려 니케아 군대 추격하던 중 아마도 테오도로스 1세 본인에게 살해됨. 이에 룸 셀주크 군대 도주. 마누일과 함께 사로잡힌 알렉시오스 3세는 히아신토스 수도원으로 보내짐. 한편 콘야에서 아미르들이 모여 장남 이즈 앗 딘 카이카우스 추대. 토카트의 알라 앗 딘 카이쿠바드와 안탈리야의 카이페리둔 이브라힘의 두 이복동생들 반란. 아르메니아의 레오와 다니슈멘드의 자히르 앗 딘 일리, 에르주름의 아미르 무기트 앗 딘 토그릴샤 등이 이브라힘 지지하여 콘야 입성하나 카이카우스의 설득에 해산. 이에 카이쿠바드는 앙카라로 도주, 카스타모니 튀르크의 도움 받아 버티나 결국 두 동생 모두 사로잡힘. 카이카우스, 동로마 측과 현상유지 평화 체결. 테오도로스 1세는 라틴 제국 쪽에 집중, 그리스인들에게 구원 약속하는 편지 보냄[90] 먼저 비베네치아계 사제들이 성 소피아 성당 모여 교황의 자유 선거 편지 제시. 하지만 그들이 떠난 후 베네치아 출신 사제들이 모여 그들의 주임 사제 필리포를 총대주교로 추대. 이에 비베네치아계 사제들이 교황에게 자신들 중 유력자들 명단 적어 선택해달라고 요청[91]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구원하고 보릴의 부관 멜닉 사로잡음[92] 추정 시기. 이에 앙리는 250명의 기사와 2천 보병과 함께 헬레스폰트 상륙[93] 이미 안티오크 전투에서 라틴 용병대 다수 상실한 상태라 패배. 테오도로스의 동생들 알렉시오스 혹은 이사키오스 사로잡힘. 이후 앙리는 미시아 지방 정복 나섬. 그 과정에서 렌티아나 점령, 수비대장이자 테오도로스의 사위인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 사로잡음. 앙리, 포이만니온과 아드라미티온 점령하고 그리스 포로들을 국경에 배치함[94] 1209년이란 기록도.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2번째 거점. 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가 반격 나섬, 아라곤 국왕 페드로 2세가 도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그들 도울 십자군 선포하고 이를 조직하도록 알비 십자군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 / 베네치아, 몰타 출신 제노바인 해적 엔리코 페스카토레로부터 크레타 정복 / 테오도로스 1세, 첫 부인 안나 앙겔로스 사망하자 아르메니아 레오 1세의 조카 필리파와 재혼 / 울리히-클레베 공작, 독일 십자군 이끌고 랑그도크 향함. 파리 부주교 역시 지원병 이끌고 시몽 합류 / 여름. 프리드리히 2세, 독일 향하기 위해 북상. 북이탈리아의 오토 4세 (벨프 가문) 지지하는 현지 구엘프 도시들 복속시킴. 2차 구엘프-기벨린 전쟁의 기원[95] 이후 러시아로 도피했던 사촌 이반 아센이 슬라브 용병과 불가리아로 돌아와 내전 터지자 라틴 제국에게 평화 요청. 한편 앙리는 1월경 포이만니온에서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모든 적들이 소멸했다고 표현[96] 이무렵 시몽 드 몽포르가 알비 점령했다 한다.[97] 먼저 생 드니의 필리프 2세 찾아가 자신에게 십자군 설교하라는 그리스도의 편지 받았다고 주장. 이에 필리프는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성당 앞에서 지중해까지 행군하면 기적 발현할 것이라며 모병. 일부는 프랑스 국왕기 모조해 모으기도[98]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 라인강 일대에서 인원 모아 두 무리로 나눔. 니콜라스, 첫번째 무리 이끌고 앞장서 남하. 바젤 지나 제노바 향함[99] 에티엔은 마차 타고, 부유한 소년들은 말타고. 소수의 가난한 사제들과 나이든 순례객들 동행. 하지만 더운 여름 날씨로 숫자 감소[100] 장 드 브리엔, 교황에게 사절 파견해 1217년 7월 휴전 끝나면 바로 성지에 당도할 새로운 십자군 요청.[101] 제노바에서 기적 없고 시민들이 거처 제공하자 상당수 그에 남음. 이후 니콜라스와 피사 향한 이들은 이번에도 기적이 없자 일부는 2척의 선박 승선해 팔레스타인 향함. 니콜라스, 승선 안한 나머지와 로마 향함. 교황의 접견, 집으로 돌아가 좀더 나이 먹을 때까지 순례 연기하라는 조언에 수긍. 겨울동안 대부분 귀국. 한편 두번째 무리는 안코나 거쳐 브린디시 당도. 일부는 배타고 팔레스타인행 향함.[102] 8월이라는 기록도[103] 1212년이라는 기록도 / 1월 15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니코시아의 사제들에게 듀랑 대체할 새 대주교 선출할 것을 지시 /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의 장남 레몽, 타르투스 성당에서 아사신에게 암살됨. 향년 18세. 구호기사단의 사주 의혹 / 인노첸시오 3세, 5차 십자군 설교 위해 관료주의적 체계 설립. 각 관구마다 설교자 지정해 특정 지역만 맡게 함. 추기경 로베르 드 쿠흐송이 프랑스에서 설교 시작 / 필리프 2세, 랑그도크 왕령지 가능성 다분한데도 아들 루이의 알비 십자군 동참 요청 거부. 아직 잉글랜드가 파문 및 성무금지령 상태에 놓여 있을 때에 침공하려는 계획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추기경 펠라지오 갈바니를 라틴 제국에 특사로 파견[104] 1212년 초라는 기록도. 루즈를 시몽 드 몽포르에게 넘기는 것 확정, 그의 부하들에게는 이단 영지들 주기로 결의[105] 1212년 무와히드 군대와의 전투로 단련된 기사들. 한편 아라곤으로 망명했던 랑그도크 영주들이 동행. 이에 십자군에 함락되었던 도시들이 옛 주인에게 항복[106] 9월 13일이라는 기록도. 기사 알리앙 드 루시가 페드로 2세 살해. 그 공로로 시몽으로부터 테름 등의 영지 하사받음. 이후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에 개입하지 못함.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교황의 지목자로서 툴루즈 백작령 뿐만 아니라 레몽 6세의 세습령인 나르본과 프로방스 변경백 영토까지 주장. 이에 레몽 6세가 충성과 가톨릭 신앙 내세우며 불평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연금 지급 제안 및 아들 레몽에게 새로운 영지 찾아주겠다고 약속[107] 알바니아의 베라트에서 하인에게 암살됨. 서자밖에 없어 니케아 제국에서 관료 일하던 이복동생이 계승 / 보릴, 앙리와 세르비아의 니시 포위하나 세르비아의 이슈트반 2세의 반격과 내분으로 실패[108] 5백명의 호위병과 사냥 하던 중 사로잡힘. 이후 술탄은 그를 성문 앞에 데려다 놓고 항복 종용하나 수비측은 트라브존에 알렉시오스의 아들들이 있음으로 그들의 통치를 받지 튀르크인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통보. 이에 술탄은 대놓고 알렉시오스를 고문, 이에 보다못한 수비측이 협상 나섬[109] 앙리, 그리스인들의 게릴라에 진군 멈춤. 키지쿠스, 트로아드, 아드라미티온 등이 라틴제국령. 현재의 마니사 ~ 발리케사르 일대 할양된 것. 그에 더하여 마르마라해 (프로폰티스) 해안 할양, 아크히사르 인근 칼라모스 일대는 무인지대로 설정, 국경 표시. 한편 헤라클레아에서 열린 펠라기우스 측 가톨릭 사제들과 니케아의 정교회 사제들간의 동서교회 화합 의논은 결렬됨[110] 알렉산드리아에 2명의 서유럽 영주들이 무장한 기사들과 상륙하자 십자군의 공격이라 판단한 당국이 시내의 3천 서유럽인들 체포했다가 별일 없자 석방하는 헤프닝 발생 / 올리비아의 프러시아 선교 실패. 이웃 리보니아 정복의 잔혹함을 목격한 터라 기독교 개종 강력히 거부, 기독교화된 헬름노 공격. 이에 현지 사제들은 교황에게 군사 지원 모색[111] 루이, 부왕의 대표로서 랑그도크에서의 왕권 재확립 위해 남하. 십자군 영주들에게 필리프 2세가 그들의 주군임을 주지시키나 시몽은 그에게 복속 혹은 원정군 지도자 자리 양보 거부. 다만 이후 시몽, 자신의 법적 정당성 확보 위해 파리 향함. 한편 최소 종군 기간인 40일 채워지고 제후들 귀국하자 루이 역시 별 성과 없이 돌아감[112] 대주교 71명과 주교 404명 및 8백여명의 수도원장 등과 레몽 6세 참가, 사상 최대 규모. 그럼에도 격론 끝에 레몽 6세 폐위 결정됨. 다만 아들 레몽에게는 가문의 세습 영지인 프로방스 변경백 봉토 주어지는 것으로. 그외에 이단 단죄하라는 명령 집행하지 못하는 세속 군주에 대한 십자군 선포 명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 아딜에게 예루살렘 넘기거나 전쟁에 직면하라는 서신 보냄[113] 파리 대학 신학부, 십자군 약속하고 안가는 것은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공표 /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 보에몽 4세가 트리폴리 있는동안 안티오크에 군대 몰래 들여보내 도시 장악. 시타델 항복. 종질 레몽 루벤 옹립, 바그라스 성채 템플기사단에 반환. 또한 교황의 지지 얻기 위해 라틴 교회의 토지 반환. 한편 보에몽 4세의 동맹인 룸 술탄 카이카우스 1세가 아르메니아 침공 / 에피로스 군대가 오흐리드와 프릴레프 점령 / 비베네치아계 총대주교 제르바시오, 콘스탄티노폴리스 귀환 / 사모사타의 알 아프달, 룸 술탄 카이카우스 지원으로 반란 모의[114] 시몽, 파리에서 필리프 2세에게 툴루즈 백작으로 봉신 서약. 이후 돌아와 싸우나 패배하자 시민들의 반란 두려워 툴루즈 성벽 파괴[115] 에피로스 친왕 테오도로스 앙겔로스가 테살로니카 왕국 노리자 테살로니카 당도하여 불가리아의 보릴과 에피로스 협공 논의하던 중 사망[116] 레몽 7세가 활약하는 동안 아라곤으로 향하여 군대 모은 부친 레몽 6세는 남쪽에서 랑그도크 진군하였으나 실패[117] 에우보이아 영주 라바노 델라 카르세리 사망, 이후 6개의 롬바르드 가문들이 에우보이아 분할[118] 룸 술탄 카이카우스 1세, 타우루스 산지의 가반 포위. 아르메니아측 원군 격파, 대원수 램프론의 콘스탄티노스 사로잡음. 이에 국왕 레오 1세가 몸값 지불해 석방시킴 / 연말. 언드라시 2세, 제후들 허가받아 구호 기사단에게 헝가리 북부 바봇 관문의 관세와 트란실바니아 살라치 소금 무역의 수익 일부 제공. 연간 600 마르크 은화 상당.이미 교황은 그들에게 헝가리 교회 재산 1/20 할당 / 십자군, 바니아스 공격하나 격퇴됨[119] 베네치아 요청대로 브린디시에서 디라키움 공격 나섬. 이후 해로 대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서의 패권 재확립을 위해, 그리고 아드리아해와 에게 해간의 육상 연결로 확보 위해 에그나티아 가도 따라 행군할 계획[120] 실패한 후 현재 알바니아의 엘반산 인근에서 테오도로스의 군대와 조우. 테오도로스, 교황 특사 지오반니 콜론나에게 호의와 지지 보이며 회담 요청. 서방 교회에 종속 및 피에르의 5차 십자군 돕겠다고 제안. 그리고 지친 라틴 군대에게 식량과 길잡이 제공하며 호의 베품. 이후 테오도로스와 피에르가 협정 맺고 동행하며 라틴인들의 경계가 누그러지자 기습해 피에르와 콜론나 등 사로잡음. (다만 5월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름. 추정 일자) 이후 에피로스 군대가 진영 약탈하자 라틴 군대는 흩어져 도적질로 연명. 임신한 피에르의 아내 욜랑드는 따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직항을 택하여 무사, 그해 초가을 막내 아들 보두앵 출산. 한편 그들의 다른 아들들인 로베르, 필리프, 앙리는 프랑스에 남아있는 상태. 교황 호노리오 3세, 주변 왕들에게 도움 구하고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에게 십자군 목적지를 에피로스로 돌리라고 서신 보내나 효과 없음[121] 식량과 자금을 지원받았으나 무와히드 왕조 측이 매년 백명의 기독교도를 요구한다는 탄원 (진실 여부는 불분명) 교황의 소우이로 주교에 대한 금지 조치에 따라 돕지 않음. 선발대는 성지로 직행하고 후발대는 리스본에서 월동한 후 출항[122] 9월 12일이라는 기록도[123] 9월 13일이라는 기록도[124] 장 드 브리엔, 휴전 만료 전에 공격 제안[125] 이후 홀란트 십자군은 교황에게 히스파니아의 해방과 이교도들의 악습 근절을 위해 1년간 남도록 청하였으나 성지 가지 못한 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이라는 답장 돌아오자 대부분 그대로 아크레 향함. 이듬해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는 알카세르에서 의회 열고 산티아고 기사단에게 도시 넘김. 1482년 팔멜라 이전 시까지 기사단 본부됨[126] 성 마르티노 기도일인 11월 11일이라는 기록도[127] 갈릴리 북상하다가 알준 주둔한 알 아딜 공격 문제 놓고 의견 충돌. 결국 언드라시 2세의 전투 반대 의견이 득세하여 야곱의 여울 거쳐 예수 관련지 순례하고 귀환[128] 바드르 앗 딘 무함마드 알 하카리가 2천의 병력과 수비 지휘, 77개의 탑으로 요새화된 상태. 장 드 브리엔, 현지 배신자가 알려준 샛길 통해 안개를 틈타 성벽에 접근했으나 장 드 브리엔이 후퇴 명령하며 기회 무산됨. 이후 연대기 작가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임. 이후에 포위 지속하지 않고 철수한 것 역시 까임, 실제로 몇 달 후 아이유브 측이 성벽 파괴하고 철수[129] 언드라시 2세의 와병 및 소극적 태도에 반하여 시돈의 영주 발리앙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출정하여 성채 인근 마쉬가라 (시돈에서 내륙으로 15km)까지 행군했으나 결국 회군, 눈 내려 진창된 상태에서 공격받아 아랍측 사료 의하면 3명만 생환[130] 아들 잘랄 웃 딘을 총독으로 봉함. 칼리파 앗 나시르가 몽골에 구원 요청 보냈다는 설도 있음 / 교황 십자군, 브린디시 집결하나 수송 자금 부족으로 출정 지체됨 / 에피로스 친왕 테오도로스의 동생이자 아이톨리아 총독인 콘스탄티노스, 아테네 공국으로부터 라미아와 네아파트라스 점령. 한편 테오도로스는 라리사 - 테살로니카 사이의 주요 거점인 올림포스 산 근처 플라타몬 요새와 라미아, 네오파트라스, 프로세크 등 점령 / 한편 아키이아 공 지오프리와 아테네 공 오도는 클레르몽 성채 건설비 충당 위해 교회 재산 건드리려 했다가 재차 파문당하고 성무금지령 내려짐[131]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 키프로스 국왕 위그 1세의 이복여동생 멜리장드와 재혼[132] 대부분 아크레에 주둔. 두 개 부대는 남쪽의 카이사레아와 순교자의 성채 (아틀리트) 향함. 아틀리트에는 destroit 라는 새 탑 세움. 언드라시 2세는 몇달 간 아크레 머물며 자신의 군대가 대세 바꾸기에 역부족이고 알 아딜 역시 십자군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 또 십자군의 주요 목적지인 이집트 공격에 대해선 불필요하다거나 혹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철수. 언드라시 2세, 구호 기사단에게 귀국 동행하는 대가로 1천 마르크 제안. 하지만 이후 벨라 4세 때가 되어서까지 교황의 요구에도 지불되지 않음. 언드라시 2세의 귀국 도중 키프로스 연안에서 해적들의 공격으로 배에 불이 붙었는데 신의 징벌로 여겨짐. 이후 니케아와 보스포루스 거쳐 육로 통해 귀국. 그 과정에서 아들 벨라와 언드라시를 각각 니케아 황녀와 아르메니아 공주와 결혼시키고 딸을 불가리아 공주와 약혼시키며 외교. 한편 에게르 주교 등은 이집트 원정 동행했다가 이듬해 귀국[133] 교황의 위협과 1217년 말엽 십자군이 안코나에 모이고 그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가 십자군 이용해 디라키움 탈환하려는 움직임 보이자 결국 단행한 것. 다만 피에르 대신 그의 장교들 등의 포로들도 풀려남. 수위권 인정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크로토네 주교 파견, 베네치아에게 에피로스 공격 금지시킴. 이는 나머지 포로들 석방 노린 것이었으나 결국 피에르는 그해 9월 전 사망[134] 이날추크는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의 숙부. 몽골 사절은 약 450여명[135] 프리슬란트 함대로 십자군 수송, 아틀리트에서 바람 때문에 대부분 발 묶임. 일부 함대만 이집트 향하고 나머지는 풍향 바뀌길 기다림[136] 니코시아 주교 에우스토르기오스의 천거. 별 저항 받지 않고 '무혈' 상륙. 본래 상륙 엄두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주교가 강권[137] 크락 데 슈발리에 (히신 알 아크라드)와 샤텔 블랑크 (사피타) 일대 습격[138] 오랫동안 지체되었으나 결국 교황 호노리오 3세가 2만 마르크 은화 마련하여 함대 꾸리는데 성공[139] 프랑스 십자군은 라마르슈 백작 위그 드 뤼지냥과 느베르 백작 에르브가 주도, 잉글랜드 십자군은 체스터, 아룬델, 더비, 윈체스터 남작들로 구성. 제노바와 배삯 협상.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교회의 나쁜 자식'으로 불리던 에르브에게 프랑스 교회 재산의 1/20 지급하여 배값 마련해줌. 이후 보르도 대주교 기욤, 그리고 파리, 랑, 앙제 주교 등이 동참. 교황은 추기경 로베르 드 쿠흐송 파견해 비록 교황 특사는 아니지만 함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 맡김. 한편 펠라지오는 자신이 교황 특사임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지시, 불만 자아냄[140] 추정 시기. 지도부가 외곽 요새 함락의 기세를 타고 바로 다미에타 공격하지 않고 지원군 기다리는 우유부단한 태도 보이자 실망한 것[141] 막 도착한 상태에서 수비 지휘. 아이유브 군대가 십자군 진영 외곽까진 도달했으나 결국 강변으로 밀려남. 상당수 강물에 익사[142] 이집트 함대의 후방 치려 시도한 것. 하지만 경사도 차이로 바다와 연결시켰을 때에 물이 끝까지 안들어와 실패. 한편 알 카밀은 시리아의 동생 알 무아잠의 지원 병력 기다리며 양측은 소강상태 돌입 (알 아딜의 사망으로 시리아 군대 편성 늦어짐)[143] 다미에타를 강변에서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으나 홍수로 성벽 근처에 표류하자 수비대가 나와 점령. 탑 내부의 십자군 전멸, 2명만 생환하나 용기 부족하다며 장 드 브리엔에게 처형됨. 펠라지오, 사태 재발 막기 위해 제방 건립 지시. 한편 홍수 후 물고기 널려 있기도. 다만 말 대부분 익사하고 그 사체는 제방 건립에 쓰임. 홍수의 유일한 도움으로 운하에 물이 차올라 십자군 함대가 다미에타 후방으로 이동[144]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랑그도크를 카페 왕가의 경쟁자이자 나바라 왕국과 함께 트랜스 피레네 제국을 꿈꾸는 샹파뉴 백작 가문에게 준다고 하자 결국 개입 결정. 20명의 주교와 30명의 백작, 6백의 기사와 1만의 궁보병으로 구성된 대군. 아모리, 대원수직 대가로 랑그도크 지방 프랑스 왕실에 바침. 루이, 아키텐 경유해 랑그도크 향함. 교회의 이름으로 '이단' 레몽으로부터 재정복하기 위해. / 테오도로스 1세, 아르메니아의 필리파와 이혼. 라틴 제국의 섭정 욜랑드와 협정 맺고 그녀와 피에르 사이의 딸 마리아와 결혼[145] Grote Mandrenke. 프리슬란트 십자군의 '대의'를 버린 것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겨짐[146] 하카리 쿠르드 용병을 이끄는 이마드 앗 딘 아흐마드 이븐 알 무쉬팁이 알 카밀의 동생 알 파이즈를 옹립하려는 음모. 알 카밀, 아들 알 마수드의 영지인 예멘으로 도주 고려하나 이내 동생 알 무아잠의 원군 소식에 그와 합류하기 위해 남하. 십자군, 알 아딜리야 비어 있는 것 보고 강 건너 진입. 다미에타 수비대의 반격 격퇴하고 장악, 도시 고립시킴[147] 이븐 알 무쉬팁은 케라크에 감금되었고 알 파이즈는 신자르 총독으로 보상받았는데 임지로 향하던 도중 사망[148] 나일 강 서쪽 십자군의 원래 기지와 함께 공격했으나 실패. 권좌는 되찾았으나 그 대가로 다미에타 고립됨. 십자군이 다미에타 공격 나서면 요격 나서기 위해 파리스쿠르 선택. 일시적으로 알 아딜리야 되찾았다가 5월 무렵 십자군에게 재차 빼앗겼다는 기록도.[149] 종전 위해 예루살렘 넘겨줘야 할 수도 있음으로. 일부 과격파가 성묘교회 파괴하여 십자군의 예루살렘 목적 의식을 없애려 하였으나 술탄의 거부. 예루살렘 외에도 알 카밀의 명에 따라 토론, 사페드, 바니야스 등 성벽 헐림. 알 카밀,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도움 요청. 칼리파 앗 나시르, 대군 지원 약속[150] 이때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샤르트르와 라마르슈 백작 기욤 전사했다고 하나 두 귀족의 전사는 6월 2일의 2차 전투에 의한 것 혹은 이때의 상처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다는 등 의견 분분[151] 추위와 더위로 사기가 꺾인 이탈자들도 함께 떠남[152] 이에 종손 레몽 루벤과 맏사위 장 드 브리엔이 반발.[153] 교황 특사 아르노의 주장대로 구약에 의거한 결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 이후 프랑스 왕실 대한 신뢰도 하락. 툴루즈 역시 루이의 입성 거부함. 이에 포위됨[154] 적군이 그를 왕으로 착각. 탈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 이때 대주교의 기원과 덴마크 국기가 될 다네보르그 십자가의 하늘로부터의 발현으로 구원되었다는 전설[155] 첫 진영 전투에선 양측 모두 피해봄. 다만 무슬림측 더 무거움. 이후 펠라지오의 주장대로 다미에타 총공격하나 공성병기가 전소하며 후퇴, 반격당하여 진영 잃을 뻔하나 어둠이 깔려 겨우 붕괴 면함.[156] 다만 이때 기사단장 기욤 드 샤르트르 중상 입고 하야, 팔레스타인 돌아가나 상처 도져 세보르가에서 사망[157] 26일 혹은 9월이라는 기록도. 코농은 음유시인으로도 유명한 그양반 맞다. 세바스토크라토르 직위를 지니고 있었음. 프랑스에 남겨진 피에르와 욜랑드의 자녀들이 도착할 때까지 섭정하기로.[158] 펠라지오는 알 카밀 진영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등 전략회의 도중 십자군 병사들이 다미에타로 돌격하자 아이유브 측은 거짓 후퇴한 후 포위하여 섬멸. 펠라지오, 지휘권 주장하며 맞섰으나 이탈리아 병사들 도주. 장 드 브리엔이 기사단과 생존자 구해내고 진영 수비. 구호기사단의 지휘관 전사[159] 추정 시기. 경비병들은 처음에 그를 의심했지만 이내 휴전 깃발을 믿고환대받고 선물 주어짐. 프란치스코, 신이 자신의 믿음과 함께임을 보이기 위해 불의 심판 자처하나 거절됨. 한편 자지라의 동생 알 아슈라프와 바그다드의 잘랄 웃 딘이 걱정된 알 무아잠이 알 카밀에게 시리아 귀환 청함[160] 나일 강의 적은 범람으로 밀 수확량 저조. 알 카밀, 기근 우려하여 십자군의 빠른 귀국 유도하려 노력. 십자군 포로 보내 협상 제안. 휴전 성립됨, 다미에타와 예루살렘 교환 논의는 거절됨[161] 거기에 더하여 갈릴리 할양과 요르단의 조공까지. 대부분의 제후들은 호의적이었으나 펠라지오와 예루살렘 총대주교 등의 성직자들은 이교도와의 협상 거부하였고 기사단 측은 팔레스타인의 옛 성채들이 모두 허물어진 상태라 돌려받더라도 곧 빼앗길 것이라며 우려. (예루살렘 지키려면 요르단 필요) 한편 이탈리아 상인들은 무역 위해 다미에타 중시함. 내륙 영토 관심 없음. 결국 펠라지오의 주도로 거절됨. 아크레 주교 장은 십자군 내분 일으키려는 알 카밀의 계책이라 판단[162] 십자군이 도시 재차 공격, 별 저항 없이 성벽 접수. 죽은 이들을 묻을 여력도 없이 병든 수비대와 시민들 조우. 3백여명의 상류층 시민들은 몸값 위해 인질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림. 어린 아이들은 기독교로 개종됨. 펠라지오, 모든 기독교권의 이름으로 교회의 다미에타 관리 주장했으나 세속 군주들은 예루살렘 왕국 귀속 지지. 특히 장 드 브리엔은 도시 내주지 않으면 떠날 것이라 위협하자 펠라지오는 결국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도시 넘길 것이고 그가 오기 전까지 장 드 브리엔이 대리로 통치하는 것으로 타협[163] 8일이라는 기록도[164] 십자군 접근하자 수비대 도주. 이후 약탈물 대한 다툼 심화, 특히 이탈리아인들이 분배 적게 받았다고 격분. 펠라지오가 제어하지 못하자 폭동 일으킴. 결국 기사단이 이탈리아 인들 도시에서 추방. 십자군 내의 불화 증폭[165] 알 카밀이 로제타 통해 함대 발진시킨 것. 펠라지오는 이미 정보 입수했으나 무시했다고 함. 참사 이후에야 보복으로 베네치아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하나 무용지물 / 보에몽 4세, 레몽 루벤의 아르메니아 원정 틈타 안티오크 수복. 구호기사단이 시타델에서 버팀. 한편 아르메니아의 섭정 바그라스의 아담이 구호기사단의 사주 받은 아사신에게 암살됨. 후임자인 하이톤 가문 출신 램프론의 콘스탄티노스, 타르수스의 레몽 루벤 포위. 이에 레몽은 구호기사단에 도움 청하나 거절됨 / 레메소스 (리마솔) 종교회의 결과 정교회 공동체의 라틴 교회에 대한 십일조 납부 면제 규정 폐지. 이에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 필리프 드 이벨린 (발리앙과 마리아 콤니니의 아들)이 같은 섭정이자 조카인 알리스에게 항의하나 소용 없자 납부 거부 / 에스토니아 인들이 탈린의 덴마크 성채 공격하나 격퇴됨 / 몽골군이 라이, 카즈빈 등 점령. 술탄 무함마드샤는 카스피해의 섬으로 피신 / 가을. 하마단, 타브리즈 항복. 메르브 함락 / 몽골군, 십자군 도우려던 조지아 군대 괴멸시킴[166] 교회 및 프리드리히 2세의 사절 2명과 함께 도착. 한편 지도부 회의에서 펠라지오와 밀라노 성직자들은 공세 전환 주장하나 예루살렘 왕국 제후들은 장 드 브리엔의 귀환 기다리자며 반대하여 무산됨. 한편 템플 기사단은 알 무아잠에게 포위된 아틀리트 구원 위해 이탈. 아크레의 십자군이 습격 나오나 케이몽에서 알 무아잠에게 격퇴됨[167] 추정 시기. 부활절 전후. 교황의 특별 허가로 이탈. 하지만 아르메니아 왕가 혈통인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사망하자 교황은 레몽 루벤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정하고 장 드 브리엔에게 더 간섭 시 파문 경고[168] 불로스는 다미에타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위치. 하지만 돌아오던 길에 아이유브 측의 매복에 걸려 지휘관 등의 기사들 사로잡힘. 아풀리아 십자군은 레시나 백작 마테오가 지휘. 펠라지오, 재차 공세 주장하나 역시 무산됨. 이후 지지 세력과 단독으로 출정하려 했으나 이탈리아인들까지 반대함[169] 4월 4일 혹은 7월 27일이라는 기록도[170] 그외에 독일의 디터 폰 카체넬른보겐, 루카 병력 등 귀국[171] 이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펠라지오에게 알 카밀의 제안 내용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전달하게 함. 봄에 출정해 8월 당도 계획. 다만 프리드리히 불신, 펠라지오에게 로마에 보고 없이 술탄의 평화조약 거절하지 말라고 지시[172] 형인 네무아 백작 필리프는 라틴 제국 계승 거부[173] 타르수스 함락 이후 레몽 루벤의 가족들은 키프로스 도주 / 보에몽 4세, 안티오크 시타델의 구호기사단 항복 수용. 배신 대가로 자블라 수복되면 원래 그들에게 주기로 했으나 대신 템플 기사단에게 주겠다고 말함 / 교황 호노리오 3세, 원정비 마련 위한 프랑스 전역에 대한 고수익 세금과 함께 필리프 2세에게 아모리 대신 툴루즈 백작령 제안하며 그에 대한 새 원정 이끌 것을 권하지만 거절됨 / 교황 호노리오 3세, 헝가리 측이 제안한 보스니아의 보고밀 이단에 대한 원정에 십자군 지위 부여 / 가을. 몽골군이 하마단 파괴, 잘랄 웃 딘 인더스 협곡까지 추격 / 테살로니카의 데메테르 1세, 도움 청하기 위해 서유럽 향함.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 연말무렵 세레스 점령하고 테살로니카 육상으로 고립시킴. 로도페 산지의 독립 군주 알렉시오스 슬라브, 테오도로스 아내 마리아 필리파의 조카와 결혼하고 에피로스와 동맹[174] 신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출된 마테오가 대관식 주관. 니케아 제국과의 평화 조약 갱신됨. 테오도로스 1세가 로베르에게 자신의 딸 에우도키아와의 결혼 제안[175] 성지에서 결성된 몬 조이 기사단의 일부. 템플러에 흡수되길 거절하에 칼라트라바에 합친 것[176] 그밖에 예루살렘 성벽 허문 것에 대해 교황에게 배상하는 것까지 포함됨. 하지만 독일군의 당도에 의기양양해진 펠라지오는 로마에 보고하는 것도 잊고 거절해버림[177] 다만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가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진 공격 나서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하며 요지부동. 하지만 기다려도 프리드리히가 안오자 펠라지오 초조해짐[178]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630척의 함대가 대동했다고 함. 아이유브 군대가 쉬림사흐까지 북상하나 십자군 규모 보고 도주. 알 카밀, 탈카와 현재의 만수라 일대의 강 양안에 방어선 구축[179] 아이유브 측은 나일 강 건너편에 주둔. 운하로 보호받음. 범람하기 전에 마른 운하 건너 십자군 후방으로 이동. 한편 장 드 브리엔은 알 무아잠과 알 아슈라프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으며 나일 강이 곧 범람할 것이라며 진군 중단을 주장하나 펠라지오는 묵살. 일반 병사들도 술탄이 카이로 두고 도주했다는 풍문 듣고 사기 팽배[180] 장 드 브리엔의 충고 무시하고 앗 사기르 호수 따라 행군한 결과. 한편 이집트 함대가 후방 물이 차오른 운하 통해 십자군의 퇴로 차단 위해 후방으로 이동하여 수로 방면으로도 퇴로 차단[181] 병사들이 와인 창고 버리길 아까워하며 마셔버림. 철수 명령 떨어지자 취한 튜튼 기사들이 남은 술독에 불을 지름. 그 덕에 상황을 파악한 알 카밀이 수문 열어 홍수 일으킴. 이에 십자군은 진창 속에 갇힘. 튀르크 기병대 및 누비아 보병들의 습격. 장 드 브리엔, 기사들 이끌고 누비아 군대 격퇴해내지만 이미 수천의 보병과 순례자들 전사. 한편 펠라지오는 넘쳐흐른 물살 타고 이집트 함대의 봉쇄 뚫고 다미에타로 도주. 식량과 의약품 싣고가버려 남겨진 십자군 식량 사정 악화됨. 그나마 탈출하던 나머지 선박들은 나포됨[182] 펠라지오, 몰타 백작의 지원군 임박했다는 소식 접하자 재차 다미에타 요새화하고 재집결 하기 위해 술탄에게 안전한 철수 조건의 휴전 청하지만 알 카밀은 다미에타 자체 내놓을 것을 요구. 식량 사정 절박하여 수용[183] 루트비히 1세와 장 드 브리엔, 그리고 기사단장들. 대신 알 카밀은 아들 앗 살리흐와 여러 아미르들을 인질로 십자군 측에 보냄. 한편 다미에타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알 카밀은 참십자가 반환 약속하나 못찾음. 이후 프리드리히 2세에게 평화 조약 승인 받기로.[184] 시칠리아 왕국의 내무대신 바이터와 함께. 한편 협약 이행 위해 먼저 풀려난 템플 기사단장과 튜튼 기사들이 도시 반환 준비하자 병사들이 앙리의 지지 하에 폭동을 일으켜 장 드 브리엔과 기사단들의 구역 공격하나 곧 수그러듦. (다미에타 성벽 튼튼하고 병력 충분했으나 식량 부족. 게다가 지도자들 인질인 상태) 알 카밀, 인질 교환 전에 장 드 브리엔과 다른 인질들에게 저녁 만찬과 귀중한 선물 하사. 일반 병사들에게도 식량 배급[185] 인질에서 풀려난 장 드 브리엔은 팔레스타인 제후들과 아크레 향하고 루트비히 1세는 독일 귀환. 펠라지오는 구호기사단과 보에몽 4세의 분쟁 조정하기 위해 안티오크 향함. 기사단들에게 자블라 공유 제안하나 보에몽 4세는 안티오크 내 구호기사단 재산 압수. 이에 펠라지오가 파문 때리나 불복하며 맞섬[186] 이듬해 1월이라는 기록도. 8세 아들 콘스탄티노스 있었음에도 제국의 안정 위해 장성한 후계자 선택. 한편 이에 반발한 테오도로스의 동생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가 라틴 제국 측으로 망명. 로베르 1세의 신붓감으로 조카 에우도키아 데려감[187] 연초 무렵 수부타이의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동부 지나 카스피아 고갯기 통과, 돈 강 유역 진입. 러시아 제후들의 영토 진입 / 레몽 6세, 난민들 위해 툴루즈 인근에 코흐드 요새 마을 건립 / 1218년에 시작된 비슬라 저지대 (마조비아) 대한 십자군 (마조비아 공 콘라트, 올리바 주교 크리스티안 주도)에 슐레지엔 공 하인리히와 브로츠와프 주교 가세. 여러 성채들 지어지거나 재건됨. 특히 프러시아 인들의 반격에 대한 방어막으로 헬름노 재차 요새화됨. 하지만 산술적 성공은 십자군이 귀국하면 터지는 반란으로 도로아미타불 / 몽골군이 장안 함락[188] 원군 요청 목적. 얼마후 프리드리히와도 회동[189]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 견제하려는 섭정 콘스탄티노스의 결정. 필리프, 대관식 앞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로 개종하고 교황 영향력으로부터 그 자주성 지켜낼 것을 맹세. 보에몽 4세, 교황특사 펠라지오의 반발에도 동의. 이로써 필리프는 공동 군주가 되어 룸 셀주크 군대 격파. 하지만 잦은 부재로 지지도 하락[190] 사실상 휴전 강요한 것. 비슷한 시기 보에몽 4세는 아르메니아 침공한 튀르크군 격파 / 한편 칭기즈 칸은 반란 일으킨 헤라트 주민 대학살[191] 알비 십자군의 '주적' 사망. 교황과 필리프 2세 모두 레몽 7세의 계승 승인 안함. 특히 후자는 이단을 이유로 영지가 왕령에 몰수되었다고 여김[192] 추정 날짜 (초가을). 튜튼기사단장 헤르만은 이미 출항[193] 장 드 브리엔, 교황에게 우투르메르 (레반트)에서 재정복된 영토는 예루살렘 왕국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수용됨. 이후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동의하자 후원자인 필리프 2세 방문 위해 프랑스 향함[194] 에스토니아인들이 리보니아 기사단에 반란, 탈린 제외한 영토 수복 / 시칠리아 함대가 제르바 섬 기습 점령하나 곧 격퇴됨 / 프러시아 인들이 마조비아 침공하여 교회에 방화. 공작 콘라트, 연공 바치며 무마시킴. 이후 일시적인 십자군 말고 영구적인 군사조직 모색 / 장 드 브리엔, 필리프 2세 방문. 하지만 필리프는 장이 튜튼기사단장 헤르만의 조언대로 후계자인 딸 이사벨을 프리드리히와 약혼시켰다는 말을 듣고 언짢아함 / 바이바르스 탄생[195] 그리고 프리드리히에게 복속하는 대가로 지원 얻어냄[196] 한편 아폰수 2세는 교회에 법적으로 미심적인 세금 부과했다가 교황에 의해 성무금지령 당했는데 산초 2세의 등극 이후 그 섭정의 노력으로 풀림[197] 장 드 브리엔, 루이 8세 대관식 참관[198] 베이루트의 장 드 이벨린이 키프로스의 섭정인 동생 필리프 방문. 이벨린 가문 행사로 필리프 아들들의 기사 서임식 축하하는 토너먼트 자리에서 이벨린 가와 나머지로 구성된 팀이 겨룸. 이벨린 가문 소속 투헝길의 상대였던 아모리 발라리가 그의 반칙을 지적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애초에 이벨린 가문에 원한이 있던 아모리는 다음날 동료들과 투헝길 덮쳐 불구 만듦. 이에 투헝길의 친척인 필리프가 복수 맹세하자 장이 개입해 발라리를 심문차 베이루트로 데려감. 이로써 키프로스 궁정 내에 이벨린 가문과 그 반대파의 당파가 양극화됨[199] 몽골군이 러시아 방면으로 떠난 틈읕 타 카즈빈, 라이, 하마단 등 수복. 주치가 장악한 호라산 두고 이라크 침공 / 프리드리히, 살레르노 대학 설립. 시칠리아의 무슬림 반란 진압하고 포로들을 남부 이탈리아 각지 (특히 루체라)에 이주시키며 기독교도들에게 개종 금지시키자 교회 측 불만 / 루이 8세, 랑그도크 원정 위해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자금 청구하나 너무 큰 액수에 거절됨 / 리보니아 기사단, 빌잔디를 본부로 정하고 에스토니아 통치 / 킬리키아의 셀레우키아 (실리프케)에 자리잡은 구호기사단, 아르메니아 섭정 콘스탄티노스 도와 룸 셀주크로부터 여러 성채 수복하게 해줌. 이에 자신감 얻은 콘스탄티노스는 안티오크와의 동맹 파기 / 무와히드 칼리파 압둘라 알 아딜이 마그렙 원정 간 사이 안달루스에서 친척 압둘라 알 바야시가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와 동맹하고 그의 군대 빌려 반란 / 연말. 아르메니아의 필리프, 아내 자벨과 킬리키아 왕관 들고 안티오크 향하다가 텔 함둔에서 사로잡힘. 섭정인 램프론의 콘스탄티노스는 필리프의 권력 뺴앗고 안티오크와의 동맹 필요없다며 시스에 투옥시킴 (룸 셀주크 측이 도왔다는 설도)[200] 아모리, 안전 귀로 보장 대가로 카르카손 항복. 이후 레몽 7세는 기존 영주의 아들 레몽 2세 복권시킴[201] 후자 압둘라는 무르시아 총독. 동생들인 코르도바의 이드리스, 말라가의 아부 무사, 그라나다의 아부 알 하산의 지지와 마라케쉬 셰이크들의 비밀 지지를 받음. 압둘라, 칼리파 알 아딜 칭하고 안달루스 군대와 지브롤터 도하해 아부 무함마드 압둘 와히드에 도전[202] 교황 호노리오 3세, 라틴 제국의 모든 영주들에게 출정 명령하고 프리드리히에게 900 마르크 원정비 지원 지시[203]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 1세가 티에리 드 발렝쿠르와 니콜로 드 마에부를 테살로니키 방면으로 파견하고 니케아에서 망명해온 알렉시오스와 이사키오스에게 군대 주어 비티니아로 파견하나 후자는 요안니스 3세의 니케아 군대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장님됨. 전자 역시 포위 풀고 후퇴하다가 에피로스 군대의 습격 받아 대패.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됨. 기세를 타고 진격한 요안니스 3세는 아시아에서 라틴 제국군 일소.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로 축소시킴. 유럽까지 건너갔다는 혹은 1223년에 벌어졌다는 기록도. 어쨋든 그 여파로 세레스 공격하던 군대까지 철수, 에피로스 군대가 트라키아 가로질러 추격[204] 에스토니아 인들의 대반란이 진압된 이후 공격. 한편 에스토니아의 이웃인 노브고로드 공국에서 가톨릭 진출 꺼리며 용병 파견한 것[205] 프랑스의 왕비이자 베렝가리아의 이모인 블랑슈의 설득이 있었다고 함. 일설에 따르면 알폰소 9세는 장에게 딸과 더불어 왕국의 세습권을 주었다고[206] 이후 이탈리아로 남하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2년 연기해 달라고 청함[207] 힌타타 부족의 아부 자카리야와 틴말의 유수프 이븐 알리가 칼리파 군대에 앞서 마라케쉬 공격하고 칼리파의 이름으로 압둘 왈리드를 폐위. 재상인 알 자미와 그 일당 숙청됨. 압둘 와히드는 포로 상태에서 목졸려 살해됨. 하지만 모로코의 현지 군벌들은 안달루스 군대에 반발, 모로코의 중앙 정부 곧 붕괴됨. 또 전임 칼리파 유수프의 동생 야흐야 알 무타심이 반란 일으키며 내전 이어짐[208] 이후 두번째이자 마지막 군주 데메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궁정으로 망명하여 6차 십자군 동행하나 1230년 아말피에서 사망. 테살로니카 명목상 지배권은 프리드리히에게로. 한편 알렉시오스 3세가 지목했던 (하지만 십자군에 의해 쫓겨나 망명 생활하던) 테살로니카 대주교 콘스탄티노스 메소포타미테스가 돌아와 복권됨. 동로마 제국 제2의 도시가 정교회로 귀환한 것. 이후 의기양양해진 테오도로스는 황제 전용인 자주색 신발 신는 등의 행보 보임[209] 테오도로스, 모시노폴리스와 카발라, 디디모티코 등 점령. 이에 니케아 군대가 시민들의 요청으로 아드리아노폴리스 점령. 테오도로스, 곧장 아드리아노폴리스 포위하여 니케아 수비대 항복받음. 선박 제공하여 소아시아 보내줌. 이로써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방으로 축소됨. 후방 안정시키기 위해 동생 마누일과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의 서녀 마리아와의 결혼 약속하며 동맹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북쪽 70km 떨어진 비즈예 지나 진군. 그 영주인 미래의 섭정이자 4차 십자군의 원로 앙슈가 도전해오자 격파, 앙슈 중상 입음. 다만 테살로니카 십자군의 상륙 소식에 회군. 어차피 공성 병기도 없었음 / 니케아 제국, 키오스와 레스보스 수복. 요안니스 3세, 갈리폴리 건너편 람프사코스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사촌 안드로니코스 네스톤고스이사키오스 네스톤고스가 반란 일으키자 회군하여 진압함. 라틴 제국의 로베르 1세, 칼케돈 제외한 소아시아 영토 니케아 제국령 인정하며 그와 동맹. (자신이 거절한 거절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에우도키아와 앙슈 결혼 / 아테네 공 오도, 프랑스 귀국. 조카 기 1세 계승[210] 튜튼 기사단, 트란실바니아에서 축출됨 / 교황 호노리오 3세, 루이 8세의 랑그도크 원정 제안 승인. 프랑스 왕립법원, 레몽 7세 폐위 선언하고 아모리 드 몽포르를 툴루즈의 적법한 백작으로 승인 / 타브리즈에 자리잡은 잘랄 웃 딘, 이웃의 조지아 침공. 가르니에서 여왕 루사단의 군대 격파. 트빌리시 점령하고 쿠르 협곡 병합. 조지아, 쿠타이시로 천도 / 도브진 기사단 창단 (1228년 설도). 마조비아 공 콘라트와 올리비아 주교 크리스티안이 14명의 기사들에게 프러시아와의 국경 성채 부여한 것에서 기원. 공작 콘라트 봉신으로 헬름노-쿨머란트 영토 다스리고 지키기로 / 봄. 카스티야 군대가 무와히드 측에 반란 일으킨 바에자의 아미르 압둘라 알 바야시를 도와 과달카비르 협곡 저지대 침공 / 키프로스 섭정 필리프 드 이벨린, 프리드리히의 야욕 경계하여 8세의 앙리 1세 대관식 거행. 15세 되는 1232년 섭정 소멸하기로. 이에 공동 섭정인 모후 알리스 반발, 그해 결혼한 새남편인 보에몽 4세의 아들 보에몽에게 도움 청하고 그를 키프로스의 실권자로 앉히려 했으나 실패하자 반이벨린 파의 아모리 발라리 소환. 하지만 그 역시 이벨린 당파의 기욤 데 라 투르에 속아 마상시합에서 위협받자 트리폴리로 도주. 프리드리히에게 이벨린 가문 비난 편지[211] 추정시기 (연초), 이후 콘스탄티노스가 성채 포위, 구호기사단 협박. 결국 구호기사단은 양심의 가책 덜기 위해 자벨 있는 채로 성채를 콘스탄티노스에게 매각. 한편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의 아들 필리프 석방하게 해달라는 부탁으로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킬리키아 침공하나 콘스탄티노스는 필리프가 아직 살아있는 척 위장하며 목숨으로 협박해 철수시킴. 이후 보에몽에게 직접 와서 필리프 데려가라 청하고 막후에서 알레포 섭정 시하브 앗 딘 토그릴에게 바그라스 공격하게 하여 결국 돌아가게 만듦. 보에몽, 필리프의 죽음 전해듣고 귀환[212] 테오도로스, 황제 칭하기 위해 자신이 복권시켜준 대주교 콘스탄티노스에게 대관식 의뢰했으나 그는 니케아에 망명 중인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에 충성한다며 거부, 이에 테오도로스와 동생 콘스탄티노스가 협박하자 차라리 다시 떠돌이 생활 자처. 결국 대주교 대신 자신을 지지하는 나우팍토스 주교 요안니스 아포카우코스 휘하 주교들 소집한 것. 오흐리드 대주교 데메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에게 테살로니카 대주교 대신 대관식 주관하도록 함[213] 성십자가 성당에서의 모의 결혼식 이후 축하 행사. 이후 이사벨은 친척인 시돈의 발리앙과 티레 대주교 시몽 대동하고 키프로스 거쳐 브린디시 향함[214] 테살로니카 십자군은 파가세틱 만의 알미로스 상륙하나 이질 퍼져 다수 병사하고 나머지 돌아감. 그리스 인들이 식수원에 독을 풀어놓은 것에 의한 것이었다고도[215] 이후 포르투갈과 레온 역시 남진. 레온 군대는 카세레스의 저항에 부딪히나 포르투갈 군대는 코르도바 교외 당도. 알 아딜은 군대 부족해 성 안에 머뭄. 민병대가 포르투갈 군대의 현지 농촌 약탈을 막고자 출정하나 학살됨. 알 바야시, 바뇨스 데 라 엔시나와 살바티에라, 카필라 등의 중요한 국경 요새들을 카스티야 측에 (영원히) 넘겨줌. 한편 안달루스 되찾고자 칼리파 알 아딜이 귀환, 모로코는 그와 마라케쉬의 야흐야 알 무타심 사이에 분단됨[216] 또한 본거지인 바에자 시타델에 카스티야 수비대 주둔 허가[217] 이후 프리드리히는 장인 장 기다리지 않고 이사벨과 신혼여행 떠남. 이에 장이 따라오자 다툼, 이사벨은 부친에게 프리드리히가 그녀의 사촌을 유혹했다고 토로함. 장, 프리드리히에게 예루살렘 왕국 섭정직 요청하나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후보를 임명할 것이라며 거절하고 필리프 2세가 예루살렘 왕국에 남긴 보물을 장으로부터 압수하고 아크레로 보냄. 이에 장은 로마로 향해 교황에게 탄원[218]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 복원됨. 하지만 카스티야는 여전히 안두자와 마르토스 등 영유[219] 이에 시리아의 알 무아잠이 복속하고 자지라의 동생 알 아슈라프 공격 의뢰. 이에 잘랄 웃 딘이 아흘라트 포위 /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 마테오 사망. / 프리드리히의 예루살렘 왕국 섭정인 아체라 백작 토마스 다퀴노 아크레 당도. 그의 열정과 중앙집권화 시도에 현지 제후들 반발 / 아모리 드 몽포르, 공식적으로 툴루즈 백작위 루이 8세에 양도. 루이, 차남 알퐁스에게 하사. 이에 레몽 7세는 푸아투 수복 노리던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동맹 / 카타리파, 피외스 공의회에서 라제 주교구 신설[220] 1225년 11월이라고도. 4차 라테라노 공의회 결과 어긴 것. 임박한 루이 8세의 십자군 비용으로 프랑스 교회 재산 1/10 제공[221] 헬름노, 마조비아 영토와 프러시아에서 정복된 모든 영토 귀속되기로. (다만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으로써, 이단 프러시아 전부의 개종과 정복 목표) 튜튼기사단장 헤르만과 올리바 주교 크리스티안의 제안 성공. 트란실바니아 대신 폴란드-프러시아 국경 지대의 발트 영토 얻음[222] 하이톤 1세. 하지만 부친의 꼭두각시. 분노한 자벨은 (당시 9세) 저항으로 몇년간 그와 부부 노릇 거부[223] 9월 9일이라는 기록도[224] 11월 3일이라는 기록도. 카르카손 태수 움베르 드 보죄가 프랑스 왕실의 새로운 사령관 되어 랑그도크 십자군 이어나감[225] 이에 예루살렘의 섭정 토마스 다퀴노가 팔레르모 주교 대동하고 카이로 방문. 알 카밀, 평화 대가로 예루살렘 양도 약속. (1226년이라고도) 하지만 사절단이 약속 이행 위해 다마스쿠스 당도하자 알 무아잠은 이를 거부. 놀란 알 카밀은 파크르 앗 딘을 시칠리아로 파견해 알 무아잠이 이집트 공격할 것을 대비해 프리드리히와의 동맹 모색[226] 1226년이라고도. 로베르 1세, 한 부르고뉴 기사의 약혼녀 (보두앵 드 누빌의 딸) 빼앗아 비밀 결혼. 이후 그 기사와 동료들이 그녀와 모친이 머물던 저택 (혹은 궁전) 습격해 그들의 귀와 코 잘라 바다에 버림. 이에 로베르 1세가 반격하려 했으나 제후들마저 기사들 편들자 도피. 로마 향함 / 카스티야, 바에자 점령 / 낙소스 공 마르코 사누도 사망. 아들 안젤로 계승 / 키프로스의 섭정 필리프 드 이벨린 사망. 그의 형 베이루트 영주 장 드 이벨린 계승 / 레몽 7세, 제후들의 반란 힘입어 툴루즈 백국 일부 수복하나 반란군은 곧 프랑스 군대에 재차 패함[227]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228] 그리고 페루자 시민들에게 그를 포데스타로 선출 지시[229] 기존 십자군들과 달리 대부분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최강의 전력. 다만 여름의 역병으로 일부 사망한 후의 숫자이다.[230] 프리드리히, 말라리아 치료하기 위해 향한 포추올리의 온천에서 아나니의 교황에게 사절 보내 출정 연기 해명하고 나으면 바로 출정할 것이라 통보했으나 또다른 핑계라 여긴 교황이 파문 때림[231] 이드리시, 마라케쉬의 야흐야 공격 위해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에게 도움 청함[232] 11월 11일이라는 기록도[233] 1197년 아이유브 측이 성벽 파괴하고 주민들 소개시킨 후로 버려진 상태였음. 프리드리히 기다리다가 시돈 향하여 재차 요새화 하기로. 다만 기존 성벽 재건하기엔 인원 부족하여 섬에 작은 성채 건설[234] 비록 툴루즈 대한 공격은 실패했으나 전쟁 지속 능력을 상실한 레몽 7세는 프랑스 섭정 블랑슈에게 협상 요청. 알비 자작 레몽 2세, 아라곤 망명 / 베르트랑 드 테지, 구호기사단장 취임[235]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아센, 자신의 딸 헬레네와 보두앵 결혼시키고 자신의 섭정 맡겠다고 제안하나 바일리 노장 드 투시에 의해 소집된 귀족회의는 '프랑크인'이 맡아야 한다며 거절[236] 프리드리히의 재정 지원. 6400 십자군 베잔트는 금 25kg 에 해당. 장 드 아미달라로부터 구입[237] 5월 4일이라고도. 향년 16세. 이후 프리드리히는 이전에 장 드 브리엔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후계자 대신 국왕직 유지[238] 전 테살로니카 국왕 데메트르 참석. 프리드리히, 키프로스의 전전 군주인 애므리가 자신의 부친 하인리히 6세에게 봉신 서약한 것을 근거로 키프로스 소유권 주장. 국왕 앙리 1세와 섭정 장 드 이벨린 초청. 장 드 이벨린과 그 아들들을 만찬에 초대하고 석상에서 체포. 프리드리히, 장에게 베이루트 영지와 위그 1세 사후의 키프로스 세수 요구하나 그는 베이루트는 이복누이 이사벨 1세로부터 적법히 주어진 것이고 귀족회의를 통해서 그 영지를 지킬 것이며 키프로스의 세수는 위그의 부인이자 섭정인 알리스에게 주어졌다며 변호. 이에 프리드리히는 기존 주장 거두고 장의 아들들의 인질로 십자군 대동하고 그에게 자신을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과 키프로스의 주군으로 인정하게 한 후 석방함[239] 프리드리히는 소수의 병력만 대동한 채로 키프로스 당도. 그곳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 소집하자 반이벨린 당파인 비블로스 영주인 기 1세 드 엠브리아코와 시돈의 영주 발리앙 그레니에 등이 합류. 그들이 제공한 군대와 합세한 프리드리히는 니코시아 진군, 도중에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와 합류. 이에 장 드 이벨린은 니코시아 포기하고 동북쪽의 성 힐라리온 성채에서 농성. 포위 장기화될 가능성에 프리드리히는 장의 조카이기도 한 발리앙 그레니에의 중재안 수용. 자신이 임명한 반이벨린 당파의 대신들 (아모리 발라리 포함)의 보좌 하에 알리스의 섭정 승인하고 아크레 귀족회의에서 장이 베이루트에 대한 자신의 권리 변호할 기회 부여. 인질로 잡혀있던 그의 아들들 석방됨. 한편 안티오크와 트리폴리 대한 봉신서약 요구받은 보에몽 4세는 병 핑계로 안티오크 귀환[240] 무와히드 칼리파 이드리시 알 마문이 카스티야 동맹군 1만 2천과 안달루스 떠나 모로코 향함. 이로써 안달루스에서의 무와히드 패권 무너지고 무르시아 총독이자 사라고사 타이파의 후디드 왕조의 후예인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가 무와히드 칼리파 대신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에 충성 맹세하며 독립. 같은 해 혹은 이듬해에 발렌시아와 마요르카 역시 뒤따름[241] 무슬림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시르에 의하면 이때 티레 부근의 시아파 민병대가 프리드리히의 십자군에 가담했다고 함[242] 자신의 도착 알리고 팔레스타인 할양 요구하나 알 카밀은 그런다면 전 이슬람 세계가 자신의 적이 될 것이라며 불가하다고 답변. 프리드리히의 잠재적 동맹이 될 수 있는 다마스쿠스의 다우드 견제, 협상 지연하는 동안 다마스쿠스 함락시키려 함[243] 알 카밀, 프리드리히에게 행군 도중 십자군이 약탈한 아이유브령 마을들에 대한 보상 지불하지 않으면 협상 파토내겠다고 위협. 이에 프리드리히가 배상금 납부, 자파 재차 요새화. 한편 다우드가 나블루스로 출정하여 알 카밀 측과 이집트와의 보급로 끊으려 시도[244] 발렌시아와 마요르카 두고 고민했는데 카탈루냐 인들의 주장대로 마요르카로 결정. 이에 아라곤 인들이 반발[245] 연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데스타였던 자코모 티에폴로, 베네치아의 도제로 선출됨 / 무와히드 칼리파 알 마문, 마침내 야흐야로부터 마라케쉬 점령. 민중 지지 얻기 위해 기존 이븐 투마르트 마흐디 사상이나 쉬아 사상 대신 순니 말리키 법학파 채택. 하지만 대다수 귀족들의 반발, 독립해 나가기도 / 가을. 키프로스 섭정 알리스, 아크레 당도하여 이사벨 2세 사후 1년 1개월간 그 후계자인 콘라트가 오지 않았음으로 다음으로 상속권 있는 자신의 왕위 주장하나 귀족들은 콘라트의 나이가 어려 상관 없다며 거절. 프리드리히에게 해명하는 사절단 파견[246] 한편 알 아슈라프는 잘랄 웃 딘의 위협에 자지라 영지로 귀환 고려. 이에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와의 협상 박차 가함[247] 파크르 앗 딘과 아르빌의 아미르 살라흐 앗 딘이 알 카밀 대신 파견되어 서명.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서부 (토론) 일대와 해안까지 이어지는 회랑, 그리고 분쟁 대상이던 시돈 외곽 영토 할양됨. 다만 알 아크사 (성전산)는 무슬림 소유로 남으며 반환지 내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자치 및 예루살렘의 통행 자유 보장됨. 예루살렘의 재요새화는 허가되나 예루살렘 왕국이 아닌 프리드리히 본인의 재량으로만 제한됨 (프리드리히의 섭정 끝나면 같이 만료되는 규정). 5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 포로들 석방됨. 율리우스력으론 10년, 히즈리력으론 10년 5개월 휴전. 한편 휴전은 안티오크나 트리폴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음. 기사단과 제후들은 새 영토가 지키기 어렵고 예루살렘을 '이교도'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 성직자들 역시 이교도들과의 타협에 불만, 총대주교 제라르는 조약 승인하길 거부하고 이슬람과의 예루살렘 공유에 반발. 주민들에게 프리드리히 들여보내면 성무금지령 내리겠다고 선언, 카이사레아 대주교 파견. 다마스쿠스의 앗 나시르 다우드 역시 애도 기간 선포[248] 나블루스 카디 샴스 앗 딘이 열쇠 바침. 입성 후 구호기사단 성채에 머뭄, 시칠리아의 무슬림 용병들 대동[249] 국왕 대관식에 튜튼기사단 제외한 현지 제후들 모두 반발. 프리드리히, 지지해준 대가로 튜튼기사단에게 다윗 탑 옆의 왕궁 제공. 한편 구호기사단장과 템플기사단의 지휘관이 프리드리히의 예루살렘 거처에서 열린 회의 참가해 도시 방어 논의. 다윗 탑과 성 스테파노스 (다마스쿠스) 성문 요새화하기로. 한편 시칠리아 무슬림 등을 대동하고 알 아크사 방문. 무슬림측 허가 없이 기독교 성직자의 방문 금지[250] 4월 23일이라는 기록도. 프리드리히가 피사 상인들에게 특혜 준 것에 대한 반발. 한편 제후들은 프리드리히의 기습 대관식 규탄, 왕으로 인정 거부[251] 정확히는 영토 현상태 유지. 다만 레몽 7세가 수복하지 못한 가문의 발상지인 생 질 등 론 강 유역은 프랑스 왕령지에 통합됨. 이단 척결 합의, 죽을 때까지 백작위 유지하고 알퐁스와 잔느의 자손 없을 시 툴루즈 나머지 영지의 왕령지 귀환이 조건이었는데 실제로 그렇게됨. 알비 십자군의 종결[252] 이에 템플기사단장의 성채와 총대주교 관저를 군대로 에워싸고 기사단장과 장 드 이벨린을 이탈리아에 삼엄한 감시 하에 연금시킬까 고민함. 그러다 교황이 장 드 브리엔에게 아풀리아 침공 지시했다는 소식에 귀국 결정[253] 오도 드 몽벨리아르를 대원수로 임명, 튜튼기사단에 몽포르 성채 하사[254] 그 전에 프드리히의 일행이 항구로 향하자 아크레 군중들이 동물 내장 투척하며 시위, 추격해옴. 이에 새벽 틈타 떠남[255] 한편 친제국파 섭정들의 위치 공고히함. 한편 섭정들은 프리드리히에게 약속한 1만 마르크 마련하기 위해 추방된 이벨린파 재산 몰수. 한편 연대기 작가이자 장 드 이벨린의 친구인 필리프 드 노바라가 두 당파간의 평화 제안, 섭정들의 초대에 응하나 사로잡힐 뻔하고 구호기사단 본부로 피신. 이후 아크레의 장에게 도움 청함[256] 기독교도들은 다윗 탑으로 피신, 예루살렘 수비대장 하이파의 르노가 아크레에 도움 청함. 이후 섭정인시돈의 발리앙과 그라니어가 원군 이끌고 당도해 사태 수습. 이후 총대주교 제라르가 임시적이란 조건 하에 예루살렘 귀환. 한편 갈릴리의 토론과 몽포르 성채 재건되나 위태로움[257] 장 드 이벨린, 필립 드 노바라와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승리. 반이벨린파 바일리들은 키레니아와 칸타라 요새에서 저항. 키레니아는 1230년 초엽에 함락되었지만 칸타라는 바일리 중 한명인 고뱅 드 셰니시의 지휘 하에 항전하나 결국 함락되고 장 드 이벨린의 외조카인 카이사레아 영주 장 드 브리스바에 의해 살해됨. 반이벨린파가 숨은 산지 역시 봉쇄됨[258] 본래 부친 알 만수르의 후계자였으나 5차 십자군 때 이집트에서 알 카밀 돕던 중 동생 앗 나시르가 먼저 즉위해버림. 텔 알 아줄 회담 결과로 복권됨[259] 구에린, 구호기사단장 등극 / 보스라의 아미르 앗 자피르 사망 / 테살로니카의 전 군주 데메테르, 아말피에서 사망. 프리드리히에게 권리 넘김[260] 4월이라는 기록도. 겨우 도망친 테오도로스의 동생 마누일이 테살로니카에서 황제 칭함. 이반 아센,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북부 휩쓸고 디라키움까지 점령. 마누일, 이반 아센의 사위 자격으로 테살로니카 일대만 유지. 다른 동생 콘스탄티노스는 아르타 거점으로 에피로스 남부와 코르푸 유지[261] 3월 19일이라는 기록도[262] 정확힌 헬름노 영지와 미래의 동프러시아 정복지. 다만 소유권을 두고 후에 갈등이 발생한다. 기사단 측은 완전한 지배권 부여, 즉 황제와 교황에게만 충성하는 것으로 해석했고 폴란드 측은 자신에게도 봉신이라 여긴 것.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콘라트가 그들을 초대하며 프러시아와 싸우는 대가로 헬름노 제공했고 프러시아 이교도들로부터 정복한 영토를 교황의 봉토로써 지배한다는 기사단측 조약문 승인[263] 마야파리킨의 아미르이자 알 카밀의 동생 알 무자파르 가지 지휘.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아흘라트 수복[264]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 제라르에게 예루살렘 대한 성무금지령 철회 및 반환지에 성직자 배치 지시. 6개월내로 이루어짐[265] 토룬 근처 포겔장 성채가 첫 거점. 이후 30여명의 기사들이 더 도착하며 정복 개시. 다만 대다수의 기사단은 우투르메르에 남아 있음[266] 알레포 영토인 자블라 약탈, 포로 챙기자 알레포의 아타베그 시하브 앗 딘이 한 아미르에게 그 영지 하사하며 군대와 파견. 기사단들 큰 피해입고 패배, 약탈물과 포로 돌려주고 휴전 제안 수용[267] 초대 에피로스 친왕 미카일 앙겔로스의 아들 미카일 2세, 모레아에서의 유배 생활 접고 에피로스 귀환. 숙부 콘스탄티노스로부터 아르타 접수. 테살로니카의 마누일에 복속하는 대가로 친왕직위 받음 / 무함마드 알 갈립 이븐 이븐 유수프 알 아흐마르, 아르주나 장악하고 자립 (나스르 왕조). 1230년이라고도.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이단심문관 제도 제정 / 레온-카스티야, 카촐라 점령 / 키프로스에서 라틴 교회 인정하기 거부한 정교회 사제 13명 살해됨[268] 1230년이란 기록도.[269] 7월 말이라는 기록도[270] 초르마칸의 몽골군이 서부 이란 침공하자 대부분의 도시들은 학살 대신 항복 선택. 이에 근거지 상실한 잘랄 웃 딘은 아르메니아 떠돌다 룸 셀주크 영지인 만지케르트 공격하나 카이쿠바드 1세가 속국인 트라브존 등과의 연합군 꾸려 공격해와 격퇴됨. 마야파리킨의 아미르 시하브 앗 딘 가지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에에 병력 빼앗기고 도주하던 중 호라즘 군에게 형제 잃은 쿠르드 인에게 살해됨. 이후 그의 부장인 키르칸이 남은 병력과 마야파리킨과 아흘라트의 아이유브 아미르에게 귀순[271] 600 기사, 100 종자, 700 보병, 1천 수병. 33척 규모. 교황청에겐 새로운 십자군 편성해 보낸다고 말함. 한편 이벨린 가문의 이탈리아 첩보원이 아크레로 향하여 경고하자 장 드 이벨린이 키프로스 당도해 방어 준비. 자신은 앙리 1세와 키티온에 주둔하고 아들 발리앙에게 리마솔 수비 맡김[272] 필랑기에리, 키프로스 당도. 사절 파견, (황제의 명으로) 앙리 1세에게 당숙 장의 해임 및 추방 지시. 하지만 귀족 회의에서 앙리가 자신은 충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며 명령 거부. 이에 애므리 발라리가 프리드리히 편들며 반발하나 린치당할뻔하고 오히려 장이 구해줌. 결국 필랑기에리는 장의 본 영지인 베이루트 공격 나섬. 장이 대부분 군대와 키프로스 방어 나섰기에 시타델에만 군대 주둔, 주교가 항복.[273] 이후 아퀼레이아에서 따로 만남[274] 추정 시기. 필랑기에리, 귀족회의 열어 자신을 바일리로 임명하고 장의 영지 압수한다는 황명 선포. 시돈의 발리앙과 오도 드 몽벨리아르 휘하 제후들, 전자는 수용하나 후자엔 귀족회의 거치지 않았다며 (소유자에게 변호 기회 주어야 하는게 원칙) 반발. 아크레 상인들이 시민들과 폭동 일으키고 12명의 집정관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처럼 코뮌 설립. 이후 장을 시장으로 선출. 다만 피사 상인들과 튜튼기사단은 제국파 가담, 다른 기사단들과 종교계는 중립[275]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 조지아 침공. 여왕 루사단 위협해 동맹 맺게 하고 아들 카이쿠스라우와 그녀의 딸 결혼시켜 사돈 맺음 /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 예루살렘 총대주교 제라르의 중재 하에 구호기사단과 화해. 압수했던 재산 돌려줌, 대신 레몽 루벤이 그들에게 했던 약속에 대한 주장 포기. 제라르, 보에몽 대한 파문 철회[276] 코르푸 주교 바르다네스와 테살로니카 황제 마누일의 요청에 앙카라 주교 크리스토포로스가 파견됨. 바르다네스 주관하에 열린 테살로니카 종교회의에서 그는 재차 니케아의 수위권 인정하자고 주장했으나 오흐리드 대주교 코마티아노스가 거부. 한편 니케아의 총대주교 제르마노 2세, 순례 후 돌아가는 수사들을 통해 교황에게 가톨릭의 잔혹성을 규탄하는 서신 전달[277] 반란 방지 위해 데려간 애므리 발라리, 자신을 따르는 80여명의 기사들과 따로 상륙. 필랑기에리가 보낸 선박 승선해 티레의 그와 합류. 필랑기에리, 그들을 재차 베이루트 수비대로 파견하나 장의 기습을 막지 못함[278] 제후들에게 도움 청하자 오직 카이사레아의 장이 원군과 합류, 필랑기에리의 동생 로타르가 재차 베이루트 포위했음에도 필랑기에리의 거점인 티레 향해 남하. 안티오크 공 보에몽 4세의 지지 얻기 위해 그에게도 사절 파견, 그의 아들 보에몽과 앙리 1세의 동생 이사벨 결혼과 동맹 제안하나 거절됨. 한편 섭정인 시돈의 발리앙과 베르너 (가르니어) 등이 협상 주선하나 필랑기에리가 영지 압수 고집하여 무산됨, 그리고 장의 예측대로 로타르는 곧 필랑기에리의 소환에 베이루트 공격 포기하고 티레의 본군과 합류[279] 장이 이번엔 레반트에 병력 집중시킨 (그리고 앙리 1세까지 그와 합류해 자리 비운) 틈에 공격시킨 것. 성 힐라리온과 부파벤토 성채만이 이벨린 가문 수중에 남음. 앙리 1세의 여동생들은 후자로 피신해 농성, 장의 며느리인 에시브 (키프로스의 전 섭정 고티에 드 몽벨리아르의 딸이자 발리앙의 비밀 아내)가 수도사로 변장해 식량 보급. 이후 트리폴리의 발리앙에게 구원 요청하나 보에몽 4세가 항구 봉쇄하여 전달되지 못함[280] 이벨린 가문이 제노바 측에 키프로스에서의 무역 특혜 약속한 결과[281] 교황 특사 안티오크 총대주교 알베르가 티레 당도해 이벨린 측과 협상 제안하자 그에 응한 것. 하지만 필랑기에리는 이에 진지하지 않았고 단지 시간벌이 수단으로만 여김[282] 그들은 하이메 1세 본인에게만 항복한다고 하여 재차 그가 방문한 것[283] 3일 새벽이라는 기록도. 장 드 이벨린, 교황 특사 알베르의 제안에 협상 승인 위해 아크레 향함. 정예병 대동하고 세 아들 (보두앵, 기, 위그)과 조카 장, 앙리 1세 남긴 채로 떠남. 그들은 협상 기간의 휴전을 믿고 경계 태만한 채로 있었는데 밤을 틈타 제국군이 22척의 함대로 해변 당도해 기습해오자 대패. 앙리 1세는 거의 헐벗은 채로 말타고 도주, 아크레 당도해 패전보 알림. 이에 장이 출정, 도착할 때까지 그의 아들들이 언덕에서 항전. 24명의 키프로스 기사 사로잡힘. 제국군이 많은 약탈물과 귀환하자 필랑기에리는 티레 길목에 군대 배치하고 키프로스 전선 합류[284] 장의 조카들인 카이사레아 영주 장과 자파 영주 장 드 이벨린은 구호/템플기사단에게 영지 일부 매각하여 원정비 보탬. 장 드 이벨린, 시민들과 총대주교 제라르의 승인 하에 아크레 항구의 제국 함대 압수하고 승전 후 키프로스 내의 영지 준다는 조건으로 선박과 군대 모아 카셀 임베르 전투 후 이탈한 병력 상쇄. 하지만 시돈에서 증원받았음에도 230여명에 불과[285] 새벽무렵 일단의 키프로스 군인들이 항구 통해 도시 잠입해 앙리 1세 만세 외치자 총공격으로 착각한 롬바르드 인들은 함대에 불지르고 니코시아 향해 도주. 이후 필리프 드 노바라가 탑에 남아있는 병력과 협상, 그 대장에게 영지 주는 대가로 항복시킴. 이틀 후 필리프은 니코시아의 관문인 칸타라로 향하여 항복 제안하나 거절됨[286] 제노바 측에 관세 면제와 주요 도시 (니코시아, 파마구스타, 파포스)에 자치구역 내어주는 대가로 동맹. 살인, 강간, 반역 혐의 외에는 치외법권 적용. 대표단과 국왕 상호 맹세, 이후 한세기 이상 제노바의 키프로스 영향력 이어지는 단초. 제노바 함대 도움으로 필랑기에리의 키레니아 포위[287] 롬바르드 인들은 이벨린 군대의 식량 차단하기 위해 니코시아로 후퇴하며 그 노상의 밭과 과수원, 우물 등을 파괴, 이에 현지인들은 필랑기에리가 섬 지켜줄 생각 없다 여기고 이벨린 측 도와줌. 장 드 이벨린, 니코시아 당도하나 비어 있는 것을 의심하여 창고의 보급품만 챙기고 성밖에 주둔. 이후 롬바르드 군대가 다가오자 전투. 기병대간의 격돌로 막상막하이던 전투 후반부에 아그리디 마을의 60명 민병대가 이벨린 군대 편에 합류하자 결정됨[288] 포위 도중 앙리 1세의 약혼녀인 몽페라토의 알리스가 키레니아 당도하나 장기화된 포위 도중 병사, 제노바 함대가 해상 봉쇄해오자 필랑기에리와 애므리 발라리는 티레로 도피. 부관 필리프 셰나흐에게 지휘 맡김. 한편 대세가 이벨린 가문 쪽으로 기울자 안티오크 공 보에몽이 입장을 바꿔 장의 동맹 및 아들 장과 앙리의 여동생 이사벨라와의 결혼 제안 수용[289] 10월 7일이라는 기록도. 마라케쉬의 야흐야가 자신을 칼리파로 임명해 줄 것을 권했으나 셰이크들이 거절. 한편 하프스 왕조는 새 칼리파 승인 거부[290] 자칭 1만 대군 / 카스티야 군대가 우베다 점령. 무르시아 토후 무함마드, 코르도바와 세비야 대한 공격 피하고 군대 재건하기 위해 휴전 합의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시몽 사망, 1년간 공위 1232년 초라는 기록도. 1234년 교황이 선임한 스폴레토 주교 니콜로 델라 포르타 계승 / 몽세귀르의 영주인 레몽 드 페레이유, 생존하는 랑그도크의 카타리파 신도들을 자신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초대 /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 알 카밀과 알 아슈라프의 아이유브 군대 격파[291] 프리드리히, 키프로스에서 그의 바일리들이 축출되었다는 비보에 로마 방문 중이던 시돈 주교를 통해 티레에 필랑기에리 해임 소식 전함. 이에 필랑기에리는 그의 동료들과 시칠리아 궁정 귀환, 프리드리히의 친구이자 제후들로부터 그와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의심받는 필립 마우구스텔이 제국 특사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됨[292] 장 드 이벨린, 필립의 아크레 당도 소식에 역시 그로 향하여 당파 모아 취임식 방해. 필립이 성 십자가 성당에서 취임 선서하려 할 때에 장이 조카인 카이사레아 영주 장이 그의 임명이 귀족회의의 승인을 받지 않았음으로 불법이라 비난. 이후 논쟁 이어지던 중에 성당의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코뮌의 군중들이 몰려와 바일리인 시돈의 발리앙과 오도 드 몽벨리아르 등을 린치하려 함. 결국 필립 마우구스텔은 제국군 주둔하는 티레로 도주해 프리드리히의 이름으로 통치. 장 드 이벨린, 시장으로서 아크레 통치. 한편 해명 위해 교황에게 사절 파견됨. 튜튼 기사단장 헤르만은 거절될 것이라 예상[293] John의 프랑스식, 비잔틴식, 불가리아식 발음이 각각 장, 요안니스, 그리고 이반이다. 장 드 브리엔, 요안니스 3세, 이반 아센 2세이며 셋 모두 황제 칭호를 쓴다.[294] 알 카밀과 알 아슈라프, 룸 셀주크의 타우루스 수비를 뚫지 못하자 아르투크 왕조에 반기를 든 카르푸트 (엘라지) 점령하나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의 반격으로 철수 / 포르투갈의 산초 2세, 메르톨라 점령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보스니아 대한 십자군 선포 /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 프리드리히가 반란, 롬바르드 동맹과 연합.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황제 지지 / 추정 시기. 아르슬란샤 1세의 아르메니아인 맘루크 출신 모술의 아타베그 바드르 앗 딘 룰루, 장기 왕조의 마지막 아미르 나시르 앗 딘 마흐무드 살해하고 집권.[295] 2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와 2명의 도미니코회 수사로 구성됨. 요안니스의 환영, 니케아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 대한 권리 인정해주면 교황 수위권 인정할 의향 있다고 하자 수사들 역시 교황의 긍정적 답변 시사. 이후 수사들은 피폐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나 장 드 브리엔은 공의회 참석 이유로 1년 휴전 제시하며 얼버무림.[296] 요안니스 3세가 가장 좋아하는 스미르나 인근 궁전에서 열림. 요안니스, 사절단에게 이스트 없는 빵 사용하는 대신 필리오케 포기 제안하나 그들은 거절하고 일찍 떠나버려 결렬됨[297] 4차 십자군의 초창기 지도자였으나 요절한 테오발드 3세와 나바라 공주 블랑슈 사이의 아들[298] 9-10월이란 기록도. 휴전 만료 시기인 1239년 7월 성지 당도하도록.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게 설교 맡김[299] 연초 무렵 동맹 체결. 요안니스의 13세 아들 테오도로스와 이반 아센의 10세 딸 헬레나와 람프사코스에서 총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주례 하에 결혼. 이후 갈리폴리의 베네치아 기지 점령하고 트라키아 상륙, 필리포폴리스 향해 진군. 불가리아 군은 육상, 니케아 군대는 수륙 양면으로 포위. 장 드 브리엔, 160명의 기사들과 성벽 수비. 이후 그의 요청대로 베네치아 함대 개입, 니케아 함대 격퇴[300] 그들의 본부 도브진은 마조비아 공 콘라트에게 반환됨 /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 에데사와 하란 점령. 가을 무렵 알 카밀, 시리아 연합군과 출정해 모두 수복. 룸 셀주크 측에 협조한 아르투크 왕조의 마르딘 공격하려 했으나 연말 무렵 몽골군이 신자르에 이르렀다는 첩보에 철수 /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아크레에 라벤나 대주교를 특사로 파견해 섭정 프리드리히의 지시 따를 것을 종용하나 거절됨. 코뮌은 지오프리 드 르 투를 파견해 변론 / 테살로니카의 마누일, 황제 대관식 거행[301] 추정 시기. 늦여름[302] 벨라 4세는 니케아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 따라서 이후 유럽에 콤니노스 혈통이 퍼지게 됨[303] 필요하다면 종교적 제제 가할 것 지시[304] 프랑스에서 십자군 설교 중이던 프란치스코회 수사 기욤 드 코델에게 성지 대신 그리스 목표 삼을 4백명의 십자군 기사들 구할 것 지시[305] 아카이아 공 지오프리 2세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함대가 봉쇄망 돌파하고 성 내에 지원병과 보급 전해주자 그렇지 않아도 공성병기가 부족했던 터에 불가리아 군대가 철수, 이에 요안니스 3세 역시 포위 풀고 평화 조약 체결한 것. 현상유지 (동부 트라키아의 니케아 소유). 한편 포위 도중 라틴 황제 보두앵 2세는 장 드 브리엔에게 전권 맡기고 도움 구하러 서유럽 향함.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불가리아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구원하도록 권유 / 베르트랑 드 콤프, 신임 구호기사단장으로 취임 /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 완전히 독립 / 몽골군이 아르빌 공격하나 시타델 함락 실패[306] 1236년 9월까지 필랑기에리가 섭정직 유지하고 오도 드 몽벨리아르가 보좌. 이후 안티오크 공 보에몽 5세가 이어받는 것으로, 그리고 코뮌은 해체. 이벨린 가문 제외 나머지는 사면, 전자의 사안은 귀족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장 드 이벨린, 이를 거절하도록 주도[307] 두달 이상 지나도록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지 않은 결과[308]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그들과 튜튼 기사단 사이의 현재 리투아니아 정복 맡김. 곧 홀슈타인의 독일 병력과 프스코프의 러시아 병력 합세[309] 차남 장은 아르수프, 삼남 보두앵은 섭정이자 외사촌인 시돈의 발리앙 보좌, 사남 기는 키프로스의 앙리 1세 보좌. 아크레 코뮌은 유지됨[310] 십자군 제후 대한 영토 불침권 근거로. 이에 루이 9세는 군대 물리고 테오발드는 파리로 향하여 봉신 서약하고 4개의 마을 매각 및 2개의 요새를 일시적으로 넘겨주며 위기 모면. 한편 루이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루이가 테오발드 얼굴에 치즈 던지며 모욕[311] 소유자들의 안좋은 행실로 인한 압수.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 (그리고 샤를마뉴의 승인)를 근거로 소유권 주장하며 맞섬[312] 로마 상인들에게 돈 갚지 않아 참사회에 고발된 테오발드가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자 샹파뉴 시장 도시 2개에 성무 금지령 내림[313] 이 날은 성 마우리시오 축일이기도. 기사단, 리투아니아의 늪지대에서 공격당해 괴멸됨. 이때의 손실은 영구적으로 복구되지 못함[314] 다만 자신이 지도자 자처하며 황제 보두앵 2세와 함께 하는 것도 거부. 이에 보두앵은 따로 군대 모음.[315] 그리고 투르네, 캉브레, 아라스 주교들에게 각각 4백의 기사들 차출 지시. 한편 보두앵은 먼 친척인 루이 9세 궁정으로 향하나 네무아 상속 문제로 모병 지연됨[316]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 테오도로스 앙겔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고 교황의 조언에 따라 실명 상태의 장인 풀어주며 언제든 떠날 수 있게 해줌. 테오도로스, 구걸하는 거지로 변장해 테살로니카 입성한 후 옛 지지자들 모아 동생 마누일을 안탈리야로 축출. 장님이라 황제가 되지 못함으로 아들 요안니스 옹립하고 자신이 재상 맡음. 불가리아와 동맹, 마누일의 아내이자 이반 아센의 딸인 마리아는 본가로 귀환[317] 사울레에서의 대패 이후 리보니아 인들이 반란, 통제하지 못하자 합친 것. 다만 기사단장 선출할 수 있는등 높은 자치 보장됨 / 튜튼 기사단, 포메른 정복. 엘빙 건설 / 템플기사단장 아르망, 무슬림 목동들이 경호 하에 아틀리트와 아크레 사이에서 방목하는 것 보고 자파 백작 고티에 드 브리엔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120명의 기사들과 출정했으나 대패. 자신 포함 10명 생환 / 나스르 왕조, 천혜의 요새 그라나다 장악하고 수도로 정함 / 키프로스의 앙리 1세,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의 여동생이자 섭정 콘스탄티노스의 딸 스테파니와 결혼 / 쿠만 인들이 몽골의 침공 피해 남하, 다뉴브 건넘. 이에 라틴 제국의 섭정 앙슈가 그들을 고용, 니케아령 투줄룬 포위하나 총독 니키포로스 타르하니오티스가 버텨내어 실패.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역시 동맹으로써 참전하려 했으나 황후 안나의 죽음으로 귀환. 이후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한 것으로 보임[318]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한 유일한 라틴 제국 황제[319] 기야스 웃 딘 카이쿠스라우, 아미르들과 섭정 사드 앗 딘 코펙으로 하여금 이즈 앗 딘 폐위시키고 자신을 술탄으로 인정하게 한 후 복종 이끌어내기 위해 동생들과 불복한 장군들 모두 살해[320] 바그라스의 템플러들이 오론테스 강변의 무슬림 마을 습격. 이에 알레포 군대가 출격해 바그라스 포위한 것. 이후 보에몽 5세가 구원하고 반격 대신 휴전 연장.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은 주전파 템플러 지휘관 기욤 드 몽포르 (몽페라토라는 기록도)가 자블라 군대와 함께 트라페사크 (다릅사크) 성채를 기습 포위. 하지만 수비대가 버텼고 성 내에 수감 중인 기독교도 포로들이 알레포로부터 원군 오고 있다고 경고하나 기욤은 이를 무시함. 결국 알레포 군대의 공격을 받아 거의 대패, 기욤 전사하고 상당수 포로 잡힘. 비보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몸값으로 보내준 5백 마르크 은화로 포로 석방하고 결국 휴전 체결[321] 이스마일 역시 형이 모아둔 병력으로 알레포 공격하려 계획[322] 지원병 요청 위한 서유럽 투어에서 플랑드르 다음으로 잉글랜드 향한 것 / 레온-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 니에블라와 우엘바 점령 / 프리드리히, 구엘프 도시인 브레시아 포위하나 함락 실패 / 연초. 장 드 베튠, 라틴 제국 지원군과 함께 베네치아로 남하하나 프리드리히가 안전 보장 거부. 장 사로잡고 밀라노 포위 도움 요구[323] 죽기 직전 케라크의 앗 나시르와 화해. 알 아딜이 카이로에 있었고 그가 아미르들에 의해 추대된 것. 한편 알 카밀의 죽음을 틈타 케라크의 앗 나시르 다우드가 다마스쿠스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아이유브가 호라즘 군대와 함께 남하하자 도주. 호라즘 인들이 시리아의 풍족함을 경험하게 됨[324] 3년여간 그리스로 선회하라는 교황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지 제후들의 의견대로 직항 고집하자 결국 교황이 샹파뉴의 교회세 이용 허가해주어 자금 마련[325] 안탈리야로 축출되었던 마누일은 룸 술탄국의 허락 받아 육로를 통해 니케아 당도. 요안니스 3세에 복종하고 그의 군대로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상륙. 총독 콘스탄티노스 멜리세노스의 지지 얻어 라리사 등 테살리아 전역 점령. 테살로니카의 테오도로스, 원정 준비하나 결국 그들과 협상. 마누일이 니케아 대한 복종 버리는 대가로 그를 보데나의 영주로 임명.[326]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이집트 원정 나선 틈을 노려 룸 셀주크 재상 코펙이 그의 속령인 사모사타 점령. 이에 아이유브 측은 호라즘 용병들에게 디야르 무다르 영지 주어 완충지대 삼음 / 헤르만 폰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1세의 막내아들), 튜튼기사단장 등극 / 피에르 드 비엘르 브리드, 구호기사단장 등극[327] 하지만 도중 이집트 아미르들이 아이유브에 개입 요청해오자 먼저 이집트 원정하기로 결정[328] 이에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 내의 교황 지지하는 성직자들 축출하고 밀라노 포위[329] 알비 십자군 이끌던 시몽 드 몽포르가 사망한 후 몽포르와 툴루즈 백국 계승한 아모리 드 몽포르가 1224년 프랑스 왕실에 툴루즈 넘기는 대가로 몽포르가 백작국으로 승격되어 백작위 유지. 한편 1230년 숙부 몽모렌시에 이어 프랑스 대원수가 되자 모친에게서 상속받은 잉글랜드의 레스터 영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동생 시몽에게 넘겨 분산 통치하기로 한 것. 다만 9년간 끌다가 드디어 이행[330] 1237년까지 아들 장 1세의 섭정[331] 본래 이탈리아 향하려 했으나 아이유브 측과의 협상 원하던 프리드리히의 반대로 막히자 대신 마르세유와 카르마그의 에그모르트에서 출항 모색[332] 용병료 마련 위해 가문의 네무아 영지를 5만 리브르에 루이 9세에게 매각. 7월 출발해 헝가리, 불가리아 거쳐 육로 행군, 겨울 도착. 한편 보두앵의 용병 대장인 장 드 베튠이 베네치아에서 사망한 후 그의 군대는 흩어짐. 상당수는 교황 조언 구하며 로마 향했고 일부는 밀라노의 롬바르드인들에 가세. 수백명만 베네치아가 제공한 선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333] 보스라와 바알벡의 아미르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파병 요구했으나 군대 모집에 시간이 걸린다며 아들 알 만수르를 선발대와 먼저 보냄. 하지만 이후로도 지연되자 의사 사드 앗 딘 디마슈키를 파견해 이스마일의 의중 파악하려 함. 이를 눈치챈 이스마일의 재상이 사드 앗 딘의 서신 위조해 아이유브 안심시킴[334] 이후 아크레에서 현지 제후들과 회의. 티레 대주교 피에르가 총대주교 대신 주재. 테오발드, 자파와 아슈켈론 거쳐 다마스쿠스 방면 행군 결정[335] 이스마일, 군대 준비되자 아이유브에게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섭정 맡기기 위한다며 아들 알 만수르 귀환 요청하였고 성사되자 홈스 등 시리아 군대와 기습하여 다마스쿠스 점령[336] 아이유브의 군대 역시 그를 버리자 아이유브는 나블루스에 소수의 호위대와 남겨짐. 케라크의 앗 나시르에게 도움 청했으나 파견된 베두인 부대는 그를 사로잡아 귀환[337]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 중이던 필랑기에리의 이탈리아 병력은 시내 포기하고 성 스테파누스 (다마스쿠스) 문과 다윗 탑 일대에서 저항.[338] 바 백작 앙리, 브르타뉴의 피에르의 전공을 넘어서고 싶은 야욕에 가자의 바이바르스가 고작 1천의 군대만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자 테오발드가 합류하기도 전에 부르고뉴 군대 및 시돈의 발리앙, 오도 드 몽벨리아르와 함께 밤을 틈타 출정. 뒤늦게 알아챈 테오발드가 기사단장들과 달려와 말리려 하지만 위그는 그를 겁쟁이라 매도하며 불복하고 진군[339] 앙리의 군대가 가자 향해 남하하고 테오발드는 도움 필요할 때를 대비해 후방 아슈켈론 주둔. 앙리, 전투에 앞서 베이트 하눈의 모래 언덕에서 휴식 도중 바이바르스의 궁수들이 습격하기 시작. 이에 자파 백작 고티에 (동시에 브리엔 백작 고티에 4세)는 위치가 드러났음으로 철수하자고 충고, 위그와 팔레스타인 제후들은 보병대 두고 도주. 앙리는 보병대와 함께 싸웠으나 압도되어 전멸. 1천 전사하고 아모리 지휘 하의 6백명은 포로로 잡혀 몸값 협상 위해 이집트로 후송됨[340] 베이트 하눈의 패잔병들이 아슈켈론에 다다르자 테오발드는 반격 주장하나 현지 제후들이 가망이 없으며 바이바르스가 포로들 죽일 것이라며 도움 거부하자 결국 철수[341] 6일 후에는 자금 지원 재개. 하지만 며칠전 벌어진 노스샘프턴 사건 모르는 상태 ㅋ[342] 12월 7일이란 기록도. 휴전 종료 100일만에 벌어진 일. 하지만 앗 나시르 역시 예루살렘 지킬 능력이 되지 못하고 프리드리히와의 전쟁 우려하여 다윗 탑과 성벽 파괴하여 무력화시킨 후 철수[343] 테살로니카 /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는 두 길이 만나는 요충지. 몽골 피해 내려온 쿠만 인들과 함께 공격. 안전 보장 대가로 항복시키곤 도시 폐허화시키고 주민들 동족 그리스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림. 한편 34척의 이탈리아 함대가 니케아 함대 격파. 그럼에도 요안니스 3세는 소아시아에 얼마 남지 않은 라틴 제국령 성채 중 2개 점령하며 보복[344] 연초. 테오발드,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분할 위협을 받는 하마의 아미르 알 무자파르와 동맹 모색. 알 무자파르, 사절을 후히 대접하고 기독교로의 개종까지 제안하나 막상 테오발드가 트리폴리 당도할 무렵 위협이 사라지자 협상 지연함 /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재상 코펙 암살하고 조지아 여왕 루사단의 딸과 결혼 / 레온-카스티야 군대가 에지카와 루체나 점령 / 라틴 제국의 왕관이 프랑스 당도[345] 프리드리히가 비테르보에서 남하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사기 진작 위해 성유물과 로마 한바퀴 순회. 시민들이 항전 결의하자 프리드리히와의 싸움에 십자군 지위 부여하고 이에 장기 포위 우려한 프리드리히 회군. 독일 사제들에게 중재 허락, 교황 측도 협상 위해 요한 콜론나 파견. 하지만 이후 군사적 위협 사라지자 그레고리오 9세는12 프리드리히와의 협정 어기고 교황권 확립 위해 1241년의 공의회 선포, 이탈리아 성직자들을 로마로 소환. 황제와의 신뢰 파기에 질색한 추기경 요한 콜로나 등의 성직자들이 곁을 떠남[346] 이집트의 알 아딜 2세가 아이유브 내주라고 요구했으나 거부하여 서로 충돌, 결국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 공격 함께한다는 대가로 동맹한 것[347] 둘다 추정시기. 부활절 전후[348] 이집트 군대가 알 아딜과 그가 총애하지만 악명 높은 환관을 버리자 알 아딜이 항복, 투옥됨. 이후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앗 나시르 다우드에게 팔레스타인, 바알벡의 앗 살리흐 이스마일에게 다마스쿠스 양도 / 한편 아이유브의 아들 투란 샤는 호라즘 용병들 날뛰며 분열되어가는 자지라에서 아이유브 패권 유지하려 노력[349] 테오발드, 무력의 한계 느끼고 (이집트의 포로들도 고려) 협상 위해 세포리스 진군. 이스마일에게 영토 할양 대가로 군사 원조 제안. 이스마일, 보급품 제공과 이집트 군대의 팔레스타인 진입 저지 대가로 보포르 및 사페드 성채 일대 반환 제안. 그밖에 앗 나시르 수중에 있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나블루스, 가자 등지 점령 승인. 다마스쿠스와 이해관계 있는 템플기사단이 협상 주도해 성사시키고 사페드 성채 취함. 다만 보포르 성채의 아이유브 수비대는 전 주인의 아들 시돈의 발리앙이 당도하자 불신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입성 거부. 이에 이스마일이 보포르 포위해 항복시켜 발리앙에게 넘김, 다만 그는 접수받고 사망. 이러한 처사에 우마이야 대사원의 카팁 이즈 앗 딘 압둘 살람이 이스마일 비난하며 예배 기도문에 언급 거부하다 체포되고 풀려난 후 이집트 망명[350] 7월경 이집트에서 돌아온 앗 나시르는 십자군이 나블루스와 요단강 일대 습격한 것 확인. 결국 그 역시 이스마일 및 십자군과 협상[351] 9월 7일이라고도. 아라곤 망명했다가 지원군과 돌아와 프랑스와 맞선 것[352] 10월 8일이라는 기록도. 헨리 3세의 동생, 전투 대신 협상 선호. 필랑기에리의 예루살렘 총독 발터 페닝필을 아슈켈론 총독으로 봉함. 프리드리히, 이를 승인하고 카이로에 특사 파견[353] 이로써 십자군에 반격 가하려던 홈스의 알 만수르는 대신 그들과의 전쟁 나섬[354] 성주 기욤이 주군 레몽 2세의 카르카손 수복 실패에 비관하여 항복한 것[355] 연초.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아이유브 내분 틈타 디야르바크르 항복시킴. 하지만 자칭 예언자 바바 이샤크가 이끄는 튀르크멘의 반란으로 한동안 레반트 개입 못함, 진압 위해 프랑크인 용병까지 고용 / 테살리아의 마누일 앙겔로스 사망, 조카인 에피로스 친왕 미카일 2세가 점령. 한편 테살로니카의 섭정 테오도로스는 니케아의 요안니스 3세의 초청받아 극진히 대접받으나 인질됨. 요안니스는 라틴 황제 보두앵 2세와 2년간 휴전 합의하고 테살로니카 원정 준비 / 여름. 시리아의 아이유브 제후들이 호라즘인들의 침공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 동맹 / 독일기사단국, 노브고로드 공국으로부터 핀란드만의 잉그리아 정복. 폴란드 제후들 중 원로로서 크라쿠프 지배 중인 슐레지엔 공 헨리크의 요청대로 몽골군에 맞설 지원병력 파견[356] 리처드, 구호기사단 주장대로 아이유브의 사절단과 아슈켈론에서 만나 이스마일의 영토 할양 승인하고 갈릴리 지역 방어 가능하도록 벨부아 성채와 타보르 산, 티베리아스 추가 할양 요구해 성사됨. 헤브론, 가자, 나블루스 등의 전략적 거점들만 무슬림 수중에 남음. 어차피 아이유브가 아닌 이스마일의 영토.. 아이유브 군대 갈릴리 동부에서 철수, 이스마일도 어차피 앗 나시르에 인접한 땅이라 수긍. 그리고 동생 알 아딜 2세의 업적 상쇄 위해 1239년의 포로들 석방하기로. 1187년 이후 처음으로 갈릴리 국경 복구됨. 갈릴리 공 라울의 딸 에시브와 결혼한 예루살렘 섭정 오도 드 몽벨리아르가 티베리아스 재차 요새화, 나블루스 통해 예루살렘과 연계할 수 없어 취약. 템플기사단과 현지 제후들은 주로 동맹 대상이던 다마스쿠스 대신 이집트 택한 것에 불만[357] 테이스 강의 모히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 함께 참전한 템플기사단의 지휘관 장 드 몽레알이 벨라에게 섣불리 공격을 주장한 결과 대패. 장과 후그린 대주교 전사, 벨라의 동생인 갈리치아 왕이자 슬라보니아 공 칼만 중상 입고 다음달 사망[358] 카말 앗 딘은 알 카밀 대의 재상 파크르 앗 딘의 동생. 하지만 1대 10의 우세에도 이집트 군대는 대패. 한편 이때부터 이스마일은 다마스쿠스의 쿠트바를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의 이름 하에 불리게 함[359] 프리드리히, 성직자들이공의회 참석 위해 제국령 통과해 로마 향하는 것 금지. 이에 일단의 주교들이 제노바에서 봉쇄 피하려 해상으로 로마 향하나 프리드리히의 서자 엔조가 습격해 사로잡거나 침몰시킴. 대주교 1명 포함 2천 전사, 18명의 성직자 사로잡힘. 공의회 위한 정족수 확보하지 못하게 되자 그레고리오 9세는 협상 요청하고 피사 파문. 한편 프리드리히는 이 승리가 신의 뜻이라 천명[360] 한편 이스마일과 아이유브의 대립 심해지며 십자군 내부에서도 누구를 지지할지 여부를 두고 갈등. 구호기사단은 이집트의 아이유브, 템플기사단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 필랑기에리의 제국파는 전자, 이벨린파는 후자를 지지하며 파벌화됨. 튜튼기사단은 중립 유지. 현지 제후들이 헨리 3세와 리처드의 매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중재자로서 바일리 임명을 청했으나 프리드리히는 그가 알비 십자군 지도자의 아들이고 사촌인 필리프 드 몽포르 (미래의 티레 영주)가 발리앙 드 이벨린의 외손자인 것을 고려해 거절, 이에 시몽 귀국한 것. 이후 시몽-루이 9세 vs 프리드리히-헨리 3세의 대립구도 형성됨[361] 사페드 성채 건설에 투입된 무슬림 노예들이 봉기 결심하고 앗 나시르의 장수와 연락하여 도움 구했고 이에 앗 나시르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에게 전했으나 이스마일은 오히려 템플러 측에 말해주어 결국 노예들 학살당함. 이에 충격입은 앗 나시르가 다마스쿠스 대신 카이로 측에 동맹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 루이 9세, 차남 알퐁스의 푸아투 백작위 선포 (18세), 명목상 주장하던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공 리처드 반발. 레몽 7세,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그의 새아버지 라마르슈 백작 위그 10세 드 뤼지냥, 푸와 백작 로제르 4세 등과 반프랑스 동맹 결성[362] 1240년에 벌어졌다고도.. 빌카 계곡의 히스반에서 앗 나시르 본군 패배시키고 나블루스의 병력 역시 격파. 이후 십자군과 합류해 가자 당도하나 술탄의 이집트 병력과 마주하자 다수의 무슬림 병사들이 이집트 진영으로 이탈 (이스마일이 보인 친십자군적 행보 때문인지)하자 십자군 역시 후퇴. 혹은 패배였다고도. 알 누와이리에 의하면 이 즈음에 이스마일은 십자군과 함께 예루살렘 입성했다고 함. 이스마일 비난하다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나있던 법학자 알 술라미는 재차 감금됨[363] 우구데이가 과음으로 사망하자 황손인 시레문 대신 경교도이자 구유크 낳은 6째부인 퇴레게네 집권하고 쿠릴타이 위해 원정 중인 왕공들에게 귀환 명령. 한편 교황청은 기독교도 황후와 대이슬람 동맹 고려[364] 같은날 라마르크의 위그 10세가 푸아투 백작 알퐁스 대한 봉신 서약 거부하며 모욕. 생통주 전쟁의 직접적 계기[365] 예루살렘 왕국의 친이집트 정책에 반발한 템플기사단이 헤브론 공격하자 앗 나시르가 보복한 것. 앗 나시르는 동맹인 술탄 아이유브에게 부탁해 파견된 샴스 앗 딘 시라순쿠르 휘하 2천 기병대와 자파를 포위했으나 포위 장기화되자 아이유브는 후퇴 명령 내리고 이에 앗 나시르도 케라크 회군. 이집트의 카팁에게 보낸 항의 편지 현존. 그 외에도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과 해안 사이의 길 끊고 순례자들에게 통과세 거둠. 다른 기록에 의하면 순례 후 아크레 귀환하던 기독교도 순례단 학살했다고도 /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왕공 알 가지를 포위하던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몽골군 접근 소식에 아르메니아, 니케아, 트라페주스 등지에 지원 요청 / 포멜른 공 스반토폴크, 독일기사단의 세력 확대 맞서기 위해 프러시아 인들의 봉기 선동. 1244년 승리 전까지 기사단 위협받음, 전쟁 자체는 1250년까지 이어짐 / 기욤 드 샤테누프가 구호기사단장 등극[366] 술탄 아이유브가 알 하이자위에게는 알 자와드를, 알 자와드에게는 알 하이자위를 사로잡으라 명령하였고 이에 둘다 술탄에 반발하여 알 하이자위는 다마스쿠스로, 알 자와드는 아크레로 도주. 동시에 예멘의 라술 왕조가 아이유브 조로부터 메카 빼앗아 수모 배가 됨[367] 정확힌 기사단 + 에스토니아 보조병. 도르파트 부근 페이푸스 호수에서 전투. 이로써 독일기사단국의 루스 지역 팽창 좌절됨[368] 몽세귀르 성채에서 내려온 50여명의 병사들이 자행. 본래 프리드리히, 아라곤, 레몽 7세 등이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 카타리파만 행동 나선 것. 심문관 2명 포함 10여명의 수사들 밤중에 살해됨. 이단 명부 불태움. 이로써 남아있는 카타리파 대한 경각심 불러일으킴. 결국 교회의 요청대로 루이 9세가 몽세귀르 공격 명령 내림[369] 봄 무렵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대 도메스티코스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 휘하 함대가 인질 테오도로스 및 쿠만 용병대와 트라키아 해안 따라 별 저항 없이 테살로니카 포위. 다만 테살로니카 자체는 민관 모두 강력히 저항, 공성병기 부족한 니케아 군대는 도시 봉쇄에 나섬. 이내 요안니스 3세는 바이추의 몽골군이 아르메니아 지나 룸 셀주크 접근한다는 비보 듣고 곧 귀국해야 함을 깨달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숨기고 수중의 테오도로스를 테살로니카의 아들 요안니스에게 파견하여 항복 설득하게 하나 테오도로스는 아들에게 기다리면 더 좋은 조건이 제시될 것이라며 항복하려 했던 그를 오히려 만류[370] 40일간의 협상 끝에 나온 결과. 이후 요안니스 3세는 니케아로 돌아가 몽골군의 동태 살피는데 주력,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카에 남아 재상으로 지낼 수 있게 해줌[371] 본래 섭정들, 특히 알릭스의 남편 라울에게 주어지기로 되어 있었으나 현지 제후들은 필리프 드 몽포르의 주장 수용. 이에 실망한 라울은 우투르메르 떠나 프랑스 귀환 / 가을. 구호기사단장 피에르, 필랑기에리 및 제국파와 공모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 베이루트의 발리앙, 6개월간 이어지던 구호기사단 본부 대한 봉쇄 해제. 이후 이스마일과 협상 계속하여 1229년에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예루살렘 전체 양도 얻어냄. 이집트의 아이유브 역시 십자군과의 전쟁 부담스러워 이를 승인 / 레온-카스티야, 오리우엘라 점령[372] 우구데이가 사망한 후 카이쿠스라우 2세가 조공 거부하자 몽골군이 공격해옴. 1차 포위는 실패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후퇴했으나 2차 포위 때는 12대의 투석기와 내통으로 승리. 한편 아르메니아의 하이톤 1세는 몽골의 승리 예상하고 원군 보내지 않음[373] 어느날 밤을 틈타 위장한 채로 아크레 잠입, 내통한 시민들과 쿠데타 꾀하나 들통남. 필리프 드 몽포르가 코뮌, 제노바, 베네치아 인들과 함께 대응하고 급보를 받은 베이루트의 발리앙과 카이사레아에 있던 오도 드 몽벨리아르가 군대와 당도. 모의자들 체포하자 필랑기에리는 본거지 티레로 도주. 발리앙은 구호기사단 비난, 기사단장 피에르는 안티오크 부근 마르가트 성채에서 무슬림 영토 습격 중임으로 아크레의 기사단 본부 봉쇄하는 것으로 보복[374] 1월이라는 기록도. 이후 루이 9세는 십자군 준비[375] 동시에 술탄의 적은 지원에 등돌린 앗 나시르 역시 요르단에 남은 마지막 이집트 거점인 샤우바크 (몽레알) 성채를 포위했으나 연합군의 후퇴 소식에 역시 철군[376] 성 내에는 18명의 기사들과 6명의 경기병, 2-3명의 석궁병을 포함한 150여명의 전투원들과 1백여 완전자들을, 그리고 일반 신도들을 포함한 5백여명이 거주. 험준한 바위지대 위의 성채라 프랑스 군은 직접 공격 대신 봉쇄, 하지만 수비대는 비밀 통로를 통해 보급받음[377] 이사벨 1세의 딸이자 콘라트의 작은 외할머니인 알리스는 다음으로 유력한 계승 후보. 현지 제후들도 교황과 대립하는 프리드리히가 선임한 토마스 디 아체라 인정 거부, 발리앙과 필리프은 알리스의 섭정권 확립 위해 귀족회의 개최. 이에 토마스는 아크레 대신 제국령인 티레 당도. 필랑기에리가 도시 내어주자 토마스는 그의 동생 로타르를 총독으로 임명. 이후 필랑기에리는 황명에 따라 이탈리아 향함[378] 아크레 주교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법학가 필리프 드 노바라는 국왕 콘라트 본인이 도착하기 전까진 그에 대해 봉신 서약할 수 없다며 알리스와 남편 라울이 섭정으로서 전권 지닌다고 주장. 오도 드 몽벨리아르는 우선 콘라트에 정식 초청을 보내고 그럼에도 그가 응하지 않는다면 그때 섭정을 세워도 된다며 기다려보자고 제안했으나 무시되고 이벨린 당파의 주도로 알리스와 라울 대해 제후들이 봉신 서약함. 한편 로타르는 티레 대한 항복 요구 거부[379] 시민들이 이른바 해안 성벽의 '백정의 문'을 열어줌. 발리앙이 부근에 선박 대고 일단의 병사들이 바위를 기어올라가 입성[380] 카이쿠스라우, 도주하며 토카트에서 왕실 보물 챙겨 앙카라로 피신. 몽골군, 시바스와 카이세리 점령. 룸 셀주크의 와지르 무하답 앗 딘, 몽골 진영 찾아가 항복 협상하여 콘야 파괴 면함. 이후 페르시아로 보내져 대장군 초르마간에게 정식으로 복종, 몽골의 속국으로써 조공 바친다는 칙령 (야를릭) 받아오자 카이쿠스라우가 승인. 몽골군은 약탈 후 철수, 다만 아제르바이잔에 주둔하며 존재감 유지[381] 역풍으로 이탈리아 행이 힘들어지던 차에 동생 로타르 돕기 위해 티레 뺴앗길 줄 모르고 돌아왔다가 그대로 체포되고 이벨린측이 그의 목에 줄음 감고 시타델 앞에서 행진하자 로타르 항복. 발리앙, 두 형제가 트리폴리로 떠나도록 허가, 곧 필랑기에리는 이탈리아 귀환[382] 아이유브 역시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 지배자로 인정하고 4년전 사로잡히고 석방되지 않은 아들 무기트 석방하기로. 다만 완전히 인장 찍힌 문서 당도 후에야 이행. 한편 이 소식에 홈스와 알레포의 아미르들 역시 아이유브 술탄으로 인정, 시리아 동맹 해체됨[383] 템플기사단장 아르망이 유럽 왕공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림. 템플기사단은 53년만에 성전산의 옛 본부 복원[384] 동맹 직후 알 만수르를 파견해 앗 나시르의 영토인 알 준 성채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아이유브가 호라즘인들에게 이스마일과의 동맹은 아들 알 무기트의 석방될 때까지라며 시리아 공격하라고 권유한 편지 입수하자 알 무기트의 석방 거부. 알 준 포위 풀자 앗 나시르 역시 가세, 십자군과 동맹. 템플기사단, 이를 지지하여 알 만수르 아크레 초청해 동맹 서약. 아이유브 타도 이룩하면 십자군에게 이집트 일부 할양하기로 약속 (예루살렘 완전 반환이 이때 일이라고도 함) 하지만 원정군 출정하기 전에 아이유브가 부른 호라즘 인들이 남하해 지연됨[385]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니케아와의 휴전 만료되자 재차 이탈리아 향해 원군 요청. 프리드리히에게 교황 간의 화해 주선 시도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요안니스 3세에게 휴전 1년 늘려달라는 서신 보내달라고 설득. 그 일환으로 프리드리히의 딸 콩스탕스, 요안니스와 결혼 (안나 개명) / 하마의 알 무자파르 마흐무드 사망, 아들 알 만수르 무함마드 2세 계승 / 레온-카스티야, 아르주나 & 물라 & 로르카 점령 / 연초. 몽골군이 알레포에서 동북쪽으로 7km 떨어진 하이란 약탈. 연말 무렵 반 호의 몽골군이 남하해 마야파리킨 포위, 아미르 알 무자파르 가지는 가족들과 포위 전에 도주. 다만 몽골군은 곧 후퇴함[386] (내통자들의 도움으로?) 비밀 통로 통해 외곽 보루 일대 장악하고 요새화한 후 투석기 설치해 밤낮으로 폭격. 이에 성밖 마을의 거주민들이 성채 안으로 피신하며 붐비게 됨. 수비대장 피에르 로제는 한계 임박했음을 자각함[387] 2주 (혹은 15일) 간의 휴전 합의됨. 전설에 따르면 휴전 도중 2명의 카타리파 신도들이 중요 문서와 보물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함[388] 이스마일이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십자군에 너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책망하고 다마스쿠스로 초대. 알 자와르, 이스마일과 십자군간 협상 도중 이스마일 조심하라 일러두고 떠남. 이 소식 접한 이스마일은 도착하자마자 그를 체포해 가둔 것. 목졸려 교살되었다고도 함[389] 역병으로 군대 약화되자 그간 교황이 주장하던 바대로 자신의 왕국을 교황의 봉토로 인정한 것.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른 지연술이라 여긴 인노첸시오 4세는 파문 철회 거부, 이에 프리드리히는 또다른 원정 준비[390] 완전자들과 배교 거부자들이 화형 대상, 성주 레몽 드 페라이유 역시 카타리파 버리고 안전히 떠남.[391] 이집트 원정 준비하던 시리아 영주들에겐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이스마일이 보낸 군대는 바알벡 남쪽의 알 자르에서 호라즘 군에게 전멸당함. 이에 그는 알 하이자위와 함께 다마스쿠스 성문 나섰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성 내로 후퇴. 가자에 집결하던 그의 군대 역시 다마스쿠스로 도주, 앗 나시르 역시 예루살렘의 십자군 두고 케라크로 철수[392] 예루살렘이 위험해지자 템플기사단장 아르망과 구호기사단장 기욤, 총대주교 로베르는 방어 구축하고 아크레에 원군 요청한 후 포위 피하기 위해 도시 빠져나감 ...[393] 전쟁 우려하는 로마의 여론에 떠밀려 프리드리히와 리에티에서 만나 협상할 것을 선포하나 로마 나오자마자 변장하고 비밀리에 치비타베치아로 향해 리베이라 행 선박 얻어탐. 프리드리히 공격하기 위해 외세 힘을 빌리려는 의도[394] 수적 우세 이용하여 제대로 방어되지 않은 성벽을 기습적으로 넘어 시내 진입.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가리지 않고 기독교도 학살됨 (특히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 야고보 수도원에서) 성묘 교회 약탈당하고 시타델 포위됨. 반격 나선 예루살렘 총독과 구호기사단장 지휘관 전사, 구원 요청에 앗 나시르가 수비대 구출 위해 파병. 이어 다마스쿠스 군대까지 당도, 압력 행사하여 호라즘 인들에게 수비대에 안전 철수 보장하도록함. 다만 예루살렘 탈환은 시도하지 않음[395] 하지만 그들 중 1/3은 호라즘인들이 전리품으로 내건 십자군 깃발들이 성탑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원군 당도했다고 착각해 돌아갔다가 공격받아 학살당함. 나머지 역시 도중에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오직 3백명만 자파에 당도[396] 이집트 군은 5천, 거기에 호라즘 인들이 합세하여 대략 1만. 알 만수르, 방어 태세 취하면 호라즘인들이 지리멸렬해져 떠날 것임으로 기다리자고 제안했으나 고티에는 적보다 수적 우세인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남하. 십자군이 해안 방면 우익, 알 만수르가 중앙, 베두인 부대가 좌익 맡음.[397] 맘루크 바이바르스 (술탄되는 바이바르스와 동명이인. 후에 끝까지 호라즘인들 편에 섰다가 숙청됨)가 호라즘 인들 이끌고 시리아 진영 붕괴시키고 다마스쿠스 병력이 도주하자 베두인 부대 역시 포위되기 전에 이탈. 알 만수르만이 끝까지 버티나 결국 격파되어 280명의 잔존 병력과 도주, 이후 십자군 포위 섬멸됨. 기사들이 반격 성공하는 듯 했으나 호라즘 인들이 후방 공격해 붕괴. 7천 십자군 중 아르망, 티레 대주교, 라믈라 주교 등 5천 전사, 고티에와 구호기사단장 기욤 등 8백 포로. 필리프 드 몽포르와 총대주교 로베르 등 소수만 아슈켈론 생환, 33명의 템플러와 27명의 구호기사단, 3명의 튜튼기사단 생존[398] 바이바르스, 잔존 병력 철수한 아슈켈론 시타델을 수륙 양면으로 포위하고 그 앞에 고티에 데려와 항복 설득하거나 죽음 중 택하라 강권. 고티에는 계속 항전하라고 외쳤으나 목숨 유지함. 한편 호라즘 인들은 가자 당도하여 약속대로 아이유브에게 이집트의 영지 요구하나 시리아처럼 약탈 자행할까 우려한 술탄이 거절, 이에 그들인 이집트 진영 이탈하여 아크레 부근과 갈릴리 일대 약탈하고 본거지 하란으로 북상함.[399] 알프스 넘을 때 한니발이 넘었던 세니 고개 이용[400] 아이유브, 그에게 왕실 막사 사용 및 상석에 앉는 것과 왕족들 대한 명령권 등 전권 부여함. 그는 가자에서 재차 술탄에 복속 청한 (그러나 더이상 신뢰되지 않는) 호라즘 인들과 합류하고 벳샨에 주둔하며 갈릴리와 나블루스 일대 분봉 후 다마스쿠스 포위[401] 봄, 수륙 양면으로 도시 포위하자 아미르가 항복 / 안티오크 총대주교 알베르, 정교회 총대주교 다비트에게 양 종파 맡기고 리옹 공의회 향함. 교황 인노첸시오 4세, 프란치스코회 수사 로렌초 디 오르타를 안티오크에 파견. 교황 수위권 받아들이는 그리스인에게 모든 가톨릭교도의 권리 하사 약속. 또 그들은 현지 출신의 가톨릭 사제들에게만 복종하면 된다고 확인[402] 라 포르비에 전투 소식 이후 알레포 측은 침공 피하기 위해 아이유브 측에 호의 보인 것. 호라즘 인들은 외곽에서 보급로 봉쇄, 포위 측은 투석기로 매일 폭격 퍼부움. 우마이야 대사원의 동쪽 미나렛이 파괴됨. 이에 이스마일은 외곽의 둑을 터뜨려 홍수 내었고 그러자 포위 측은 조금 후퇴하여 봉쇄에 열중[403] 프란치스코 수사. 무슬림 대한 도움 요청 및 기독교 개종 권유 목적, 아셸린 디 롬바르드 포함. 마침 쿠릴타이 개최 할 때라 신임 칸에게 팔레스타인 파병 청하기로. 다만 몽골어로 평화와 복속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추정됨[404] 그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레몽 7세와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등 참석. 그중 안티오크 총대주교 알베르는 공의회 끝날 때 즈음 사망[405] 정확힌 프리드리히 끌어내릴 목적인 교황의 전쟁에 참전한는 자들에 대한 정식 십자군 지위 하사한 것. 추후 교황청 인사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십자군 설교. 이에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사르데냐의 엔초가 밀라노를 양면에서 포위했으나 격퇴됨[406] 알 만수르, 라 포르비에 패전 이후 홀대한 이스마일에 대해 불만 품고 도시를 넘기려 했으나 호라즘 인들의 과거 시리아에 대한 약탈을 떠올리고 접은 것. 하지만 그 직후 이스마일의 와지르인 아민 앗 다울라가 무인 앗 딘의 진영 방문하여 항복 제안[407] 봉쇄로 식량 부족해져 민심 흉흉해지자 1238년 알 카밀이 다마스쿠스 점령하며 내어준 영토에 만족하며 항복 협상 나선 것. 알 만수르 역시 홈스 영지 그대로 유지하기로[408] 이스마일과 알 만수르는 전날 밤에 말에 올라 급히 각자의 영지로 향함. 하지만 입성 직후 (협상 소식을 전해들은 듯) 절대 이스마일을 놓아 주어서는 안되고 카이로로 압송해야 한다는 아이유브의 편지 당도. 어쩔 수 없음, 주군 분노[409] 건강 악화가 이유 중 하나, 이후 다마스쿠스에 은거하다 사망[410] 한편 카이로에 투옥되었던 브리엔 & 자파-아슈켈론 백작 고티에, 술탄의 허가 하에 그가 전에 약탈한 상인들에게 살해됨. 아들 장이 브리엔 영지 세습 (다만 키프로스 궁정에 머뭄). 앙리 1세, 장 드 이벨린 (필리프 드 이벨린의 아들이자 베이루트 영주 발리앙의 사촌)에게 왕실 영지인 자파-아슈켈론 백작령 하사 / 룸 술탄 카이쿠스라우 2세 사망, 7세 막내아들 알라 앗 딘 카이쿠바드 2세를 후계자로 지목하나 대신들이 반발. 결국 11세 장남 이즈 앗 딘 카이카우스 2세와 9세 차남 루큰 앗 딘 클르츠 아르슬란 4세까지 삼형제가 공동으로 즉위 /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 테살리아의 파가사이 만 일대 점령 / 가을. 요안니스 3세, 멜니크부터 스트리몬의 벨부즈드 까지 동부 마케도니아 점령하고 남하. 마리차 강변부터 스테니마코스 점령, 다시 북상하여 프릴레프와 펠라고니아 (스코페) 일대 석권. 불과 3달만에 이룩한 성과[411] 아이유브, 나블루스 주둔하던 후삼 앗 딘 이븐 아비 알리를 신임 총독으로 봉함, 그가 다마스쿠스 당도한 얼마 후 갑자기 전 총독이 사망한 것. 독살설, 이로써 무인 앗 딘이 호라즘 인들에게 한 시리아 남부 및 팔레스타인 영지 약속도 사라짐[412] 이후 세비야 압박해오자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가 카스티야에 복속[413] 아이유브, 이이제이 통해 이스마일의 후퇴 유도하기 위해 알 만수르에게 (술탄 권위 하의) 다마스쿠스 총독위 제안. 알레포 측엔 금전 제공했다고도. 마침 호라즘 인들에 대해 치를 떨던 알레포의 섭정 토그릴은 흔쾌히 응함. 이에 호라즘 인들은 포위 풀고 홈스 향해 북상[414] 잔여 호라즘 인들은 이라크로 도주해 몽골군 혹은 압바스 칼리파 측에 편입되고 이스마일은 바알벡 영지 귀환하나 전운이 드리우자 알레포 측에 망명[415] 후작 팔라비치니의 항전, 아테네 공 기 드 라 로쉐가 아카이아 병력과 구원 나서 미카일 격파[416] 이후 베네치아 함대와 그리스 인들의 도시 모넴바시아 포위[417] 아이유브의 이집트 초대에 응하여 준비하던 중 외곽 가우타에서 병사한 것. 이후 홈스는 다시 수동적인 제후국으로 전락[418] 구유크 칸, 도움 주기 전에 서유럽 군주들이 자신에 복속하고 조공 바쳐야 한다고 명시. 카르피니, 몽골측이 돌아가는 길에 사절 보내겠다고 하자 그들이 약소한 서유럽 군주들이 내분 벌이는 것에 침략 계획할까 우려해 만류[419] 한편 독일의 대립왕 하인리히가 니다 전투에서 콘라트 4세 격파. 독일에서의 전쟁으로 콘라트는 아크레 가지 못함[420] 이후 아이유브는 그를 카이로로 소환, 직접 시리아 향하며 그동안 이집트 위탁. 후삼의 부재동안 무자히드 앗 딘 이브라힘과 자말 앗 딘 마트루가 다마스쿠스 맡음[421] 수중의 호라즘 인들 인도하는 대가로 케라크 성채만을 소유하는 것으로[422] 요안니스 3세, 멜니크에서 테살로니카 친왕 데메트리오스 대한 음모 소식 접함. 모의자인 캄파노스가 당도하여 요안니스와 협상, 항복 대가로 테살로니카의 기존 권리와 특권 인정해달라는 금인칙서 얻어냄. 이후 테살로니카로 돌아간 캄파노스는 체포되지만 비밀 공모자인 스파르테노스가 그를 거짓 고문과 함께 '심문'하고 무고하다고 보고하자 데메트리오스 안심. 그리고 니케아 군대가 테살로니카 당도, 데메트리오스는 성밖으로 나와 복종 표하라는 요안니스의 최종권고 거부. 정찰전 도중 공모자들이 해안 성벽의 암문을 열어줘 니케아 군대 입성. 데메트리오스, 시타델에 피신하나 요안니스가 그의 동생이자 불가리아의 섭정인 이리니를 앞세워 설득시키자 항복. 비티니아의 렌티아나에 유폐되어 사망, 부친 테오도로스는 보데나에서 계속 통치. 요안니스,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총독 임명하고 귀환[423] 포위 도중 파크르 앗 딘은 와병하여 후방으로 실려감[424] 아미르인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알 무아자미는 아이유브가 성 아래 다다르자 내려와 항복, 함께 말타고 다마스쿠스 돌아감. 시리아 북부 알 카부르, 카르키시야, 마즈달의 영지로 보상받기로하나 실효 지배 중인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가 거부. 이에 아이유브는 돌연 이즈 앗 딘을 사로잡아 이집트로 돌아간 후 그를 투옥시킴. 이내 옥사. 한편 아이유브는 포병 장교 알라 앗 딘 인디킨 알 분두크다르 체포, 바이바르스 포함한 그의 노예들 몰수[425] 교황 인노첸시오 4세, 조카 오피조 피에스치 안티오크 총대주교 임명. 그로 하여금 정교회 총대주교 다비트로부터 가톨릭 교회 관할권 돌려받도록 시리아로 파견 / 홈스의 알 아슈라프 무사, 살라미야 술탄에게 헌납 / 프랑스 태후 블랑슈, 네무아 백작령 매각 위해 플랑드르 가있던 라틴 황제 보두앵 2세에게 2만 마르크 빌려줘 영지 팔지 않아도 되도록 구제해줌 (다만 1265년에 실행됨) / 마야파리킨 아미르 알 무자파르 가지 사망, 아들 알 카밀 무함마드 계승[426] 이라크 북부 주둔 몽골군 사령관 바이추, 사절에게 오만한 태도로 임했으나 아이유브에 대항하여 십자군 돕는 것과 주요 적수인 바그다드 칼리파 알 무스타심 공격 합의. 돌아가는 길에 몽골인 사절로 아이베크와 세르키스 딸려보냄[427]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인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 내무대신 보두앵 드 이벨린과 1백의 기사로 구성된 8척 함대 파견. 아크레의 코뮌과 이탈리아 상인 공동체들도 7척의 함대 파견. 이에 아슈켈론 봉쇄 중이던 이집트 함대가 반격 나섰으나 폭풍으로 해안에서 난파됨. 이후 구원 함대는 아슈켈론 입항하여 보급품 전하지만 악천후 지속되자 보호되지 않은 열악한 항구에 머물기보다 회군. (아슈켈론은 좋은 항구 아니어서 12세기 무슬림 영토일 때도 같은 문제 겪음) 한편 이집트 병력은 공성탑 제조 위해 목재 모음[428] 24일이라는 기록도. 설사 십자군이 탈환하더라도 사용 불능이도록 파괴. 수비대 전체 죽이거나 사로잡음[429] 여름. 교황 인노첸시오 4세, 프리드리히 대한 싸움에 십자군 지위 부여 / 아카이아 공 기욤, 모넴바시아 함락. 미스트라, 마이나 등지에 성채 건설 /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4세, 몸소 바투 칸 찾아가 복속하고 단독 술탄 되게 도움 요청. 그는 이복동생 카이카우스 2세의 모후와 결혼한 아타베그 샴스 앗 딘 이스파니의 중앙 정부에 반발하는 독립적인 아미르들의 지지 받음[430] 이로써 로마냐 지방에서 교황파 지속되고 교황령 정복하려는 기벨린파의 시도 좌절됨. 한편 프리드리히의 서자이자 토스카나 전권 대사인 안티오크의 프리드리히는 피렌체의 구엘프 축출하고 지배력 공고히함[431] 바투 소환했는데 그가 대군 이끌고 오자 구유크 역시 군대 이끌고 만나러 가던 중 투르키스탄에서 병사한 것. 이후 차가타이 칸국의 트랜스옥시아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우구데이의 손자이자 구유크의 종질인 카이두가 선출되나 주치와 톨루이 가문에서 반대. 내전으로 이어짐[432] 아이유브, 카이로 총독 후삼 앗 딘을 살라미야로 파견, 몇달 전 그곳에 보내진 근위대 (알 할카 알 술타니야) 지휘하여 홈스 구원하게 함. 후임 카이로 총독으로는 자말 앗 딘이 임명됨. 한편 아이유브는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아쉬문 타나 주둔하며 시리아 친정 준비했는데 병을 얻어 와병, 의사들은 불치병임을 깨달았지만 발설하지 않음. 이후 회복할 때까지 계속 아쉬문에 머뭄 / 이즈음 키프로스로의 몽골 사절단이 타브리즈에서 출발[433] 라몬 보니파스 휘하의 함대가 과달키비르 강 따라 세비야로 향하여 강 건너편 트리아나와의 보급로였던 배다리를 파괴한 것. 이로써 세비야는 고립되어 기아 시달림. 한편 이 즈음 카스티야 군대가 알리칸테 점령[434] 무사, 아이유브에 도움 청하나 지연되자 결국 항복 협상 나선 것. 유수프에게서 (나름 관대한 조건처럼 보이려) 홈스와 교환 형식으로 주어진 투르베셀은 알레포 영지 속 고립되어 있어 어차피 독립 군주로의 실권 미미하게 됨. 한편 8월 중순 경 아쉬문에서 비보를 전해들은 아이유브는 더 버틸 것이라는 예상 깨져 충격[435] 그밖에 헨리 3세의 사촌인 솔즈베리 남작 윌리엄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병력과 스코틀랜드의 마르크 남작 패트릭 등이 동참. 헨리 3세, 추가적인 잉글랜드 제후들이 참전하는 것 금함[436] 루이, 프리드리히에게도 사절 보내 십자군 동행 제안하나 그는 아이유브와 좋은 관계에 있었고 미리 경고해주기까지 했다고도. 이집트와의 무역 조약을 깨기 싫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선박 제공을 거부하나 제노바, 피사가 선박 제공.[437] 9월 18일이라는 기록도. 이 소식을 접한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소나크가 키프로스 당도. 이후 술탄이 보낸 아미르 접견하고 루이에게 협상 제안하나 왕명 없이 나서지 말라며 제지당함, 이로써 외교 노선 실패[438] 가을경 도착했다고 하는데 아마 8월 중순 경 홈스의 항복 소식을 들었음으로 이때로 추정함. 아이유브, 후삼 앗 딘과 상의한 후 길을 나서 다마스쿠스 도착. 이후 시타델에 머뭄. 후삼 앗 딘과 파크르 앗 딘에게 왕실 휘장 대동하고 홈스 포위 나서게 함. 다만 무인 앗 딘 때처럼 전권 부여하진 않음[439] 다만 빌린 돈 갚기 위해 섭정 맡아주던 아내 마리아를 프랑스로 보내 자신의 영지 담보로 잡히게 하고 아들 필리프를 베네치아로 보내 상환하겠다는 확신 보임[440] 겨울이 시작되었음에도 포위에 나서지 않았다고 함으로 이 시기로 추정. 겨울에 전투 병력 유지 힘듦으로 주둔지에서 기다림, 그동안 다마스쿠스의 농민들을 징집하여 투석기 운반해옴[441] 페르난도 3세, 열쇠 건내받으며 알카사르 (시타델)의 수비대에게 늦어도 한 달 내로 카스티야 군대 입성한다는 조건 전달[442] 루이, 서둘러 현장 향하여 양측 주모자 모두 체포한 후 시시비비 가리고 니코시아 귀환[443] 2명의 경교도 (마르코, 다비드)로 구성됨.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상실 동정하는 타브리즈의 몽골군 사령관 알지기다이가 파견한 것[444] 술탄과 칼리파의 공동 대응 막기 위한 것.[445] 다만 카스티야는 그곳은 (자신들이 정복한) 세비야 토후국의 일부였다며 영유권 주장[446] 휘하 대원수인 기와 내무대신 보두앵 형제에게 키프로스 병력 지휘하게 함. 그들은 아랍어 구사하고 용맹하여 돋보임 / 봄. 라틴 제국의 황후 마리아가 북프랑스에서 키프로스 당도해 라틴 제국 대한 군사 지원 청하나 루이는 이교도와의 십자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변 / 여름-가을. 라틴 황제 보두앵 2세, 루이에게 재차 군사 지원 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미에타 당도 / 연말. 몽골 사령관 알지기다이, 루이의 사절단 카라코룸으로 보냄 / 룸 술탄 카이카우스 2세, 아크사라이에서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회동. 도중에 아미르들이 소규모 공격해오자 클르츠 아르슬란 도주, 폐위됨. 이후 그리스인 해방노예 출신 카라타이가 카이카우스 2세의 단독 집권 체제 공고히함[447] 1월 25일 몽골 사절단에게 떠나도 좋다고 통보한 후 합류시킴. 알지기다이에게 도움 청하는 서신과 성유물 대동시킴[448] 교황 특사의 주재 하에 1차 프러시아인 대반란 종결된 것. 다만 개종 안한 프러시아인들과의 전투 이어지고 결국 2차 프러시아 대반란 일어남[449] 6개월간 키프로스 머물며 약 3백여 기사들 사망[450] 루이, 이집트로의 병력 운송 위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게 재차 요청하나 베네치아는 역시 거부. 3월 제노바가 동의했으나 아크레에서 상권 두고 피사 공동체와 벌어진 무력 충돌로 선박 상실. 이에 장 드 이벨린이 나서 화해시켰고 충분한 함선 마련됨[451] 1238-41년 사이 부친 장 드 브리스바르 사망한 후 딸 마가렛 계승, 프리드리히 2세가 남겨두었던 독일인 섭정 베르너 폰 에기스하임 (가르니어 알레만)의 아들 요한 (장)과 결혼[452] 자지라 총독인 아들 투란 샤에게 시리아 맡기고 베두인 부족 바누 키나나와 막대한 보급품을 다미에타에 파견하곤 자신은 군대와 천천히 행군[453] 아이유브가 다마스쿠스 떠나기 직전에 앗 나시르가 파견한 그의 개인교사이자 조언자인 페르시아인 파이크 샴스 앗 딘 알 후라사니와 알 암자드 하산을 파견해 샤우바크 성채 반환과 이집트에 영지 (쿠브즈)를 대가로 케라크 항복할 뜻을 전함. 이에 아이유브는 후산 앗 딘에게 협상 맡기고 떠남. 하지만 후삼은 앗 나시르가 변심하고 자신을 감금할까 두려워 핑계대고 빠짐. 이에 타즈 앗 딘 이븐 무하지르가 카라크 당도하나 아이유브의 병세 및 십자군의 접근 소식을 접한 앗 나시르는 새로운 기회를 노리며 협상 무산시킴[454] 혹은 24척. 도중 로도스 습격[455] 몽골-셀주크-아이유브 제국들의 충돌로 발생한 튀르크인 도적 무리들의 습격에 방어하게 해달라는 안티오크 총대주교와 보에몽 5세의 지원 요청에 응한 것. 다만 재규합 힘들 것 우려해 기사는 보내지 않음[456] 5월 19일이라고도[457] 요안니스 3세의 처제인 헝가리 왕비 마리아가 교황에게 그의 교회 통합 수용 의사 밝힌 결과. 지오반니 디 파르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회 총회장. 가을 무렵 니케아 당도해 요안니스 3세 접견, 필리오케 인정한다면 니케아에서 합동 공의회 개최에 동의하기로 사전에 교황의 지시 받음.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니케아 정통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 동의되자 교황에게 사절 파견됨.[458] 루이, 나머지 함대 기다리지 않고 상륙. 수심이 얕아 배가 육지에 근접하지 못하자 그대로 뛰어내려 달려감. 이에 파크르 앗 딘과 다미에타 수비대가 요격 나섬. 루이, 허리춤까지 오는 바닷물에서 백병전 벌여 튀르크 군대 격파, 자파 백작 장의 예루살렘 왕국 기병대가 활약. 파크르 앗 딘, 밤이 되자 어둠을 틈타 배다리 건너 다미에타 후퇴[459] 왜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음. 쨋든 그의 명령에 바누 키나나는 십자군에 물자 넘겨주지 않으려 바자르에 방화. 이에 주민들 혼란에 빠짐[460] 서안과 도시 이어주는 다리는 물론이고 성문조차 열려 있던 상태, 콥트 기독교도들이 루이 반김. 십자군 입성 후 5차 십자군 때처럼 대사원을 성당으로 개조, 주교 임명하고 기사단들과 피사 & 제노바 상인들에게 구역 배정해줌 (참여 안한 베네치아에겐 없음. 이에 항의..) 개선식 후 루이는 아크레에 가있던 아내 마가렛과 다른 가족들 부름. 한편 5차 십자군 때와 달리 예루살렘 왕국이 아닌 예루살렘 총대주교 휘하 대주교구 설치, 시리아의 무슬림 대한 직접적인 공격 기지로 사용[461] 아이유브, 다미에타 함락 소식에 경보 (앗 나시르 알 암) 발동. (아쉬문 타나에서?) 후퇴하는 파크르 앗 딘의 병력과 마주친 후 그의 공개적으로 후퇴를 비난하고 해임하지만 이내 그의 충성심을 높이사 사령관으로 재선임. 한편 루이, 보급품 부족해지고 역병이 발생하는데도 동생 알퐁스의 도착하면 상류 향해 진격하려는 생각으로 나일 강의 범람기 끝나길 기다림. 튀르크 기병대가 주기적으로 다미에타 외곽의 십자군 진영 기습해오자 수비대가 버리고 간 투석기 24대를 이용해 십자군 전체 수용 가능한 방책 건설하고 참호 파서 방어[462] 십자군이 이집트 상륙하는 등의 시기에 앗 나시르는 튀르크인 후궁 사이에서 얻은 막내아들 알 무아잠 이사에게 카라크를 맡기고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를 만나러 감. 한편 그와 정실 부인 아슈라 카툰 (알 카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인 알 암자드 하산과 앗 자히르 샤디가 이복동생 이사를 감금하고 전자는 칼리파의 알 만수르 주둔지에 나타나 (부친의 제안을 재차 꺼내며) 이집트 영지 대가로 카라크 항복 제안한 것. (본래 후처 소생을 편애하는 부친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아이유브는 즉시 환관 바드르 앗 딘을 카라크 총독으로 임명해 파견했고 이후 앗 나시르의 동생들이 이끄는 카라크 병력이 이집트 진입하여 알 만수라의 나일 강 서안에 주둔해 십자군의 측공 대비[463] 11월 22일이라는 기록도. 루이의 왕비 마가렛과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소수의 병력과 다미에타에 남음[464] 카이로 총독인 자말 앗 딘 모흐센과 아미르 파크르 앗 딘을 소환하여 '위독하지만 살아있는' 술탄의 조서를 꾸며 후자를 신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이유브가 신임한 바흐리 맘루크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를 히신 카이파의 투란샤에게 파견해 정권을 이어받으라는 급보를 알림. 이후로도 아이유브의 죽음 숨김, 결국 진실이 새어나갔을 때에 투란샤가 시리아 남부 당도한 상태라 큰 일 없이 넘어감[465] 프러시아인중 기독교 개종 안한 나탕기아인과의 전투. 포로 잡힌 54명의 기사 학살됨[466] 6일이라고도. 이집트 기병대가 앞길 가로막고 전투 벌이나 기사들에게 밀려 후퇴. 이에 선발대를 맡았던 (미래의 기사단장) 르노 드 비시에 휘하의 템플러들이 루이의 명령에 불복하고 튀르크 기병대를 멀리까지 추격하다가 이집트측 지원군에 고립될 뻔하고 겨우 귀환하기도[467] 알레포의 유수프와 모술의 바드르 앗 딘 룰루의 방해를 우려하여 알레포 ~ 홈스 구간 우회, (현재의 시리아 - 이라크 국경 따라 내려오며 아나 거쳐 시리아 사막 건너 다마스쿠스 향하느라) 오래걸림[468] 당시에는 아쉬문 운하라 불렀다고 함,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군대는 만수라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기데일라에서 운하를 두고 십자군과 대치하며 주둔[469] 자인 앗 딘 알 하피지의 사절, 몽케 칸 접견. 이듬해 말엽 몽골의 휘장 (탐가, 니샨)과 귀환[470] 1월 4일 늦게 다마스쿠스 근교의 쿠사이르 당도, 마중나온 총독 자말 앗 딘이 설치해둔 왕실 막사에서 하룻밤 보내고 다음날 화려하게 입성. 도시의 아미르들과 유력자들의 지지 유도 위해 거금 분배해줌. 시타델에서 10만 디나르의 보물 발견하자 카라크에 인원 파견해 더 모으게 함. 한편 파리스 앗 딘은 그대로 이집트 향한 듯[471] 6일이라고도. 새벽 틈타 십자군이 여울 건넘. 템플러들이 선두,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가 잉글랜드 병력과 함께 중간, 루이가 후위 맡고 부르고뉴 백작 위그는 십자군 진영 지킴. 생각보다 수심이 깊어 말이 헤엄쳐야 했을 정도였고 강둑이 가파르고 진흙으로 미끄러워 몇몇 기사들 낙마해 익사. 도하 지연되는 와중에 로베르, 자신이 건너고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고 서로 연락하며 군대 분산시키지 말라는 루이의 명령과 신중하라는 템플기사단장 기욤의 조언에도 먼저 출격 (윌리엄 2세 역시 탐탁치 않았으나 로베르가 강력히 주장했다고도). 이에 루이는 템플러들에게 지원 나서게함. 로베르, 먼저 건넌 6백의 기사들과 운하 방어 맡은 3백여 튀르크 병력 격파하고 해뜰 무렵 이집트 진영 습격, 템플러들 역시 뒤쳐질세라 출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이집트 진영 혼란에 빠짐. 파크르 앗 딘, 아침 목욕 도중 갑옷도 안 걸치고 병사들 독려하기 위해 나왔다가 템플러들과 마주쳐 두차례 칼을 맞아 전사. 이후 닥치는대로 보이는 모든이 학살한 후 그들은 기세를 몰아 (혹은 브르타뉴의 피에르의 주장에 따라) 만수라 진군. 템플기사단장 기욤은 주저했지만 겁쟁이냐는 말 듣자 출격, 이로써 6백여 기사들 모두 후퇴하는 이집트 병력 추격하며 만수라 향해 돌격.[472] 샤자르 알 두르, 바이바르스와 파리스 앗 딘에게 지휘권 넘김 (처음으로 바흐리 맘루크가 군부 장악). 성문 열어놓고 십자군 기다리자는 그의 주장 수용. 로베르, 이집트 측이 도시 버렸다고 여겨 시내로 돌격하나 복잡한 시가지 내에서 길 잃음. 바이바르스, 군대와 주민들 규합해 좁은 길따라 반격 가하자 십자군 대패. 로베르, 민가에 피신했다가 살해되고 윌리엄 2세 전사. 290명의 템플러들 중 기사단장 기욤 포함 5명 생환, 브르타뉴의 피에르 역시 부상 입고 기데일라로 철수. 지원군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여전히 운하 위에 다리 놓기 위해 기술자들을 감독하던 루이는 서둘러 지휘권 인수하고 반격 나서 돌격하지만 카이로 수비하던 병력까지 합세하여 불어난 맘루크 기병대에 격퇴되어 운하 앞까지 밀려남. 이후 맘루크 군대의 공격에 십자군 큰 피해 입고 일부는 운하 건너려 하다가 익사해 병장기가 떠다니지만 루이가 결연히 버티자 용기를 회복한 병사들이 결사 항전하여 오후 3시 즈음 맘루크들 철수. 아이유브측의 그리스의 불 공격으로 지연되던 다리가 해지기 전에 겨우 완성되자 석궁병들이 건너와 전멸 모면[473] 투석기 14척 포함한 여러 목재 모아 방책 세우고 참호 파서 적침 대비. 피해 줄이고 북안으로 철수하는 것이 현실적이었지만 큰 희생을 치르고 확보한 교두보를 포기할 시의 사기 저하를 우려한 듯. 또한 아이유브 측 내분 기대함[474] 금요일 하루종일 맹렬히 공격, 이에 십자군은 맘루크 보고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다고 기록. 좌익의 앙주 백작 샤를과 중앙의 키프로스 병력이 버텨내고 루이는 수세에 몰린 우익의 템플러 및 프랑스 병력을 구원. 푸아투 백작 알퐁스, 적에게 고립되나 가신들에게 구출됨. 3일전 눈 하나를 잃고도 붕대 감은 후 다시 전장으로 달려갔던 기욤, 이번엔 그리스의 불 던지며 싸웠으나 튀르크 병사들이 그에 굴하지 않고 덤벼들자 나머지 눈도 잃고 전사. (혹은 나머지 눈 잃고 그 부상 도 또한 구호기사단장 기욤이 카이로에서 옥살이 하는 동안 대리로 기사단 이끌던 장 드 로나이 전사. 십자군은 운하 북쪽 기존 진영 석궁병들의 엄호 사격 하에 버팀. 수백의 기사들과 (십자군 측에 따르면) 약 4천의 이집트 기병 전사[475] 2월 25 혹은 27, 28일이라고도. 이로써 이집트 군을 궁지에 몰며 아미르들 사이에서 내전 기대하던 루이의 계획 무산됨. (투란샤가 오는 것 몰랐을 가능성) 다만 투란샤는 바흐리 맘루크들을 명예롭게 대해주고 의지하라는 선왕의 충고가 담긴 유언장 무시하고 자신의 맘루크 (무아자미)들을 요직에 앉히고 어릴 때부터 동행한 흑인 환관 둘을 각각 근위대장과 집사로 임명함. 또 촛대를 칼로 자르며 바흐리 맘루크 아미르들의 이름을 외치는 등 기행을 벌이자 사이가 악화됨[476] 건기로 마할라 운하의 수위가 낮아졌음에도 육로로 우회하여 나일 강에 전함 띄워 십자군 고립시킴. 다미에타로부터의 보급선 차단되고 이에 만수라의 십자군 굶주리고 전염병 엄습. 들판과 운하는 시체로 가득, 떠내려온 시체가 십자군의 배다리에 차곡차곡 쌓임. 두 차례에 걸쳐 이집트 함대가 다미에타발 보급선을 차단하며 식량 사정 악화되자 죽은 말, 당나귀, 노새 고기 먹다가 결국 개나 고양이 먹는 지경에 이름. 일부 십자군 투항하기도. 연대기 작가 장 드 주앙빌, 영양 부족으로 괴혈병 걸려 썩어 곪아 들아가는 부위 수술하는 '이발사'들과 산통에 시달리는 여인처럼 울부짖는 병사들의 상황 기록.[477] 헨리와 루이의 아내들은 서로 자매지간, 따라서 두 국왕은 동서지간[478] 부상자들과 병자들은 함대 승선, 나머지 병력과 기사들은 강 따라 육로 행군[479] 4월 4일 밤이라는 기록도. 루이, (고결하게도) 체포를 면하기 위해 배에 오르라는 제안 거절하고 보병들과의 고행 함께하기로. 후퇴 은폐 위해 운하 남쪽 진영의 막사들은 그대로 두었으나 결국 정찰대에 발각됨. 루이, 기술자인 조슬랭 드 코흐누에게 배다리의 밧줄 잘라 파괴 명령하나 그는 적들이 몰려오자 혼비백산하여 임무 버리고 도주. 이에 다수의 이집트 병력이 손쉽게 다리 건너 추격해와 하루종일 십자군 괴롭힘. 한편 이질에 걸린 루이는 병세가 심각해져 바지에 구멍 뚫기에 이름[480] 다미에타와 만수라의 중간 지점인 쉬림사흐 지나며 한계 체감, 필리프 드 몽포르를 술탄에게 보내 해변까지의 안전 귀환 대가로 다미에타 반환하기로 합의. 십자군 행렬은 파리스쿠르부터 쉬림사흐까지 길게 늘어선 듯. 일설에 의하면 매수된 십자군 장교 마르셀이 루이가 프랑스 군 대열을 말타고 지나며 루이가 항복 명령했다고 소리치자 대부분 무기 내려놓음. 그리고 맘루크 군대가 공격해오자 전열 붕괴되어 수천 전사. 근위대장 지오프리 드 사르지니의 인도 하에 인근 모이아트 압달라 (메니아드 앗 나시르)의 버려진 저택에 피신해 있던 루이는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지저분한 헛간에서 환관 앗 살리히에게 체포됨. 바이바르스, 몸값 받아내거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십자군 한군데 모아 남하, 행군 못하는 병사들 학살됨. 루이, 쇠사슬에 묶여 고관인 이브라힘 이븐 루크만의 관저에 환관 사비흐 알 무아자미의 감시 하에 샤를과 알퐁스는 다른 귀족들 함께 감금됨. 투란샤가 보급 담당, 나머지 수천의 포로 수용하기 위해 만수라 외곽에 따로 진영 설치. 루이의 스카프 (코이프)는 시리아 각지에 전시됨. 투란샤, 루이에게 예루살렘 왕국 항복 요구하나 그는 주권자인 콘라트만이 가능하다고 변론. 무슬림측 기록 의하면 2만여 포로 및 7천 전사 혹은 익사했다고 함[481] (사렌사 = 쉬림사흐?) 장 드 주앙빌, 선박으로 이동하던 중 4척의 이집트 전함들이 접근하자 항복. 즉결처분 면하기 위해 루이의 사촌이라 둘러댐. 한편 가까스로 잡히지 않고 육로 행군 중이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로베르와 교황 특사 외드 드 샤텔누프는 지쳐 쓰러질 즈음 버려진 작은 배 한 척 발견해 용케도 다미에타 당도. 한편 이날 루이의 왕비 마가렛은 다미에타에서 아들 장 트리스탕 (슬픈 장) 출산. 루이 소식 들은 후 절망하여 사라센 인이 가득해지는 악몽 꾸며 도와달라는 외침을 연발하다가 5월 초엽 루이에 앞서 장과 함께 아크레로 떠남[482] 이라크 출신의 장교들에게 이 일을 맡김. 한편 루이 역시 다리 망가뜨리는 용도의 톱니가 맞물린 고문기구 드리밀며 고문 위협 당하기도[483] 한편 다미에타의 왕비 마가렛과 지도자들은 루이의 몸값 마련에 나섬. 곧바로 도시 떠나려는 피사와 제노바 상인들에게 그 대가로 36만 디나르 납부 및 성안의 모든 식량 챙겨가지 말 것 요청함[484] 한편 투란샤는 킹메이커이자 태후인 샤자르 알 두르가 선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보석을 빼앗으려 위협, 이에 샤자르는 맘루크 아미르들에게 불평[485] 투란샤가 파리스쿠르의 왕실 막사에서 주재한 승전 축하 만찬에서 인사 배치 놓고 말다툼 벌어졌는데 샤자르 알 두르의 불평과 함께 만찬 말미에 바이바르스 주도 하의 바흐리 맘루크 아미르들이 술탄에게 돌격, 칼을 휘둘러 투란샤의 손을 베어버리고, 이후 투란샤는 인근 나일 강변의 목재 망루에 피신하지만 맘루크들이 불을 지르자 뛰쳐내려와 강변의 진흙탕 방면으로 도망가던 중 한 맘루크가 던진 창에 갈비뼈 부위를 맞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서 맘루크 아미르들을 향해 양위하고 자지라로 은퇴하겠다고 애원하지만 파리스 앗 딘 혹은 바이바르스가 물에 뛰어들어 살해. 이후 파리스 앗 딘은 술탄의 심장을 도려내어 루이에게 보여주며 칼을 들고 보상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한편 예루살렘 총대주교 로베르가 파리스쿠르에 당도해 석방 협상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투란샤가 보장한 안전 약속을 맘루크들이 파기하여 오히려 체포된다. 다만 루이의 결연함에 감탄한 맘루크들이 협상 재개한다.[486] 80만 이집트 베잔트 = 40만 리브르. 그 절반 납부와 다미에타 반환과 함께 석방되기로, 나머지 금액은 아크레에 있는 동안 마련하는 것으로 협상체결.[487] 루이, 맘루크 지도부와 다미에타 입성. 루이의 전쟁 비용에서 17만 7천 리브르 (35만 4천 베잔트) 먼저 지불되고 나머지 2만 3천 리브르는 템플기사단이 마련하기로. 납부 완료될때까지 그 증표로써 왕제 알퐁스가 (최대 9월까지) 다미에타에 인질로 남아있기로 (다른 기록에는 루이와 함께 출항했다고도...)[488] 다미에타 주의 공식 기념일. 장 드 주앙빌 대동. 폭풍 뚫고 저녁 무렵 아크레 도착한 후 귀족 회의 열고 속히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모후 블랑슈의 명령 거부. 이후 아사신 사절이 요구한 금전 요청 거부[489] 한편 카입 (설교자) 아실 앗 딘 알 이드리시가 새 정권 대한 충성 다짐받으려는 의도로 다마스쿠스로 파견되었으나 총독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는 거부[490]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자샨키르 앗 살리히. 한편 바그다드 칼리파는 여성 군주 옹립 비난[491] 7월 6일이라는 기록도. 만수라 전투 때 부상 입음[492] 우마르는 본래 카이로 시타델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투란샤가 이집트 당도한 후 사촌인 그를 요르단의 샤우바크 성채로 옮김. 이후 정변 소식이 퍼지자 카라크 총독 알 사와비가 자립하기 위해 우마르를 석방하고 카라크로 데려와 얼굴마담 격으로 왕공이라 선포한 것[493] 자말 앗 딘이 아이유브 왕공 추대하지도 않고 모호한 태도로 있자 쿠르드 맘루크 (카이마리야)들은 그가 기존 아이유브의 맘루크들과 공모해 자신들을 없애려 한다고 의심, 두 지휘관인 나시르 앗 딘 알 카이마리와 디야알 앗 딘 알 카이마리는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에게 더 많은 영지를 대가로 도시 넘기겠다고 연락[494] 신속히 남하해 9일 다라야 당도해 주둔, 다음날 새벽 남문 밥 알 사기르 맡은 나시르 앗 딘이 문 열어주자 입성. 자말 앗 딘, 시타델로 피신했으나 곧 항복. 앗 나시르 유수프, 기존 아이유브의 맘루크들 체포해 가두고 영지 압수하여 카이마리야에게 넘겨줌. 자말 앗 딘 역시 감금되었으나 곧 풀려나 회유하고 예복 하사함.[495] 맘루크 장교들이 카이로에서 비슷한 배신 일어날까 우려[496] 앗 나시르 유수프와의 일전 다가온다고 체감하여 이즈 앗 딘 아이바크를 술탄으로 추대한 것. 알 말리크 알 무이즈 칭호 사용, 카이로 거리의 환영식 이후 시타델에 거처 마련[497] 무조건 항복 요구했는데 알 무기트가 그럼 자신이 갈 곳이 없다며 그의 뜻대로 통치할테니 총독위 요구, 험준한 카라크 요새 공격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유수프가 이를 수용[498] 알 카밀의 아들인 알 마수드 유수프의 6세 아들(이라고 함). 혹은 알 카밀의 증손자라고도. 맘루크 아미르들의 회의 끝에 아이유브 가문 대한 왕당파 잠재우고 앗 나시르 유수프의 침공 명분 분쇄하기 위한 취한 조치. 다만 실권은 여전히 아이바크가 지님[499] 성지에 남은 기사들에게 자신의 보물 나눠주고 십자군 종군 도중 사망한 장인 레몽 7세의 툴루즈 영지 계승 위해 그곳으로 직행[500] 아이바크가 파견한 루큰 앗 딘 카스 투르크 알 카비르의 군대가 앗 나시르 유수프가 가자에 파견한 선발대와 마주치자 혼비백산하여 시나이 반도 너머 앗 살리히야로 철수. 아이바크의 처벌 두려웠던 카스 투르크는 동료인 시하브 앗 딘 알 카비르와 우마르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선포[501] 바알벡의 아미르에게는 디야르 무다르의 영지 약속해 도시 얻음. 바니야스는 투란샤 사후 다시 돌아와 부친 알 아지즈 우스만의 맘루크들 설득해 도시를 장악했던 앗 사이드 하산이 재차 이집트로 도주하자 손쉽게 알레포 영토로 편입됨[502] 200명의 기사 포함. 앗 나시르 유수프가 동맹 유도 위해 예루살렘 왕국 복원이라는 통큰 조건 내걸었음에도 루이는 맘루크 측이 자신과의 협정 지키고 포로 석방하는지 지켜보고 그러지 않으면 흔쾌히 승낙하겠다고 답변, 이 상황 파악한 맘루크 측 결론. 이후 루이에게 유수프 대한 동맹 제안했으나 그는 모든 십자군 석방될 때까지 거부하겠다고 답변. 한편 포로들과 아크레 당도한 이집트 사절단에게 루이는 동맹 원한다면 라 포르비에 전투 때 전사자들의 시신과 강압적으로 개종된 이들을 포함한 이집트 내의 모든 기독교도 아이들과 남은 20만 리브르의 몸값 삭감의 조건 요구. 2년 후 수용됨[503] 예고도 없이 기습 공격해 격파, 패잔병 행렬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짐. 파리스 앗 딘, 추격하지 않고 귀환[504] 알레포의 맘루크 (아자지야, 나시리야)와 투란샤의 맘루크 병력, 다마스쿠스 주둔군, 텔 바쉬르의 아미르 알 아슈라프 무사, 아직 살아있던 살라딘의 서자 누사라트 앗 딘 마르완, 그리고 하마의 알 만수르 무함마드 2세가 파견한 지원군 등으로 구성됨[505] 마침내 그들의 위험성을 깨달은 블랑슈는 진압 명령. 한편 부르주 당도해 성직자들이 도주한 것을 확인한 목동 십자군은 유대인 재산 압류하고 시나고그 습격, 시내 약탈. 이에 시민들이 민명대 조직해 그들을 감금하려 했지만 오히려 성문 부수고 빠져나감. 민병대는 그에 굴하지 않고 목동 십자군을 추격, 비르누브 쉬르 쉐르에서 따라잡아 전투. 자크 및 상당수 전사시킴. 이후 일부는 론 강 따라 마르세유까지 이르렀고 나머지는 잉글랜드령 보르도 향했으나 가스코뉴에 주둔하던 시몽 드 몽포르에게 패배. 지도부는 지롱드 강에서 익사당함. 한 지도자는 잉글랜드 가서 선동하려 했으나 목동 십자군의 파문 소식 들은 목동들이 그를 죽임. 헨리 3세, 워든에게 잔당 처리 맡김. 일부는 속죄 위해 십자군 종군 서약하고 성지로 향함. 한 성직자 연대기작가는 목동 십자군이 비밀리에 술탄과 기독교를 '무함마드교'에 종속시킨다는 밀약을 맺었다고 기록[506] 봄. 유수프, 루이에게 재차 사절 파견해 동맹 제안 이에 루이는 장 드 발렝시엥 이집트로 파견해 아이베크에게 남은 십자군 포로 반환 안한다면 유수프와 동맹하겠다는 의사 전함. 이를 아이바크가 수용한 결과 장이 3천 포로와 아크레 귀환. 동시에 구호기사단장 기욤이 풀려났다고도 한다 / 키프로스의 앙리 1세, 안티오크 공 보에몽 5세의 딸 플래정스와 결혼. 이듬해 둘 사이에서 아들 위그 태어남 / 이탈리아의 만프레드와 독일 장군 베르톨드 폰 호엔베르크가 독일의 콘라트부터 시칠리아 왕국 탈취하려 한다는 의혹에 중부 이탈리아 (테라 디 라보로) 반란. 이에 교황 특사 카파치오가 그 일대 대한 교황의 군사적 패권 확립. 교황 인노첸시오 4세, '레그노' 분열시켜 자립적인 귀족들과 도시 코뮌들에게 주어 이탈리아에 교황령의 군사적으로 맞설 세력 없앨 계획. 한편 만프레드는 시칠리아에 군대 보내 충성 여부가 의심되는 피에트로 루포 해임 / 독일기사단국과 프러시아인 대해 동맹인 리투아니아 대공 민다우가스, 기독교 세례 받음. 다만 왕실 및 일부 귀족 제외한 나머지는 이교도로 남은 점은 기사단의 공격 핑계로 이용됨 / 아르수프 영주 장, 예루살렘 왕국 대원수 등극[507] 유수프가 후방의 카라크에 신경쓰이도록 존재하지도 않는 동맹을 팡파레 울리며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고 축하함. 비슷한 시기 유수프 진영에 가담한 이스마일 흔들기 위해 카이로 시타델이 갇힌 그의 두 아들을 석방해 예복을 하사하는 등 내분 유도하나 효과보지 못함.[508] 압바사는 아마 툴룬 왕조와 파티마 왕조 시대 군사 기지였던 빌바이스 의미하는 듯. 이에 허를 찔린 아이바크는 앗 살라히야에서 50km 떨어진 압바사 인근 사무트로 향함[509] 동틀 무렵 양측 군대가 전열 갖춤. 아침 중에 시리아 기병대가 돌격해오자 이집트 진영 붕괴됨, 대부분 카이로로 도주하고 일부는 상이집트까지 도피. 시리아 주력군은 그들 추격하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짐. 이에 아이바크는 파리스 앗 딘과 약 3백여명의 근위대만 대동하고 이집트 포기한채 요르단의 샤우바크 성채로 피신하려 동쪽으로 향함. 그러던 도중 유수프의 깃발들 포착, 병력 적은 것을 보고 그대로 돌격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도박한 듯)했는데 유수프는 겁에 질려 도주. 그러자 그의 아자지야 맘루크들이 갑자기 동족인 아이바크에게 투항. 유수프 대해 충성 유지한 자들은 전사하거나 사로잡힘. 간단히 말하면 시리아군의 공세에도 아이바크의 맘루크 주력은 전열을 유지했고 유수프측 튀르크 맘루크들이 배신하자 유수프가 도주하며 승리한 것. 한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채 추격을 그만두고 주군의 행방을 물색하기 위해 돌아온 알레포의 재상 샴스 앗 딘 룰루는 측근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이바크측 병력을 과소평가하고 돌격했다가 압도되어 부관 디야 앗 딘 알 카이마리와 함께 사로잡힘. 그밖에 앗 살리흐 이스마일, 누사라트 앗 딘, 텔 바쉬르의 알 아슈라프 무사 등도 사로잡힘. 아이유브 왕족들은 명예롭게 대우되었으나 알레포의 재상 샴스 앗 딘 룰루는 아이바크의 면전에 끌려가 후삼 앗 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자리에서 처형됨. 그 직후 디야 알 앗 딘이 뒤따름. 한편 이 사실들을 모르는 시리아 병력은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의 인도 하에 압바사에 재규합, 곧 앗 나시르 유수프가 당도할 것이라 믿고 왕실 막사까지 설치.[510] 마침 금요일, 카이로의 시타델과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사원에선 아이바크의 이름이 쿠투바에 언급됨.[511] 앗 살리흐 이스마일 시절 우스타드 알 다르 (조언자)와 와지르였던 나시르 앗 딘 이븐 야그무르와 아민 앗 다울라 앗 사미리, 전투 초반 시리아 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감옥에서 나와 새 정권 하에서 누릴 권력을 뽐냈다가 돌아온 아이바크의 분노를 사 교수형 처해진 것. 쿠르드 맘루크인 사이프 앗 딘 역시 사형 명하려다 시리아로 추방하는 것에 그침. 쿠라에서 사로잡힌 아이유브 왕족들은 비록 투옥되었으나 별 해가 가해지진 않음[512] 밤 무렵 횃불 든 병사들이 그를 시타델의 감방에서 카라파 공동묘지로 데려가 목졸려 살해됨[513] 뒤늦게 루이의 체포 및 십자군의 실패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제후들이 별 행동을 취하지 않자 농민들이 십자군 나서 루이 구하기로 한 것. 소년 십자군의 선동가 중 일원이었다고 전해지는 자크는 긴 수염과 항상 소매에 감춘 손 (성모 마리아가 하사한 지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짐)을 지닌 60대 노인. 피카르디부터 플랑드르, 이후로 브라반트, 에노, 로렌, 부르고뉴 일대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크 앞에 나타나는 깃발 하에 수만명 군집. 아미앵 시민들이 보급 제공. 그들은 루이를 꾀어 성지로 향하게 한 성직자 계급 적대시[514] 섭정이자 태후인 블랑슈의 초청. 자크, 주교 모자 쓰고 파리 입성. 블랑슈, 그들을 이집트에 파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자크 접견하고 선물 줌. 목동 십자군, 성직자들 사냥하여 센 강에 던지고 파리 대주교 모욕. 파리 대학은 센 강의 다리 폐쇄, 블랑슈 역시 목동 십자군에게 대학 위치한 센 강 서안으로의 도하 금함[515] 이후 교황군이 피에폰테로 진격하나 동부에서 독일-시칠리아 군대가 버텨냄[516] 투르에선 도미니코회 수도원 약탈하고 교회 모독함. 일부 군중들은 그들을 성인들로 믿고 병자를 데려오기도[517] 이후 루아르 강에 던져버림. 주교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모두 목동 십자군 규탄. 이후 부르주와 아미앵 일대에서 유대인 습격하다가 해산됨[518] 바투가 파견한 원정군의 몽골에 대한 군사 개입 이후 바투와 연대한 왕공들이 쿠릴타이 개최한 결과. 우구데이, 차가데이 가문 반발[519] 3명의 추기경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대동[520] 옛 주인으로써 수복하려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앗 나시르 유수프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멀리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유배된 것[521] 1251년이라고도. (2년 전) 자신의 제안에 확답이 오지 않자 루이는 브르타뉴인 이브를 유수프에게 파견. 이에 놀란 아이바크는 호의의 상징으로 코끼리와 얼룩말 보내고 동맹 대가로 남은 십자군 포로 전부를 몸값 없이 석방하고 요르단까지 포함한 예루살렘 왕국 복원 제안. (전통적으로 시리아와의 동맹 지지하며 이 문제로 구호기사단과 전쟁 직전까지 갔던) 템플기사단은 동맹에 반발하나 루이가 공개 석상에서 그 지도부를 꾸짖자 마침내 수긍. 동맹 성사됨[522] 알라무트의 아사신, 그 다음으로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 대처할 수 있는 전권 부여 / 아사신, 자파의 루이에게 화해 제안하는 사절 파견해 선물 바침. 이에 동맹 성사되고 루이의 사절인 브르타뉴인 이브가 아사신의 시리아 거점인 마스야드 (마시아프) 방문 / 파리스 앗 딘, 상이집트에서 벌어진 알 샤리프 하산 앗 딘 쌀랍의 반란 진압한 공로로 알렉산드리아에 봉해짐[523] 레그노 회복 위해 테라 디 라보로의 반군과 전쟁 개시. 만프레드의 권력 및 영지를 타란토 공국으로 제한하고 그가 모계 친척인 란키아스에게 하사한 것 취하[524] 그녀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종질녀. 관직을 이탈리아의 친척들에게 맡기자 현지 제후들 반발. 보에몽 6세, 그녀의 인기 없는 섭정직 종식시키고자 교황에게 성년 일찍 인정해달라고 청하여 법적 효력 부여받음. 이후 루이로부터 기사 서임받기 위해 아크레 향함[525] 루이와 아이바크의 동맹을 알아챈 앗 나시르 유수프는 결단을 내려 우스타드 알 다르 사이프 앗 딘 바크투트 휘하의 다수의 선발대를 가자 인근의 텔 알 아줄에 파견해 양측의 합세 저지하게 함. 유수프 본인은 나머지 군대와 요단강 유역의 저지대 (가우르)의 암타로 남하. 아이바크는 앗 살라히야 주둔하며 파리스 앗 딘 휘하 1천 기병대를 가자에 파견. 다만 이집트와 시리아측 모두 결국 십자군에 이득이 되는 전쟁 원치 않아 몇주간 대치, 그동안 루이는 자파 재차 요새화. 시간 지나며 공동 원정 흐지부지됨[526] 이단 심문관이 이단으로부터 자백 받아낼 시에 고문 제한하는 규정 파기한 것[527] 그에게는 독일왕 필립의 딸인 모후 엘리자베트 통해 호엔슈타우펜 황위 계승 자격 주어짐[528] 습격대는 시리아 북부의 사루즈와 라스 알 아인 약탈. 아미르 알 카밀 무함마드는 포위 직전 히신 카이파로 도주. 동생 알 아슈라프 무사를 바이추 주군인 바투 칸에게 파견해 포위 풀어줄 것 청함. 바투 칸, 포위 푸는 즉시 알 카밀 무함마드가 직접 카라코룸 향하여 대칸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철수 명령. 바이추, 알 아슈라프 무사 당도와 함께 철수. 다만 이미 2만명 사망하고 일대 황폐화됨[529] 우선 쿠히스탄 (아프간 중동부)의 아사신 일망타진 하는 고된 임무 맡음. 훌라구의 본군은 1천팀의 중국인 공성전 전문가들과 몽골 왕공들 휘하 군인 가정들에 부과된 1/5 특별세로 차근차근 준비됨[530] 휘하 장수들과 동맹이 니케아 측에 투항해버리며 불리해진 미카일 2세, 요안니스가 파견한 사절 요르요스 아크로로폴리티스와 1251년부터의 점령지 및 마케도니아 서부 할양하고 양측의 결혼 동맹 재확인한다는 조약 체결. 요안니스는 특별히 테오도로스 앙겔로스의 인도 요구, 보데나에서 에피로스 사절이 요안니스와 만나 이행됨. 함께 인질로 제공된 미카일의 장남 니키포로스는 친왕 봉해지고 얼마후 돌려보내졌지만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로 유배되어 이내 그곳에서 사망. 향년 80세 (추정)[531] 아이바크 혹은 유수프가 순례 제안했으나 루이는 제후들의 조언 대로 리처드 1세의 전례에 따라 거부한 것 / 유수프, 칼리파에게 아이바크와의 중재 요청, 이에 칼리파는 노련한 나짐 앗 딘 알 바디라이 파견. 입장이 좁혀지기 힘들어 몇달을 끈 후에야 분할안 합의됨 / 트라페준타 황제 마누일 1세, 시돈의 루이에게 사절 파견해 결혼 동맹 제안. 루이의 딸 요청했으나 십자군에 자녀 대동하지 않은 루이는 그에게 니케아 제국에 맞서 라틴 황제 보두앵과 결혼 동맹할 것 제안 / 카이사레아 영주 장 2세, 아크레 인근 알 다문 성채를 구호기사단에게 1만 2천 베잔트에 매각. 2년 후에는 아크레에 남은 부동산 모두 매각, 명예 구호기사단원 됨. 장 2세,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동생 위그의 아내 이사벨라 위한 지참금 대줌 / 하프스 왕조의 무함마드, 칼리파 칭함[532] 그는 에게 해 서부 케아 & 세리포스 섬의 베네치아인 영주인 필리포 주스티니아니의 아들 / 마야파리킨의 알 카밀 무함마드, 카라코룸 향해 떠남. 그곳에서 모술과 마르딘의 후계자들과 함께 대칸에게 복종 서약[533]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대부분의 지배자로 승인한 것. 또한 해안 일대 도시들도 맘루크 영토로. 갈릴리까지 주어졌다고도. 다만 나블루스 통해 예루살렘 견제. 아이바크, 카이로에서 옥살이 하던 아이유브 왕족들 (알 아슈라프 무사, 누사라트 앗 딘 등) 석방해 다마스쿠스 향할 수 있도록 허락[534] 바투 칸의 아들 사르타크의 기독교 개종 소식에 도미니코회 수사 루브룩과 바르톨로메오 디 크레모나를 파견해 군사 지원 요청한 것. 그들은 우선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여 얼마전 보두앵 2세 대표하여 카라코룸 다녀온 보두앵 드 에노에게 조언 구함. 이후 통역사 압둘라 대동하고 1235년의 율리아누스 바라트 (서진하지 않고 남은 마자르족 찾기 위해 파견된 도미니코회 수사)의 루트따라 흑해 건넘. 이후 카르피니 루트 따라 여정[535] 그의 명령 혹은 시리아 군대의 의지로 가자에서 다마스쿠스 돌아갈 때 해안으로 행군. 정교회 측 요한 축일 경 자파 외곽 루이의 진영 지나감. 십자군측 석궁병들 유인(혹은 도발)해 소규모 전투 벌였지만 무승부. 이후에 아크레에서도 외곽의 과수원과 정원 일대 약탈 나섬, 이에 출전한 수비대와 잠깐 전초전 벌임. 한편 시돈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라는 첩보에 북상[536] 루이의 이집트 원정 동안 시리아 아미르들이 재차 시돈 수복, 이븐 샤다드에 의하면 그 무타왈리 사드 앗 딘 이븐 니자르가 동굴 성채인 니하 (티론)에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 점령했다고도. 다만 현상유지 평화 조약에 의거해 시돈과 티론 재차 십자군에 반환됨. 다만 제대로된 수비대 파견하기엔 시간 촉박, 이에 시리아 군은 별 저항 없이 입성. 중과부적이라 판단한 소수의 수비대는 일부 시민들과 해안 성채 피신. 장 드 주앙빌에 의하면 남겨진 2천여 주민들 학살되었다고 함. 다만 유수프는 도시 정복하려 시도하지 않고 다마스쿠스 향함. 비보 접한 루이는 자파 요새화 마치면 시돈 재차 요새화 할 것이라 다짐[537] 루이, 티레 머물며 나블루스 습격 계획하나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 군대와 맞닥뜨릴 우려에 대신 내륙의 바니아스 (카이사레아 필리피) 수복 결정. 기사단 포함한 현지 제후들과 지오프리 드 사르지니, 장 드 주앙빌, 프랑스의 대원수 질 드 르 브룅, 궁중 집사 피에르, 에우 백작 알퐁스의 프랑스 군대. 루이 본인은 시돈 직행해 요새화 시작하기로. 앗 나시르 유수프의 무관심 속에 십자군은 필리프 드 몽포르와 현지 제후들이 왼쪽, 구호기사단이 오른쪽, 템플기사단과 프랑스군이 정면 맡아 공격하였고 별 저항 없이 도시 점령. (첫번째 공격은 격퇴되었는데 인근 언덕의 요새 공격하러 가던 후발대가 당도하여 도시 장악하였다고도) 다만 외곽의 알 수바이바 성채 및 성채와 도시 사이의 언덕을 시리아 군이 장악하여 불안정. 십자군, 성채 주변 접근하나 위로부터의 돌 세례를 받은 후 적의 추격으로부터의 엄호 격으로 관목 (키 낮은 나무)지에 불지르고 후퇴. 루이가 그 원정 이끌었다고도[538] 1251년 리보니아 기사단과의 조약 대로. 또한 당시 조건대로 사모기티아를 독일기사단국에 할양. 리보니아 기사단은 메멜에 새로운 주요 거점이 될 성채 세울 수 있게 됨[539] 5월이라는 기록도. 프리드리히와 세번째 부인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아들. 외삼촌 헨리 3세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 본래 프리드리히 다음으로 예루살렘 국왕직 약속받았고 (콘라트는 독일에서 바뻤음으로) 교황 인노첸시오4세는 그와 자신의 조카딸을 약혼시키며 지지하였으나 요절. 이에 교황은 만프레디의 독살 주장[540] 현지 이교도들의 강한 저항에 고전하는 튜튼기사단 돕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지시 및 후원 하에 이루어진 프러시아 방면 독일인 주도 십자군. 여기에 독일 황제 후보인 오타카르 2세가 도움 자청한 것. 기사단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건설[541] 유수프, (바흐리 맘루크 수용으로) 이집트와의 대립 피할 수 없게 되자 카말 앗 딘 이븐 알 아짐을 모술의 바드르 앗 딘 룰루와 마르딘의 아르투크 아미르 알 사이드 가지에게 파견해 양측 간의 누사이빈 대한 영토 분쟁 중재하고 맘루크와의 전쟁 터질 시 지원 확답 얻어냄 / 루이,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와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의 딸 시빌라와의 결혼 주선 / 니케아 사절단이 로마 당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총대주교 대신 니케아 총대주교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적법한 소유자들에게 돌려준다면 신학 측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 인정하고 필리오케 문제에 대한 동방 교회의 공의회 소집하겠다는 요안니스의 뜻 전달. 인노첸시오 4세, 자신은 보두앵 2세을 심판 위해 소환할 수 없고 다만 그리스 교회가 복속한다면 신학적 논쟁에서 직접 중재 맡을 것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복될 시에 니케아 총대주교가 그리스와 라틴 교회 모두 관장하도록 허가하겠다고 답변 / 유수프, 룸 술탄 카이카우스 2세의 여동생과 결혼[542] 2일 혹은 9월 18일이라고도. 아이바크, 더 많은 이크타 요구하는 등 지나치게 세력 강해졌다 판단한 바흐리 맘루크 대신 1251년 편입된 알레포의 맘루크 신뢰. 파리스 앗 딘이 약혼녀인 하마의 공주 (알 만수르의 누이이자 현 술탄 알 아슈라프 무사의 이모)와 시타델 입주 요청해오자 이 결혼으로 술탄 등극의 혈연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판단한 아이바크가 암살 결심. 아이바크가 시타델 입주 수용하자 파리스 앗 딘은 바이바르스와 함께 진입. 이에 아이바크의 맘루크들이 후자 두려워하며 주저, 아이바크 분노. 그대로 나가려는 파리스 앗 딘에게 긴급한 사항 논의할 것이 재차 시타델로 부름, 바이바르스의 만류에도 혼자 궁전 들어서는 순간 쿠투즈가 이끄는 맘루크들이 찔러 죽임. 주군이 돌아오지 않자 바이바르스는 아미르들과 시타델 향함, 파리스 앗 딘의 수급 던져지는 것 보고 상황 접한 바흐리 맘루크들은 회의 끝에 밤을 틈타 시리아로 도주, 남은 자들은 다음날 아침 아이바크의 숙청 명령으로 투옥 혹은 사형됨. 압수된 바흐리 맘루크들의 재산은 새로 집권한 아자지야 맘루크에게 분배됨. 다른 기록에 따르면 했다고도 / 아르수프 영주 장, 바일리직을 사촌 자파 영주 장에게 넘김[543] 무사는 알 파리스와 결혼할 뻔 했던 이모와 은퇴. 이후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했다고도. 아이바크, 알 가쉬야 구절 읊는 독경사들과 함께 화려하게 카이로 시내 행진. 한편 일부는 룸 술탄국으로 가서 고용되고 7백여명은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의 주도 하에 가자 당도해 유수프에게 망명 및 고용 신청. 이에 유수프는 직접 요단강 유역의 암타로 남하하고 가자에 환영 위한 분견대 파견하며 화답. 이에 유수프가 두번째 이집트 침공 꾀한다고 여긴 아이바크는 압바사 (빌바이스)로 북상. 하지만 유수프는 상이집트의 이즈 앗 딘 알 아프람이 상이집트에서 일으킨 반란 (잠깐동안 바흐리 맘루크가 상이집트 장악)과 바이바르스 휘하 맘루크들의 설득에도 재정비한 군대로의 모험 꺼림[544] 교황 인노첸시오 4세, 시칠리아 왕국의 교황 직할령 편입 포기하고 다른 호의적인 군주 물색. 이에 헨리 3세는 호엔슈타우펜 황가 대신 교황청의 동맹으로서 막내아들인 레스터-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으로 추천한 것. 이후 교황에게 사절 보내어 설명하고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싸움도 십자군 지위 부여받았음으로) 십자군 연기 허가됨[545] seneschal. 프랑스군 유지비로 매년 4천 리브르 국고에서 차출. 아크레 외에도 카이사레아, 자파, 시돈 등 요새화된 상태. 프랑스 함대, 키프로스 근해에서 풍랑 만나 난파 위기에 처하나 왕비 마가렛이 성 니콜라스에게 기도하자 잦아들었다고함. 한편 카이사레아 영주 장 2세 등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에게 도움 요청[546] 향년 26세, 말라리아. 콘라딘이 모후와 독일에 있는동안 독일인 장군 베르톨드가 아풀리아, 시칠리아는 피에트로 루포가 섭정.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그 둘의 '보호자', 하지만 재차 시칠리아 왕국 대한 교황령 지배 주장하며 군대 이끌고 아나니 향함. 시칠리아에선 봉기가 일어나 시민들이 각 도시에 코뮌 선포해버림.[547]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 도착하기 직전[548] 그의 아들 테오도로스는 필라델피아에서 룸 셀주크와 협상 중. 큰 간질 겪고 죽음 임박함을 깨닫자 후계 구도 안정 위해 아들과 가까운 소아시아 방면으로 향한 것으로 추정됨[549] 베르톨드, 만프레드를 교황에게 파견해 협상하게 하나 그는 콘라딘이 성년 이를 때까지 인노첸시오 4세를 섭정으로 인정하기로 함. 베르톨드는 이를 거부하지만 만프레드가 돌아오자 결국 사임. 만프레드, 레그노의 바일로 등극. 다만 교황군이 캄파니아 주둔하자 의심 깊어짐[550] 부친의 바타체스 대신 외조부의 라스카리스를 이름으로 씀. 재능 있지만 간질 심각해 불안정[551] 시칠리아 국왕 콘라딘의 섭정인 교황편으로 가담한 독일 장군 베르톨드 측의 이탈자들로 증원된 결과. 이로써 만프레드가 아풀리아 지역 석권하게 되고 교황군 사령관 데 피에스치는 토리아에서 급료 체불된 병사들의 반란을 맞아 철수[552]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조카 리날도 콘티. 만프레드가 남부 이탈리아 석권하자 시칠리아의 피에트로 루포 역시 그에게 복속 (권위 인정)한 상태[553] 천한 출신의 소년기 친구 요르요스 무잘론이 귀족들의 질투 속에 '대 도메스티코스'로 임명됨. 테오도로스의 외삼촌들인 마누일과 미카일 고위직으로 복권됨[554] 아이바크 죽이고 그를 불러들이겠다는 것 (충분한 보상 대가로)[555] 바투 칸 사망, 장남이자 정교회 기독교도인 사르타크 계승 / 아카이아 공 기욤 2세, 사별한 아내 카테리나 델라 카르체리의 에우보이아 영지 주장하며 현제 사두정 제후들과 전쟁. 아테네 공 기 1세 및 살로나와 메데니차 (보도니차)의 영주들은 후자 편에 가담[556] 만프레드, 친교황파로 의심되는 필리포 루포를 남부 이탈리아에서 축출. 시칠리아에서도 자치 코뮌들의 반란으로 지배력 상실. 만프레드, 콘라딘의 삼촌이자 독일에서의 후견인인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2세에게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한다는 뜻 전달[557] 옥타비아노, 아풀리아 침공하나 동맹이던 독일 장군 베르톨드가 이탈, 만프레드를 루체라에서 공격하나 오히려 포자에서 포위됨. 결국 전쟁 포기하고 만프레드를 콘라딘 위한 남부 이탈리아의 교황측 섭정으로 인정한 것. 이에 만프레드는 (호의의 표시로, 어차피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시칠리아를 교황에게 양도[558] 매주 화요일 아자지야 맘루크 대동하고 사냥 위해 압바사 진영 나서는 아이바크의 습관 이용하기로 하나 그가 전모 파악했다는 소문 돌자 연루된 이들 (아자지야 맘루크의 대부분) 도주. 이로써 다시 전운 고조되고 유수프는 재차 칼리파 찬스 이용[559] 4월 9일이라고도. 본래 안티오크 총대주교 오피조가 선출되었는데 교황이 직접 지목하며 무산됨. 자크는 프랑스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후에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되는 양반. 대신 오피조에게는 줄어드는 안티오크 교회 재산 상쇄 위해 키프로스나 안티오크 공국의 공석이 되는 교회 영지 주어지기로[560]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파견한 나짐 앗 딘 알 바디라이의 중재 하에 유수프가 바흐리 맘루크 고용 않기로 합의. 바흐리야에 이어 아자지야까지 합류하며 군세 커진 유수프에게 아이바크는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 북부의 알 아리쉬까지의 영토 할양. 유수프, 팔레스타인 남부 일대를 바흐리 맘루크에게 이크타로 하사. 키티크를 신임 예루살렘 총독으로 봉하고 바이바르스는 120명의 기병과 나블루스 및 지닌 일대 하사. 다른 기록에 의하면 유수프가 바흐리 맘루크 고용 않겠다고 약속하여 바이바르스 등 바흐리 맘루크들이 카라크의 우마르에게로 망명했다고도, 혹은 아이바크가 쿠데타 우려해 바이바르스 일당을 다마스쿠스로 보냈다고도[561] 만프레드, 필리포 루포 암살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반란 진압하여 권력 공고히함 / 연말. 불가리아의 차르 미카일 아센의 사촌 칼리만이 그를 살해하고 등극. (칼리만 아센 2세) 하지만 미카일의 장인이자 베오그라드 주둔 헝가리 군 사령관 로스티슬라프의 남하에 도주, 지지자들에게 버림받고 살해됨 / 교황 알렉산데르 4세, 타보르 산과 케이몽 구호기사단에 하사. 안티오크 공국의 쿠사이르 성채 보강됨[562] 키프로스에서 아크레 당도한 것. 낙타로 구성된 대상들 약탈[563] 기존에 두 주교구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지시 하에 구호 & 템플기사단에 자금 대어주던 상태[564] 예루살렘 부근 성 사바라는 정교회 수도원이 두 상인 공동체의 경계점인 몽주아 언덕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놓고 갈등이 벌어진 것. 본래 베네치아 측이 차지했는데 밤을 틈타 제노바인들이 빼앗음. 이에 베네치아 인들이 항의하자 다음날 아침 제노바 인들이 피사인들과 함께 베네치아 구역 침공해 약탈. 그러다 양측은 중재안 받아들이나 이미 티레의 필리프 드 몽포르가 이번을 계기로 베네치아 인들을 축출한 상황. 이에 제노바인들이 중재 나서나 별 효과가 없자 베네치아 인들은 그들이 오히려 필리프를 부추겼다며 비난, 양측의 불화 재점화. 아크레의 베네치아 지휘관 마르코 주스티니아니, 필리프가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우려하는 섭정 자파 영주 장과 제노바 측에 암살당할 뻔한 대원수인 아르수프 영주 장과 동맹. 그외에 성전 & 튜튼기사단과 아크레의 마르세유 상인들도 그에 가담했고 피사인들도 제노바 배신하고 붙음. 구호기사단, 카탈루냐 상인들, 티레의 필리프 드 몽포르는 제노바 편 가담[565] 다만 9월 6일 니코시아 대한 권리는 뺴앗김[566]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장이 다마스쿠스 측과 동맹하고 아슈켈론 습격하자 이에 이집트 군대가 자파 포위. 이에 장이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바일리 직을 다시 사촌인 아르수프 영주 장에게 넘겼다고 함[567] 클르츠 아르슬란 4세가 이란의 훌라구 진영 찾아가 복속, 술탄으로 서임되어 아나톨리아 방면 원정군과 동행한 결과. 카이카우스 2세는 휘하 튀르크멘과 라오디케아 피신.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몽골측 총독 (페르반) 무인 앗 딘 술레이만과 함께 콘야 지배[568] 하지만 이미 유수프가 술탄 칭호의 특권으로 명분 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바크가 파견한 대표단이 칼리파 궁정에 도착한 상황. 진군해오는 몽골군에 대해 양측 모두의 지원이 필요한 알 무스타심은 답변 미룸. 따라서 카말 앗 딘은 4달 넘게 바그다드 머뭄[569] 5일 혹은 20일이라고도. 쿠르샤의 명령에 의해 무카담 앗 딘이 항복. 훌라구의 무슬림 서기관 주베니가 도서관 감정으로 선별되어 카라코룸으로 이성된 서적 외에 나머지 '이단적'이라 판명된 서적들 소각됨. 일부 장교들이 저항하였으나 함락되었다고도[570] 그 전이라고도. 성년된 기념, 프랑스 영지 선택한 장남 필리프 대신 후계자 지목 / 몽케 칸, 아사신 이맘 쿠르샤에게 카라코룸 떠나 이란으로 돌아가 아직까지 항전하는 람바사르와 기르두쿠 성채의 항복 유도 명령. 하지만 복귀 도중 몽케 칸은 훌라구에게 그와 가족들 모두 처형하고 '이단' 근절 위해 모든 아사신 모아 살해할 것을 지시[571] 연초 무렵 카라코룸에서 복귀, 철저한 몽골의 동맹으로 처신하면서도 디야르바크르 지역 지배력 강화 위해 약화된 룸 술탄국으로부터 아미다 빼앗음 / 미카일 아센의 매부 (여동생 마리아의 남편)이자 보야르 중 한명인 미초 아센이 불가리아의 차르 등극. 하지만 세르비아 장군 로스티슬라프가 비딘 장악하고 황제 칭함. 터르노보의 귀족들은 둘다 지지하지 않고 콘스탄틴 티흐 선출, 그가 승낙하며 단독 차르로 등극. (콘스탄틴 티초미르로도 불림, 로스티슬라프가 옹립했다고도) 미초는 가족들과 터르노보 탈출, 결국 메셈브리아 바치며 니케아 측에 망명 / 몽케 칸, 트란스옥시아나의 차가타이 칸국 왕공들과 킵차크 칸국의 바투에게 훌라구의 알라무트 원정 돕게함 (거의 강요) / 카라코룸 향하던 룸 술탄 카이쿠바드 2세, 도중 사망. 동행한 와지르 바바 타그라이 용의자 지목되나 증거 전무 / 훌라구, 콜레라로 약화된 람브사르 성채 함락. 생존자 전원 처형 / 만프레드, 시칠리아의 반란 지역 수복하고 함대 파견하여 니케아 군이 최근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로부터 빼앗은 에피로스 북부 해안 점령. 디라키온과 블로러의 니케아 수비대 항복/ 니케아의 테오도로스 2세, 더이상의 협상 진전 없이 교황 특사 오르비에토 주교 돌려보냄 / 베르케, 킵차크 칸국의 칸으로 즉위[572] 작년의 선거 (보헤미아, 팔츠, 쾰른, 마인츠가 리저드 지지)에서 보헤미아가 배신하며 트리어, 브란덴부르크, 작센 편에 가담한 결과[573] 십자군처럼 성당에서 왕실 및 지도부에게 설교한 것. 다만 헨리 3세는 교황 사절 리날도 마송에게 비용 너무 과중해서 사위 시몽 드 몽포르를 필두로 한 귀족들이 왕실의 외부 원정비 납부를 거부하고 있다고 설득. 한편 시몽 등은 원정비 감축 요청하기 위해 직접 로마 향함[574] 11일 혹은 9월 18일이라고도. 아이바크, 출신 성분 더 나은 부인 및 모술과의 동맹으로 유수프 압박 위해 룰루의 딸과 결혼 앞둠. 이에 기존 아내 샤자르 알 두르 박탈감 및 암살 두려워하여 먼저 음모 꾸미려 하나 고위직 관리들과 유지들은 낮은 관심 보임. 사피 앗 딘 이븐 마르주크에게 와지르 직 제안하며 모의 가담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만류하고 나섬. 결국 (이제는 아이바크의 환관이지만 여전히 술탄 부인의 명예 지켜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옛 하인들을 끌어들임. 샤자르 알 두르, 아이바크에게 화해 가장하며 시타델의 궁으로 초대. 두 암살자들이 목욕 중이던 아이바크를 찔러 죽임. 다른 기록에 의하면 샤자르 본인이 죽였으며 핏자국을 본 의붓아들 알리가 호출한 경비병들에 쫓기던 샤자르도 넘어져 사망. 이후 며칠간 그녀의 행위가 정당성이 있는지 여부를 논의하던 (아이바크의) 살리히 맘루크들은 그녀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움직임[575] 알 무스타심의 와지르 무아야드 앗 딘 이븐 알 칼라미가 자말 앗 딘을 불러 유수프가 모색하는 명예는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추후 가까운 시일에 주어질 것이라며 그 증표로 고급 단검 건냄. 이 '창피한' 선물과 사절단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감[576] 5월 2일 혹은 14에 처형되었다고도. 아이바크의 장남 낳은 부인에게 보내져 하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함[577] 바이추가 회군하고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콘야 총독 술레이만이 반군에게 포위당한 토카트 구원 위해 아나톨리아 동북부로 향한 틈에 벌어진 일. 이에 더 많은 튀르크멘과 쿠르드 인들이 몽골 지배에 반기를 들었고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와 마야파리킨의 알 카밀 무함마드 역시 디야르바크르 회복 위해 몽골-셀주크 대한 반란 가담. 한편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몽골군의 도움 하에 말라티야에서 저항[578] 결국 맘루크 아미르들의 꼭두각시.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 알 무스타립이 섭정 맡고 사이프 앗 딘 쿠투즈 역시 주요 자리 차지하나 재차 음모 소문[579] 알리의 즉위식 후 며칠만에 두 명의 고관들이 그가 대권이 미성년에게 주어져서는 안되고 시리아의 알 말리크 앗 나시르만이 유일한 적임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밀고. 사실 여부 확인 없이 시타델의 관저에서 끌려나와 목졸려 살해됨.[580] 2만 8천 마르크 소비하여 보헤미아 포함한 제후들 표심 바꾼 결과[581] 한편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마그립까지의 무슬림이 날 도우러 올 것이라'라며 언플 후 나짐 앗 딘 알 바디라이를 다마스쿠스로 파견해 유수프에게 그가 요청했던 술탄직 인정하며 예복 (알 타르키드 알 샤르타프 빌 술타나) 건냄. 압바스 칼리파측 군대는 최대 12만명. 훌라구, 이라크 진군 결정하며 바이추에게도 남하 지시[582] 아이바크 사후 이집트의 혼란에도 유수프는 이 좋은 기회 방관, 이에 실망한 바흐리 맘루크 들과 미묘한 대립 개시. 새로 복귀한 아자지야에 대한 질투도 한몫. 유수프, 오만한 용병 집단이고 충성스럽지 않은 그들이 (이집트에서처럼) 자신을 폐위시키고 집권하려 한다고 의심. 현실적으로 그들 유지시키는 것도 시리아 국고에 큰 부담이기도. 한번은 유수프가 바이바르스에게 봉급 (무스타하끄) 전체를 주었는데 나머지 맘루크들에게는 일부만 지급되는 것에 만족하라고 선언. 이 사건으로 실망하고 유수프의 허가를 구했거나 혹은 쫓겨났는지 어쨋든 바이바르스는 동료들과 남쪽으로 향함[583] 유수프가 임명한 예루살렘 총독이자 같은 바흐리 맘루크인 키티크에게 그들과 합류하자고 권했으나 그가 주군을 거절하지 않겠다고 하자 예루살렘 점령해버리고 그를 폐위시킴. 좋든 실든 카이로와 다마스쿠스 대신 제3의 선택지의 중심 역할을 하던 카라크의 우마르에게 충석 서약 (쿠트바에서 그의 이름 언급). 이후 바이바르스와 바흐리 맘루크들은 예루살렘의 보급 창고 약탈한 후 가자로 향하여 같은 과정 되풀이함[584] 시칠리아 원정비 문제에 있어 지나치게 타협적인 태도 보였다고 여긴 잉글랜드의 교황 대표자 마송 파면하고 사절 (알로투스) 파견해 기한 내에 시칠리아에 군대 보내지 않으면 왕위 제안 약속도 없을 것이라고 알림[585]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 떠났다는 소식에 유수프의 새 공격이라 여긴 이집트 측이 압바사에 선발대 파견한 것.[586] 시리아 기병들은 바흐리 맘루크 대적하자마자 대열 흐트러뜨리며 철수, 이에 맘루크 기병대가 추격해오자 갑자기 돌아서 포위해 격파 (고전적인 알 카르와파르 전술)[587] 패배한 바흐리 맘루크는 동쪽으로 도주. 요단강 너머 발카에서야 재정비하고 사해 동안따라 남하해 주가르 당도, 카라크의 우마르에게 복속 청함. (7년전 카스투르크의 망명 때처럼 그들의 의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던) 우마르는 그들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로부터 자립할 수 있을거라 여겨 흔쾌히 수용. 그들의 충성 확고히 하기 위해 8년전 아이유브가 카라크에 쌓아둔 엄청난 보물 분배해줌[588] 칼리파 알 무스타심, 다마스쿠스의 유수프에 긴급히 지원군 청하고 옛 친구인 앗 나시르 다우드가 그 지휘 맡아달라고 명시. 유수프, 칼리파 돕고 다우드 제거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응함[589] 바이바르스, 변함없이 이집트 원정 제안하고 우마르와 그의 조언자인 바드르 앗 딘 알 사와비는 이에 호의적. (왜 그들이 성공할거라 여겼는지는 미지수) 다만 이집트 내의 조력자 전무하고 모인 군대는 겨우 7백의 기병 (그중 3백은 베두인 용병인 무카틸라) 어쨋든 소수의 빠른 기동력 덕분에 발각되지 않은채로 팔레스타인 가로질러 이집트 측이 눈치 채기도 전에 알 아리쉬 지남[590] 뒤늦게 정보 입수한 맘루크 군대가 압바사에서 더 방어 용이한 앗 살리히야로 진영 옮겨 싸운 것. 새벽 무렵 전열 갖춰지고 아직 일출 전이라 어두울 때 전투 시작됨. 바흐리 맘루크와 카라크 군대는 소수임에도 맹렬히 싸웠고 이에 일부 이집트 병력이 전장 이탈하기도. 하지만 해가 뜨고 자신들이 얼마나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는지를 실감한 카라크 군은 혼란에 빠져 시나이 반도 방면으로 도주. 원정 실패에도 병력 손실 미미하여 우마르와 바이바르스는 주눅들지 않고 재차 원정 준비[591] 한편 하마단 주둔 중이던 훌라구는 북쪽에서, 모술 주둔 중이던 바이추는 서쪽에서, 후제스탄 주둔 중이던 키토부카는 동쪽에서 바그다드 접근. 아이바크, 본래 훌라구 목적으로 출정했지만 티그리스 강 건너는 바이추 공격하기로 결정[592] 바그다드 함락 후 훌라구의 다음 목표로 시리아가 확실해지자 아제르바이잔과 그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영토가 첫 대상지가 될 것을 깨달은 마야파리킨의 알 카밀 무함마드는 직접 다마스쿠스 방문해 유수프와 동맹, 이에 유수프는 그의 요새화된 핵심 도시들 방어에 원군 보내기로 약속. 하지만 그가 떠나자 유수프는 약속 어김. 이븐 와실에 따르면 시리아 병사들이 알라무트와 바그다드의 비극으로 대변되는 몽골군의 공포스러운 명성에 겁에 질려 주군의 명에도 불구하고 디야르바크르 종군 거부했다고함. 사실이라 해도 유수프가 그들을 더 설득하지 않은 것은 확실. 다만 풍부한 보급품과 끈질긴 저항으로 공성전 장기화됨[593] 가을. 비블로스의 베르트랑도 디 엠브리아코가 보에몽 6세에 반란. 보에몽의 6촌 친척 (보에몽 3세의 막내아들 기욤의 손자) 바트룬 영주 장 2세 동참해 트리폴리 포위. 보에몽, 베르트랑도의 습격에 부상 입음. 템플기사단의 구원병 당도하자 반군은 내륙으로 후퇴. 이후 베르트랑도는 과수원에서 무장 농민들의 매복에 당해 전사, 반군은 비블로스 철수 / 한편 1257년 연말 무렵과 1257년 초까지 이라크 동북부 (샤라주르) 지방의 쿠르드 인들이 몽골군 피해 고향 떠나 시리아로 피신.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파였던 카이마리 용병들은 군부의 쿠르드인 영향력 높이고자 동족인 그들 중 3천여 전사들의 고용 청함, 더 많은 군대 필요했던 유수프는 이를 수용. (샤라주리야) 하지만 시작부터 그들은 불만이 많고 반란 조짐 보이며 더 많은 이크타와 보수 주지 않으면 카라크의 우마르에게 이탈한다 위협. 유수프가 진정시키려 하자 더 반발, 결국 카이마리 아미르들이 유수프에게 그들 중 바드르 앗 딘 후리 알 하다리를 위임해준다면 샤라주리야를 설득시켜 다시 복종시키겠다고 제안. 그래놓고 며칠 후 바드르 앗 딘은 유수프가 몽골과의 전쟁에 열정을 보이지 않고 주요 각료들 역시 몽골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며 샤라주리야 모두와 우마르 섬기기 위해 카라크 향해 떠나버림, 유수프는 며칠 후에야 소식 접함 / 연초, 룸 셀주크 사절단 카라코룸 당도. 몽케 칸, 카이카우스 2세와 클르츠 아르슬란 4세 간의 왕국 분할 칙령. 전자는 콘야, 후자는 카이세리 일대 차지 / 불가리아의 차르 콘스탄틴 티흐, 니케아 황녀이자 이반 아센의 외손녀 이리니와 결혼 / 예루살렘 총대주교 장,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게 베네치아 및 피사와 제노바의 대표단을 성 사바스 전쟁 중재 위해 비테르보로 소환해달라고 설득 / 위그 레벨, 구호기사단장 등극 / 만프레드, 제독 필리포 치나르도를 디라키움의 지휘관으로 파견[594] 칼리파 군대를 물 쪽으로 내몰고 학살[595] 이 소식이 다마스쿠스에 다다랐을 때도 원군은 보급품 준비 중. 훌라구, 와지르나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 등의 사절 접견 거부. 중국의 공성병기들이 성벽 허물기 시작[596] 대부분은 맘루크 정권 하에서 자신들의 영향력과 지위가 스러져 간다고 여긴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옛 아미르들, 그리고 전 호라즘 지도자 베르케 칸의 아들들과 카이마리야 아미르들을 포함한 잡다한 용병들 및 이집트의 재물과 권력 대한 예상에 이끌려 지원한 모험가들 포함. 한편 상대편인 이집트 군의 취약함은 탈영자들 뿐만 아니라 자리 지키며 남은 아미르들 역시 카라크 측의 상대 아미르들과 연락 주고받으며 관계 이어나감. 다만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카라크 군대는 (예상할 수 있듯이) 암투 잦았는데 가끔 공공연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오직 약탈에 대한 희망으로 결속력 유지[597] 본래 베네치아와 제노바 대표단과의 회담이 본래 목표였는데 플래정스가 아들 위그 데리고 나타나서 도시의 주인이자 남동생인 보에몽 6세의 지지 하에 (이사벨라 1세의 외증손자인) 위그를 콘라딘의 후계자이자 그의 부재 하에 대리인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 섭정이 되는 것을 제안해 수용됨. 이후 제후들과 아크레로 향하여 귀족회의 열고 콘라딘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결정될 수 없다는 구호기사단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템플/튜튼 기사단의 묵인 하에 다수의 찬성표로 플래정스가 섭정, 아르수프의 장이 바일리로 결정됨[598] 감금되어 창문 통해 학살 지켜보게 함. 숨겨진 보물 위치 실토하게 한 후 가문원들과 처형됨. 다만 그의 아들들은 (살해된 한 명 제외) 몽골로 보내져 몽골 여인과 결혼해 자녀까지 보았다고 함.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아내 도쿠즈 카툰의 설득으로 시내 기독교도 공동체 우대해줌. 한편 이후 메카 샤리프는 이프리키야 하프스 왕조의 아부 압둘라를 새 칼리파로 인정, 그는 알 무스탄시르 칭호 취함.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이를 인정하지 않음[599] 양측 모두 탈영자 없었던 것이 전세 결정.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버텨내었으나 우마르와 그의 재상 바드르 앗 딘의 전열이 무너지자 그 역시 저항 포기하고 후퇴. 카라크 군은 다수 사로잡히고 진영의 보급품 맘루크 수중에 넘어감. 포로들 중 기존 맘루크 군에서 이탈했던 자들은 쿠투즈의 감독 하에 추후 배신 대한 경고 차원에서 발견되는 대로 현장에서 처형됨. 한편 실패 후 카라크 귀환한 우마르는 바흐리야 맘루크 대한 불만 표출, 바이바르스의 암묵적 위협에 결국 그들에게 다시 신임 보임. 동시에 군사적 자율권 얻은 바이바르스는 (아마 샤리주리야의 카라크 망명 이후) 여름 무렵 유수프 지배 하의 가우르 (요단강 유역)와 시리아 해안 일대에 파괴적인 습격 가함. 우마르의 명령 없었고 그는 그저 바흐리야 맘루크가 맘껏 휘젓도록 놓아둘 뿐. 이는 그에 대한 유수프의 반격을 불러올 것이 자명했으나 우마르는 바흐리 맘루크 다루는 것보다는 낫고 샤리주리야의 합류로 시리아 군과 한번 해볼만 하다고 여긴 듯[600] 동시에 카라코룸에 약탈물 실은 수송대 파견. 이후 우르미아 호 서안의 샤하에 (왕궁에 준하는) 진영 설치[601] 훌라구는 떠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사례에서 배우라는 편지 남김. 이에 사절단은 훌라구의 숙영지까지 따라가 유수프 본인이 출두하라는 편지 받아옴. (직접 가기엔 두려운) 유수프는 더 공적인 사절 파견하기로 결심[602] 아테네의 개입으로 에우보이아 전선에서 패배한 기욤 2세가 복수 위해 테베로 진군, 그 영주들과 아테네 공 기 1세, 보도니차 후작 우베르티노 팔리비치니, 살로나 영주 토마스 드 우투르멩쿠르 2세의 동맹군 격파. 이후 기욤은 이들을 카드메이아 시타델에서 포위, 자신의 에우보이아 분할안에 동의하고서야 포위 풀어줌.[603] 동시에 제노바의 동맹인 티레의 필리프 드 몽포르가 육군 이끌고 남하. 베네치아 제독 로렌초 티에폴로는 동맹인 피사 함대와 함께 아크레에 전함 준비[604] 24일이라고도. 아크레 정부는 제노바인들이 내항 차지하기 위해 피사 구역 공격하는 등의 혼란을 제어 못하는 상황에서 로렌초 티에폴로가 40척의 함대와 당도하여 제노바인들이 항구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 끊고 50척에 달하는 제노바 함대 격파. 필리프 드 몽포르의 육군 역시 아크레 민병대에 격퇴되어 추격당하며 티레로 도주 (제노바 함대는 베네치아 함대가 바람으로 두 그룹으로 분산되었을 때에 기습적으로 나타나는데 성공했지만 연로한 사령관 로소 델라 투르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베네치아 함대가 재정비하고 공격해오자 패배, 24척 나포되고 1700명 전사. 이후 제노바 함대는 티레로 철수, 폭풍으로 추격당하진 않음) 군대 부두에 상륙시켜 제노바인들을 본래 구역으로 내몰고 사바스 토지 차지, 그 방어시설 파괴하고 제노바 구역 포위. 다만 유명한 석궁병들을 포함한 8백여 제노바 수비대는 50여대의 발리스타와 인근 구호기사단 본부의 식량 공급으로 베네치아-피사인들의 공격 버팀. 석궁병들이 이젠 베네치아 측에 가담한 자파 백작 장을 쏘려 했으나 제노바측 지휘관이 금함[605]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사절 아크레 당도해 교황 주선 휴전 합의 공표함[606] 테오도로스 2세, 간질 악화되어 36세로 님파이온에서 사망해 소산드라 수도원에 안치됨. 측근 요르요스 무잘론이 섭정, 그의 동생 안드로니코스가 보좌. 요르요스, 자신의 낮은 인기를 자각하고 민간-성직자 지도자 모임에서 섭정직 사임 제안하나 테오도로스의 사촌과 장군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가 괜찮다고 설득하여 무산[607] 테오도로스 2세 장례식 9일째 되는 때에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라틴 용병들이 건물 밖에서 요안니스 4세 대면 요구하며 시위, 결국 건물로 교회 건물로 돌격하여 사태 수사하러 당도한 요르요스의 비서 테오필락토스 살해. 이후 요르요스와 안드로니코스 형제는 은신처에서 끌려나와 살해됨. 한편 그 주모자인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는 무력으로 요르요스의 아내와 그의 여동생의 딸 이리니를 구금시킴 (혹은 저지시킴). 이후 귀족들은 섭정직 놓고 토론하나 대원수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가 휘하 용병들로 무력 시위하며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설득, 결국 메가스 코노스타울로스 (대장군) 및 요안니스 4세의 후견인 등극. 그외에도 마그네시아의 금고 장악, 의심하는 (혹의 회의적인) 자들에 대한 뇌물 쥐어주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608]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가 6만 히페르페라와 테살리아의 성채 몇개의 지참금으로 결혼 동맹 제안한 것을 수용한 것. 파트라스에서 결혼식 치르고 스파르타 북쪽 산맥의 산꼭대기 성채 미스트라에서 신혼여행. 이후 미카일 2세가 친히 당도하여 니케아 대한 군사 동맹 체결 / 한편 이즈음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는 정변 직후엔 황제를 동생 요안니스에게 맡겼으나 이내 섭정직 장악하고 요안니스는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직함을 주어 마케도니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테살로니카에 파견. 미카일 2세의 서자 요안니스 (블라크인 족장 타로나스의 딸과 결혼)가 블라크인과 동맹해 도발하는 것 견제 목적[609] 방패 위에 올려짐.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에게 요안니스 4세가 성년 되면 퇴위하겠다고 약속[610] 추정 시기 (연말 무렵). 우마르의 방관 하에 요르단 일대 습격하던 그들이 다마스쿠스 근교까지 약탈하자 마침내 유수프는 심복인 무지르 앗 딘 이븐 아비 자카리와 누르 앗 딘 알리 이븐 슈자 앗 딘 알 아크타를 파견해 대적하게 함. 그들이 지휘하는 2천 기병대는 가자에서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6백 기병대 (그중 3백은 무크탈리야, 즉 베두인 부대)와 격돌, 수적 우세로 압도하고 양익을 붕괴시켰으나 바이바르스 휘하 70여 정예병들이 강하게 버텨내었고 순간적인 반격으로 시리아 측 전열을 흐트러뜨림. 무지르 앗 딘과 누르 앗 딘 모두 사로잡혀 카라크에 투옥됨[611] 시몽 드 몽포르 휘하 귀족 의회가 헨리 3세 굴복시키고 시칠리아 원정 등 그의 대외 원정 대한 과도한 지출 취소한 결과[612] 부인 테오도라와 함께. 요안니스 4세에게는 진주 화관 하나 주어짐[613] 1258년이라고도. 1차 사절단 이후 후계자 알 아지즈 무함마드를 자인 앗 딘 알 하피지와 하지브 알람 앗 딘 카이사르 알 자히리. 아미르 사이프 앗 딘 일자키 등의 보좌 하에 화려한 선물과 서부 이란의 훌라구 주둔지로 파견. 훌라구, 격식 있게 맞이하였으나 (몽골에 복속했음에도) 2년전 자신의 이란 당도 시에 적당한 사절을 보내지 않은 것에 실망한 상태에서 유수프 본인이 마라게로 오지 않으려 하는 것에 더 괘씸해함. 이에 사절단은 극진히 사과하며 십자군과 국경 접한 이유로 임지 떠날 수 없다고 주장. 훌라구, 이 핑계를 받아들이는 척 했으나 독실한 기독교도인 아내 도쿠즈 카툰과 부관 키토부카의 영향력과 교황청과 동맹 꾀하는 몽골 제국의 분위기 상에서 별 효과 없음. 또한 1250년 카라코룸 행을 통해 몽골인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은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비밀리에 훌라구에게 시리아 대한 전면 침공 간하기도. 유수프 진영의 분열과 낮은 사기 드러내는 일화.[614] 미카일 8세, 시칠리아에 니키포로스 알랴티스 파견해 사실상 포로 신세인 요안니스 3세의 과부이자 만프레드의 친여동생 안나 (콘스탄체) 석방 제안하며 동맹 이어갈 것을 청하나 만프레드는 사절을 감금하는 것으로 대응. (2년 후에야 석방) 발칸 정복 염두에 둔 만프레드는 조력자로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와 동맹. 이에 세르비아와 헝가리, 불가리아 등은 니케아와 동맹 / 모술의 바드르 앗 딘 룰루 사망, 아들 앗 살리흐 루큰 앗 딘 이스마일 계승 / 니케아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미카일 8세에 반발하여 사임 / 가을.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가 그리스 중부의 레바디아로 철수하자 테살리아의 요안니스는 부친 미카일 2세 찾아가 니케아 점령군이 인기 없다며 귀환 설득. 이에 미카일 2세는 아르타 회복하고 장남 니키포로스 파견해 포위된 이오안니아 구원. 만프레드로부터 더 많은 지원 받음 / 하프스 왕조의 아미르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칼리파 칭함[615] 작년 말엽의 예상치 못한 패배로 바이바르스와 약탈자들이 우마르의 이름으로 가자, 헤브론, 나블루스 장악하며 유수프에게 단순한 골칫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영유 자체에 도전하는 심각한 위협으로 대두. 유수프, 휘하 아미르들 중 충격에 빠져 오래간 함께한 이들까지 자신을 폐위시키고 다마스쿠스를 우마르에게 넘길까봐 의심병 도짐. 이에 카이마리야 아미르들이 충성 서약 시키고 이행 거부자들을 투옥시키고 그 재산 압수할 것을 제안, 그러나 아자지야 일부가 (자주 반복된 요구대로) 자신들의 지위 및 충성에 비해 이크타가 합당하지 않다고 선포하며 정말 서약을 거부했음에도 시기상 병력이 아까운 유수프는 결국 그들 뜻대로 더 많은 영지 하사. 이로써 군부의 분규를 잠재운 유수프는 바흐리 맘루크에 맞서기 위해 다마스쿠스 외곽의 가우타에 주둔. 초장부터 바이바르스가 기습해 진영이 뚫리고 술탄 막사의 줄까지 잘리는 망신을 겪으며 소식을 접한 다마스쿠스 시민들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원정군 자체에는 별 차질 없었고 곧 바흐리 맘루크는 요르단으로 퇴각. 유수프, 봉신인 하마의 알 만수르 무함마드에게 도움 요청하며 소환, 함께 남하. 바이바르스 역시 가우르에서 우마르 및 카라크 군대와 합류. (샤라주리야가 돌연 별 이유도 없이 이탈하여 가자에 정착해버리며 세력 약화된 상태) 수적 열세의 카라크-바흐리 맘루크 군대는 예리코에서 시리아 군에 패배, 카라크로 패주. 유수프, 잠깐 예루살렘 체류한 후 요단강 건너 카라크에서 이틀 거리인 비르카트 지자에 주둔. 천혜의 요새를 포위하는데 자원 낭비하기 보다 우마르가 항복 협상 나설 때까지 그를 가두는 것에 만족[616] 몽골 지배 피해 남하한 것. 그밖에 헝가리의 벨라 4세가 1500 기병, 카린티아 공작이 3백 기사 보내고 불가리아와 튀르크인들도 일부 병력 보내는 등 니케아측 연합군 편성됨. 이에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가 카스트로이아 주둔하나 이젠 '세바스토크라토로'로 격상된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의 기습에 패배. 밤을 틈타 핀두스 산맥 너머 시칠리아령 블로러로 도주해 시칠리아군 기다림. 한편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오흐리드 탈환하고 펠라고니아 평원과 베라트 장악[617] 1257년 상처한 만프레드에게 미카일 2세가 대니케아 동맹의 일환으로 자신의 딸 헬레나의 결혼 제안한 것. 5월경 시칠리아 사절단이 블로러 도착해 헬레나 데리고 키프로스 향함, 코르푸 지참금. 구엘프와의 이탈리아 전쟁에 신경쓰던 만프레드는 직접 가지 못하고 4백여 독일 중무장 기병 파견. 그들은 베라트 포위 나섬. 그리고 아카이아 공 기욤 2세는 모레아 군대와 코린트만 건너 나프팍토스 상륙. 라미아에서 살로나, 부도니차, 낙소스, 아테네 등지의 라틴-그리스 혼성군 이끌고 직접 합류, 테살리아 진군. 미카일 2세의 서자이자 테살리아 총독인 요안니스 역시 블라크 군대 이끌고 합류[618] 유수프, 우마르에게 바흐리 맘루크 인도 요구. 이에 우마르는 거부하였으나 점차 협상으로 기움, 이러한 태도 변화를 감지한 바이바르스는 몇몇 맘루크들을 설득해 (강제로 인도되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유수프 진영으로 이탈. 유수프, 이들을 환영하고 바이바르스에게 나블루스와 지닌의 이크타까지 복원시켜줌. 이내 우마르는 마침내 카라크에 남아있던 나머지 바흐리 맘루크들까지 유수프에게 넘겨주기로 합의, 이들은 (바이바르스 무리와 달리) 호송되어 알레포 시타델에 감금됨. 이후 유수프, 알 만수르, 바이바르스는 다마스쿠스 귀환. 유수프, 비록 정치인으로써는 실패했지만 복수심은 덜했는지 우마르의 체면 살려주기 위해 (완전히 망신주진 않기 위해) 바흐리 맘루크가 점령한 영토 중 헤브론 소유 승인해줌[619] 8월이라고도.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 6월 말 무렵 아드리아노폴리스 떠나 펠라고니아 주둔. 에피로스 군대가 다가오자 농민들에게 덤불을 태워 먼지로 군대 규모 커보이게하고 형 미카일 8세의 조언대로 직접 전투 대신 쿠만인과 튀르크 기병대 파견해 화살 퍼부움. 이로써 미카일 2세와 기욤 2세 기죽음, 이때 미카일의 서자 요안니스가 기욤과 다툼, 후자에게서 '천한 출신의 서자'라고 모욕당하자 휘하 병력과 전선 이탈하고 오히려 적장 요안니스와 비밀 동맹 맺음. 그리고 밤동안 미카일 2세 역시 아들 니키포로스와 철수. 기욤 2세는 여전히 이길 수 있다고 설득되어 남았고 이에 다음날 선제 공격. 하지만 니케아측 카린티아 기사들이 지휘관의 전사에도 반격에 성공, 라틴 군대 대패. 낙소스 공 안젤로 사누도와 기욤 2세의 부관 지오프리 등 지도부 사로잡힘. 기욤 2세는 변장한 채로 카스트로이아 인근 건초 더미에 숨어있었으나 두드러진 이빨 때문에 발각되어 포로가 됨. 포로들은 니케아로 압송되고 신임 대 도메스티코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가 나프팍토스 장악, 요안니스는 에피로스의 수도 아르타 입성. 미카일 2세는 친척 오르시니 가문의 케팔로니아 섬으로 피신[620] 포위 장기화된 마야파리킨에 아르빌과 바그다드 원정에 협조한 바 있는 모술의 룰루에게 지원 명하여 그의 두 아들이 이끄는 원군이 합세했음에도 요쉬무트는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한 상태, 이러한 몽골군의 흔치 않은 고전에 훌라구는 다른 루트로 시리아 진군. 아흘라트에서 남쪽으로 꺾어 하카리 산지를 주파, 동맹 룰루의 아들이 통치하던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 (지즈레) 당도. 그곳에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전광석화와 같이 디야르 무다르와 카부르 유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 여러 곳에서 약탈과 학살 자행[621] 카말 앗 딘 이븐 알 아짐 파견해 원군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그가 도착할 즈음 이집트에서는 쿠투즈의 쿠데타 발생한 상태라 당분간 구체적인 협상 이루어지기 힘듦.[622] 12월이라고도. 17세였음에도 정치에 조숙했던 알 만수르 알리에 쿠투즈가 이러한 시기에 이집트 정권은 아이의 수중에 있어서는 안된다며 술탄의 근위대 장교들이 카이로 외곽에 대포 훈련 (혹은 사냥 여행) 나간 틈에 거병해 알리 및 그의 모후와 형제들을 체포. 이에 근위대가 카이로로 돌아와 찬탈자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이미 아타베그 파리스 앗 딘 알 무스타립의 지지 얻은 쿠투즈는 도전하기엔 이미 정권에 안착한 상태라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이후 그의 권위에 대한 더이상의 반발 전무. 정권 공고히 한 쿠투즈는 유수프의 대몽골 동맹 제안 수용 답변과 함께 카말 앗 딘 돌려보냄[623] 마야파리킨 포위 도중 겨울 나기 위해 소환된 상태. 유프라테스 건너 도강 지점 (마즈)인 발리스 점령하곤 기수를 북으로 돌려 만비즈와 텔 바쉬르 점령, 이후 에데사 (우르파) 인근 진영으로 귀환[624] 앗 살리흐 루큰 앗 딘 이스마일은 부왕 룰루처럼 몽골의 충실한 봉신, 아미다 함락으로 1년 넘게 항전 중인 마야파리킨만이 알 카밀 무함마드의 수중에 남음. 이 소식을 접한 유수프는 조언자들 및 다마스쿠스의 유지들과 대책 논의한 결과 시민들에게 확신 주고 신속히 적에 대적하러 나설 수 있도록 다마스쿠스에서 북으로 4km 떨어진 알 비르자에 주둔. 이교도 몽골군 대한 지하드 수행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베두인, 페르시아인, 튀르크인, 쿠르드인들, 그리고 룰루의 차남이자 (몽골에 반기를 든) 신자르 영주 알 무자파르 알라 앗 딘 유수프 합류. 조언자들의 주된 의견은 북진하여 평지에서 몽골군과 회전을 치러 일거에 물리치자는 것이었는데 아미르 하지브 이븐 나짐 앗 딘과 자인 앗 딘 알 하피지 등은 훌루구의 군대가 몇배나 더 수가 많고 (유수프의) 휘하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있어 회전에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최대한의 신중론 주장. 이에 유수프의 천성인 결정 장애가 발동, 어떤 정책도 결정 못하고 겨울 보냄[625] 비레칙이라고도. 도하 지점 관장하는 성채. 요새화되어 있었고 수비대는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에 결국 2-3주 후에 함락됨. 그곳에 구금되어 있던 전 바니아스 영주 알 사이드 하산 석방됨, 훌라구는 (점령하는 즉시) 그의 이전 영지 복구시켜준다는 칙령 하사. 이 은덕을 받은 후 하산은 몽골의 시리아 침공을 열심히 도움. 연말 혹은 1260년 초엽 알 비라 함락되자 알레포 진격로 열림[626] 몽골 패권에 반감을 표했으나 시하브 앗 딘 부흐투르의 보병대가 포위해 복속 얻어냄. 티레 역시 파괴 면치 못함 / 베이루트 영주 장 2세, 템플러들과 갈릴리 습격하나 몽골군에게 격퇴됨. 십자군 세력은 시리아 무슬림 패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이득을 취하기에는 너무 약했고 (그마저도) 분열되어 있었음[627] 봄-여름 사이 무렵. 하늘이 몽골에 지배권 부여했으며 저항하는 것은 이를 거역하는 것이며 도망갈 수 없다고 명시. 또한 쿠투즈의 천한 출신 비꼼. 이에 아미르들이 반토막 내고 수급은 카이로의 밥 주왈리야 성문에 내걸림[628] 보에몽 6세, 안티오크 총대주교 오피조 피에스치와 함께 훌라구에 복속. 두 도시 외에 카프르 데빈, 다르쿠쉬 마을도 주어짐. 보에몽, 템플/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모두 점령. 라타키아에서 보에몽은 (니케아와의 동맹 염두에 둔 훌라구의 요구대로) 오피조에게 안티오크의 교회를 그리스인 총대주교 에우티마이오스의 그리스 정교회 공동체에 넘기게 함. 이 일로 예루살렘 총대주교 자크에게 파문당함 / 연말. 포위된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마침내 항복하고 훌라구에 복속. 아이유브 왕가의 마지막 독립 거점 히신 카이파는 주요 교통로에서부터 고립되어 있는 이유로 제대로된 공격에서 배제됨 / 교황 특사 토마스 아그니 디 레티노, 도미니코회 수사 데이비트 오브 아쉬비를 훌라구 진영에 사절로 파견. 그는 이후 14년간 몽골 진영에 머물다가 아바카 칸이 2차 리옹 공의회에 파견한 사절단과 함께 서유럽 귀환 / 알폰소 10세, '레콘키스타'의 대상을 아프리카로 넓히려는 의도로 최신 카스티야 함대 37척 파견해 알제리의 살레 습격하나 곧 격퇴됨. 알폰소, 퇴각에 분노 / 연말. 제노바의 카피타노 델 포폴로가 미카일 8세와의 동맹 확정 위해 굴리에모 비스콘티와 구아르네리오 기우디체를 니케아에 파견. 한편 미카일은 불가리아의 콘스탄티노스에게 사절 파견 / 아리크 부카,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 열고 대칸으로 선출됨. 형 쿠빌라이, 배신당할까 두려워 참석 거부하고 중국에서 대립 쿠릴타이 열어 대칸 선출됨. 초원 지대의 아리크 부카와 북중국의 쿠빌라이 간의 내전 발발[629] 유약한 유수프에 실망한 군부가 유수프 및 그의 심복인 카이마리야 아미르들에 대한 쿠데타 계획 (민족적 경쟁심과 질투가 유수프의 무능함 이상으로 큰 원인이었음을 보여줌) 거사 성공 후 유수프 감금하고 그의 동생 앗 자히르 가지 옹립할 계획이었다고 후술 (앗 자히르 역시 공모자였을듯) 다만 당대인들은 점차 주군을 업신여기며 자신들이 최고 권력에 더 어울린다고 여기게 된 나시리야가 술탄 살해하고 그들 중에 한명을 옹립할 계획이었다고 여김. 암살자들은 소수의 최측근들과 다마스쿠스 부근 정원의 막사에서 며칠밤을 보내는 유수프의 습관을 이용해 정초 어느날 저녁 예고없이 들이닥침. 하지만 유수프는 그들이 다다르기 전에 담벽을 기어올라 탈출하였고 겁에 질린 채로 곧장 시타델로 달려가 피신. 이로써 거사의 실패를 깨달은 나시리야와 바이바르스는 자히르 가지 등과 함께 비르자의 진영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도주. 다음날 아침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와 카이마리야 아미르들이 시타델 들어와 설득 끝에 유수프로 하여금 더이상 위험하지 않으니 진영으로 돌아와 다시 군대 직접 맡도록 함. 다만 맘루크 측에 다마스쿠스 빼앗길까봐 알레포 구원 나서지 않음. 한편 가자에서 (1년째 그곳에 머무르는) 샤라주리야와 합류한 도망자들은 (약 4천 기병대?)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앗 자히르 가지를 술탄으로 선포. 다만 막강한 군대를 얻었음에도 앗 자히르 가지는 행운을 극대화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더 많은 이크타와 더 높은 지위 요구하는 것에 그침[630] 알레포 총독인 알 무아잠 투란샤 (살라딘의 12번째 아들이자 유수프의 작은 할아버지, 당시 80세)는 몽골군이 당도하기 전에 맞서려 했으나 파견된 알레포 군대는 훌라구의 대군을 마주하자 전의 상실하고 허둥지둥 알레포 도주, 상당수 전사. 이후 훌라구는 알 무아잠에게 정식으로 항복 제안, 훌라구가 다마스쿠스 정복할 때까지 시내와 시타델 각각 관장할 2명의 몽골 총독들을 임명하고 둘은 각자 맡은 곳에서 행정권 전부를 부여받고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증한다는 상당히 관대한 조건. 하지만 알레포가 아이유브 왕조의 주요 보루임을 자각한 알 무아잠은 단호하게 거절, 포위 시작됨[631] 아침 무렵 이루어짐, 이로써 알레포는 완전히 포위됨. 밥 알 이라크 일대에만 20대의 큰 투석기들이 폭격을 가하였고 동시에 공병들이 갱도 파기 시작[632] 25일이라고도. 밥 알 이라크 통해 입성. 당대 소문에 의하면 라이스 (시장)이자 자인 앗 딘 알 하피지의 사위인 사피 앗 딘이 공격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고함. 길거리가 시체로 가득차고 수많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노예로 전락. 기독교도들은 오인 사살 외에는 안전 보장됨. 몽골군과 함께 입성한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 (혹은 보에몽 6세)가 대사원에 방화. 다만 훌라구는 대사원 파괴 가담한 병사들 처형, 아이유브 왕조가 빼앗은 성채들은 돌려줌[633] 리투아니아 국왕 민다가우스와 기사단과의 협정 (사모기티아를 리보니아 기사단에 할양) 이행 거부하는 발트의 '반란 세력' 대한 응징[634] 가자에서 맘루크 술탄 쿠투즈와 합류하자는 아미르들의 주장 따른 것. 한편 홈스의 전 주인 알 아슈라프 무사는 남하 대신 알레포 향해 북상. 유수프, 다마스쿠스 시타델에만 수비대 배치하고 남하. 이에 시민들은 성벽 위로 몰려나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위협 앞에서' 자신들을 두고 떠나는 지도부에 대해 욕설 내뱉으며 울부짖음. 시내의 기독교도들 중 다수는 도시 떠나 티레 피신. (십자군 등 기독교권에 몽골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것을 염두에 둔 듯) 유수프는 폭풍과 강우로 질퍽해진 길을 따라 행군, 대동한 여인들 중 상당수는 현지 농민들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하였고 도적질 만연. 나블루스에 무지르 앗 딘 이븐 아비 자카리와 누르 앗 딘 알리 슈자 앗 딘 알 아크타 주둔시켜 몽골군의 전진 막도록함.[635] 그밖에 샤라주리야, 나시리야 등 반란 일으켰던 용병들과 합류. 앗 자히르 가지는 사르카드에 총독 (나킵 알 아스카르)로 사드 앗 딘 이븐 우마르 클르치를 파견. 이 합의로 유수프는 다시 대군을 지니게 됨[636] 유수프가 나블루스 떠날 즈음 몽골군 분견대가 다마스쿠스 외곽의 올리브 농장 당도. 수비대 기습해 순식간에 격파, 두 지휘관 전사. 한줌의 부상당한 병사들만이 도주하여 유수프에게 비보 전함. 몽골군의 기동력에 놀란 유수프는 가자 떠나 이집트와 더 가까운 알 아리쉬로 향함. 도착 후 앗 살리히야의 맘루크 진영에 동맹 확인하는 사절 파견하며 복속 의사 전함. 쿠투즈가 수용 의사 밝히자 자신과 하마 아미르 알 만수르 2세의 산자크 (왕실 휘장)를 보냄. 신중한 쿠투즈는 자신이 떠나기보다 시리아 군대에게 앗 살리히야로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유수프는 그곳에서 4일 거리인 알 카트야 당도. 하지만 그곳에서 의심과 우유부단함에 사로잡힌 유수프는 (몽골에 사로잡힐 것과 맘루크 측에 체포되어 투옥될 것 둘다 우려) 고심 끝에 하마의 알 만수르에게 자신의 가족과 군대 지휘권 맡기고 쿠투즈 진영으로 파견. 자신은 카트야에 소수의 호위대 및 동생 앗 자히르 가지, 아들 알 아지즈 무함마드, 카이마리 아미르 쉬하브 앗 딘, 홈스의 왕자 앗 살리흐 누르 앗 딘 (알 무자히드의 아들이자 알 아슈라프 무사의 숙부)과 남음. 알 만수르와 시리아 군대는 쿠투즈의 환대 받음, 다만 유수프의 측근인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는 임시적으로 카이로 시타델에 감금되었고 휘하 맘루크 장교들 역시 고문과 재산 몰수에 시달렸으며 셀주크 왕녀인 아내를 포함한 모든 카이마리 아미르들 (유수프의 최측근들)의 여인들은 귀중품 압수당함.[637] 알레포 함락 직후 하마의 귀족들은 (유수프 진영의 알 만수르 2세의 의도와 달리?) 훌라구에게 사절 보내 방어 취약한 도시 거주민들의 생명과 재산 보장 청함. 훌라구, 관대히 요청 받아들이고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한 페르시아인 쿠스라우샤 대동시켜 사절단 돌려보냄. 시타델은 아이유브 가문의 지휘관에게 남겨졌으나 그는 신임 총독에게 종속됨 (보고해야함)[638] 이후 베르케 칸과의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639] 군대와 보급품이 부족했던 다마스쿠스는 유수프 따라가지 않고 남은 자인 앗 딘 알 하피지의 주도 하에 항복 결심한 것. 몽골 사절 들여보내고 여전히 알레포 시타델 포위 중인 훌라구에게 카디 사드르 앗 딘 이븐 사니 앗 다울라를 필두로 복속 청하는 사절단 파견해 성문 열쇠 바침. 훌라구는 사절단 환대하고 3명의 페르시아인 행정관뿐만 아니라 키토부카 휘하 군대 파견. 자인 앗 딘 알 하피지는 새 정부의 주요 현지 조언자로 남음.[640] 바니야스의 알 사이드 하산 역시 대동. 이날 몽골 분견대가 나블루스와 가자로 파견되었다고도. 한편 이 직후 카라크의 우마르 역시 키토부카에게 사절 파견해 복속함으로써 직위 유지. 하이톤 1세와 보에몽 6세는 대사원을 다시 성당으로 개조, 무슬림 성지는 와인과 음악으로 더럽혀짐[641] 홈스의 전 주인 알 아슈라프 무사는 (자신의 세습 영지 빼앗은) 주군 유수프의 제국이 망할 것이라 판단, '무적의' 훌라구와 개인적 협의 결정. 가신 중 한명을 (알레포 포위되기도 전에?) 보내 복속 표함. 훌라구, 이를 수용하고 무사의 직접 방문 명령하여 이루어진 것. 알 아슈파르 무사, 환대 받고 홈스 영지 복원에 더하여 시리아 전역에 대해 나이브 알 물크 (총독)으로 봉해짐. 시리아 지역의 다른 몽골 총독 및 예속 군주들보다 공적 우위를 점한다는 뜻. 앗 사이드 하산, 알 아슈라프 무사, (그리고 이후) 알 나시르 유수프 등에 대한 처우를 보면 훌라구는 최소한 (단기적 관점에선) 아이유브 왕조를 절멸시키기보다 룸 셀주크의 경우처럼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임. 알레포 이후 시리아 도시들은 더이상 저항 보이지 않음[642] 알 무아잠,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고 몽골측 공병들이 무력으로 점령할까 두려워 항복 협상 나선 것. 훌라구, 평소의 잔인함과는 달리 (존엄한) 알 무아잠의 품위와 용기를 존중하여 약속 지킴. 다만 고령의 알 무아잠은 항복하고 불과 며칠 후에 사망. 홈스의 알 아슈라프 무사 알레포 총독 등극, 다만 시타델의 금고 약탈됨. 한편 파괴되고 반쯤 버려진 알레포는 이 대학살에서 한세기 동안 회복하지 못함[643] 왈트 (지휘관) 바드르 앗 딘 무함마드 이븐 칼리자르와 나킵 알 칼라 (성주) 자말 앗 딘 알 사이라피가 가자에서 파견된 유수프의 은밀한 지시 받고 봉기한 것. 아마 그들이 시간 버는 동안 유수프는 이집트 군대와 다마스쿠스 회복 나서는 계획이었던 것. 하지만 유수프는 역시 움직이지 않았고 키토부카는 별 방해 없이 돌아와 시타델 포위[644] 훌라구, 알레포 점령 이후 그와 안티오크 사이의 요충지인 하림에 분견대 파견. 얼마간 항전하던 호라산 출신 수비대장 파크르 앗 딘 사키, 목숨 보장 대가로 항복하였으나 훌라구는 협정을 파기하고 전부 학살 지시. 한편 시리아 북부에는 다수의 강력한 성채들이 있었으나 지난 수십년간 일대의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진 결과 각자 제대로된 저항할 수 없는 상태. 매우 고립되어 있어 침략자들이 당분간은 신경쓰지 않은 안사리야 산지의 사흐윤 (사온) 영주(이자 시리아 북부의 마지막 혈연 세습된 영주 중 하나인) 무자파르 앗 딘 우스만 이븐 나시르 앗 딘 망기베르쉬 이븐 쿠마르티킨이 혼란을 틈타 부근 성채들을 합병해 작은 독립 공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것 외에는 시리아 북부에서의 전쟁은 종식됨[645] 바이바르스, 유수프에게 3-4천 규모의 병력을 유프라테스 강의 도강 지점 (발리스)에 (자신과 함께) 파견해 몽골군 진군 막을 것 제안하나 거절됨. (유수프, 그의 이집트 원정 실패 기억 혹은 그가 승리할 시 자신의 지위 위협할까 우려한듯) 또한 몽골 대한 회의 도중 협상 제안한 자인 앗 딘 알 하피지에 반박하고 그를 구타하기도. 이후 가자에서 권력의 양대 중심지에서 멀어진 신세를 한탄하던 그는쿠투즈가 시리아 돕기 위해 파견한 자말 앗 딘 알 나지비 휘하 (유수프의 줄어들고 사기 저하된 군대 증원 위한) 원군을 샤라주리야가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이집트 측에 경고하여 그들이 안전히 철수하도록 해줌. 이렇듯 유용한 도움으로 신뢰를 쌓은 바이바르스는 동료 중 하나인 알라 앗 딘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를 카이로에 파견, 쿠투즈와 자신의 이집트 복귀를 상의하게함. 맹장이 필요했던 쿠투즈는 카이로 북쪽 근교 칼유브의 이크타와 군부에서의 고위직 약속. 결국 유수프는 복속했음에도 원군 얻지 못하게 된 것[646] 이븐 와실의 기록에 의한 것. 다만 이 명령은 곧 (이유없이) 철회되었고 수비대 말려죽이기로 함. 하지만 한달 지나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너무 오래 걸린다고 여겨 공성 준비[647] 많은 약탈물과 함께 귀환. 현지 주둔군 자체는 다마스쿠스 시타델 점령된 후에 혹은 유수프의 복속 후에야 파견된 듯[648] 이라크 기독교도들과 조지아 인들이 몽골군 선발대에 포함되었다고함[649] 20대의 거대 투석기들이 밤새 건조되었고 다마스쿠스 시의 구조물들에서 포탄으로 쓰일 돌 구함. 이틀간 폭격 견디던 수비대는 결국 유수프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으로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협상 임함.[650] 6일이라고도. 훌라구보다 관대했던 키토부카는 수비대에 사면 약속하고 지킴. 다만 저항의 장소로써 쓸모없게 하기 위해 시타델 성벽 일부 및 성탑과 여장 등 상부 방어시설 허물어지고 전시 보급 창고 역시 파괴됨. 포위 도중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여전히 유수프에게 충성 유지했던 바알벡 총독 하집 슈자 앗 딘 이브라힘에게 파견되어 항복 요구하였으나 그는 몽골과의 연대 대신 순교를 택함.[651] 바알벡의 종교적 유지들이 하집 슈자 앗 딘 이브라힘에게 도시 수비는 주민들의 피폐함으로만 이어질 것이므로 종교적 가치가 없다고 설득, 이에 그는 키토부카와 협상하여 그 자신과 가족들의 다마스쿠스로의 안전 보장받음. 시타델 파괴됨. 하지만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훌라구에게 바드르 앗 딘 이븐 칼리자르, 자말 앗 딘 알 사이라피, (고집 센) 슈자 앗 딘 이브라힘 모함하며 그들의 처형 주장해 인가받음. (훌라구의 명을 어길 수 없는) 키토부카는 수긍했지만 자신의 권위 무시한 것에 분노, 자인 앗 딘에게 자신은 이를 수행할 의도가 없으니 스스로 집행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그 자신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함. 이후 키토부카는 알 수비이아 당도, 전 주인이던 앗 사이드 하산의 도움으로 점령. 성벽 파괴하고 그를 수바이아 및 바니아스 영주로 봉함. 이후 알 준 성채 포위[652] 대다수 제후들의 주장에도 바일리 지오프리 드 사르지니는 루이의 동생 앙주 백작 샤를에게 지원 요청[653] 1월 ~ 4월의 일이라고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포로가 된 라틴 제국의 제후 앙슈 드 카이유가 내통 제안하자 소수의 병력과 차낙칼레의 진영에서 북상해 셀렘브리아 점령하고 갈라타 주둔하며 내응 기다림. 하지만 앙슈가 그를 의심한 보두앵 2세에게 열쇠를 압류당했다고 연락해오고 원군 올거라는 소식에 철수 결심[654] 자신이 대칸 후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누가 등극하느냐가 중요했기에 사태 지켜보러 후방으로 향한 것. 그의 일기에 의하면 6월 6일 아흘라트 도달[655] 앗 카트야에서 진퇴양난에 처해 있던 유수프는 남은 인원들과 시나이 반도 횡단해 네게브 사막 진입, 결국 북으로 기수를 돌려 카라크 향함. 이에 우마르가 자신과 합류하라며 성채로 초대했는데 함정일까 의심한 유수프는 이를 거절하고 발카 방면으로 북상, 이전에 자신이 바흐리 맘루크 격파한 비르카트 지자에 주둔. 여기서 그의 가신들 중 한명인 근위대장 (타바다르) 후세인 알 쿠르디가 어차피 몽골군이 시리아 전부 정복할 것이므로 그들의 보호 하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며 키토부카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 장기간 절망에 빠져있던 유수프는 달갑게 수용, 소식을 접한 키토부카는 곧바로 남하하여 그에게 개인의 안전과 타브리즈에서 훌라구로부터의 관대한 대우 약속. 이후 키토부카는 그들을 이용하여 아직 몽골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지역들 장악 나섬. 먼저 다마스쿠스로 같이 돌아가는 길에 유수프에게 알 준의 총독 항복 설득시키고 성공하자 성벽 파괴. 일대의 몽골 지배력이 거점들에 기반되어 있지 않다보니 성채들은 반란 혹은 혼란의 근거지로만 여겨진 듯. 사르카드의 명목상 영주 앗 자히르 가지 역시 임지로 보내져 성벽 파괴 감독하도록 함. 다만 이크타로써 도시 지배권 유지시켜 주었으나 몽골인 총독이 행정권 장악한 상태. 그밖에 앗 살트, 보스라 등 항복 후 성벽 파괴됨. 한편 키토부카가 템플러 성채인 사파드 당도하자 수비 측이 보급품 지원하고 장군 위해 막사 설치해줌[656] 사르카드에서의 임무 마친 앗 자히르 가지가 다마스쿠스 도착하자 키토부카는 그와 유수프, 알 아지즈 무함마드, 앗 살리흐 누르 앗 딘 (홈스 영주 알 아슈라프 무사의 숙부)의 네 아이유브 왕공들을 호위대 하에 타브리즈의 훌라구 궁정으로 보냄. 타브리즈에서 그들은 약속대로 환대받음. 특히 유수픈는 많은 봉급 주어졌고 훌라구는 그를 왕좌에 자신과 함께 (옆에) 앉도록 권함. 훌라구, 유수프에게 이집트 정벌 끝나면 그의 이전 영지 전부를 돌려주겠다고까지 약속[657] 현재 라트비아의 리에파자. 사모기티아인들이 쿨머란트 약탈 후 돌아오던 리보니아 기사단과 그 동맹군 (프러시아의 튜튼기사단 및 현지 에스토니아인 민병대) 습격해 150여명의 기사 전사시킴. 이에 기사단은 메멜에서부터 내륙으로 진군 계획[658] 한편 이 무렵 몽골군은 알 두루즈 산지와 요르단 일대 제외하고 모든 무슬림 시리아 일대 장악한 상태. 토착 기독교도 혹은 시아 무슬림 거주하는 레바논과 안사리야 산지 일대만 정복 안되거나 최소한 속국인 상태, 그마저도 몽골에 별 위협되지 않음. 그나마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이집트 마저 지난 수십년간 민족적, 정치적 대립으로 골병이 든 상태라 훌라구는 이를 몽골의 침공에 절멸한 다른 무슬림 왕국들보다 더 위협적이라 여기지 않았을 듯. 한편 앗 살리히야 이르르자 아미르들이 진군 거부, 종교적 설득마저 실패하자 쿠투즈는 자신 혼자서 몽골군과 싸우겠다고 선언하자 이에 부끄러움 느낀 아미르들이 마침내 진군하였다고 함[659] 몽골 지휘관은 쿠슐루 칸이라고도. 쿠투즈가 바이바르스 휘하 선발대 파견한 것. 몽골군 격파했다고도. 바이다르는 가자가 전투에 적합하다 여기지 않고 가우르 지방으로 철수. 이후 당도한 쿠투즈는 호라즘 용병 생존자들 및 카라크의 우마르가 파견한 병력과 합세[660] 쿠투즈, 사절 파견해 아크레에 도움 청함. 대부분의 제후들은 이에 호의적이었으나 템플기사단장 토마 베라르가 맘루크 측이 승리한다면 기고만장해져 다음 목표로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할 것이라며 만류. 맘루크 측에 병력 지원 없이 안전 통행과 보급품 정도만 제공하기로. 이에 바이바르스 등의 몇몇 아미르들이 보급품 조달하러 아크레 입성 허가됨. 틈틈이 방어 시설 살펴본 바이바르스는 복귀 후 쿠투즈에게 자신이 기습 공격 해보겠다고 제안하나 거절됨. 아크레 측은 심지어 병력 제공 제안하나 쿠투즈의 불신으로 거절됨. 한편 쿠투즈는 사기 고취시키기 위해 아미르들 앞에서 가족과 재산 (그리고 이집트에서 누리는 특권)을 지켜야 하고 불신자들로부터 이슬람 방어해야 한다며 연설. 눈물과 맹세, 가자 진군 시처럼 바이바르스의 선발대가 아인 잘루트 향해 파견됨[661] 바알벡 주둔하던 중 요르단 지나 나사렛 방면으로 남하. 한편 수비대 없이 남겨진 다마스쿠스는 곧바로 반란에 휩쌓임. 맘루크 측에 비해 병력 부족했던 키토부카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심지어 부족한 기병대 지원 위해 주민들 중에서 보조군 용도의 보병대 모집하기까지 함[662] 시돈의 율리안, 혼란기 이용해 주변 지역 장악 나서 이젠 몽골 지배 받는 부카이아 협곡 습격하였고 이에 반격 나선 키토부카의 조카를 전사시킴. 분노한 키토부카가 파견한 몽골군이 시돈 기습 점령. 시타델은 제노바 함대의 지원 받으며 버팀, 한편 영주 율리안은 해상으로 도피, 그의 장인인 아르메니아의 하이톤 1세는 키토부카에게 율리안이 그의 채권자인 템플러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공격 나선 것이라고 그를 위해 구명. 한편 막대한 비난과 (시돈을 방어할) 자금이 부족한 율리안은 템플기사단에게 담보로써 보포르 성채 포함한 영지 및 군사 지휘권 넘기고 스스로 기사단 들어감[663] 사료에 따라 키토부카가 먼저 도착했다고도, 혹은 바이바르스의 선발대가 몽골군과 소규모 전투 벌이며 그들을 그곳으로 유도했다고도. 몽골군 위치 파악 위해 선발대와 파견된 바이바르스가 언덕에서 몽골군 진영 살펴보자 몽골군이 출격하여 언덕의 그를 포위하려 시도, 이에 바이바르스는 철수하여 하루 거리에 있던 쿠투즈와 합류해 귀환. 혹은 쿠투즈에게 몽골군 위치 알리고 몽골군 굽어보는 언덕에 주둔했다고도[664] 금요일. 키토부카 역시 아인 잘루트 당도하나 현지 정찰대의 부족으로 적군의 위치 파악 못함. 한편 쿠투즈는 몽골군 유인 위해 바이바르스 휘하 소수의 선발대만을 파견하고 본군은 언덕 뒤에 숨김. 예상대로 몽골군이 공격해오자 바이바르스는 언덕 쪽으로 도주, 이에 몽골군이 추격 나서고 맘루크 대군에 포위됨. 몽골군의 탈출을 위한 두 차례의 필사적인 돌격으로 이집트 측 전열을 거의 붕괴시킴. 이에 쿠투즈가 병사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투구를 벗어던지고 '와 이슬람!'을 외치며 근위대와 무너져가던 좌익 합류. 바이바르스 또한 용기있게 돌격. 이에 고무된 맘루크 군대가 재결집하여 반격 가하여 승기 되찾음. 붙잡힌 키토부카는 쿠투즈 앞에 압송되어 몽골의 복수와 주인을 배신한 맘루크와 달리 자신은 훌라구 대한 충절 지킬 것이라 연설한 후 맘루크 아미르인 자말 앗 딘 아쿠쉬 앗 샴시에게 처형됨. 일부 몽골군은 언덕 위에서 저항하려 했으나 추격 나선 바이바르스에게 붙잡히거나 학살됨, 일부는 현지인들에게 살해됨. 다른 몽골 병사들은 관목들 사이에 숨었으나 맘루크 측이 불 지르자 최후 맞음. (알 마크리지에 의하면 일단의 몽골군이 베트샨으로 도주, 이에 맘루크 군이 추격해오자 반격해 격파하고 전장 복귀해 맘루크 군 거의 패배시켰으나 쿠투즈가 재차 반격 성공하자 바이다르 등의 생존자들과 철수. 본 전투보다 더 치열했다고 함. 다만 이 내용은 확실치 않음) 시리아에서의 몽골 패권 붕괴, 수비대 없이 남겨진 다마스쿠스 시민들 봉기. 하마, 알레포 등지에서도 일어남. 친몽골 총독 자인 앗 딘 알 하피지, 대중들이 소식 접한 후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 깨닫곤 북으로 도피해 일 칸국 궁정의 관료가 됨. 카라크 파견된 몽골 관리 (샤흐나) 역시 임지 향하지 않고 도주. 바알벡 인근 진영에 남겨진 키토부카의 가족들 포로로 잡힘[665] (어떤 기록엔 키토부카 떠난 직후, 아크레 측이 맘루크 군에 군사 지원 거절한 이후라고도) 전투 소식 당도하자 다마스쿠스는 이틀간 폭동과 약탈로 얼룩짐. 무슬림들이 몽골 치하에서 우대받던 기독교도 (더 작은 규모로 유대교도 역시)에 복수. 밥 투마와 밥 알 샤르키 사이에 위치한 동북 구역에 위치한 성 마리아 성당 전소시키고 기독교도 가옥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이어짐. 많은 교회들 파괴되고 몇몇 기독교도들이 군중에게 살해됨. 다음날 공격의 대상은 유대인들에게로 넘어가 무슬림 군중이 상당수의 유대인 상점들에 방화. 다만 대회당은 무사. 무슬림들 중에서도 몽골과 협조한 자들은 현지인이건 몽골인 따라온 외부인이건 모두 살해됨. 군중의 행위는 당연히 매우 잔혹했으나 (굳이 이유를 대자면) 기독교도들 역시 몽골 승리 시에 비슷한 숙청 계획했다는 소문도 있음. 한편 시리아 각지 주둔하던 몽골군 북으로 도주, 손쉽게 맘루크 측에 정복됨. 훌라구 진영에 있던 룸 셀주크의 번왕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카이카우스 2세 역시 귀국[666] 풀네임은 자말 앗 딘 앗 무함마디 앗 살리히. 쿠투즈 대표하여 입성한 것. 도시의 혼란 진정되기 시작[667] 라마단 단식 종료하는 이슬람 명절 지냄. 유수프의 항복 유도해낸 후세인 알 쿠르디 처형[668] 시리아 지배를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 대부분의 시리아 아미르들은 아이유브 왕조 시절 이크타 유지. 다만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와 카이마리야 아미르들의 영지는 압수되어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아이바크의 전 아미르들에게 분배됨. 아인잘루트 전투에 맘루크 편으로 참가한 하마의 알 만수르 2세 (마라트 알 누만과 바린 영지 더해짐) 뿐만 아니라 몽골에 복속했던 (다만 그들을 열정적으로 돕진 않은) 카라크의 우마르까지 본래 영지 영유 승인됨. 심지어 아인잘루트에서 키토부카 휘하에서 싸운 후 (다만 적절한 때에 이탈해 맘루크 승리에 호재가 된) 모든걸 비관한 채로 팔미라로 도피해 홈스의 알 아슈라프 무사가 용서 구해오자 받아들이고 별 처벌 없이 본래 영지 영유 승인. 쿠투즈, 아인잘루트에서 포로로 잡힌 앗 사이드 하산에게도 본래 자비를 베푸려 하였으나 그가 몽골 측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그 자리에서 처형. 전투 전 바이바르스가 보낸 밀서에 응한 알 아슈라프 무사와 달리 열심히 싸운 것이 이유라고도. (처벌 받을만 했던) 하산 외의 아이유브 왕공들은 결국 세습 영지 유지, 다만 그들의 존재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맘루크 수중에 놓여 있음으로 시리아의 맘루크 패권에 별 위협 되지 않았고 그들의 존재 자체도 맘루크 술탄의 의지에 달려 있었음[669] 홈스에서 훌라구가 키토부카에 파견한 2천의 몽골군 만나 격파, 몽골군의 처자식들까지 사로잡음. 아파메아에서 재결집한 바이다르의 패잔병 격파하고 하림 일대까지 진출했다고도. 한편 북부 시리아의 베두인 부족장 샤라프 앗 딘 이사 이븐 무한나가 다마스쿠스 당도하여 복속 표하자 쿠투즈는 그를 아미르 알 아랍으로 임명하고 하마 소유이던 살라미야 영지 하사. 이사는 전에 바이바르스가 이집트에서 피신해 왔을 때에 도움 거절한 사촌 아부 바르크 이븐 알리와는 달리 그를 도움[670] 아인잘루트의 비보 당도에 훌라구 격노. 유수프와 다른 아이유브 왕공들 끌어내어 이집트 측에 그의 군대 참전한 것을 이유로 반역 혐의로 직접 문책. 유수프, 자신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며 자신은 타브리즈에 있어 시리아의 옛 제후들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항변. 이에 훌라구는 그를 바닥에 팽개치고 자신의 칼로 직접 살해하는 것으로 응답. 다른 시리아 왕공들 역시 도시 밖으로 끌려나가 처형됨. 유수프의 어린 아들 알 아지즈 무함마드만이 훌라구의 부인 도쿠즈 카툰의 환심을 사 (젊음과 결연한 태도에 호감 느끼고 그를 위해 직접 개입) 죽음 면함.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일 칸국의 궁정에서 명예로운 대우와 존중 받으며 지냄[671] 떠나기 전 가장 중요하게도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 현지의 세습적 연관성이 없는 이들을 총독으로 봉했는데 전자는 룰루의 아들이자 신자르 영주였던 (알 무자파르) 알 사이드 알라 앗 딘 유수프, 다마스쿠스에는 알 만수르 알리의 아타베그이자 쿠투즈의 경쟁자였던 알람 앗 딘 산자르 알 할라비와 부지르 앗 딘 쿠슈타린 알 쿠르디의 두 총독을 임명. 알라 앗 딘은 곧바로 알 비라 수복. 비록 쿠투즈는 얼마 안가 암살당하지만 그가 한달간 시리아에 머물며 정립한 새로운 체제는 유지되었고 바이바르스 때에 확장되고 공고히되며 맘루크 왕조의 구조적 토대가 됨[672] 바이바르스가 알레포 총독직 원했으나 그가 그곳을 기반으로 세력 키워 독립할 것을 우려한 쿠투즈가 막음. 함께 이집트 귀환[673] 알레포 총독직 거부된 것에 불만 품고 있던 바이바르스, 쿠투즈가 바흐리 맘루크 숙청할 것이라는 소문에 거사 결심. 사냥 나선 쿠투즈 앞에 숨겨온 토끼 풀어 놓음. 쿠투즈가 이를 쫓아가자 바이바르스와 동료들이 따라가 술탄을 에워싸고 한명이 그의 손을 붙잡음과 동시에 바이바르스가 뒤에서 그를 찔러 죽임. 이후 암살자들은 진영으로 돌아왔고 이에 원로이자 참모인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 알 무스타리비는 누가 죽였냐고 물어봄. 바이바르스가 대답하자 술탄 후보로 여겨지던 원로 알 라시디 (아이바크가 알렉산드리아에 가두었으나 쿠투즈가 시리아 출정 전 석방) 대신 그를 튀르크 법에 따라 술탄으로 추대. 바이바르스에게 알 라시디 측근들의 불만 잠재우기 위해 그들에게 영지 하사하고 빚 탕감해 주라고 조언해 그대로 선포됨. 이에 그들도 충성 서약. 또한 바이바르스가 (뒤따라오는) 나머지 아미르들의 충성 서약 걱정하자 뒤따라오는 할카 병력과 아미르들이 쿠투즈가 서로에 있다고 여기게금 우선 카이로 향할 것 제안. 역시 시타델 장악하자 (수비대가 바이바르스의 대표단에 항복) 할카 병력의 아미르들 역시 충성 서약[674] 산자르 알 할라비. 카이로에선 흑인 노예들과 마굿간의 종자들 및 하인들이 시아파 이름 하에 봉기하나 진압됨. 무이지야 맘루크 중 쿠투즈가 속했던 쿠슈다쉬야 역시 바이바르스 암살 꾀하나 진압됨.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항상 내부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 바이바르스는 협상과 위협 카드 실패하자 군대 파견 하기로. 바이바르스 휘하에 있던 아미르 알라 앗 딘 아이디긴은 몇몇 아미르들의 지지 하에 주군 대한 충성 맹세하고 그들과 다마스쿠스 떠남. 이에 산자르가 추격대 파견하나 격퇴됨[675] 쿠투즈가 선임한 알레포 총독 알라 앗 딘 유수프, 알라 앗 딘은 아미르들의 반대에도 몽골군의 습격에 도움 요청한 알 비라와 만비즈에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했다가 괴멸당하는 등 소심함 보임. (다만 몽골군이 성채 점령하진 못한 듯)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반란 소식에 아미르들이 자신들 중에서 후삼 앗 딘 라킨 알 주칸다르 알 아지지 선출하며 사실상 자치.[676] 알레포 접수한 바이다르는 샤흐나 (지방관) 두고 남하. 하마 건드리지 않고 연합군 쫓아 홈스 향함[677] 10일이라고도.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영묘 부근에서 전투 벌어졌다고 함. 6천의 몽골군은 8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1천으로 구성된 제1 부대 뒤로 나머지 부대 포진. 1천 4백의 시리아 측은 하나의 군대 유지. 알 아슈라프 무사가 중앙 맡고 하마의 알 만수르가 우익, 알레포 아미르들이 좌익 맡음. 알 유니니에 의하면 새들이 몽골군 앞에서 퍼덕거렸고 안개와 햇빛으로 몽골군의 시야 방해받았다고 함. 그리고 전투 도중 몽골군 후방에 누르 앗 딘 자밀 이븐 알리의 베두인 군대가 나타나며 전세 결정됨. 바이다르 등 소수 도주하고 나머지 사로잡히거나 전사. 포로들 중 키토부카 (키트부가)는 칼라운의 맘루크가 된 후 술탄까지 역임. 다만 일 칸국의 사가 라시드 앗 딘은 원정은 훌라구가 명한 것이고 사령관이 바이다르가 아닌 코케 일게 (일게 노얀)이며 단순히 바이바르스의 북상에 철수했다고 기록. 맘루크 사가들은 소수의 무슬림 군대가 승리한 것이야말로 아인 잘루트 이상의 승리였다고 기록. 전투 소식 당도하자 하마에선 친몽골 인사들 (몽골군 입성 위해 땅굴 파려 했다고) 공격받아 그 중 한명 살해됨. 한편 전투 결과에 감탄한 바이바르스는 알 아슈라프 무사에게 예전 텔 바쉬르 영지 더해줌. 한편 몽골의 침공 대한 체계적인 대응 필요성 느낀 알레포의 나시리야와 아자지야 아미르들은 이집트 향함. 바이바르스의 환대 하에 시리아의 맘루크 군에 편입됨[678] 칼리파 알 무스타르쉬드의 현손이자 알 무스타심의 12촌인 아불 압바스 무함마드. 그는 바그다드 함락 후 카파자 베두인들 사이에서 숨어 지내다가 시리아로 향하여 알 파즐 베두인 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의 보호 받음. 이후 유수프의 초청으로 다마스쿠스 향하려 하였으나 훌라구의 시리아 원정으로 좌절됨. 한편 이집트로의 회군 도중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에 대한 정보 입수한 쿠투즈는 (칼리파 후견인 명분 얻기 위해) 그에게 칼리파위 약속하고 대리인 파견해 바이아까지 이행. 다만 이 계획은 쿠투즈의 암살로 좌절됨. 어쨋든 알 하킴 비 아르믈 알라라 칭한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는 알 파즐 베두인과 이라크의 아나, 알 하디싸, 히트, 안바르 등지 습격. 바그다드 근교 팔루자에서 몽골군 분대 (카라굴) 격파. 유니니에 의하면 1천 5백의 몽골 기병 전사하고 칼리파 측은 오직 6명만 전사했다고.. 이후 바그다드의 몽골 사령관 카라 부가가 대군 이끌고 나오자 시리아로 도주. 쩃든 이 승전보를 접한 바이바르스와 알 무스탄시르가 이듬해의 바그다드 원정 꾀한 것일 수도[679] 전투 이후 살라미야에서 재집결한 몽골군은 북상. 이미 알 만수르가 복귀한 하마 공격 포기하고 무방비 상태의 알레포 입성하여 주민들 모두 추방한 후 일부 학살, 나머지 귀환 허락하고 봉쇄. 이에 주민들 고난 겪음[680] 여전히 포로 신세인 기욤 2세, 미카일의 (아테네 공국의 종주권 하에?) 아르고스 혹은 나풀리아 할양 요구에 아카이아 봉건법에 의하면 제후들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영토도 내어줄 수 없다며 거부. 그러자 미카일은 기욤의 직할지이자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남부의 요충지인 미스트라, 모넴바시아, 마이나 성채의 할양 요구. 기욤, 제후들의 결정에 따르기로. 이를 공작 부인이자 섭정인 안나에게 통보하기 위해 그의 조카이자 카리타이나 영주인 지오프리 드 브류이예가 파견됨[681] 줄라마르크의 아미르 사이프 앗 딘 만칼란 이븐 알리 알 하카리, 많은 쿠르드 아미르들과 남하하여 바이바르스에 복속. 바이바르스, 그에게 자신의 영토에 남는 것과 (몽골 치하에 있고 이전 아미르가 바이바르스 측에 망명한 상태, 즉 와피디) 명목상의 아르빌 총독 봉하는 것의 선택지 제공. (이슬람측 입장에선 직위 비어있는 상태) 만칼란, 후자 택하고 몇몇 아미르들과 출정. 초반엔 성공 거두었지만 결국 전사, 아들이 계속 싸워 몽골 측과 협상 유도. 결국 몽골측 묵인 하에 쿠르디스탄 산간 지방에서 자치. 몽골의 이라크 일대 통치의 어려움 보여주는 예시 / 몽골군에 파괴된 라카, 에데사 (알 루하), 칼라트 자바르 등지는 복구되지 않고 무인지대로 남겨져 맘루크 왕조와 일 칸국 사이의 비무장지대 역할 / 바이바르스, 십자군과 동맹하고 그들에게 맘루크 측 약한 지점 (아르와트) 알려준 하우란의 주바이드 베두인 대해 비밀리에 군대 파견해 상당수 학살 / 가을. 미카일, 훌라구와 비밀 동맹 체결. 카이카우스 2세 계속 동로마에 억류하기로[682] 산자르, 알레포와 하마 측에 지원 요청했으나 두 영주 모두 (그게 누구든) 이집트 술탄 충성한다며 거부. 산자르, 직접 출정하나 패배. 시타델에서 항전. 바이바르스, 다마스쿠스의 아미르들에게 뇌물과 예복 보내 전향시킴. 다마스쿠스 시민들은 산자르에 충성 유지하며 저항했지만 맘루크 군대가 포위하자 곧 항복. 이후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옛 주인이던 알 분두크다르를 총독으로 봉함. 바알벡 시타델로 도주했지만 결국 포로가 되어 압송된 알람 앗 딘 산자르는 후에 사면되어 알레포 총독 봉해짐[683] 선물 주자 바이바르스에 복속하였으나 여튼 제거됨. 하마와 홈스만이 아이유브 왕공들 하에 유지됨[684] 아크레, 사페드 등지의 9백의 기사 및 종자들과 1천 5백의 경기병대, 3천 보병이 골란 고원의 튀르크군 진영을 습격하나 미리 알아챈 튀르크 군대에 격파됨. 지도부와 다수 기사들 다수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 지불하고 풀려남. 이로써 몽골의 침공으로 인한 시리아의 혼란기 이용하려는 십자군의 시도 좌절됨[685] 몽골이 장악한 알레포 수복 위해 후삼 앗 딘 라킨 알 주칸다르와 파크르 앗 딘 알 툰바 알 힘시의 알레포 아미르들을 파견한 것. 아크레 측은 이 소식을 바이다르에 전달 (공식적인 결정인지 개인적 판단인지는 미지수), 그와 몽골군 철수[686] 제노바 특사 비스콘티, 기우디체와 서명. 베네치아 대한 양측의 영구 동맹. 미카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위한 충분한 해군력 확보 의도 및 베네치아 견제 목적. 니케아 제국의 주요 항구들에 제노바 구역 설치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시 수복될 시에 자치 구역 설정. 제노바 인들은 해당 도시들의 방어 돕고 니케아 측은 제노바의 적들을 해역에 들이지 않기로[687] 보에몽 6세와 하이톤의 친몽골, 반라틴 풍조에 대해 곧 소집될 공의회에서 논의하려 하였으나 불과 몇달 전에 사망. 그리고 보에몽 파문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자크가 교황이 된 것.[688] 알 앗 살리흐 루큰 앗 딘 이스마일 이븐 룰루. 2년간 몽골의 봉신으로 지내다가 공포심 느끼고 이집트 향함. 그곳에서 동생이자 역시 복속 결심한 지즈레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의 영주 알 무자히드 사이프 앗 딘 이샤크와 마주침. 바이바르스, 이들을 환대하고 요청에 따라 시리아 북부에 구금되어 있던 전 알레포 총독 알 사이드 알라 앗 딘을 석방.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군대 대동시켜 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함, 이후 칼리파의 바그다드 원정군 따라 귀환 / 헨리, 교황의 옥스퍼드 조례 무효화 근거로 귀족들과 재차 대립[689] 아불 카심 아흐마드 이븐 앗 자히르. 무스타심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258년 훌라구가 풀어준 후 3년간 베두인들 사이에 숨어 지내다 50여명의 카파자 베두인들과 시리아 향함. 맘루크 총독에게 환대받고 카이로 향한 것[690] 바이바르스, 그의 혈연적 정당성 확인 위해 공공 회의 개최. 법관들, 울라마, 지방 아미르들과 셰이크 알 이슬람인 앗즈 앗 딘 압둘 살람 등을 초청하여 위원회 결성. 법관들이 혈통을 따지고 대법관 (카디 알 쿠다트)가 혈통의 순수함을 선언하자 바이바르스를 필두로 모두 바이아 (충성 서약) 행함. 서부 아프리카 제외한 전 수니 무슬림 세계가 맘루크 왕조 보호 하의 칼리파 인정. 한편 다마스쿠스 총독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와 연락한 후 그에 의해 카이로로 보내진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 알 무스탄시르의 즉위 소식에 체포될까 두려워 도주. 알레포의 알 바를리에게 의탁, 칼리파로 선포됨[691] 맘루크 출신 시리아의 약탈자 아쿠쉬 알 바를리 알 아지지는 본래 아인잘루트에서의 전공으로 쿠투즈에게 팔레스타인의 가자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음. 바이바르스는 찬탈 이후 그의 영지 늘려 주고 아이디긴의 다마스쿠스 원정 도울 것 지시. 하지만 다마스쿠스 평정되자 바이바르스는 임시 총독 아이디긴에게 바하 앗 딘 알 부그디와 알 바를리 등 아지지야와 나시리야 아미르들에 대한 체포 명령. 이에 그는 신속히 전자를 체포, 하지만 후자는 다른 아미르들과 밤을 틈타 마르즈로 도주. 아이디긴, 시리아의 반란 커질까 우려해 알 바를리에게 서신 보내 좋은 의도 상기시켜 하나 그는 수용 거부하고 북상. 홈스 당도해 알 아슈라프 무사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였으나 거절됨. 이후 하마에서도 자신의 도움으로 술탄 칭하라는 제안 거절당하자 일대 약탈하고 몽골군 철수한 알레포 장악. 맘루크 군의 북상에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나 그들이 다시 남쪽으로 회군하자 귀환한 것. 홈스 전투의 영웅인 베두인 누르 앗 딘 자밀 이븐 알리가 알레포 의탁해옴 한편 알 바를리는 자신이 칼리파로 인정한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 (알 하킴)에게 수백의 튀르크 기병대 주어 유프라테스 건너편으로 보냄. 알 하킴은 하란 당도하여 주민들 및 인근 바누 타이미야로부터 칼리파로 인정됨. 이후 재차 바그다드 향해 남하[692]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가 타클리드 (칙령) 내려 바이바르스를 술탄으로 봉하고 현재 영토 영유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이 점거한 영토 대한 지하드 촉구[693]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리스인이 10여 km 외곽 레기온 (혹은 셀렘브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니케아 장군 알렉시오스 진영 찾아와 라틴 수비대 및 포데스타 마르코 그라데니고 휘하의 베네치아 함대가 흑해의 헤라클레아 인근 다프누시아 (케프켄) 섬을 공격하러 떠난 틈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도시의 비밀 통로 알려줌. 이에 24일과 25일 밤 무렵 분수의 문 근처의 수도원 당도, 일단의 병사들이 내통자들과 사용 중단된 수도교를 따라 침투하여 수비병들을 제압하고 분수의 문을 여는데 성공, 이후 니케아 군대가 입성해 퍼져나감. 보두앵 2세는 왕관과 보검도 챙기지 않고 블라케르나이 궁전을 빠져나와 부콜레온 궁전으로 피신. 베네치아 함대 돌아오고 니케아 병사들은 그들의 상륙 막기 위해 금각만 쪽의 이탈리아인 거주지에 방화. 이에 사기 꺾인 베네치아인들은 도시의 상실을 인정하고 보두앵 2세 등의 라틴인들과 에우보이아로 피신. 한편 도시 장악한 알렉시오스는 낮 동안의 집회 금하고 밤에는 통행 금지령. 다만 도시에 남은 라틴 인들은 그대로 거주권 인정[694] 카이카우스 2세의 (공동) 술탄직 폐한다는 조서와 함께 진격한 것. 페르시아인 무인 앗 딘 술레이만 파르바나가 재차 몽골측 총독 부임, 튀르크 부족들에게 높은 세금 부과하여 반발 유발[695] 테살리아의 메테오라 주둔 중이던 미카일 8세, 잠결에 수녀인 여동생 에우로기아가 깃털로 발바닥 간지럽히자 일어남. 그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소식 전하나 알렉시오스가 보낸 보두앵 2세의 왕관과 보검 보기 전까진 믿지 않음. 그 길로 북상, 알렉시오스 대동하고 호데게트리아 (성모가 그리스도 안고 있는 성화, 성 소피아 대성당의 재봉헌 의식 기념 위해) 이콘 하에 개선식. 미카일, 향후 1년간 자신 및 총대주교와 함께 알렉시오스가 교회 미사에서 언급되게 함.[696] 2세 아들 안드로니코스도 함께. 다만 요안니스 4세는 님파이온에 남겨짐. 한편 황궁으로 이어한 미카일은 반쯤 버려진 도시 활성화 위해 이주자들 데려오고 파괴된 건물 재건 위해 자금 지원 및 새 지붕 제공. 대대적으로 재건 및 자선 사업 벌이며 영광 회복에 나섬. 그리고 보두앵의 전 비서들 중 (고용 혹은 직위 유지시킨) 2명을, 호의 확인 위해 로마 교황청에 파견하나 별 효과 없음[697] 추기경 거치지 않은 마지막 교황. 프랑스 출신으로서 루이에게 만프레드와의 전쟁에 도움 청함. 곧 시칠리아 국왕으로 왕제 샤를을 추대하려는 계획 발현. 보에몽, 왜 몽골에 복속했는지 해명하여 파문 풀림[698] 마슈하드 앗 나스르 건설. 십자군의 튀르크멘 습격 대한 보복으로 십자군 영토 약탈. 다만 소규모였고 사실상 보여주기용. 막 안정된 무슬림 시리아의 재구축과 몽골과의 전쟁 집중하기 위해 (이후와 달리) 곧 아크레 대한 온건 정책으로 선회. 흉년 든 시리아에 해상으로 곡식 전달과 배후 안정 및 수월한 통신 체계 위해 십자군 측과 앗 나시르와의 평화 협정 갱신한다는 조약 맺음[699] 니클리 회의라고도. 이른바 '여인들의 의회' (포로가 된 제후들의 부인들이 모임) 미카일의 요구 수용하기로 함. 한편 프랑스에서 루이로부터 아테네 공 서임받고 돌아온 기 1세가 영토 할양 대신 몸값 지불할 것을 제안하나 액수 감당할 수 없다며 거절됨[700] 22일이라고도. 아직 8살인 키프로스 국왕 겸 예루살렘 차기 국왕 위그의 섭정으로 그의 사촌들인 브리엔 백작 위그 (고모 마리아 아들)와 위그 드 안티오크 (고모 이사벨라와 보에몽 5세의 동생 앙리의 아들)가 섭정직 두고 경쟁. 전자가 주장 철회하자 후자가 키프로스 섭정으로 선임되고 예루살렘 섭정은 공석, 일단 이탈리아 도시들과 기사단들 간의 분쟁 조정으로 능력 인정받은 지오프리 드 사르지니가 아크레의 실권 장악[701] 바이바르스, 아미르 자말 앗 딘 알 무함마디 휘하 병력 파견, 이들은 도중 파크르 앗 딘 알 힘시와 사면된 산자르의 군대와 합류해 북상. 이에 알 바를리는 알 비라 장악, 이후 북상하여 하란 향함. 인근 알 카라디 성채를 몽골군으로부터 빼앗고 자지라 떠돌다 디야르바크르까지 이르름. 그러다 하란에 정착[702] 이후 합의 이행 위해 아카이아 향함[703] 본래 바이바르스는 1만의 병력 준비했는데 모술에서 온 한 아미르가 원정이 성공하여 칼리파가 바그드드 장악한다면 그를 제거하려 들 것이고 권좌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간하자 바이바르스는 소수의 병력만을 제공한 것. 이븐 마크리지는 칼리파의 카이로 존재가 후계자들의 지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겨 그랬다고 주장. 다만 칼리파가 도움 필요할 경우 및 몽골군이나 그 동맹군의 기습을 대비해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발라반 알 라시디와 순쿠르 알 루미의 (2700?) 군대 파견됨[704] 알 라흐바에서 바그다드 함락 당시 도주에 성공한 (혹은 베두인 알 파즐 부족의) 4백 기병대도 합류. 다만 모술, 지즈레, 신자르의 삼형제는 이곳에서 이탈하여 각자 영지 향함. 그리고 아나에서 알 무스탄시르는 자신의 11촌이자 알레포의 6백 기병대와 역시 바그다드 향해 남하 중이던 알 하킴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와 조우. 병사들이 설득되어 알 무스탄시르 편에 가담하자 알 하킴 역시 칼리파 칭호 버리고 가담한 것. 이후 아나와 알 하디싸 등의 도시 복속해옴[705] 바이바르스는 우마르와 어느정도 연락하며 공존하였지만 후자가 샤흐랴주리 맘루크 아미르들을 포섭하려 하자 의심. 이전 망명 시에 우마르가 바이바르스의 아내를 홀대한 것이 원인이었다고도. 이후 맘루크 군은 카라크 자체도 포위하나 (아이유브 혈통의 명분 주장하는) 하란의 알 바를리 원정 염두에 둔 바이바르스가 회군 명령[706] 훌라구의 개입에 아직 맞서는 것은 시기상조라 판단한 듯. 그 전에 아르수프 영주 장과 베이루트 영주 장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당도하여 (아크레에서의 보급 대가로?) 쿠투즈가 약속한 십자군 포로 석방 및 자린 (갈릴리) 할양 이행을 요청하였으나 성과 없이 귀환. 바이바르스의 군사적 능력과 함께 십자군-맘루크 관계 전망이 어두워짐[707] 이후 바그다드의 샤흐나 알리 바하두르 알 콰레즈미가 나머지 군대 이끌고 합류. 다만 무슬림들은 병력에서 배재시킴[708] 12월 18일이라고도. 카라 부가, 밤새 유프라테스 도하. 알 무스탄시르, 군대를 12개 부대로 편성하고 베두인들과 튀르크 기병대를 각각 좌익과 우익에 배치. 칼리파 군대가 먼저 공격, 이에 알리 바하두르의 몽골군이 밀려나는듯 하였으나 곧 매복해 있던 나머지 몽골군이 공격해오자 전세 역전. 좌우익의 베두인과 튀르크 군 도주하고 남은 칼리파와 3백 맘루크 병력은 전멸. 알 무스탄시르도 도주하였고 이후 사라졌다는 기록도. 아흐마드 및 50여 기병만이 생존[709] 바이바르스, 아크레와의 일시적 화해와는 달리 몽골에 완전 복속하여 샤흐나 (다루가치)가 인구 통계 내고 인당 1 디나르의 세금 거두는 안티오크는 적대. 칼리파의 바그다드 원정 보조 위해 파견된 발라반 알 라시디와 순쿠르 알 루미의 군대가 북상 도중 공국의 농촌 지방 약탈한 것. 한편 알 라흐바에서 칼리파와 헤어진 삼형제는 계속 북상, 신자르에서 알라 앗 딘과 알 무자히드 남고 형 앗 살리흐는 몽골군 마주치지 않고 모술 당도. 한편 두 동생들은 칼리파의 패전보 듣고 시리아로 도주. 바이바르스, 이들을 재차 환대하고 관대히 큰 이크타 하사[710] 흑해안의 다디브리즈 성채에 유폐됨. 이에 분노한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는 니케아 외곽의 파스카시오스 수도원으로 은퇴, 라스카리스 왕조 폐지 대한 공공연한 반발. 옛 니케아 영토에서의 미카일 평판은 영영 회복되지 않음[711] 이번에도 순쿠르 알 루미가 지휘, 성 시메온 (알 수와이디야)의 전함 불태우고 안티오크 역시 공격. 다만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의 요청으로 당도한 몽골군 덕에 안티오크 대한 공격은 풀림[712] 여름 이후. 아르메니아 군의 시리아 북부 알 푸아 원정에 안티오크 보병이 동참한 것. 하지만 알레포 군에 격파되고 다수 사로잡혀 카이로 보내짐 / 바이바르스, 미카일 8세와 우호 관계 맺음. / 만프레드, 딸 콘스탄체 아라곤의 페드로 3세와 혼인시켜 동맹 / 전 라틴 황제 보두앵, 시칠리아 궁정 거쳐 비테르보의 교황 우르바노 4세 접견해 말로나마 정당성 인정받음. 보두앵, 교황에게 만프레드 옹호하여 8월 1일까지였던 그의 비테르보 소환 기한이 11월로 유예됨. 이후 보두앵은 프랑스 향해 루이에게 자신 위한 십자군 설득 / 교황 우르바노 4세, 만프레드에게 조공 및 그가 추방한 이들 대한 사면 조건으로 그의 시칠리아 왕위 인정하겠다고 제안하나 거절됨 / 베네치아-에피로스-교황-보두앵의 동맹 성립됨. 교황측 설득으로 아카이아 공 기욤 2세 역시 가담.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 재차 마케도니아의 동로마 기지 공격 / 훌라구, 루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리아에서의 철수는 목초지 및 사료 부족이라고 언급 / 아미르 알 아랍 이사 이븐 무한나, 사촌 누르 앗 딘 자밀 이븐 알리와 카이로 당도. 바이바르스, 환대하고 쿠투즈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서임[713]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에서 메소포타미아 방면 10일 행군 거리까지 목초지 방화 및 시리아-이집트 간의 연락 체계 (바리드) 정비[714] 루이가 이집트에 함대 파견하는 대가로 자신이 예루살렘 점령하고 십자군 측에 넘겨준다는 계획. 다만 프랑스까지 전해졌는지는 미지수[715] 1256년 교황이 후자에 하사할 때부터 분쟁[716] 봄 무렵 하란 머물던 알 바를리에게 모술의 앗 살리흐의 구원 요청 당도. 이에 그는 몽골군의 1/8 규모인 1천 4백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곧장 출정. 원군 소식에 삼다구는 철수 고려하나 몽골측 조언자인 자인 앗 딘 알 하피지가 그 숫자가 작다며 맞설 것을 주장, 용기 얻은 몽골군 출격해 승리. 하란 군대는 대패하고 알 바를리는 부상 입은 채로 소수의 생존자들과 도주, 알 비라 당도. 훌라구, 그에게 서신 보내 복속한다면 알 비라를 이크타 (영지)로 하사하겠다고 제안하나 거절됨. 오히려 카이로 향함[717] 같은 달 알 루사파 역시 점령[718]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되었으니 교회 통합 논의 뒤따라야 한다는 서신 보냄.[719] 미카일의 요구대로 콥트 총대주교 사절단 포함. 이때 맘루크용 노예 및 사절단 운반선의 보스포루스 통과 승인된 듯. 한편 기욤 2세의 배신에 미카일은 응징할 원정대 준비[720] 바이바르스, 기존 영지가 알려지지 않은 와피디 (망명자) 쉬하브 앗 딘 아부 바크르 알 샤이브 환대해 주고 동쪽으로 파견하고 받은 답변. 주민들의 술탄에 대한 복속 보고. 하지만 이후로 연락 두절, 몽골군에 진압된 듯 함. 비록 실패했어도 바이바르스는 자신의 힘 들이지 않고 일 칸국 괴롭히며 국력 소진시키고 통치 불안정하게 만듦. 도망친 인사들 이용해 몽골의 지배력 약한 이라크 지방에 소규모 원정대 파견하는 것이 기본 정책이었던 듯[721] 이렇게 유프라테스 강가의 요충지 알 비라가 바이바르스 소유가 됨. 다만 알 바를리는 1년도 되지 않아 체포됨[722] 약 1년전 베르케 칸이 파견한 킵차크 선발대. 훌라구의 학살 피해 귀순[723] 1261년 알란인 사절 이후 두번째. 현지어 가능한 튀르크인 아미르와 귀순자들 중 지리 잘 아는 두 명 딸려보냄. 이집트 당도한 킵차크 인들에 대한 대우, 칼리파 추대 알리고 같은 무슬림으로서 지하드 제안. 선지자 무함마드가 쿠라이쉬 부족과 싸운 것처럼 동족이라도 신앙을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점 역설[724] 10-11월경 선발대가 노가이에게 패한 것 설욕. 노가이 본인도 데르반트로 도주[725] 21일이라는 기록도. 1261년과 같은 과정 거침. 바이바르스 충성 서약, 다만 타클리드 (칙령) 청하지도 않음. 다만 다음날 쿠트바에서 알 하킴이 바이바르스 칭송하며 지하드 선포. 이미 칼리파로부터 서임 받았음에도 또다시 추대했다는 것은 바이바르스가 칼리파제에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증거[726] 11월 20일 샤마키 진영에서 본군과 출정[727] 11일이라고도 함. 다음날 노가이는 캅카스 포기하고 킵차크 평원으로 퇴각, 아바카가 추격[728] 그는 보에몽 6세의 숙부이자 위그 2세의 고모부이며 키프로스의 섭정 위그의 부친. 부인 이사벨라와 아크레 당도. 이사벨라, 귀족회의 열고 콘라딘으로부터의 섭정권 요구해 통과됨, 다만 충성 서약은 적법한 국왕 콘라딘의 존재와 승인 있어야 한다며 거절됨. 이후 그녀는 남편 앙리를 아크레의 바일리로 임명하고 키프로스 귀환[729] 만프레드 폐하고 교황청의 봉신으로서 시칠리아 왕국 다스릴 것 제안하며 협의 /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 동로마 군에 패배. 이오안니아 할양 대가로 휴전 / 아테네 공 기 1세 사망, 장남 장 1세 계승 / 여름. 미카일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 동로마 함대와 모넴바시아 상륙. 라케다이몬 포위하고 아르카디아 침공. 기욤 2세는 코린트로 도주, 다른 라틴 영주들의 원군 기다림. 동로마 군은 영주 지오프리 드 브리엘의 부재 덕에 별 저항 받지 않고 카리타이나 고개 넘어 엘리스 진입. 스코르타의 산간 민족들이 원정군 가담, 함께 올림피아 당도. 동로마측 튀르크 용병들이 라틴 교회의 이소바 수도원에 방화. 다만 연로한 영주 장 드 카타바스가 기사들과 돌격해 그들을 격퇴. 콘스탄티노스, 기욤 2세가 원군과 남하하자 언덕 지대 거쳐 라코니아로 철수 / 세테포치 해전. 베네치아 함대가 제노바 함대 격파, 티레 공격. 이에 미카일은 잘못된 해양 세력을 택했다고 결정, 베네치아와 협상 나섬 / 보에몽, 장인 하이톤 1세와 안티오크의 정교회 총대주교 에우티미오스 납치해 아르메니아에 유폐. 라틴 총대주교 오피조가 현지 교회 장악. 한편 에우티미오스 보호자 자처했던 훌라구와 도쿠즈 카툰은 모욕감 느낌 / 바누 킬랍의 1천 베두인들이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의 아인 탑 (안테프) 약탈 참가. 다만 이후 바이바르스가 아르메아 원정한 후 그들 역시 맘루크 편으로 전향한 듯 (1277년 이전) / 쿠빌라이 군이 차가타이 칸국 (트란스옥시아나) 장악, 훌라구와의 통신 회복 / 바이바르스, 사파드 성채의 템플러들에게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싸우는데 도움 주는 대가로 성채 넘겨주었는데 이제 시리아의 주인인 자신은 그 도움이 필요 없음으로 성채 넘기라 주장하나 무소용[730] 13일이라고도. 킵차크 진영 점령하고 3일간 축제 벌이던 일 칸국군을 킵차크 칸국군이 기습하여 격파. 이후 일 칸국군이 얼어붙은 강 건너 후퇴하던 중 지나친 하중으로 얼음 갈라져 상당수 익사. 베르케 칸, 데르반트까지 추격하고 귀환[731] 도중 팔레스타인의 아이드, 자름, 라바 베두인 부족들 대표들 접견. 거주 승인 대신 유목세 (이다드)와 파발을 통한 통신망 유지 (바리드) 및 술탄이 원할 시에 군마 제공한는 등의 의무 지움. 또한 디완과 무쉬드 (군사 교관) 설치해 몽골령 이라크 대한 체계적인 습격 이끌게함[732] 이전에 약속되었으나 미루다가 평화 주선 위해 부랴부랴 이행한 것. 하지만 구호/템플기사단은 이를 이행하지 않아 바이바르스의 분노 유발[733] 자발 앗 투르. 십자군 도시들 및 기사단의 사절단 접견하나 공격적인 비난 퍼붓고 굴욕적으로 내쫓음. 한편 구호기사단이 벨부아 (카우캅) 성채 포기. 성벽 허물고 해안에 집중[734] 이때 성당 건물의 잔해는 20세기에 발굴됨. 다만 수태고지 성지 자체는 무사[735] 바이바르스, 1261년 이후 재차 카라크에 군대 파견하려 했으나 칼리파의 개입으로 철회 (명분만 그랬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 있었을 듯). 훌라구와 협상하고 돌아오던 우마르의 아들 알 아지즈, 다마스쿠스에서 체포되어 카이로에 감금됨. 바이바르스는 그를 이용해 우마르가 협상 나서게 함. 한편 바이바르스 심기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시리아 약탈 못하게된 우마르는 보물이 바닥나고 용병들이 바이바르스 측으로 전향하자 세력 약화됨. 한편 1263년 연초 무렵 가자로 사냥 나온 바이바르스는 우마르의 모친 접견. 그녀가 아들 명의로 협상, 바이바르스는 우마르 안전 보장. 이에 벳샨에서 우마르가 바이바르스에게 항복, 환대받음. 하지만 이미 바이바르스는 아미르들 소집해 준비해온 우마르 대한 기소 내용 설명하여 처벌 합의. 함께 타보르 산 도달하자 바이바르스의 명으로 우마르는 무슬림 대해 몽골과 공모한 혐의로 체포됨. 훌라구와 주고받은 편지 중 하나에서 그는 우마르에게 보스라 ~ 가자의 영지 및 이집트 정복 위해 2만 군대 지원 약속. 우마르는 이집트에 보내져 구금됨[736] 4월 14-15일이라고도. 바이바르스, 아크레 근교 방화하고 초토화시킴. 주변의 모든 건물과 식물을 태워버려 시내 주민들은 연기와 먼지, 그리고 반짝이는 병장기만을 볼 수 있었다고. 이에 십자군이 반격 나서나 대패, 많은 귀족들이 일부는 말탄 채로 포로로 잡힘. 티레의 필리프과 제노바 인들이 아크레 정부와 베네치아-피사에 대항하여 바이바르스 지원, 군대 파견하려 했으나 철회하였다고도[737] 우마르는 벳샨 향하며 아들 알 아지즈에게 카라크 맡김. 성채 당도 전까지 진군 목적지 숨기는데 성공, 갑자기 나타난 대군에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한 알 아지즈가 아미르들과 서둘러 나와 항복[738]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와병하여 이탈한 맘루크 사절 및 동로마와 제노바 사절까지 동행. 훌라구가 몽골법 어겼다며 일 칸국 대한 협공 제안. 바이바르스,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호의 제공. 만찬 열어주고 칼리파의 예복 (푸투와) 하사, 사원 방문, 칼리파 알 하킴의 지하드 대한 쿠트바 참관, 그와의 면담. 또한 바이바르스는 베르케 칸에 대한 호의 표시로 메카, 메디나의 금요 예배문에 그의 이름 넣게함[739] 교황의 봉신으로서 통치하고 이탈리아에서 다른 영토 취하지 않으며 요구대로 군대 지원하기로. 한편 교황 우르바노 4세는 교회 통합 논의 대해 동로마 측에 우호적인 (혹은 애매한) 편지 보내 프란치스코회 수사 파견 제안[740] 25일이라고도. 아미르 파리스 앗 딘 아쿠쉬 알 마수디와 이마드 앗 딘 압둘 라흐만 알 하쉬미를 킵차크측 사절과 함께 파견.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먼저 훌라구의 사절 도착, 이에 그의 분노가 두려워 킵차크-맘루크 사절단의 입성 막은 것[741] 밭갈기 위한 평화. 추수 때까지 휴전하기로. 바이바르스, 곡식이 익으면 그들이 수확하기 전에 이슬람의 칼날이 그들의 수급을 앗아갈 것이라 장담. 프랑크인들이 몇몇 무슬림과 가축 건드리자 바이바르스는 이집트 방문 중이던 카이사레아의 사절 구금[742] 아크레의 프랑스 병력이 주도. 맘루크 군이 하이파 인근 카르멜 산 일대 습격해 농사 망치고 농민들 내쫓은 것에 대한 보복[743] 홈스와 알 라흐바 등 그의 영지는 술탄의 직할령으로 포함됨. 이로써 하마만이 시리아의 유일한 아이유브 왕가 소유로 남음[744] 그녀와 바일리 앙리의 아들이자 키프로스의 섭정. 부재 시에 바일리인 지오프리 드 사르지니에 아크레 대리인 맡김. 다만 사촌인 위그 드 브리엔이 자신의 모친인 마리아가 이사벨라의 언니임으로 자신의 서열상 우위라며 섭정직 주장 / 베이루트 영주 장 드 이벨린 사망, 딸 이사벨라 계승 / 가을. 훌라구, 재차 시리아 원정 준비 / 바이바르스, 앙주 백작 샤를의 사절 접견. 베네치아-시칠리아-에피로스-맘루크 vs 제노바-동로마-아라곤 대립구도 형성 / 연초. 미카일, 교황 사절인 크로토네의 그리스계 가톨릭 주교 니콜라스 접견. 교회 통합의 가능성 대한 호의적인 보고와 함께 돌려보냄 / 연초. 튜튼/구호기사단, 연합하여 리존 (텔 메기도) 점령 /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 약화된 동로마령 마케도니아 공격하나 미카일이 서진해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협상. 남편 잃은 미카일 8세의 조카 안나 칸타쿠제노스와 결혼하기로. 미카일, 회군 도중 전 룸 술탄 카이카우스가 부른 킵차크 칸국군의 공격 받음. 억류된 맘루크 사절단의 중재로 카이카우스 넘겨주는 대가로 그들은 퇴각, (혹은 미카일이 막은게 아니라 사절 자체적 문제로 지연되었다고 해명했다고도) 이에 미카일은 사절단의 통과 허가 / 카이사레아 영주 장 2세의 후계자인 장남 장, 낙마하여 사망[745] 바이바르스, 노련한 아미르를 시리아로 파견해 각 도시의 방어 태세와 병력 점검하게 함. 군사적 준비가 미흡했던 하마에 직접 개입하기도. 한편 이사 이븐 무한나와 피트나 벌였던 죄로 감금했던 그 사촌 누르 앗 딘 자밀 이븐 알리 석방. 재차 아미르 알 아랍으로 봉해져 시리아로 귀환, (바이바르스와 비밀리에 연락하던) 시라즈 군주에게 파견되어 지나가던 술탄의 관리 (쿠사드)를 체포하고 그들이 운반하던 편지를 훌라구에게 보내버림. 이후 훌라구 칸 알현하고 이라크에 이크타 얻어냄. 바이바르스, 아미르 알 아랍 직을 그의 형제인 아부 바크르에게 넘김. 이후 히자즈에서 월동하며 핫지 순례객들 공격해 학살하던 자밀은 떠돌이 생활에 지쳐 바이바르스에게 용서 구하는 사절 파견. 바이바르스, 자밀에게 지정된 기한에 카이로 방문 지시. 그리고 그는 당도하는 즉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272년경 옥사 / 우르바노 4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 교회 통합 대한 긍정적 보고와 함께 귀환 / 베네치아의 상인 겸 탐험가인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 부하라 방문 후 크림 반도로 귀환 도중 몽골 내전으로 볼가 강에서 길이 막히자 쿠빌라이 궁정으로 파견된 현지 사절단과 대도 향함 / 스텝에서 벌어진 3년간의 전쟁에서 패배한 아리크 부카, 쿠빌라이 진영 찾아와 정식으로 복속. 용서 받고 목숨 부지하나 측근들 처형되고 그 자신도 (우연히 혹은 편리하게) 곧 사망[746] 교회에서 맹세, 십자가 새겨진 겉옷 걸친 채로 전투 전 미사드리고 고해성사. 십자가 문장 하에 전투 임함[747] 휴전 끝나자마자 십자군이 비밀리에 자파 집결했다는 첩보에 이미 지시[748] 보에몽과 하이톤 1세 참석해 (이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미카일 궁정에 망명한) 안티오크의 정교회 총대주교 에우티미오스 축출에 대해 해명. 놀랍게도 별 처벌 없음[749] 알바니아의 복잡한 해안선으로 베네치아 전함들 따돌리고 정박 중이던 베네치아 수송선 약탈, 나포, 격침시키거나 전소시킴[750] 3일이라고도. 역시 환대받음. 베르케 칸의 궁정 정보 전달[751] 쿠발리아의 총독이자 첫 일 칸. 만프레드와 샤를이 모두 개입 염두에 두며 콘클라베는 점점 지연됨[752] 니콜로 & 마페오 콜로, 대도의 쿠빌라이 궁정 당도 / 브라운슈바이크 공 알브레히트 1세와 튀링겐 변경백 하인리히 3세가 프로이센 대반란에 직면한 독일기사단국 원조 /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알리칸테 함락[753] 17개의 투석기 배치. 그중 15개가 시타델 겨냥. 당시 사냥 여행 중이던 바이바르스는 당장 군대 파견[754] 나르본 주교 위그 드 풀크. 프랑스 왕가와 좋은 관계. 시칠리아 왕국 대한 샤를과의 협의 승인[755]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인 친아들 아바카 칸의 계승 확보. 시리아로 파견된 몽골군 철수[756] 아르수프 일대에서 사냥 위장하며 포위 준비. 1263년 아크레 공격 때와 같은 전술[757] 알 아우자의 맘루크 진영에서 목재 운반되자 바이바르스는 아미르 잔다르인 이즈 앗 딘 알 아프람에게 마그리비와 이프라니 형식의 투석기 주조 명령한 것. 큰 것 4개와 작은 것 여러개. 이후 밤새 군대 이동시킴[758] 27일이라고도. 바이바르스, 수륙 양면으로 포위하고 갖가지 공성병기 배치. 본인 역시 공성전 참가. 이후 카이사레아 영주 장 2세는 키프로스 피신[759] 바이바르슷, 아크레 측의 카이사레아 원조 막기 위해 아랍-튀르크 기병대 파견. 이들은 아크레 성문 앞까지 당도하여 수비대 묶어둠[760] 맘루크 군이 시타델의 성벽 허물고 성문 불태우자 항복한 것. 이후 바이바르스는 아틀리트 향해 정찰대 파견, 하이파가 파괴되고 버려진 것 확인[761] 10일이라고도. 세명의 맘루크 아미르들이 하루만에 점령. 주민 포로 혹은 학살되고 일부만 선박으로 도주, 도시 파괴됨[762] 하이파 공격 대한 주의 분산시키기 위해 직접 경기병대 이끌고 템플러들이 수비하는 아틀리트 공격. 하부 도시 점령하고 약탈, 수비대는 시타델에서 항전[763] (진전이 보이지 않는?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아틀리트 포위 지속 대신 파괴 작업 중이던 카이사레아 진영 귀환 후 더 남하. 아틀리트 공격은 아르수프 깜짝 공격 및 수비대 안심시키려는 연막작전[764] 아르수프의 수비대는 270명의 구호기사단 중심으로 구성됨. 맘루크 군은 해자 장악하고 공성 병기로 성벽 붕괴시키기 시작[765] 아크레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 하지만 아르수프 구하기엔 이미 늦음[766] 새벽 4시부터 총공격.[767] 새벽 4시 경 항복. 바이바르스, 목숨 보장 증표로 자신의 문장 보냄. 아미르들에게 포로들을 각각 분배, 성벽의 일부씩 할당해주고 포로 이용해 파괴 작업. 다만 이후 부상자들은 자파로 보내주었다고도함[768] 아르세니오스, 미카일의 찬탈 규탄하고 미사에서 언급 안하는 것에 더하여 무슬림 아미르에게 성찬식 거행. 결국 유배됨. 그 어떤 주교도 나서서 미카일 대한 파문 풀어주려 하지 않아 1년간 공위기[769] 키프로스 군대 당도한 아크레 공격 대신 회군. 이미 아크레 남쪽의 십자군 도시는 자파만이 남은 상태[770] 그리고 만프레드와의 전쟁 수행 위해 로마 의장으로도 임명[771] 부르고뉴 공 위그 4세의 장남이자 옥세르 백작이며 느베르의 상속녀 마틸다 2세의 남편[772] 연초 무렵 시리아의 맘루크 관리들과 마찰, 습격 준비하나 홈스의 아미르가 정보 입수하고 준비한 결과 패배[773] 1263년부터 계획되던 십자군이 이제서야 설교 개시된 것[774] 룸 셀주크의 몽골 총독이자 페르반 (재상)인 무인 앗 딘 술레이만, 클르츠 아르슬란 4세 암살하고 그의 어린 아들 카이쿠스라우 3세를 허수아비 술탄으로 옹립 / 미카일, 자신의 서녀 마리아를 일 칸국의 아바카 칸에게 시집보냄 (데스피나 카툰) / 한편 이해에 비블로스가 바이바르스에 항복하고 그 대가로 엠브리아코 가문이 1302년 혹은 1306년까지 도시를 통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바이바르스 휘하 두 맘루크 아미르들이 튜튼 기사다느이 몽포르 성채 포위하나 함락 실패[775] 빠르게 남하하여 만프레드에 선수침[776] 만프레드의 과부인 헬레나, 친정인 에피로스로 도주하려 시도하나 트라니에서 교황군에 붙잡혀 노체라에 구금됨. 석방되지 못하고 1271년 옥사. 세 아들과 딸 (장남도 겨우 4살)은 카스텔 델몬테에 감금됨. 샤를, 우선 귀족들에게 관용 베푸나 이후 가혹한 프랑스 정부 세움. 시칠리아령 에피로스 지배 주장하나 디라키움 사령관 치나르도가 거부, 버팀. 한편 에피로스의 미카일 2세는 치나르도에게 자신의 처제와의 결혼 약속하며 영토 양도 합의. 그러곤 동맹인 틈을 노려 요원들을 파견해 반란 선동, 치나르도 암살. 그러나 연말 무렵 샤를이 시칠리아 함대와 당도해 디라키움과 블로러를 정복하며 미카일 2세의 계획 물거품[777] 하이톤, 맘루크 측이 함대 제조 위해 킬리키아의 숲의 목재 구매 금하며 압박. 이에 바이바르스는 아르메니아 원정 결심[778] 본인이 참배하고 나서 내린 지시라고도 함[779] 10일이라는 기록도. 가자에서 홈스로 칼라운 휘하 7천 선발대 파견. 도착해서야 트리폴리 공격 지시받음. 완전 깜짝 기습[780] 바이바르스, 군대 나누어 여러 곳을 동시에 습격하게함. 그중 트리폴리 대한 공격은 보에몽이 공격 대상인 아르메니아 혹은 아크레 돕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칼라운과 알 만수르는 크락 데 슈발리에 지나쳐 진격, 트리폴리 일대 농지 황폐화시키고 쿨라이아트와 할바 등의 소규모 방어 시설 점령하고 성벽 파괴. 2주간의 약탈 끝에 3천 포로와 홈스 귀환. 바이바르스는 그밖에 2개의 습격대를 더 파견. 전자는 둘로 나뉘어 티레와 시돈 공격해 낙타, 소, 양 등의 가축과 티레의 와지르 및 아르메니아 측 고위 관리 사로잡음. 후자는 아틀리트 공격. 본인은 본대 이끌고 아크레 습격, 부근의 요새 하나 점령.[781] 얼마전 프랑스에서 원군 당도[782] 몽포르 성채는 아크레에서의 템플/구호기사단 간의 분쟁 후 튜튼기사단의 새 본부가 된 곳. 수비대가 강력히 저항하자 포위 풀고 사파드로 목표 변경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정황을 보아 당초 목표가 바이바르스의 연대기 작가의 표현으로는 '이슬람의 승리의 장애물'로 묘사된 사파드였던 것으로 보임[783] 사파드에 비밀리에 선발대 파견 후 왕실 막사 보냄. 본인과 본대는 아크레 측이 티레와 시돈 습격하고 돌아오는 병력을 습격하지 못하도록 더 주둔, 그들이 사파드 외곽의 맘루크 진영 합류한 후에야 이동[784] 특히 포위 도중 당도한 티레의 사절은 바이바르스와의 비밀 동맹 연장 제안. 이에 바이바르스는 필리프가 자신의 보호 원한다면 십자군 축출할 것 명령. 또한 티레는 십자군의 바니야스 습격 도왔고 자신이 아크레 공격했을 때에 돕는다 해놓고 오지 않았음으로 그쪽이 먼저 동맹 어겼다며 거절, 사절 돌려보냄[785] 본래 최대한 빨리, 최소한의 인명 손실로 성채 점령하려 했으나 당일 포함한 2차에 걸친 공세에도 수비대가 버텨내자 투항하는 정교도 그 누구에게나 사면 약속. 증표로 스카프 (두건/넥타이?) 보내고 수비대 측이 이를 반환했음에도 포위군에게 템플러들만 저격할 것을 지시하며 분란 일으키려 노력. 결국 템플러들은 현지인 보조병들에 대해 의심, 분쟁 발생. 1265년 무렵 바이바르스가 갈릴리 진군해 현지 기독교도들의 공모로 요새 몇개 취했다는 기록은 이 일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짐[786] 이에 수비대는 포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성벽에 불을 붙이는 등 노력했으나 역부족[787] 맘루크 군은 즉시 시타델 대한 땅굴 작전 돌입, 이에 수비대 사기 저하. 현지인 보조군 중 상당수가 이탈하고 일부가 성문 열어주기로 했다는 소문까지 도는 상태에서 병력마저 부족해진 수비대는 현지 기독교도 레오를 파견해 아타베그와 항복 협상. 바이바르스, 그들이 시타델 파괴하지 않고 무기나 재산 대동하지 않은 앗태로 성문 나온다는 조건 하에 약속. 아크레 향하려는 이들에 대한 안전 철수 보장 약속했다고도. 기사들은 이를 수용하고 항복 결심[788] 협정에 의해 금지된 물품 (금품과 무기) 대동하고 무슬림 포로들을 기독교도라고 우기며 끌고나오자 분노한 바이바르스가 처형 결심.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바이바르스는 카르문 부가에게 맹세 대신하게 하고 자신과의 합의 없었다는 명분으로 처형 강행했다고도. 혹은 템플러 배신한 기독교도가 항복 조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도[789] 기사단이 무슬림 포로 처형하던 언덕으로 데려가 형 집행. 2명만 살려줌. 한명은 아크레에 소식 알리게 하고 나머지 한명인 시리아 기독교도는 유창한 아랍어 실력을 눈여겨본 바이바르스가 첩자로 활용할 목적[790] 소수의 수비대에 목숨 및 거취 보장 자유 대가로 항복 제안, 이에 그들이 응하자 약속 지킴[791] 떠나기 전 바이바르스는 사파드에 군대와 보급품 쌓아두어 대십자군 요새로 활용 지시. 아크레 십자군이 틴 쉬하 습격하자 사파드 주둔군에게 아크레 일대 습격 지시[792] 맘루크 군이 기동력으로 바그라스 성채와 레오 휘하의 아르메니아 주력군을 우회. 이에 레오 역시 회군하여 맘루크 군과 맞섬. 하지만 대패하고 동생 테오도로스와 숙부 전사. 레오 본인과 또다른 사촌이며 도주한 대원수의 아들도 함께 포로 잡힘. 함무스 영주 역시 도주. 아르메니아 주력군 괴멸되어 킬리키아는 무방비 상태에 놓임[793] 알 만수르, 본인은 하마 병력과 수도인 시스 약탈 및 주둔하고 두 아미르들에게 킬리키아 약탈 맡김. 칼라운은 아야스, 아다나, 타르수스 등지 습격. 약 2주간 목표 달성하고 약탈물 및 포로와 회군. 아르메니아 왕국은 황폐화됨, 하이톤 1세는 일칸국군과 뒤늦게 당도[794] 성인 남자들은 학살되고 아이들은 십자군 대한 첩자용으로 노예화됨. 이후 승리하고 귀환하는 킬리키아 원정군 맞이하러 홈스, 하마 지나 북상[795] 타바리야 (갈릴리) 일대 약탈. 혹은 사파드 성채 수복 나선 것이라고도. 이에 사파드 주둔군이 출정, 아틀리트 부근 협곡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십자군 격파. 상당수의 프랑스 귀족들 전사해 이후 아크레어서 애도의 물결 잃었다고함. 전투 후 현지 베두인들이 십자군 진영 약탈, 이에 위그는 철수[796] 카라크에서의 일 처리하고 말에서 낙마하여 치료하며 천천히 행군하여 늦어진 것. 회군하며 재차 아크레 접근했으나 위그 드 안티오크가 재차 키프로스 지원군과 당도하자 주변 마을 파괴하고 철수했다고도 하나 초여름의 습격을 말하는 것 일수도[797] 봄이라고도.[798] 연초 무렵 아바카 칸의 사절이 로마 당도. 일 칸국 궁정의 라틴 관리가 부재하여 몽골어 서신이 왔지만 대충 의사는 전달됨. 이에 교황 클레멘스 4세와 하이메는 교황 특사 페르피냥의 하이메 알라릭 휘하 사절 파견해 자신과 루이가 곧 십자군 나설 것이니 바이바르스와의 전쟁 도와달라고 청한 것. 최근 그와 결혼한 동로마 황녀 마리아가 십자군과의 동맹 상징할 것으로 기대[799] 기사단이 마시아프의 아사신과 하마로부터 받던 연공을 포기하는 조건. 이후 아사신은 맘루크 왕조에 조공. 추가 조항에 의해 바이바르스는 휴전 파기할 권한 지님 /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 프러시아인들의 반란에 직면한 독일기사단국 돕기 위해 십자군과 개입 / 가을. 만프레드의 전 시칠리아 총독이던 콘라드 카페체, 콘라딘의 남하 소식에 후방 교란 목적으로 시칠리아에서 반란 / 키프로스의 위그 2세, 불간섭 약속 어기고 맘루크 아타베그 소유의 상선 나포. 이에 바이바르스가 베이루트의 사절 위협. 위그 2세의 왕비이자 베이루트 영주인 이사벨라가 이들의 석방 및 손해 보상 약속. 이듬해 봄 무렵 무슬림 상인들 풀려나 맘루크 령으로 인도됨[800] 멸망한 라틴 제국 대신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시칠리아 왕국을 보호자로 택한 것. 샤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 돕고 본래 동로마 황자 안드로니코스와 결혼하기로 했던 상속녀 이사벨라와 그의 아들 필리프 간의 결혼 논의[801]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서 열린 의회[802] 성지 돌아온다는 약속 지키기 위해. 귀족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음[803] 알폰소 10세, 기존에 세비야 토후국의 영토였음으로 세비야 정복한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던 포르투갈의 알 가르브 정복 승인. 다만 알 가르브의 왕이란 칭호는 유지, 이에 아폰수 3세는 아들 데니스에게 (형식적으로) 알가르브 왕국 하사[804] 시돈의 세금 양분 및 보포르 성채의 파괴에는 합의했으나 다른 모종의 이유로 파토남. 이에 바이바르스는 군사적 위협 가하기록 결정[805] 1266년도에 노획한 템플/구호기사단 문장 하에 경보도 없이 성문 입성한 후 성벽 일부 장악하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밀려남. 이에 주변 약탈하고 농지 황폐화시키는 것으로 만족. 이후 아크레 측은 사파드의 바이바르스에게 사절 파견, 바이바르스는 처형된 십자군 포로들의 수급을 성벽에 둘러 이들을 겁줌[806] 그리스 교회가 교황청의 조건 하에 복속하지 않는 이상 협상도 없다고 선을 그음[807] 2천 기사 준비하기로. 그 대가로 아카이아 공국의 복속 (기욤 2세의 딸 이사벨라와 샤를의 아들 필리프 결혼, 자녀 없을 시에 샤를의 카페-앙주 가문이 계승) 및 에피로스 해안과 (베네치아 령인 레스보스, 키오스, 사모스, 코스) 제외한 에게 해 섬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제외한) 정복지의 1/3 할양받고 보두앵의 아들 필리프와 샤를의 딸 베아트리스 결혼. 아카이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필리프가 자녀 없이 사망할시 라틴 제국 대한 권리는 샤를의 카페-앙주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으로[808] 바이바르스, 티레 측이 자신의 수하인 알 사비크 샤힌 죽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1만 5천 티레 디나르 요구. 사절단이 그자리에서 절반 납부하고 마그렙인 포로 몇명 석방. 나머지 추후에 내겠다고 제안, 이에 티레의 99가구 대한 10년 휴전 합의됨[809] 재차 붉어진 베네치아와의 구역 경계 문제로 성 사바스 전쟁 이어짐. 제노바 군은 방파제 끄트머리의 필레 성탑 점령하고 항구로 진격. 이 함대로 라인란트 십자군이 아크레 당도했을 가능성[810] 그리말디가 떠나기 무섭게 베네치아 함대가 들이닥쳐 남은 12척의 제노바 함대를 공격. 제노바 함대 역시 분전했으나 결국 5척을 잃고 티레로 도주[811] 갈반은 만프레드 사후 콘라딘에 충성. 의장인 인판테 엔히크, 교황의 분노에도 그를 환대하고 지원 약속[812] 1269년이라고도[813] 후자는 동로마와 동맹 / 아카이아 공 기욤 2세, 소규모 군대와 샤를의 탈리아코초 전투 참가. 그럼에도 샤를은 그를 압박하여 그의 딸인 이사벨라가 자녀 없이 죽을 경우 계승권이 동생 마가렛이 아닌 남편 필리프와 장인인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불법적인 조건 첨가된 결혼 동맹 맺음. 한편 초여름 무렵 샤를은 바이바르스에게 사절 파견해 동맹 제안 / 겨울. 몽골 사절단이 제노바 당도. 아바카 칸, 동생 에제이 휘하 병력 파견 및 킬리키아의 항구 아야스 (유무르탈르크)에서 집결 제안. 식량 및 공성병기 제공. 미카일 8세 역시 해상 보급 약속. 한편 바이바르스가 샤를에게 답신으로 파견한 사절단이 제노바와 루이의 십자군 준비 지켜보던 몽골 사절단과 마주쳐 대낮에 길거리에서 충돌. 칼부림 전에 제노바 병사들이 떼어놓음[814] 몽골과 싸우러 알레포 향한다고 알리고 진짜 목적지는 숨겨 십자군 측의 경계 느슨하게 만듦. 정말 몽골군이 알레포 공격하긴 했으나 곧 후퇴함. 그 정보 접한 결과일 수도. 뭔가 중요한 일로 후퇴했을테니 십자군 대한 공세 집중 가능. 한편 1266년까지 자파 영주였던 장 드 이벨린과 바이바르스는 좋은 관계 유지. 하지만 어느날 장은 어부들로 위장한 병력을 시나이 반도의 카트야에 파견해 약탈. 이에 분노한 바이바르스는 장의 후계자인 자크 드 이벨린이 보낸 카스테용 휘하 사절의 휴전 연장 제안 거부하고 자파를 목적지로 설정. 또한 자파 시민들이 협정 어기고 아크레에 식량 제공했고 무슬림 여성이 시중 드는 술집 열었다고도[815] 바이바르스가 접근해오자 카스티용 등의 지도부가 사절로 찾아오나 구금되어 혐의 조사 후에야 풀려남. 이후 항복 협상 진행되나 이미 바이바르스는 포위 공격 지시. 하루만에 함락됨[816] 바이바르스, 이집트 출정할 때부터 시리아 병력에게 보포르 성채로 비밀리에 움직여 포위 준비하며 전투 대신 봉쇄 지시. 자파 함락 직후 이집트 병력 일부 역시 파견한 후 자신도 북상. 동시에 시돈 일대 습격, 티레는 휴전 중이고 아크레는 중간에 사파드 주둔군이 막으면 되므로 원군 차단됨. 그럼에도 수비대는 아크레에 도움 요청, 그 답신을 가로챈 바이바르스는 자신에 유리하게 왜곡해 보냄. 보포르 수비대 일부가 아크레로 떠나며 약화된 상태[817] 취약한 성채들 공격해 그곳에 피신한 주민들 사로잡음. 다만 타르투스와 사피타 (샤텔 블랑크)의 템플기사단이 포로 3백명 석방 조건의 휴전 청해오자 수용[818] 보에몽에게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인상을 보이려 한듯. 홈스에서 몇가지 행정 업무 처리하고 알레포 당도해 본심 드러냄. 알레포 당도하여 군대를 셋으로 나눔. 자신이 직접 선발대 맡아 안티오크 향하고 2번째 부대는 안티오크 북쪽 습격하고 아르메니아의 개입 대비해 타우루스 산맥의 고갯길 장악, 마지막 부대는 안티오크의 외항인 알 수와이디야 (성 시메온) 장악해 바다 통해 원군 당도할 여지 차단. 세 군대는 안티오크에서 재합류 지시[819] 15일이라고도. 단순한 습격이라 판단한 안티오크 대원수 시몽 망셀 (아르메니아 왕녀와 결혼, 트리폴리에 주로 거주하는 보에몽 대신 안티오크 수비 맡음)이 반격 나서나 패하고 사로잡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날 시몽 파견해 항복 제안하나 거절되자 총공격 하고 이에 수비대가 협상 제안했으나 묵살되었다고 함[820] 바이바르스, 함께 사로잡힌 시몽의 아들을 인질로 잡은 후 그를 성내로 보내 항복 설득하게 하나 수비대가 거부하여 실패. 그럼에도 함락 후 시몽은 그의 의사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수도 시스로 보내짐[821] 19일이라고도. 항복 제안 거부되자 (2번째라고도) 총공격, 지나치게 긴 성벽에 제대로 병력 배치하지 못해 놓았던 안티오크는 4시간만에 성벽 무너지고 함락됨. 일부 시민들과 수비대는 시타델에서 농성[822] 21일이라고도. 시타델은 다수의 인원이 있기엔 비좁았고 물과 식량 등 보급품도 부족. 밤을 틈타 유력 인사 두 명이 도주하자 사기 저하된 수비대가 포로 될테니 항복 제안하자 바이바르스가 수용. 시타델 내려옴. 소년은 12 디르함, 소녀는 5 디르함에 팔림. 약탈 끝난 후 바이바르스는 십자군이 재차 요새화할까 우려해 시타델의 전소 명령. 한편 안티오크의 함락으로 보에몽이 훌라구에게서 양도받은 (그리고 바이바르스가 불법 점거라 규탄한) 다이라쿠쉬, 샤키프 카프르 다비, 샤키프 발라미스 등이 고립되어 결국 항복. 보에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이바르스는 이를 특히 강조. 한편 안티오크 공국의 남은 도시 라타키아는 트리폴리 백국에 편입됨. 안티오크 남쪽의 쿠사이르 성채만이 맘루크 군의 포위 견디고 대주교는 기사 기욤에게 넘김. 기욤은 맘루크측 총독과 친근한 관계 유지, 총독의 중재로 바이바르스는 그가 무슬림들과 수입 공유하는 이상 평화 유지, 7년간 이어짐[823] 맘루크 측과 좋은 관계인 티레 통해 평화 주선 시도. 보에몽 역시 휴전 협상했다고도[824] 26일이라고도. 안티오크 떠나며 사절 접한 바이바르스는 예루살렘 왕국에 하이파 인근 3개 마을, 카르멜 산 일대의 마을 절반, 아틀리트와 주변 5개 마을, 알 쿠라인의 10개 마을, 시돈 평원 등 21개의 마을 소유 인정. 자신은 하이파의 남은 마을 들 중 절반, 아틀리트 영지의 절반, 알 쿠라인의 나머지, 시돈의 산악지대를 취하기로. 평화는 10년간 지속되고 쌍방은 물론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도 깨지지 않는 것으로. 또한 휴전의 범위는 쌍방 뿐만 아니라 트리폴리의 보에몽과 아사신 영토, 그리고 키프로스 왕국까지 포함하는 초안을 작성[825] 내전 이후 화합 다지려는 목적도 포함. 왕자들 외에 그들의 사촌인 헨리 오브 알레만 (콘월 백작 리처드의 아들)과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오브 클레만 역시 서약. 하지만 남부 웨일즈 마르크령의 유력자이며 에드워드의 경쟁자인 길버트는 자신이 아닌 에드워드가 지휘관이라는 말에 분노하여 이탈 시도. 남작 리처드의 설득에 재차 종군 약속하나 결국 출정하지 않음. 또한 헨리 3세의 종군 여부 때문에 지연됨 (결국 참모들의 조언 따라 안함)[826] 샤를의 토스카나 방면 사령관 장 드 브라이셀브가 아레초 부근에서 매복에 당해 사로잡힘. 이후 교황 거처인 비테르보 경유해 남하[827] 다 수긍했으나 휴전 범위가 키프로스와 아사신 영토까지 포괄하는 것은 주권 침해이고 키프로스와는 따로 논의해야 한다고 판단. 바이바르스가 몇몇 영토 포기하면서까지 협상 지속했으나 위그가 자신의 입장 고수하여 결국 협상 결렬됨. 한편 위그는 군대 사열시켜 맘루크 사절단에 위용 뽐내려 하나 무히 앗 딘은 카이로에만 이보다 더 많은 기독교도 포로 있다며 조롱[828] 하이톤 1세, 아바카 칸이 협상 카드로 쓰라며 아르메니아 측에 인도한 포로인 맘루크 장수 샴스 앗 딘 알 아슈카리의 석방을 제안하자 바이바르스가 협상 응함. 장군 석방 및 몇몇 국경 요새 할양으로 후계자 되찾은 것. 한편 레오는 바이바르스의 배려로 귀국길에 예루살렘 순례.[829] 한편 샤를은 사라센 용병들이 봉기한 루체라 포위 풀고 북상. 아베차노 향하던 콘라딘과 조우[830] 엔히크가 기병대와 강을 건너 돌격, 샤를측의 각가 첫번째와 두번째 대열인 프로방스 기사들과 북프랑스 기사들을 격파. 샤를의 갑옷 입고 깃발 든 채로 전투에 임한 마샬 드 코상스가 전사하자 기벨린 군은 승리의 함성 지르며 패잔병 추격. 독일-토스카나 병력 역시 적진 약탈하며 흩어짐. 언덕에서 전투 지켜본 샤를은 체념하고 마돈나에게 기도, 발라리가 그를 책망하며 기습 공격 제안. 8백여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 기벨린 군대 붕괴. 콘라딘은 지도부 및 5백의 기병들과 도주, 뒤늦게 돌아온 엔히크가 두차례의 돌격해보나 실패[831] 전투 후 카스텔 베치오에서 병력 재정비하고 휴식, 비코바로 거쳐 로마 향함. 하지만 전투 결과 당도 후 싸늘한 분위기. 비밀리에 입성, 게다가 엔히크가 시타델 맡긴 귀도 드 몬텔페트르가 콘라딘의 카피톨리노 출입 거부.[832] 지기인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와 함께 처형됨. 향년 16세, 이로써 코라도 디 몽페라토의 직계 단절. (갇혀있지 않은) 가장 가까운 혈육은 숙부 만프레드의 딸인 아라곤 여왕 콘스탄체와 작은 증조부 필립의 외손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및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 한편 키프로스의 위그 3세 (드 안티오크)는 사촌형 위그 드 브리엔이 아테네 공 기 1세의 딸인 이사벨라와의 결혼 위해 그리스 있는 틈에 예루살렘 국왕 칭함[833] 클레멘스 4세가 임명한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이탈리아인 교황 선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 콘클라베 보이콧한 결과. 교황의 장기 부재로 교회 통합 논의 중단됨. 그에도 굴하지 않고 샤를은 동로마 원정 준비[834] 아크레 측이 그리로 도망간 바이바르스의 네 하인들의 반환 요구에 그들이 세례받고 기독교도 되었다며 거부. 또한 티레의 필리프 드 몽포르는 일전에 바이바르스가 제시한 휴전안 초안에 서약 거부하고 일부 조건만을 추린 조약에만 서약해 분노 산적 있었음. 거기에 딸과 함께 티레에 포로로 있던 한 여성이 몸값 지불하고 나왔는데 사파드 향하던 중 십자군이 딸을 강제로 데려가 세례시켰다는 하소연과 티레측이 맘루크 인사들 필리프 드 몽포르가 체포했다는 소식에 이들에 대한 반환 명했으나 거절되자 습격 지시. 티레 ~ 아크레 일대 보급선 방해하고 곡물 탈취 / 미카일, 루이에게 사절 파견해 교회 통합 대한 자신의 지지를 재차 밝히고 샤를의 무력 침공보단 자발적인 통합이 더 기독교적이고 지속력 있다고 설득 / , 이에 하이메 1세는 십자군 출정 준비 / 마페오와 니콜로 폴로, 베네치아 귀환. 백명의 선교사와 성묘 교회의 기름 등 대도의 경교도들을 위한 쿠빌라이 칸의 요청 전달 / 아바카 칸, 시리아 친정 준비하나 차가타이 칸국의 바라카 칸이 공격해와 무산됨. 1만 병력만 파견[835] 샤를, 본래 마르세유 상인들에게 임무 맡겼으나 실패하자 투옥시키고 동맹인 제노바의 그리말디 가문에게 부탁한 것. 사절단에게 실패자들의 처벌 알릴 것 역시 당부[836] 사실상 루이의 아크레 태수이자 프랑스 주둔군 사령관. 한편 루이는 새로운 병력 파견[837] 생 피에르 드 오를레앙의 부주교 기욤 드 파룽빌과 2명의 도미니코회 수사, 2명의 군사 교관, 2명의 앙주 귀족 등 46명의 인원이 바이바르스의 사절 바드르 앗 딘과 함께 떠남. 술탄에게 바칠 금 50 온스어치 예복과 선원들의 임금 101 온스, 포르타포레 선에 배치된 무기 6 온스, 기욤과 바드르 앗 딘의 여행 경비로 79 온스 등 큰 지출. 그밖에 보급품, 무기와 수백개의 치즈 대동[838] 함장들에게 이듬해 4월까지 함대와 돌아올 것을 지시, 다음 성 요한 축일 (6월 23일)에 루이와 시라쿠사에서 집결하는 것으로 계획[839] 하이메 1세의 자금 요구에 바르셀로나는 8만, 마요르카는 5만, 모렐라는 1만 수 제공. 3척이 선박과 소고기 마련.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처남인 하이메에게 몽골인들은 기만적이니 믿지 말고 남아 있을 것을 당부하나 수용되지 않자 10만 마라베틴 금화 및 군마 백마리 제공[840] 벨라 4세의 장남 이슈트반의 자녀들인 라슬로와 마리아가 샤를의 딸 이사벨라와 장남이자 후계자인 샤를과 결혼하는 것. 카페-앙주 왕가의 헝가리 진출 포석 놓임[841] 몇달 내로 프랑스군이 섬 평정.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들인 시몽과 기가 도움.[842] 1일이라고도. 30척의 대선, 20척 이상의 중형 선박 및 많은 작은 선박들과 출항. 바르셀로나와 아르나우 주교 대동[843] 강한 돌풍으로 바닷물 검게 변함. 노련한 항해사들도 전대미문이라 보고. 함장 라몬 마르켓은 돛을 접고 폭풍 벗어나려 시도하지만 실패. 그렇게 리옹 만에서 시달리던 하이메 1세는 라몬을 불러 신께서 이 원정이 흡족하지 않아 동쪽으로 갈 바람을 주지 않는 것 같다며 포기 주장. 참모들 역시 귀국 종용해 결정됨. 10여일의 지연으로 어차피 아크레 당도했어도 초겨울의 짙은 안개와 직면했을 것이라고도[844] 베네치아 도제 로렌초 티에폴로는 샤를과 친구였음에도 막 동로마측으로부터 얻어낸 흑해의 밀 시장을 중시 여김[845] 위그의 부친 앙리의 이복 누이인 마리아가 귀족회의에서 (이때까지 모후 멜리장드 살아있었다고) 자신은 이사벨라 1세의 증손자인 위그와 달리 손녀임으로 혈연적 우위로 왕위 주장. 템플기사단은 그녀 지지하나 위그, 왕국의 섭정은 조모인 알리스, 모후 이사벨라에서 자신으로 이어졌음으로 법적 우위 있다고 반박. 이에 마리아는 그 임명은 실수였다고 주장하나 묵살됨. 귀족회의는 마리아의 주장 인정하나 결국 위그로 결정됨. 위그, 티레의 필리프 드 몽포르와 화해. 누이 마가렛과 그의 딸 장 결혼시킴. 필리프, 관습대로 티레에서 대관식 승인. 마리아는 불복, 로마 향함[846] 12월이라고도. 아크레 측에서 필요로 했던 식량과 군마 등 제공, 아라곤 성 밖에 주둔[847] 일대 아랍인들의 가축 약탈[848] 연말 무렵 아카이아 공국과 동로마와의 휴전 끝나는 것을 기회로 동로마 원정 준비 위해 왕실 선박 수리하고 민간 선박들도 목록 만들어 통제. 왕실의 허가증 없는 무단 출항 금지. 마르세유에서 밀 1천 가마 가져와 선원들 위한 비스켓 만들도록 지시[849] 운송 및 제작 비용 절감 위한 것. 최고 재단사 호노라투스 파견. 샤를, 그의 요구대로 목재 제공. 이듬해 2월 말 샤를에게 더 많은 밧줄과 만프레도니아에서 목재 운송할 선박 요구한 것을 보아 오래 머무른듯. 한편 샤를은 루이가 시칠리아 정복에 빌려준 돈 갚기 시작[850] 11월 혹은 19일이라고도. 바이바르스, 로베르의 미숙함을 이용하기 위해 사파드 수비대에게 돌아오는 프랑스군을 남쪽으로 유인할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이집트 병력 및 시리아 아미르들과 야곱의 여울 건너 토론 향함. (마르즈 바르구트 방면 사냥 나가는 것처럼 위장) 아크레 근교에 파견된 사파드 병력만 보고 맘루크 군이 소수라고 판단한 아크레 행정관 로베르 크레스크는 신속히 아크레로 회군하자는 프랑스군 지휘관 올리버 트르메의 만류에도 (새 직책에 어울리는) 자신의 능력 과시 위해 공격 결정. 기사들도 호응하여 사파드 병력을 추격, 바이바르스가 세워둔 매복조의 선발대에 당해 (바이바르스가 당도하기도 전에) 대패, 올리버의 동생들 역시 전사하고 하이메 1세의 조카 사로잡힘. 7차 십자군 이후 가장 많은 포로 발생. 아크레 및 아라곤 병력은 구원 나서지 않음. 이후 하이메 1세의 원정 포기 소식으로 사기 저하된 아라곤 십자군은 군사 행동 참가하지 않고 곧 귀국[851] 반군의 갈반 란치아와 카스티야 왕자 프리드리히, 콘라드 카페체가 항복한 후 튀니스로 망명한 것. 샤를의 십자군 대상지 변경에 영향. 또한 1267년부터 샤를은 하프스 왕조가 시칠리아의 반군 돕는다는 의혹 제기. 제노바 상인들이 상품 대가 지불할 때에 튀니스 금화 위조해 정상 금화와 섞에 건냈다가 들통나 아미르에게 체포당하고 재산 몰수됨. 이후 제노바 상인들은 루이에게 탄원 / 기벨린 도시 피사, 샤를의 토스카나 총독 장 브리투에 항복[852] 봄. 차가타이 칸국의 바라크 칸, 일 칸국 침공[853] 같은 목적으로 부근에서 맘루크 측 말 방목. 본래 구호기사단의 마르가트 성채 공격 계획했으나 강우로 포기[854] 5천 리브르 투르네 탕감됨. 31일에는 플랑드르 여백작이 자신에게 진 빚을 루이에게 갚도록 지시[855] 아들 발루아 백작 장 트리스탕, 필리프, 알랑송 백작 피에르 1세. 조카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역시 종군[856] 성벽 파괴 뿐만 아니라 항구 매립하여 회복 불능으로 만듦[857] 바이바르스의 농촌 파괴로 식량 부족해진 십자군 측에 큰 도움. 사라센, 그리스인, 피사인(?!)과 다른 기독교의 적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858] 기한인 5월 10일 무렵 주문한 7척의 함선 중 5척만이 건조 완료되었고 빌린 선박들도 제노바에 그대로[859] 시칠리아 왕국의 주요 무역 상대. 또 십자군 당도하면 하프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가 대다수 무슬림들의 압박을 덜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는 소문 전하자 루이는 북아프리카의 기독교화를 결심하고 튀니스로 목표 정함 또한 이집트를 서쪽에서부터 육로로 공격할 수 있는 전진기지 성격도[860] 금 8천 파운드 중 절반 내고 나머지는 '모든 성인들의 축일' 11월 1일까지 내는 것으로[861] 5일이라고도. 프로방스 출신 노꾼들 고용[862] 16 혹은 18일이라고도[863] 에드워드의 친척이기도함. 본래 포츠머스에서 자신의 영지인 가스코뉴 향하여 처남 알폰소 10세 만나고 8월 15일까지 에그모르트 향하기로 했으나 늦어져 프랑스 직행 결심[864] 2일이라고도. 7차 십자군 도중 다미에타에서 태어나 8차 십자군 도중 튀니스에서 사망한 것[865] 다음 공격 전에 십자군 지도자 중 하나 없애려는 바이바르스의 사주로 여겨짐. 아사신은 연공 납부 중단을 대가로 행하였다고도. 아들 장 드 몽포르는 도주하는데 성공[866] 루이 사망한 직후 저녁에 당도했다고도. 루이 사망 후 원정 포기 결정되었음에도 조카 필리프의 협상 도와 시칠리아 왕국의 이권 챙기기 위해 남음[867] 호수 건너편 튀니스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 예상한 하프스 병력이 습격 포기하고 집결. 이에 프랑스-시칠리아 기사들이 돌격하여 격파한 것[868] 알퐁스는 장 드 브리엔의 아들, 5차 십자군 때 아크레에서 출생. 그외에 몽모렌시 영주 마티외 3세, 프랑스 원수 고티에 2세 드 네무아 사망. 한편 하프스 군의 패전보에 튀니스에 원군 파견하려던 바이바르스는 루이의 죽음 소식에 철회[869] 티레 영주 필리프 드 몽포르의 장남[870] 1270년 피사는 샤를의 신임 토스카나 총독 장 브리투에게 항복했으나 8차 십자군으로 제노바의 선박과 선원들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반프랑스 감정 고조된 결과 재차 기벨린파 전환[871] 10월 28 혹은 30일이라고도. 하프스 왕조는 다시 시칠리아 왕국에 조공하고 원정비 1/3 (무려 금 21만 온스) 부담, 튀니스에 시칠리아 상인 구역 설치 승인, 관세 없는 자유 무역권, 기벨린 망명자들 추방 및 모든 기독교도 포로 석방하기로. 또한 공개적으로 성당에서 예배하고 선교할 수 있도록 허가. 팔레스타인으로의 십자군은 3년 후에 추진하기로[872] 프랑스 북부의 프로뱅에서 사망했다고도[873] 부친 니콜로 및 마페오 폴로와 대도 향하던 도중.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회담. 그가 쿠빌라이 칸에게 보내는 편지와 떠남[874] 마르캅 요새화하지 않고 일대 세금 부분 납부, 발다 일대와 앗 나시르 시기에 기사단들이 취득한 영토 할양 및 샤텔 블랑크 항복 조건. 또한 무슬림들과 세금 양분하던 영토 대한 권리도 포기./ 미카일, 새로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교회 통합에 더 호의적이라 여기고 협상 준비[875] (부재한) 교황이 금하거나 부왕 헨리 3세가 사망하고(거나) 잉글랜드에 내전이 터지지 않는 이상 팔레스타인 향할 것이라고 선언[876] 프랑스 행군 도중 임신한 상태로 낙마하고 미숙아 낳음[877] 바이바르스, 초반에 저항했지만 타르투스의 안전 보장 대가로 항복하라는 기사단장의 조언에 굴복. 바이바르스, 다른 성채들의 항복 독려 위해 약속 충실히 이행[878] 독일 왕이던 콘월 백작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대표해서 귀국, 필요하다만 정부 이끌도록[879] 22일이라는 기록도[880] 이날 성벽 외곽 목책 일대 장악했다고도[881] 헨리 오브 알레만, 샤를에게 에드워드의 처남인 포로 엔히크 데 카스티야 석방 제안하는 등 비테르보 체류하다가 시몽의 아들들인 기와 시몽에 의해 비테르보의 산 실베스트로 성당에서 암살됨. 이브셤 전투에 대한 복수. 이후 에드워드는 교황측이 기 드 몽포르 일당에 대한 검거 제안을 수용하고 아크레행 열중[882] 다음날 맘루크 군이 성문의 외부 성탑 (옹성) 장악했다고도 한다.[883] 이날 외성 장악했다고도[884] 30일 혹은 4월 2일 혹은 4일이라고도. 혹은 내성 (베일리)의 성탑 중 하나 장악하여 수비대는 남쪽 성탑에서만 항전했다고도. 성내 피신한 현지 기독교도들 포로, 기사들 다수 전사[885] 7일이라고도. 바이바르스가 트리폴리에 있던 구호기사단장이 항복 허가한다는 편지 위조해 전한 결과. 다만 목숨 및 거취 보장해줌. 성내 예배당에 미흐랍 2개와 민바르 더해져 마스지드 개조됨[886] 17일이라는 기록도. 무히 앗 딘에 의하면 인근 무슬림들 약탈하고 험지의 요새로 돌아가는 패턴의 공격 일삼던 곳. 한편 샹파뉴 향하던 테오발드 2세의 과부 이사벨라 병사[887] 두 구호기사단 성채의 함락으로 트리폴리는 무방비 상태 놓임. 바이바르스, 보에몽의 협상 요청에 겁쟁이라 비웃고 맘루크측 원정비 부담할 것을 요구 (사실상 거절)[888] 성채 위치한 레바논 산지의 삼림 뚫고 투석기 끌고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함. 포위 도중 맘루크 아미르인 루큰 앗 딘 만쿠루스 알 다우다리가 예배하던 중 수비대의 화살 맞아 사망[889] 1일 혹은 12일이라고도. 바이바르스, 주 성탑에 자신의 표범 문장 새기게 함.[890] 9일이라고도.[891] 레이날드 루셀, 고드프루아 웰레스, 존 파커 등으로 구성됨. 1268년 약속한 군사 지원 요청. 한편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집트에 군수품과 식량 파는 것에 분노, 베네치아 측은 칙령 제시하며 이집트 무역이 아크레 참사회로부터 허가받았다는 것을 보임.[892] 무거운 장비 모아둔 보급 기지. 위치 불명. 일대 성채 대부분 점령했고 기사단들과도 협정 맺어 트리폴리 공격 시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 판단. 또한 연이은 습격으로 트리폴리 사기 낮을 것. 기습 점령 염두에 두고 기병대만 이끌고 나머지 군대 따라오게함. 하지만 에드워드의 십자군 당도 소식에 포기[893] 다음날 부왕 루이 장례식, 8월 15일 랭스에서 대관식[894] 기존의 모욕적인 조건에서 낮춰 제안. 보에몽이 머뭇거리자 일대 공격. 결국 맘루크측 정복 인정하는 조건 휴전 성립. 이후 아크레 방면 남하[895] 한편 자크 드 이벨린 주도의 키프로스 제후들은 예루살렘 왕국에서 주군 위그의 주장대로 그를 위해 군사 복무를 해야 하는 것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지에 대해 의문 제기. 이에 에드워드는 한때 그들의 주군이었던 리처드 1세때의 선례처럼 잉글랜드 왕의 명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 결국 위그가 그들에게 봉급을 지급한다면 1년 중 4달간은 복무해야 한다고 합의 도달[896] 십자군 관심 분산시키기 위해 (그리고 바이바르스의 아크레 부근 통과 안전 확보 및 공격 기회 제공) 이집트 함대가 키프로스 국왕 위그의 부재를 틈타 본섬 공격했으나 폭풍 맞아 근해에서 11척 침몰, 6척만 귀환. 약 1800명 포로됨 / 푸아티에-툴루즈 백작 알퐁스, 메시나 떠나 북상[897] 시타델 항복은 다음날이라고도. 다른 기록에 의하면 포위 3일째에 외성, 4일째에 내성 점령되었고 15일째에 항복했다고도함[898] 티레는 인근 10개 마을 소유, 다만 바이바르스가 5개 먼저 선점. 나머지 마을은 세금 양분하기로. 트리폴리처럼 관대한 조건, 에드워드 돕지 않을 명분 획득[899] 12일 혹은 8월 1일라고도. 룻드 근처 지방 대한 소규모 방화와 약탈. 다만 병력 부족으로 별 성과 이루지 못하고 귀환[900] 8차 십자군으로 인한 병으로 시칠리아에서 6개월간 요양했음에도 역부족[901] 자녀 없음으로 이전 합의에 따라 푸아투와 툴루즈는 프랑스 왕실 직할지로 회수됨. 또한 1259년 파리 조약에 따라 푸아투 백국 중 생통주 일대는 1285년 잉글랜드 측에 할양됨[902] 십자군의 습격 대처, 일 칸국의 침공 준비 소식, 유력자 자녀들 인질로 잡은 것에 반발한 베두인들의 일 칸국으로의 전향 의도, 아사신과의 협상 등의 목적. 다른 일 처리하며 천천히 행군[903] 나짐 앗 딘의 아들. 환대 받으나 곧 체포되어 이집트에 구금됨. 이에 알 카와비와 알 쿨라이아 성채 항복[904] 몽골군 더 끌어들이려는 바이바르스의 지시. 한편 다마스쿠스 역시 혼란, 일부 카이로 피난[905] 6월 24일이라고도. 잉글랜드 병력, 예루살렘 및 키프로스와 기사단 병력 동원. 가축 5천마리 얻음. 아미르 1명 전사, 1명 부상. (2명 부상이라고도) 바이바르스의 우스타다르 (조언자)도 사망. 주민 대부분은 몽골 침입 피해 맘루크 왕조에 피신해온 튀르크인들. 맘루크 군 중심이 아닌 보조병 (할카)라 제한된 성과. 아인잘루트의 맘루크 군이 당도하여 구원, 추격하여 튀르크인 포로 일부 구출. 당시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에 있었음[906] 알레포 당도 전부터 바이바르스는 샴스 앗 딘 아크 순쿠르 알 파리카니 휘하 베두인 병력을 마라쉬로,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와 '아미르 알 아랍' 이사 이븐 무한나를 하란과 알 루하 (에데사) 방면 파견. 전자는 일 칸국군 떠난 후에야 도착. 후자가 하란 당도하자 이미 친맘루크 베두인들의 약탈로 주민들 대부분 흩어진 상태였고 60여명에 불과한 몽골 수비대 항복. 다만 샤흐나 (총독)은 술탄 본인에게만 항복하겠다며 성탑 중 하나에서 농성, 공격 대신 철수. 한편 술탄은 카슈샤파 (정찰대)와 무나위룬 (방화대, 초지 태움) 파견[907] 카쿤 소식 접하자마자 귀환하는 십자군 기습하러 남하했으나 비로 무산된 것. 이후 군대를 각지의 거점에 분산시키고 이집트 향함[908] 노포크 출신, 에드워드의 십자군 동행한 것으로 보임. 1267년 약혼자이던 키프로스 국왕 위그 2세가 사망한 후 (혹은 그 전인 10대 초반부터) 이사벨라는 37살 연상인 전 시돈 영주 줄리앙과 간통. 이에 교황 클레멘스 4세가 De sinu patris 편지 보내 규탄하고 결혼 촉구한 결과[909] 제노바는 오베르토 스피놀라와 오베르토 도리아의 성 시메온 & 유다 동지회가 주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동로마에 교회 통합 촉구하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미카일과 오직 일시적인 조약만을 맺으라고 지시. 동시에 샤를에게는 동로마 원정 연기하고 시칠리아 왕국 통과하는 동로마 사절 대해 안전 보장할 거슬 촉구. 한편 최근 십자군들의 실패 및 열정 부족 대한 성직자들의 분석 지시 / 연말. 기 드 몽포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앞에서 속죄하고 사면받음 / 바이바르스, 누비아의 마쿠리야 공격 / 포르투갈의 아폰수 3세, 파로의 무슬림 축출[910] 알바니아 침공 준비하자 현지 지도부와 주교들이 사절 보내 동로마 지배기의 특권과 자치 유지 대가로 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추대한 것. 알바니아 왕국 세워짐. 샤를, 필리포 치나르도의 아들 혹은 동생 가조를 총독 임명. 이듬해 프랑스인으로 교체[911] 이탈리아에 만연한 샤를의 영향력 탈피 위해. 미카일에게 편지 보내 논의 의사 밝힘. 교회 통합 외에도 십자군, 교회 개혁 등 논의 예정[912] 22일 혹은 5월 22일이라고도. 1283년 3월까지. 일 칸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싶었던 바이바르스는 관대한 조건으로 휴전 제시. 아크레 소유로 기존에 인정한 12개의 마을에 8개 더해주고 샤프람 및 (기독교도 다수인?) 알렉산드레타 (이스칸데룬)과 그 일대의 절반 대한 관할권 부여, 영토 보장 외에도 나사렛으로의 순례 안전 보장. 위그 외에도 각 기사단장들에게도 따로 서약. 에드워드는 반대했으나 결국 서명. 다만 더 많은 지원 올때까지 전쟁 미루려는 에드워드가 위그에게 제안했다고도. 한편 에드워드와 엘레오노르 간의 딸 조앤 오브 아크레 출생[913] 형 헨리와 부친 리처드의 연이은 부고에 에드워드가 귀국시킨 것[914] 무바리즈 앗 딘 알 투리 아미르 타바르와 파크르 앗 딘 아야즈 알 무크리 알 하지브. 이란 향하며 우선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2세 알현하고 룸 술탄국 향하여 사마가르 및 술레이만 접견. 술탄의 선물 전하고 후자와 함께 아바카 칸 알현. 킵차크 칸국과 맘루크 왕조가 일 칸국 협공하여 서로의 말이 닿은 데까지 영토 삼기로 했다는 말 듣자 아바카 칸이 알현실 나가버렸다고 함. 다른 기록에선 바이바르스의 입을 빌려 우리고 순종적 태도 (무타위안)를 보이고 일 칸국을 공격하지 않게 하려면 무슬림 영토 반환할 것을 요구. 아바카 칸은 그것은 불가능하고 각자의 영토에 만족하자고 답변. 그외에도 사절단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함. 십자군과 휴전하여 자신감 생긴 바이바르스의 태도 대변한다고도[915] 무히 앗 딘에 의하면 휴전에 걸림돌이 되는 에드워드 제거 염두에 둔 바이바르스가 라말라의 아미르에게 암살 주선하게 했다고 함. (혹은 에드워드가 재차 십자군과 돌아올 것을 우려한 듯) 자객은 현지 기독교도로 위장해 아크레의 에드워드 거처에 침입. 에드워드, 자객의 칼에 다섯 군데나 부상 입었음에도 그를 살해. 다만 독 묻은 칼이었는지 에드워드는 상처 부위에 패혈증 걸림. 템플기사단장의 치료에도 호전되지 않자 왕비 엘레오노르 혹은 사부아 출신의 관료 오토 디 그랑디송이 입으로 독 빨아내었다고함. 이후 요양 도중 에드워드는 아크레 성벽에 성탑 하나를 추가하고 '아크레의 성 에드워드 기사단'에게 하사[916] 신임하는 자크 드 탁시 대동시켜 2년 전 후퇴할 때 남겨둔 목재 챙겨올 것 지시[917] 아바카 칸, 평화 제안하며 술탄 본인 혹은 고관 초청. 이에 바이바르스는 정말 평화 원한다면 그 자신이나 형제들 중 한명 오라고 답변. 사절단은 한 달 후 귀국[918] 공의회와 교회 재통합 논의 위해. 다만 서방 교회 주도 조건[919]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있는 샤를의 궁전에서 소식 접한 에드워드는 아직도 요양 중인지 천천히 로마 ~ 사부아 백국 ~ 프로방스 ~ 파리 ~ 가스코뉴 등을 다니며 천천히 귀국. 그동안 로베트 브루넬 주도의 의회가 정무 보고 1274년 8월 19일에야 대관식 거행됨[920] 하마에서 도강 위한 선박 확보. 파크르 앗 딘 알 툰바 알 힘시를 하림에 파견, 타이바르스 알 와르지를 알 비라에 선발대로 파견. 3천 적군 보고. 실상은 두르바이 하의 일 칸국군 및 3천 룸 셀주크군, 친카르 휘하 5천 병력이 강변 지킴. 맘루크 군이 얕다고 착각하게 유도 위해 깊은 곳이 여울인것 처럼 방어[921] 알 라잘라 알 우크질라 (궁수들) 먼저 파견해 적군 교란시키고 맘루크 기병대가 헤엄쳐 도강. 불리한 지형에도 승리, 미래의 술탄 키토부카 알 만수리가 적장 친카르 죽였다고함. 200명 포로, 알 비라 함락시키기 직전이던 두르바이는 소식 접하자 공성 병기와 보급품 두고 도주. 바이사리의 맘루크 군이 사루즈까지 몽골군 추격. 한편 다시 서안으로 건너갔던 바이바르스는 4일 후에야 알 비라 입성, 총독과 수비대 치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바이바르스는 알 비라 주둔군에게 반드시 원군 올테니 굳건히 버티고 7일 이내로 오지 않으면 항복해도 좋다고 지시. 이후 7명의 아미르들과 마라킵 이 얌 (파발마) 타고 4일만에 건너편 언덕 당도, 자신의 깃발 내걸자 수비대 사기 고무됨. 하마의 2백 병력과 합류, 12일 후 이집트 대군 당도. 물속에 과감히 뛰어들자 용기에 놀란 일칸국군이 두배의 우세에도 도주했다고도. 한편 아바카 칸은 두르바이에게 동료 친카르가 전사했는데 상처도 없이 돌아왔다며 힐난하고 유배보냄. 대신 아브타이 사령관 선임[922] 혹은 1272년 연말. 하모는 영지와 이사벨라를 주군 위그 대신 동맹인 바이바르스에게 후견 맡긴다고 유언. 위그는 이사벨라를 키프로스로 납치해 충성스러운 제후와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이사벨라가 반발. 이에 바이바르스는 그녀 석방하지 (그리고 베이루트에서 자신의 대리자와 면담하도록) 않는다면 베이루트 영지 취하겠다고 위협, 템플기사단 역시 그녀 지지. 위그는 베이루트가 휴전에 포함되어 있다고 항변, 바이바르스는 자신이 따로 맺었다며 반박. 이후 분쟁 넘겨받은 참사회마저 바이바르스의 종주권 인정하자 이사벨라 석방됨. 신변 보호 위해 베이루트에 맘루크 수비대 배치됨. 다른 기록에 의하면 위그는 하모가 자신에게 진 빚 때문에 그녀를 납치했다고 하며 바이바르스 편 든 템플기사단 고발했다고. 또한 이사벨라는 확실한 의사 표하지 않았다고 함. 이에 바이바르스는 아크레의 교황 특사에게 이 사안 대한 교회측 입장 구했으나 이후 도시 정복될 때까지 결론나지 않았다고함[923] 동로마에 파견된 교황 사절단, 교회 재통합 대한 미카일의 확답과 귀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미카일에게 공의회에 대표단 파견할 것 제안. 그리스 교회가 로마 교황의 수위권 및 필리오케 문제 등 서방 교회의 교리 따라야 한다고 주장. 공의회 전 협상에서 미카일은 그러한 조건에 반발이 심하지만 개인적인 수용과 자신의 교회에 관철시킬 것이라는 확신 전달. 이후 그리스 태생 프란치스코회 수사 요한 파라스트론과 함께 교회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정교회 지도부 설득 위한 선전 활동 전개. 또한 교황이 직접 와서 합의 내용을 집행할 가능성은 낮음으로 라틴 교회의 관습과 교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행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보여주기식에 불과하다고 자신함. 그럼에도 미카일의 누나인 에우로기아 (이리니)는 궁정 내에서 통합 반대 주도, 결국 추방되나 딸 마리아가 황후인 불가리아로 망명. 한편 에피로스와 테살리아 교회 역시 통합 반대,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에게 미카일 반대 종용. 한편 미카일은 뒤늦게나마 공의회 초청 대한 수용 의사 전달. 이에 그레고리오 10세는 미카일이 재통합에 수긍하는지 지켜볼 의도로 샤를에게 동로마 원정을 1년 연기하도록 지시 / 미카일, 제노바 공화국에 갈라타 지구 하사 / 독일기사단국, 서부 프러시아 평정 / 프란치스코회 수사 레몽 룰, 북아프리카 ~ 인도까지의 선교 여행 떠남 / 아바카 칸, 예루살렘 총대주교 모시는 도미니코회 수사 다비드를 통해 에드워드 1세에게 다음 십자군 언제가 될지 묻는 서신 전달. 아크레 거쳐 전달됨[924] 2월 5일 로마 당도[925] 샤를과 루이 9세의 할머니인 이사벨라와 기욤의 할머니 시빌라 모두 에노 백작 보두애 5세의 딸들로 자매지간이다. 각각 필리프 2세 및 기스카르 4세와 결혼. 그 덕분인지 기욤의 형제들인 몽펜시에 영주 움바르와 앙리, 루이 등도 프랑스 대원수나 부원수직 등을 거치며 중용되었다[926] 마라쉬와 말라티야 사이의 아크 수 강변에 위치. 이곳 주민들이 몽골 모자 (사라쿠자트) 쓰고 시리아에서 오고가는 카라반과 바이바르스의 요원들 (쿠스사드) 공격한 혐의.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2세에게 자제시킬 것 지시하나 별 효과 없자 당시 알레포 총독 후삼 앗 딘 라친 알 아인타비 파견[927] 성벽과 시타델 모두 함락됨. 후삼 앗 딘, 성인 남성 학살하고 여성과 아이들 사로잡음. 인근 '타르수스' (그 타르수스 아닌듯) 약탈 후 빠르게 귀환[928] 7월 26일 ~ 8월 6일 체류[929] 일 칸국군의 공격 소식에 베두인들까지 동원. 먼저 다마스쿠스 다다르고 자파에서 합류. 다만 위협 생각보다 작자 이집트 귀환. 아미르 알 아랍인 이사 이븐 무한나 대신 파견, 바이바르스가 이끈다고 여긴 일 칸국군 도주. 아바카 칸, 공의회 소식에 대표단 파견하고 일정 논의 위해 시리아 원정 주저한듯[930] 공의회 준비 위해 6개월 앞서 당도. 한편 초청한 군주들 중 오직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만 응함.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대관식과 겹친다며 주교들도 보내지 않음[931] 10월 말이라고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역시 필리프의 명목상 계승 승인. 다만 그는 샤를의 꼭두각시에 불과함. 그마저도 교회 통합 논의에 이은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동로마 원정 무산됨[932] 1. 프란치스코회 수사 길베르 드 투르네는 'collectio de scandalis ecclesiae 에서 세속 군주들의 다툼과 부패한 성직자들의 십자군 사면장 남용으로 인한 조소 유발을 이유로 듦. 2. 보헤미아의 올무츠 주교 브루노는 무슬림 세력이 강대하니 레반트로의 십자군은 무의미하며 발트 지방의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 그리고 이는 그의 주군 오타카르 2세와 같은 강력한 황제의 지도 하의 보편적 평화 속에서 제후들이 연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고 역설. 3. 우투르메르의 도미니코회 수사 티레의 기욤은 직접적인 전쟁보단 동방에서의 (특히 몽골 대해) 선교를 통한 개종 선호. 4. 전 도미니코회 총장 움베르 드 로망스만이 사기 전환으로 유럽인들의 나태함과 용기 결핍을 떨쳐내는 것이 필수적이라며 레반트 대한 십자군 지지. 더이상의 인기 없는 추가 과세 대신 교회 수중의 보물 일부 팔아 십자군 비용 마련할 것을 제안[933]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에게 반군 지원 중단 조건으로 30만 마라베디 바쳤으나 소용 없자 야쿠브에게 알헤시라스, 타리파, 론다 일대의 할양 조건으로 도움 요청 / 필리프 3세, 프로방스 변경백이기도 했던 숙부 알퐁스의 유언대로 아비뇽 일대 교황령으로 기증 (베나셍 백국) / 에피로스 친왕 니키포로스와 테살리아 친왕 요안니스, 교회 통합 수용하라는 동로마 사절단의 요구 거부. 이에 미카일의 동생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가 테살리아 침공. 쿠만 용병들로 일대 습격하고 친왕 요안니스를 네아파트라스에서 포위하나 후자는 포위망 빠져나가 테베 향하여 아테네 공 장 1세에 도움 청함. 이에 3백의 라틴 기병이 파견되자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는 포위 풀고 후퇴, 볼로스 만에 주둔하던 동로마 제독 필란트로파네스의 함대로 추격 피함. 필란트로파네스, 롬바르드 영주들의 에우보이아 공격. 베네치아 함대가 동로마 함대를 데메트리아스 (볼로스) 항구 쪽으로 밀어내나 항구의 동로마 병사들이 가세해 다시 전투 나선 끝에 라틴-베네치아 함대를 크게 격파. 다만 필란트로파네스 역시 부상 입음, 아테네 공국의 원군 당도하여 동로마 함대 철수. 가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 귀환 도중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 병사 / 동로마 제국군이 베라트에서부터 시칠리아령 알바니아 공격. 부트린트와 스피나르차 점령, 디라키온과 아비오나 (블로러 ?) 포위는 실패. 알바니아 왕국은 디라키온, 블로러, 크루여, 코르푸만 남음 / 미카일, 샤를이 동로마 공격을 삼간다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십자군 지원 약속. 한편 에게 해 섬들의 재정복 위해 이탈리아 비첸차 출신의 영지 없는 기사이자 천재적인 해군 제독인 리카리오를 고용[934] 결과 나올 때까지 총대주교 요시프는 수도원에 보내짐. 황실 측 압력 하에 교회 통합 결정됨. 예배 시에 교황 언급하고 수위권 및 로마에 청원할 권리 등 승인. 미카일과 후계자 안드로니코스의 신앙 서약 등이 날인된 문서 교황청에 보냄[935] 공의회 대표단은 메가스 로고세티스 (외무장관) 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 니케아 대주교 테오파네스, 전 총대주교 제르마노스 등으로 구성됨. 다만 교황에게 선물로 바칠 보물과 이콘 (성화) 등 귀중품 실은 선박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남쪽의 말레아 곶에서 침몰, 그외엔 무사[936] 국왕 중에선 오직 아라곤의 하이메 1세만 당도. 예루살렘 왕위 요구자인 마리아 드 안티오크 역시 교황의 지지 얻기 위해 참석. 그외에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와 트리폴리 주교 폴 등이 우투르메르 대표로 참석. 교황 공위기 줄이기 위해 콘클라베 제정. 날짜 정해진 후로는 추기경들 기다리는데 10일 말미만이 주어짐, 추기경들은 밀폐된 공간에 모이고 빠른 결정 위해 삶의 질을 점진적으로 악화시키기로. 다만 십자군 논의에선 합의 도달 실패. 프랑스측 특사 에라르 드 생 발레리는 레반트로의 일반 십자군은 쓸모 없다고 주장. 유일한 열성론자인 하이메 1세마저 그의 십자군을 좌절시키려는 샤를의 의도에 따라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가 훼방 놓자 실망하여 정부 베렝가리아와의 재회 위해 떠나버림.[937] 시리아 대한 십자군과 일 칸국의 협공 논의하러 왔으나 교황 그리고리오 10세가 건낸 답신에는 십자군 일자 없음[938] 미카일과 총회가 로마에 복속한다는 결의안의 라틴어 번역문이 낭독되고 아크로폴리티스는 미카일의 이름으로 교황의 수위권과 필리오케 포함한 라틴 교리 대한 견지 맹세. 이에 교황은 감사 예배 주도하고 그리스 성직자들은 전례의 맹백한 오류 느낌[939] 정확히는 샤를-필리프 드 쿠르트네와 미카일에게. 몬테카시노 수도원장 베르나르를 나폴리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1275년 5월 1일부터 한 해간 휴전 동의받음. 하지만 알바니아와 아카이아에서는 효력 없음[940] 스키토스, 스키로스, 스코폴로스, 케아, 시프노스, 이오스, 산토리니 (테라), 아모르고스, 키티라 섬 등을 점령. 낙소스 공작 마르코 2세는 수중 주요 섬들 중 절반 가량 상실. 이후 리카리오는 에우보이아 상륙, 수도 칼키스 (네그로폰테) 제외하고 모두 점령. 롬바르드 영주들의 구원 나선 아카이아 공 기욤 2세와 샤를의 장군 드뢰 드 보몽트 격퇴. 이에 미카일은 리카리오에게 에우보이아를 영지로 하사 / 미카일, 이오니아의 포카이아를 제노바인 형제 베네딕토와 마누일 자카리야에게 하사 / 동로마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부의 스코르타까지 진군, 이에 현지 카리타이나 영주 지오프리 드 브리엘 (브리유?)과 샤를의 지원군이 격퇴해냄. 다만 라코니아 (반도 동남부) 부분은 동로마령으로 유지됨 / 여름. 제노바 함대가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와 나폴리 만 습격 / 시돈 영주인 템플기사단원 줄리앙 그르니에 사망[941] 3월 8일이라고도. 위그는 그의 사촌이자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서 섭정권 주장하나 아르메니아 출신 태후 시빌라가 이를 부정, 친정의 관습대로 자신이 섭정 등극하고 보에몽 7세를 오빠 레오 2세에게 보냄. 타르투스 주교 바르톨레뮤가 정부 장악, 시빌라와 함께 보에몽 6세의 모후 루치아나 때에 임명된 낮은 평판의 로마인 관료들 숙청. 보에몽 7세의 숙부인 트리폴리 백작 폴은 템플기사단의 지지 제외하곤 정치적으로 고립됨. 위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리폴리 당도하여 별 지지 얻지 못함. 다만 라타키아 문제 대한 바이바르스와의 협상 주도해 평화 회복[942] 십자군-일칸국군 집결지로 거론된 곳. 일부 시민들과 라틴 인들이 배를 타고 도주했으나 그마저도 일부는 침몰해 익사[943] 이드 알 피트르 지냄[944] 13세기 초반 이래로 매우 드문 경우. 세비야 근처까지 진군[945] 맘루크 측과 좋은 관계 유지하던 쿠사이르 성주 기욤이 아내 사망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후임자가 (무히 앗 딘에 의하면) 수확 나눌 때 기존 협의대로 반씩 나누는 대신 농간 부리고 맘루크 군의 아르메니아 원정 시에 바이바르스가 금한 와인 판매, 마지막으로 주민들이 몽골군 하림 당도했을 때 성벽 위에서 축하하고 길잡이 되어주었다는 혐의 적용되어 공격 결정됨.[946] 그 전에 하림에 주둔하며 약탈물 분배[947] 제노바 등의 대 샤를 동맹. 이에 알폰소가 응했음에도 기벨린 군대는 롬바르디아에서 샤를의 조카인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선전함[948] 6월 5일 취임. 이전 성 소피아 대성당의 하르토필락스 (서기관)이던 때에는 신학적 차이가 십자군의 위협 종식으로 인한 이익보다 위중하다며 교회 통합 반대 움직임 주도. 당시 총대주교 요시프 1세 역시 라틴 교회가 의심하는 그의 입장 지지. 미카일, 베코스 체포하고 성벽에 붙어있는 아네마스 감옥에 수감시킨 후 받아들일만한 키릴로스 서방 서적 (특히 키릴로스 신학)들을 통해 서방 교회와의 교리적 차이가 근소하다고 설득될 때까지 읽게함. 이로써 입장을 바꾼 베코스는 석방되자 교회 통합의 필요성에 우호적인 중도파 주도[949] 평화협정 직후에야 라타키아가 1260년 무렵 혼란을 틈타 보에몽 6세가 점령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바이바르스는 그 후계자에게 도시 반환 요구하였고 이에 라타키아 영주는 경계 강화하고 성벽 보강하는 소동이 있었는데 (혹은 맘루크 군이 포위했다고도) 위그가 개입하여 연공 더 내는 것으로 합의 본 것[950]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주선으로. 당연히 이 동맹으로 롬바르디아에서 샤를의 패권이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음[951] 잉글랜드 방문해 빚 돌려받고 도착한 것. 샤를의 사촌으로서 예루살렘 국왕 위그 적대시, 바이바르스와는 친선 유지[952] 교황 특사들로 하여금 유럽 군주들에게 동방으로의 십자군 권하고 교회 십일조를 오직 십자군을 위해서만 쓰도록 촉구하다가 병든 것[953] 같은날 추위와 보급품 부족으로 일칸국군 철수했다고함[954] 이에 몽포르 가문 및 제노바와 대립하던 템플기사단과 베네치아가 위그에 반감[955] 교황 인노첸시오 5세, 샤를의 반동로마 압박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포함한 십자군 추진. 다만 미카일에게 라틴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무력으로 축출되었음으로 샤를의 주장에도 정당성 있다고 경고하며 정교회 지도부 개개인의 교회 통합 대한 맹세 촉구. 다만 이 내용을 전하기 위한 특사단을 보내기 전에 적절한 의상 골라주기 위해 그들을 로마로 초대하였는데 그들이 도착한 직후 교황 본인 병사 / 가을. 아바카 칸, 조지아인 요안니스와 얀 바셀리의 사절단을 로마 교황청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파견해 다음 십자군 대한 지원 약속 / 겨울. 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회 열어 교회 통합 지지 재확인. 한편 테살리아 친왕 요안니스는 네아파트라스에 에피로스와 테살리아의 주교들 모아 반통합파 총회 열고 미카일, 요안니스 11세, 교황 파문. 재차 침공해온 동로마 제국군 격퇴. 한편 에피로스 친왕 니키포로스는 샤를에게 사절 파견 / 미카일, 교회 통합 대한 개인적 맹세의 사본과 후계자 안드로니코스의 신앙 지지 서약문을 로마에 보냄. 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와 그의 총회 역시 교황 수위권과 필리오케 교리 대한 지지 표명 알림 / 리카리오의 계속된 공격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미카일과의 협상 재개 / 아테네 공 장 1세, 미카일에게 막대한 몸값 납부하고 석방됨 / 베이루트 상속녀 이사벨라, 전 카이사레아 영주 장 2세의 아들 니콜라와 결혼[956] 전 리옹 대주교 피에르 드 트랑테즈. 샤를 대한 추기경들의 화해 제스처. 아부 로마에 있던 샤를은 새 교황 만나기 위해 비테르보 향함. 이후 교황을 로마로 '호위'[957] 술탄 카이쿠스라우 3세의 누이를 아바카 칸과의 결혼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데려가던 것. 그 틈에 반독립적인 영지의 아미르들의 연맹이 바이바르스와 비밀 동맹 맺고 일 칸국의 간섭에 맞서 반란. 하지만 바이바르스가 당도하기 전에 너무 빨리 움직인 탓에 술레이만이 일 칸국군과 귀환해 진압[958] 하이메 1세는 무려 63년간 통치 (68세 사망), 스페인 역사상 최장기간. 후계자인 페드로 3세는 만프레드의 딸 콘스탄체의 남편[959] 이탈리아, 프랑스 추기경들 간의 첨예하게 대립한 끝에 중립적인 포르투갈의 브라가 대주교 페드루가 선출된 것. 교황 요한 14, 15, 17, 18, 19세만 정통임에도 대립교황 요한 16세와 14와 15세 사이에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표기의 오류였던 '요한 14세 b'를 고려해 20세도 아닌 21세 칭함.. 한편 인노첸시오 5세가 추진했던 교회 통합 및 샤를의 영향력 저지 등의 정책 지지[960] La Fauconnerie. 바이바르스에게 영지 제한된 예루살렘 왕국은 기사단보다 자금 부족. 아크레에 바일리도 임명 않고 티레로 떠나버린 국왕 위그 대한 결정적 모욕. 한편 이후 예루살렘 총대주교 토마스와 구호-튜튼기사단, 제노바 인들, 아크레 코뮌 등이 위그에게 바일리 임명 청함. 이에 고민하던 위그는 마침내 전 아르수프 영주이자 발리앙 드 이벨린을 선임하고 키프로스로 떠남[961] (같은해 아르메니아에서 돌아온) 보에몽, 자신의 7촌 친척이자 비블로스 영주 기 2세의 동생 지오반니와 알레만 가문의 상속녀를 결혼시키겠다는 약속 철회하고 타르투스의 주교이자 영주인 바르톨로뮤가 지목한 그의 조카로 대신. (사실상 타르투스 계승권 부여) 하지만 기 2세는 알레만 가문 상속녀를 납치, 커플 (혹은 보에몽과 바르톨로뮤)의 반발에도 지오반니와 그녀의 결혼 강행시킴. 이후 템플기사단에게 도움 청하며 피신, 이에 보에몽은 트리폴리의 템플러 지부를 철거하고 몽투아크의 기사단 소유 숲을 벌목해버림. 그러자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는 트리폴리 밖에서 무력시위 후 보트룬 (바트룬) 성채 습격. 다만 보트룬과 트리폴리 사이의 네핀 (엔페흐) 성채 공격은 실패, 12명의 기사 사로잡힘. 이후 보에몽이 비블로스 공격하나 엠브리아코 가문과 템플기사단의 맹렬한 소규모 공격들에 패배. 보에몽의 사촌이자 기 2세의 처남인 시돈 영주 줄리앙의 장남 발리앙 (그의 모친 에우페미아와 보두앵의 모친 시빌라는 자매지간으로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의 딸들) 전사. 결국 보에몽은 현상유지 조건 휴전 체결, 비블로스의 반란 지속됨[962] 오직 장 드 몽포르만이 충성.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가 샤를의 바일리 루지에로 대한 지지 선언하자 아크레 제후들 침묵. 교착상태 지속되고 키프로스 군의 4달 복무 기간 만료되자 키프로스 제후들이 종군 거부, 결국 귀국 / 봄. 베네치아 공화국, 동로마 제국과의 조약 갱신. 미카일에게 리카리오로부터 보호 부탁 / 연초. 샤를의 아들이자 아카이아 공녀 이사벨라의 남편 필리프 사망. 조약에 따라 이사벨라의 후계자는 그녀의 여동생이 아닌 장인 샤를 / 베이루트 영주 니콜라, 니코시아에서 키프로스 대원수였던 기 드 이벨린 (위대한 장 드 이벨린의 막내 아들)의 차남 장과 다투다 그를 살해. 이에 부친에 이어 키프로스 대원수였던 장의 형 보두앵이 (오촌 조카 이사벨라의 남편인) 니콜라 보복 살해. 이사벨라 3번째로 과부됨 / 하프스 왕조의 칼리파 무함마드 알 무스탄시르 사망, 아들 야흐야 알 와시크 계승[963] 5월 18일이라는 기록도. 금 450kg 과 매년 4천 프랑의 연금 대가로[964] 역시 후계자 안드로니코스와 함께 서명. 성 소피아 대성당의 미사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라틴 교리 따르겠다고 맹세[965] 16일이라는 기록도. 아나톨리아의 룸 셀주크 대한 일 칸국의 영향력 종식시키려는 목적, 1만 4천의 맘루크 군 및 반몽골 아미르들 합류. 7천의 일칸국군과 2천 조지아 군 등의 연합군이 맘루크 군 좌익의 베두인 부대를 붕괴시키고 바이바르스의 산자키야 (기수)를 전사시켰지만 바이바르스가 친히 하마 병력과 좌익 지원 나서자 전세 역전. 남은 일 칸국군은 말에서 내려 근처 언덕에서 결사 항전하나 전멸. 어느 한쪽도 돕지 않고 전황 지켜보던 룸 셀주크 섭정 술레이만은 술탄과 토카트로 도주. 술레이만의 아들 무하드답 앗 딘 사로잡힘. 일 칸국군 포로 중 킵차크와 살라르는 후일 칼라운의 주요 맘루크로 부상. 일 칸국 장교들 목숨 보장됨[966] 술레이만이 같이 싸우자며 귀국 연기 부탁해오자 바이바르스는 그가 엘비스탄 전투 때에 돕지 않은 것을 꾸짖음. 바이바르스, 일 칸국군에 자신의 진짜 목적지 숨기기 위해 시바스 향했다가 남하. 한편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를 일전에 일 칸국군 숨겨주었던 아르메니아 마을 알 룸마나 파견해 보복. 한편 맘루크 선봉장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앗 샤이키가 일 칸국 측에 귀순해버림[967] 5월 14일 그의 서재 지붕이 갑자기 붕괴, 이때 잔해에 깔려 입은 부상으로 6일 후 사망한 것[968] 아나톨리아 수복하고 전투 분석한 아바카 칸은 분노하여 카이세리 등 룸 술탄국 동부의 무슬림 학살 지시, 대혼란 발생. 또한 바이바르스에 충성 맹세한 카라만 후국에 군대 보내 재차 복속시킴. 이후 시리아에 3만 대군 파견하나 귀순한 아이바크 앗 샤이키로부터 바이바르스의 병력 규모 접하곤 철수시킴 (바이바르스의 죽음 숨겨진 듯) 그리고 여름에 군대 보내려는 아바카 칸을 장교들이 겨울까지 기다리자고 만류, 결국 원정 자체 시행되지 않음[969] 본래 루지에로는 마르시코 백작. 템플기사단과 베네치아 공화국 도움 받음. 루지에로, 아크레 당도하여 마리아와 교황 요한 21세 서명한 계승권 양도 문서와 자신의 바일리 임명장 제시. 이에 위그의 바일리 발리앙은 반발하나 구호기사단이 그를 위해 싸우길 거부하자 결국 시타델 넘겨줌. 루지에로, 성탑에 샤를의 문장 내걸고 바일리로서 제후들에게 복속 요구[970] 아나톨리아 원정 함께한 아이유브 가문의 카라크 영주 알 카히르에게 주려던 독주를 본인이 마셔 죽었다고도 함. 19세의 바라카 계승하나 (앗 사이드) 선배 맘루크 장군들에 가려짐[971] 본래 아바카 칸은 술레이만의 배신을 눈감아 주었으나 몽골 귀족들이 처형할 것을 설득해 결국 집행.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2세에 의하면 처형 이후 아바카 칸과 고위 귀족들이 복수의 의미로 그의 살을 씹어먹었다고함. 자신의 동생들인 콘구르타이와 샴스 앗 딘 주와이니에게 룸 술탄국 섭정 맡김. 쿠타이하 (코탸에온)의 파크르 앗 딘 알리와 프리기아의 게르미얀 왕조는 일 칸국편 편에서 약화된 중앙 정보 보조, 이사우리아의 메흐메드 베그 휘하 카라만 후국과 카리아의 멘테셰 후국은 맘루크편. 특히 카라만 후국의 독립성 점차 확대[972] 샤를, 와병하여 콘클라베 개입하지 못함. 비테르보에서 4명의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4명의 프랑스 추기경들이 리옹 공의회 때의 신속한 선출 결의안 폐지하고 6개월간 대립, 시민들이 지붕 허물자 이탈리아의 강경파 오르시니 선출. 오만한 로마 시민인 그는 오르시니 가문 대한 혈족주의 의심받고 가문간 결혼 거부한 샤를 적대시[973] 휴전 끝날 때 즈음 보에몽이 엠브리아코 가문이 비블로스 공격하나 격퇴됨. 그 틈에 템플기사단이 해상으로 트리폴리 공격 시도하나 폭풍으로 실패. 이에 보에몽이 시돈의 템플러 성채 해상으로 공격. 구호기사단장 니콜라스 로르그의 중재 나서 엠브리아코 가문과 템플기사단이 여전히 보에몽 적대시하는 현상 유지로 휴전[974] 이로써 남은 안달루스 통합. 사위에게 내어줌 / 성 조지의 십자가 잉글랜드 국기로 처음 쓰임 / 교황 니콜라오 3세, 모든 유대인들의 개종 권유 설교 경청 의무화. 샤를의 동로마 공격 금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특사에게 미카일과 안드로니코스 뿐만 아니라 모든 정교회 성직자 개개인의 교회 통합 대한 구두 맹세 확보 지시. 또한 교황 특사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항시 상주 및 동로마 교회가 교회 분열 대해 용서 빌 것을 요구 / 에피로스의 니키포로스 1세, 동로마 제국령 부트린트 점령 / 베이루트 상속녀 이사벨라, 기욤 발라리와 결혼 / 시칠리아 제독 나르조 드 투시,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의 누이 루시아와 결혼 (1275년이라고도)[975] 루지에로가 참사회의 결정권 무시한 것에 반발한 제후들이 위그에게 소식 알리고 루지에로에 충성 서약할 의무 풀어줄 것을 요구하나 묵묵부답. 루지에로는 충성 서약하지 않는 제후들의 영지 몰수하겠다고 협박, 동시에 위그에게 탄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부여. 이에 귀족들이 연락 취하나 역시 답이 없자 충성 서약함. 루지에로는 샤를에게 충성스러운 오도 푸엘르시앙, 리샤르 드 누블랑, 자크 비달을 각각 행정관, 대원수, 부원수로 임명. 또한 샤를의 조언대로 그의 동맹인 맘루크 왕조와의 충돌 최대한 피하여 더 좋은 관계 맺음[976] 갈레랑은 엄격한 프랑스 관리들 임명하며 철권통치[977] 교황 니콜라오 3세의 동생 마테오 오르시니와 조카인 추기경 말라브란카를 각각 로마 의장과 토스카나 총독 봉함[978] 만프레드의 사위인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 궁정에 망명해 궁중 집사로 있다가 시칠리아 거져 동로마 도움 얻으러 향한 것. 다만 미카일이 교황 승인 없이 아라곤 도와줄 수 없다고 하자 로마로 향함 / 봄. 교황 특사인 그로세토 주교 바르톨로메오의 사절단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 불안해하는 미카일에게 교황의 요구 전달. 미카일, 특사의 요청 승낙하나 고위 장군들 및 주교들 포함한 대다수 여론의 반감 때문에 교회 통합 집행이 힘들고 명령 시행할 믿을만한 관료들 구하기가 어렵다고 불평. 트라브존, 에피로스, 테살리아가 반발의 중심으로 거론됨. 그리고 특사에게 통합 반대하다 투옥되어 쇠사슬에 묶인 황족 보여주고 통합 반대했던 전 총대주교 요시프를 흑해의 섬으로 유배보내는 등 교회 통합 추진 의지 보임 / 하프스 왕조의 칼리파 야흐야 알 와시크 퇴위, 숙부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계승. 아라곤의 페드로 3세, 튀니스에 군대 파견. 무역 특혜 대가로 이브라힘의 즉위 도움. 이브라힘 1세, 야흐야와 그 아들들 처형. 도주하여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 아부 아시다 무함마드 2세 도주. 1295년 11월 2일 복위 (~ 1308년 9월 17일)[979] 부왕 대한 반란 도중 계승 사자심왕 리처드 동생 아폰수는 그가 태어날 당시 교회가 부모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다며 왕위 요구하기도[980] 교회 통합 반대하면서도 형식상으로 교황에게 복속. 샤를에 대한 복속의 증거로 아들을 블로러에 인질로 보냄. 그럼에도 샤를은 코르푸의 지휘관에게 에피로스 소유라도 전에 시칠리아 왕국령이었던 곳은 모두 점령하라고 지시[981] 루체라의 사라센 용병까지 파견. 위그는 스피나리차 점령해 거점 삼고 베라트 공격 준비, 교황 니콜라오 3세가 중단시킴[982] 부친 대의 아미르들을 숙청해나가던 술탄 바라카는 그들이 돌아오는 즉시 체포할 것을 계획했는데 이를 한 아미르가 밀고하자 회군 감행한 것[983] 미카일의 설득으로 복위한 요안니스 `11세기 교황 특사 주재 총회에서 공동 성명서에 서명했는데 복잡하여 라틴어로 정확히 번역 불가함[984] 18일이라고도. 폐위된 바라카는 카이로 떠나 은퇴 영지 카라크 향함[985] 27일이라고도. 쿠투즈가 즉위할 때와 같은 논리 (성인 군주 필요)[986]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 향해 비테르보의 교황 니콜라오 3세로부터 만프레드의 딸 콘스탄체의 명의로 시칠리아에서 샤를에 대해 반란 주선 승인 받음. 또한 교황의 주선으로 독일의 루돌프 1세도 방문했다고. 이후 재차 콘스타티노폴리스 방문, 미카일로부터 금 850kg 지원받고 시칠리아의 공모자들의 지지 확인한 후 바르셀로나 귀환. 페드로 3세에게 1282년 출정 설득[987] 가을 무렵 사절단이 아크레 당도해 소식 전함.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알리도록 잉글랜드로 파견됨 / 봄. 미카일, 차남 콘스탄티노스를 파견해 바르다르 협곡 공격해온 샤를의 동맹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에 맞서게 함. 이후 그는 니케아 침공한 튀르크 습격대를 격퇴하고 상가리오스 협곡의 요새들 재건해 방어선 구축. 장남 안드로니코스는 더 남하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상 메안데르 협곡을 수복하고 트랄레스 도시 재건 / 아테네 공 장 1세 사망, 동생 기욤 계승 / 전 룸 술탄 이즈 앗 딘 카이카우스 2세, 킵차크 칸국령 크림 반도의 망명지에서 사망. 여름. 그의 아들 기야스 웃 딘 마수드가 현지 튀르크멘과 아나톨리아 귀환. 반란 시도했다가 시노프에서 사로잡혀 감금된 동생 시야부쉬 구출하고 카라만 후국 일대를 기반으로 한 룸 셀주크 섭정 봉한다는 칙령 (야를릭) 확보하기 위해 이란 향함. 카이쿠스라우 3세는 아바카 칸의 동생 콩쿠르타이의 섭정 하에 재위 유지. 한편 마수드의 조카 알라 웃 딘 카이쿠바드가 타르수스에서 반란 일으키나 실패하고 도주[988] 팔레스타인과 하마의 알 마수르 2세, 알레포 총독, 북부 베두인 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 남부 베두인 족장 아흐마드 이븐 훗자 등의 지지 얻음[989] 바이바르스 즉위 시에 다마스쿠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산자르 알 할라비가 이번엔 진압군 사령관으로 출정[990] 전투 개시되자 알레포, 하마 군대가 이탈해 순쿠르 패배. 이사 이븐 무한나와 사막으로 도주. 라흐바 당도하나 총독의 지지 얻지 못하자 아바카 칸에게 서신 보내 개입 요청. 이사는 사막 동부에 머물고 순쿠르는 미리 보물과 가족 대피시켜 놓은 사흐윤 (살라딘 성채)에 틀어박혀 상황 주시. 한편 아바카 칸은 룸 술탄국의 섭정 콩쿠르타이와 부관 사마가르, 조카 바이두 및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동맹군, 그리고 망구 테무르 및 아르메니아 왕국 동맹군의 3로군 파견. 시리아의 맘루크 군은 순쿠르의 동맹인 핫즈 오즈데무르의 샤이자르 포위[991] 샤를과 루돌프 1세 모두 시칠리아 주장 철회토록 협상하던 중 사망. 이후 샤를이 본인 지지하는 후보 선출하기 위해 간섭하며 콘클라베 지연됨[992] 칼라운이 일 칸국에 맞설 군대 준비하던 틈에 일칸국과 함께 움직인 것. 7천 포로와 귀환했다고도[993] 28일이라는 기록도. 이때 대사원 등에 불지름. 알레포 주민 대부분은 난민이 되어 다마스쿠스와 바알벡으로 몰려듦. 한편 알레포 수비대는 칼라운이 파견한 선발대, 시리아 맘루크 주둔군 및 샤이자르 포위 풀고 회군한 병력 등과 하마에 집결. 시리아 아미르들은 순쿠르에게 일 칸국과의 동맹 규탄하고 그에게 합류해 같이 싸우자고 제안. 이에 순쿠르와 핫즈는 각각 성 밖에 주둔하나 일 칸국군 철수 소식에 다시 성으로 귀환[994] 한편 이때 아인탑, 알 비라 방면으로 파견되었던 하마의 정찰대 귀환. 이들이 철수 소식 알린 듯[995] 현지 아미르 부그론이 기독교 개종 및 항복 제안한 것. 다만 시칠리아 반란 터질 경우 그곳으로 향할 것도 염두에 둠 / 샤를의 함대가 메시나에 집결하자 동로마 요원들이 시칠리아 반란 모의자들과 합류. 미카일, 매년 6만 하이페르페라 지원 제안. 가을. 동로마 사절인 포카이아 공동 영주 베네딕토 자라키아가 제노바 측에 통보한 후 바르셀로나 당도. 왕비 콘스탄체의 권리 확보 및 샤를 축출 대가로 자금 지원 약속 / 한편 프로방스 문제를 두고 아를 왕국을 복원시키고 샤를의 아들 샤를 마르텔이 루돌프 1세의 딸 클레멘티아와 결혼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으로서 다스린다는 합의가 이해 5월 (혹은 1280년) 교황의 승인받음. 하지만 형수이자 처형인 루이 9세의 과부 마가렛이 장녀인 자신의 부분적 계승권 주장하며 반발, 반샤를 영주들 규합해 무력 점령 시도. 부르고뉴 공 로베르 2세, 사부아 백작 필리프 1세, 생트 폴 백작 위그 3세 등이 그녀 지지[996] 2백 기사와 5백 보병. 칼라운이 보낸 병력 격파[997] 루이 9세의 측근이던 시몽 드 브리에. 앙주 세력이 요직의 오르시니 가문원들 축출[998] 미카일,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타르카네이오이티스와 그랜드 스트라토페드라크 (체찰사?) 요안니스 시나데노스, 친왕인 사위 미카일 (에피로스 친왕 니키포로스 1세의 이복동생, 동로마 전향, 황녀 안나와 결혼) 등의 지휘 하에 원군 파견. 타르카네이오이테스는 시타델 성밖에 흐르는 강을 따라 보급품 띄워보냄, 이에 위그가 25명의 호위대만 대동하고 정찰 나섰다가 동로마측 튀르크 기병대에 발각되어 그의 말이 죽자 사로잡힘. 살아남은 호위대 통해 사실 알려지자 포위군 혼란에 뻐져 도주, 동로마 군이 추격해 화살로 기병들 말을 죽여 낙마시킴. 대승, 많은 장교들 포로 되고 일부만 크루여 도주. 재물과 무수한 공성병기 노획.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개선식에서 포로들은 술리 출신 거인 장교를 필두로 나열됨. 미카일, (추수?) 감사 예배 주재하고 블라케르나이 황궁 벽에 승리 묘사. 이듬해 안드로니코스 2세는 승리 기념해 베라트에 아르데니카 수도원 건립[999] 순쿠르를 도왔던 이사 이븐 무한나가 찾아와 복속한 것. 재차 아미르 알 아랍으로 봉해짐. 이미 남쪽의 훗자는 순쿠르 패하자마자 복속해 남쪽의 아미르 알 아랍으로 봉해짐[1000] 쿠벤두크 알 카즈나다르 등의 자히리 아미르들이 십자군 측에 서신 보내 칼라운이 곧 폐위되고 그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것이니 술탄의 조건에 동의하지 말라고 조언. 하지만 오히려 루지에로가 칼라운에게 알렸고 술탄은 이들을 심문, 혐의 시인하자 처형. 나머지는 3백 기병과 순쿠르 측에 가담[1001] 기존 사흐윤 영토에 샤이자르 대가로 아파메아, 알레포 대가로 안티오크와 카라프탑 등 기병 600명의 이크타 주며 아바카 칸과의 동맹 버리도록 매수한 것. 한편 칼라운은 바이바르스의 삼남인 알 마수드 카디르의 카라크 영지에서의 자치 허락[1002] 베라트 전투 후 육로 통한 동로마 정복은 힘들다고 판단한 샤를이 베네치아와 접근한 결과. 1283년 4월의 본 원정에서 샤를은 8천 기병대 제공하고 베네치아는 전함 40척 (필요하다면 더) 제공하기로. 1282년의 선발대로는 각각 3백 기병대와 15척의 전함 7개월간 제공하기로. 동로마뿐만 아니라 제노바 등 다른 점거 세력도 원정 대상[1003]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에 의하면 장교는 군대 규모가 8만이고 10월 중순이 작전 개시 예정이라고 실토[1004] 엘비스탄, 마라쉬, 아인탑 지나 남하. 수비대 도주한 알레포 통과. 하마 역시 통과, 일대 농촌 혼란. 하마의 알 만수르 2세는 이미 홈스에 가있던 상태. 마르가트의 구호기사단은 아크레 본부의 휴전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기사들 지원[1005] 12일 전에 모임. 칼라운은 본래 유사시를 대비해 시타델 있고 이집트와 가까운 다마스쿠스를 전장으로 택함. 하지만 산자르, 바이세리 등의 장군들이 술탄이 함께하건 말건 홈스에서 싸울 것이라며 떠날 준비하자 (이 경우엔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가 지휘) 벡타쉬 알 파크리가 여기서 움직이지 않으면 왕위 잃을 것이라 조언, 이에 아미르들의 의견 수용한 것[1006] 칼라운, 적군 탈영병의 조언대로 좌익 강화. 좌익은 순쿠르 알 아쉬카르와 자히리 맘루크, 산자르 알 할라비, 벡타쉬 알 파크리, 에트미쉬 알 사디, 빌리그 알 아이데무리, 바즈카 알 알라이, 베쿠트 알 알라이, 자브라크 알 타타리 등의 아미르들 배치됨. 그 외곽 (자나하인)엔 튀르크멘 병력과 히슨 알 아크라드 (크락 데 슈발리에) 총독 발라반 알 탑바키 배치됨. 우익에는 알 만수르 2세 휘하 하마 병력과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 다마스쿠스 총독 라긴, 바이세리, 아이테킨 알 분두크다르, 아이바크 알 아프람, 쿠슈타그디 알 샴시 등 40명의 아미르들과 10개의 할카 부대 배치됨. 그 외곽엔 이사 이븐 무한나, 아흐마드 이븐 훗자의 베두인 병력 배치됨. 중앙 부대의 선발대 (잘리쉬)에는 나이브 알 술타나 투란카이와 아바지 알 하집 벡타쉬 이븐 그레문 지휘 하의 칼라운 휘하 맘루크 (만수리야) 배치됨. 칼라운 본인은 선발대 뒤의 심장부 (칼브)에 동료들 (알 알잠) 및 8백의 친위 맘루크, 4천의 할카 병력과 위치. 알 마크리지에 의하면 술탄은 한 쪽 (툴브)이 어려워지면 3백의 친위 맘루크들과 함께 지원 나서기 위해 2백의 근위대와 인근 언덕에 주둔했다고도. 당대 구호기사단원 조지프 드 캉시에 의하면 순쿠르가 좌익, 아이바크가 우익 지휘 맡았다고함[1007] 라시드 앗 딘에 의하면 행렬이 24km에 이르렀다 하고 바이바르스 알 만수르에 의하면 양익이 하마부터 살라미야에 이르렀다함. 좌익은 힌두쿠르, 마주크 아가 지휘. 우익은 알리나크, 타이주 바하두르, 왕자 훌라구, 카라부가, 사마가르 휘하 3천 룸 셀주크 군, 드미트리 2세 휘하 1천 조지아 군, 레오 2세 휘하 아르메니아 군과 오이라트 병력이 배치됨. 중앙엔 망구 테무르와 전선 지휘관인 투크나, 돌라다이 배치됨[1008] 아침 무렵 양 군은 홈스와 알 라스탄 (하마와 홈스 중간)에서 조우. 알리나크의 일 칸국군 우익이 돌격해 맘루크 좌익 격파. 순쿠르 부상 당하고 전열 붕괴되고 중앙 일부 무너짐. 병사들 사파드, 다마스쿠스, 가자로 도주. 일부는 이집트까지 당도. 일 칸국군은 패잔병들의 보급품 약탈하고 추격해 보이는대로 민간인 할 것 없이 학살. 한편 맘루크 우익은 일 칸국군 좌익의 공세에 타격 입었지만 버텨내었고 반격해냄. 이에 칼라운이 바이바르스 알 만수르와 함께 우익 및 중앙 선발대와 함께 반격해 일 칸국군 격파. 이에 중앙의 망구 테무르가 공세 멈추고 주춤. 그 틈에 칼라운이 남은 좌익 및 베두인 병력과 함께 일 칸국군 우익에 총공격을 퍼붇자 그들 역시 후퇴, 이에 맘루크 군이 후방을 공격해 격파함. 한편 순쿠르의 동료인 알 핫즈 오즈데무르가 항복하는 척하며 망구 테무르에게 접근해 칼로 내리쳐 그를 낙마시키고 그 호위병에게 살해되는 희생을 통해 일 칸국군에 혼란 초래. (혹은 전쟁 경험이 적은 망구 테무르가 어느 순간 베두인들의 공격에 놀라 말에서 낙마하여 부상당했다고 함) 이후 일 칸국군은 왕자를 지키기 위해 (혹은 말들이 지쳐) 말에서 내림. 적이 약해졌다고 판단한 (혹은 적장이 전사했다 생각해 고무된) 맘루크 군이 총공격을 가해 승리, 대부분은 일 칸국군 추격에 나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격하고 칼라운은 수백의 호위대와 전장에 남음. 한편 전투 초반 맘루크 좌익 추격 나섰던 알리나크의 일 칸국군이 전장 지나 망구 테무르와 합류 위해 북상 (승리 확신하고 홈스 남쪽에서 본군 기다렸으나 오지 않자 정찰대 파견, 패전 확인. 이에 본군과 합류 위해 북상). 이를 포착한 칼라운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언덕 뒤에 숨어있다가 그 후방을 기습해 격파. (다만 이 기습은 진실 여부 논란 많음) 어쨋든 전투는 해질 무렵 맘루크 군의 최종 승리로 귀결됨.[1009] 이후 하마 혹은 살라미야 방향으로 철수하던 일 칸국군은 라흐바, 알 비라의 수비대와 베두인, 현지인의 공격으로 다수 사상자 발생. 유프라테스 도강 중에도 일부 익사, 일부 스텝에 숨어있다가 칼라운의 지시로 방화되자 사망. 바그라스의 맘루크 수비대는 아르메니아 군 습격해 한 부대 전멸시킴.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는 적군이 전투보다 후퇴 도중 더 죽었다고 기록. 카파자 베두인 길잡이들이 사막의 길과 유프라테스 도강 지점 안내하여 사상자 그나마 줄임. 한편 맘루크 측도 아미르 11명 전사하는 등 큰 피해. 2백명 전사했다고도 하나 신빙성 낮음. 한편 순쿠르 역시 사흐윤 귀환, 다만 그의 일부 아미르들은 칼라운 편에 남기로 결정[1010] 라시드 앗 딘에 의하면 10월 15일 사냥에 관심 쏠려 떠났다고도. 패잔병들이 소식 전했거나 전령 비둘기로 소식 전해받은 라흐바의 축제 분위기에 결과 짐작한 것이라고도. 일 칸국군이 라흐바 포위 시도했다고도[1011] 마지막 남편 기욤 발라리와도 후사 없이 사망. 음프헤는 필리프 드 몽포르의 차남 / 봄.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 나폴리에서 동로마 원정 준비하는 숙부 샤를에게 페드로 3세가 에브로 강 하구에서 준비 중인 함대가 튀니스가 아닌 시칠리아로 향할 가능성 알림[1012] 잠입하여 템플기사단 지부 당도하나 사전 협의와 달리 지휘관이 부재. 배신 짐작하고 거사 포기, 구호기사단 지부로 피신하나 소식을 전해들은 보에몽이 휘하 기사들과 체포 위해 당도. 기 2세, 동생들 및 사촌과 기사단 건물의 성탑에 포위되자 몇시간 후 목숨 보장 대가로 항복. 하지만 보에몽은 그들을 네핀 성채에 감금해 굶겨 죽이게 하고 (엠브리아코 가문의 출신지인) 제노바 함대 및 티레 영주 장 드 몽포르의 병력 당도하기 전에 비블로스 (주바일) 영지 몰수해 직할령으로 편입[1013] 4월 5일이라고도. 팔레르모의 성심성당에서 프랑스 출신 병사 뒤레가 젊은 현지 유부녀를 모욕하자 남편이 그를 살해. 시민들이 주변 프랑스 인들을 학살, 만종 (저녁 기도) 종소리를 신호로 각지에서 같은 일 발생해 하루동안 수백명의 프랑스 인들 살해됨[1014] 팔레르모 근교에서 시칠리아의 판관 장 드 생 레미와 비카리 성채의 수비대가 항복 협상 중 학살됨. 팔레르모에 코뮌 선포되고 다른 도시들도 잇다름. 샤를의 시칠리아 총독 움베르 드 오를레앙이 메시나에서 버팀. 팔레르모 코뮌은 교황에게 시칠리아를 그의 보호 하에 취할 것을 제안. 한편 제노바 상인 카사노가 대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미카일,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신은 시칠리아를 인도할 신의 수단이었다고 선언[1015] 4일이라고도. 다만 불만스러운 제후들이 쿠빌라이 칸에게 불평, 후자의 승인 하에 아바카 칸의 아들 아르군 칸이 곧 반란 시작[1016] 바이바르스의 휴전 갱신한 것. 일대의 방어 시설 증축 혹은 신축하지 않는다는 조건[1017] 1일이라는 기록도. 적이 성문 넘었음에도 반대편 성문으로 군대 내보내서 습격해 격파[1018] 게다가 이미 하프스 군대가 콩스탕틴을 수복, 반란 시도했던 총독 부그론 처형한 상태라 본래 침공 목적 무산된 상태. 콜로 향하기 전 메노르카 경유했는데 문타네르에 의하면 그곳의 라이스 아부 우마르가 하프스 칼리파 이브라힘 1세에게 밀고한 결과라고. 한편 시칠리아 사절단이 콜로 당도해 페드로의 호엔슈타우펜 가문 왕비가 그들의 적법한 주권자임을 선포[1019] 자신이 아나톨리아에 있는 틈에 테살리아 친왕 요안니스가 침공하자 보복 결정[1020] 토마스 디 아체라 등 군사 전략가들이 그에게 우선 후퇴하고 이후에 (될 수 있으면 시칠리아 인들이 아라곤 지배에 신물이 났을 때) 더 많은 병력과 돌아올 것을 조언한 결과. 다만 페드로 혹은 콘스탄체의 계승권 주장은 부인, 메시나 수비대 철수[1021] 19일이라고도. 이후 프랑스의 필리프 3세에게 카탈루냐 침공해 처남 페드로를 폐위시킬 것을 설득하기 위해 사절 파견[1022] 몸이 좋지 않자 황후 테오도라가 걱정, 이에 트라키아 넘어서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나 상륙 직후 병세 악화됨. 12월 11일 금요일 23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후계자 지목 후 사망. 향년 58세, 서방 교회에서 파문당는데 형식상으로나마 동방에서도 마찬가지라 교회 미사도 없이 진영 부근 언덕에 묻힘. 다만 이후에 셀렘브리아로 이장됨. 안드로니코스 2세는 5세 아들 미카일을 공동 황제로 임명, 교회 통합 철회하고 미카일에 의해 감금된 모든 세속/성직자 죄수들 석방[1023] 흑해안 유배로 쇠약해진 요시프, 들것에 실려 시민들의 환영과 함께 귀환. 교회 통합 반대로 불구 되거나 장님 된 수도사들은 순교자로 칭송받으며 행진. 교회 통합 지지했거나 라틴 사제들과 성찬식 함께 진행했던 성직자들은 속죄 요구됨[1024] 다만 연로한 샤를 대신 각자 1백의 기사들 선발해 대결하기로. 장소는 에드워드 1세의 중재 하에 그의 영지인 가스코뉴의 보르도에서. (1285년 예정?) 한편 시칠리아 전선에 집중하게 된 샤를은 칼란드리차 영주 기 드 드라믈리를 아카이아 공국의 바일리로 봉함. 한편 여름 무렵 양측 모두 전쟁 위한 예산이 바닥나 레조에서의 소강 상태 지속됨. 특히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측이 군대 유지비로 막대한 터무니없이 높은 비용 청구하자 회피하고 보내는데 '실패'[1025] 칸의 동생으로 형의 계승권 도전. 술탄 대동하나 도중 사망, 테쿠데르 칸은 반란 가담한 카이쿠스라우 3세에 대한 보복으로 공동ㅇ로 동남부 다스리던 기야스 웃 딘 마수드를 단독 술탄으로 봉하기로. 한편 테구데르의 조카 아르군이 반란, 호라산 장악 / 페드로의 동생이자 독립을 보장받은 아라곤 왕국의 제후국 마요르카 왕국의 하이메 2세가 교황의 아라곤 십자군 계획 지원 의사[1026] 반통합파 운동이 지속됨에 따라 요안니스 베코스 등의 통합파 수뇌부에 대한 배신자로서의 심판 목소리. 결국 유배되고 교회 통합 관련된 모든 문서들 불살라지고 미카일 8세 역시 크리스트교도로의 매장과 의례적인 교회의 기념 역시 거부됨[1027] 정확힌 기존 시칠리아-아라곤 대해 진행되던 전쟁에 십자군 지위 부여하고 참전하는 이들에게 완전한 십자군으로의 사면 제공한 것. 교황청과 십자군과 이탈리아의 동맹을 지목하는 교황권을 악용한 정치적 실수로 평가됨[1028] 앙주 군이 철수한 직후 페드로가 인근 상륙. 한편 왕자 샤를은 산 마르티노에서 의회 소집해 개혁 공표, 현지인들에게 선정 재차 약속[1029] 안드로니코스 2세, 저명한 일반인 학자인 키프로스의 요르요스를 논쟁의 여지 없는 후임자로 지목. 태후 테오도라, 알렉사드리아 및 안티오크의 정교회 총대주교 역시 교회 통합 대한 지지 철회[1030] [1031] 지오반니 디 프로치다. 샤를과의 약속대로 보르도에서 대표단간의 대규모 결투 위해 떠난 것. 한편 시칠리아 왕국의 주인 문제는 자신의 영역이라 생각한 교황 마르티노 4세가 반발, 주최자인 에드워드에게 결투 주선하지 말고 샤를에게 철회 부탁해 전자는 수용하지만 후자는 거부. 또한 에드워드의 기엔 (가스코뉴) 총독 장 드 그라이가 주선[1032] 겁쟁이란 오명 피하기 위해 직접 향하나 서로 다른 때에 나타나 상대편이 부재하니 자신의 승리임을 주장, 보르도의 토너먼트장에서 가식적인 퍼레이드 후 돌아가며 결투 무산됨[1033] 5월이라고도. 칼라운이 먼저 사절 보내 휴전 10년 연장 제의. 섭정 루지에로가 소환된 후 임명된 오도는 아크레 코뮌과 시돈, 아틀리트의 템플기사단이 자신과 함께 서명케 함으로써 합의가 (국왕 위그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쇠퇴하는 앙주 가문의 지원을 받는) 섭정 정부에만 그치지 않도록 함. 아크레 측은 더 나은 조건 기대했으나 현상유지에 그침. 다만 나사렛 순례 왕복 모두 안전 보장되고 성당 및 주변 가옥 4채가 주어졌으나 아크레, 시돈, 아틀리트 제외한 방어 시설 보강 금지됨. 아크레는 새로운 십자군 도착 최소 2달 전에 술탄에게 소식 알려야함. 몽골이 쳐들어온다면 먼저 접한 측이 상대방에게 알려줌. 만약 신께서 허락치 않으시겠지만 몽골군에 의해 맘루크 군대가 철수한다면 아크레는 백성, 영토 구하기 의해 그들과 협상할 권리 지님. 반아크레 기조를 유지하던 티레는 따로 조약 체결. 보에몽의 트리폴리 백국 역시 제외. 마크리지에 의하면 단순히 4월 5일부터 10년간이라고도[1034] 1282년부터 몰타에서도 봉기, 이에 앙주 병력은 산 안젤로 성채에서 농성. 그곳에 파견된 지원 함대를 쫓아가 격파한 것. 이후 몰타 상륙해 음디나에 2백 수비대 배치하고 회군, 산 안젤로는 계속 버팀[1035] 위그는 템플기사단이 이를 주선했다며 비난[1036] 위그는 자신이 원할 때에 150 베잔트로 티레를 매입할 수 있고 후사 없이 사망하면 왕령지로 편입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음프헤의 계승 승인[1037] 멘테세 후국이 동로마 제국의 트랄레스 (아이딘) 점령. 시민 2만명 노예화[1038] 필리프 3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해 샤를을 낳음.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십자군 전비 마련 목적으로 프랑스 교회의 십일조 할당 요구. 3년간 1/10 지원받기로[1039] 음프헤의 두 아들 애므리와 루벤이 있음에도 어리다는 이유로 음프헤의 형 장의 과부인 마가렛에게 왕령지로써 하사한 것[1040] 파크르 앗 딘 알리가 섭정 봉해짐[1041] 1275년 7월 사망한 알폰소의 장남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의 아들들 알폰소와 페르난도가 상속권 부인되자 추후 왕위 도전하며 문제 일으킴[1042] 이후 그는 시칠리아로 보내짐. 시칠리아 측은 포로 교환에 있어 샤를에 의해 18년간 수감 중인 만프레드의 딸 베아트리체 석방하게 함[1043] 샤를 2세의 체포 후 일어난 프랑스 당국에 대한 봉기 일어남[1044] 테쿠데르 칸의 이슬람 개종 및 친맘루크 정책에 불만인 아미르들의 음모로 궁전에서 살해당함. 호라산에서 버티던 조카 아르군이 추대되고 다시 일 칸국을 친십자군 성향으로 돌려놓음. 신임 네스토리우스 교회 총대주교인 중국인 마크 (야흐바할라)의 조언에 의지함[1045] 샤를 1세의 죽음 및 그 후계자의 포로 신세로 아크레에 있어 앙주 가문에 대한 충성이 쓸모없게 되자 도시에 줄리엥 르 준을 사절로 파견해 자신을 그들의 적법한 군주를 인정하고 앙주 가문에서 뤼지냥 가문으로 충성 이전할 것을 요구. 아크레 코뮌과 기사단들이 (템플기사단 역시 마지못해) 동의. 하지만 샤를의 바일리 오도 드 푸아레상은 프랑스 병력의 지지 하에 사임 거부함[1046] 전 술탄 카이쿠스라우 3세 과부의 탄원에 의한 것. 룸 셀주크 더욱 약화시킴. 다만 이듬해 술탄 메수드 2세가 소수의 병력과 침공해 콘야 수복. 5촌 조카들 처형하고 재통합. 그 후로 아르군 칸에 복속하며 잘 지낸 듯[1047] 공교롭게도 프리드리히 2세의 주요 거처였던 포지아에서 사망. 후계자인 장남 샤를 2세가 포로인동안. 만약 석방되지 못한다면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장손인 샤를 마르텔이 계승하는 것으로. 섭정 로베르 2세 하의 프랑스 귀족들은 교황의 주장대로 전쟁 지속. 섭정단은 (상속녀 이사벨라 무시하고) 아테네 공 기욤 1세를 아카이아 공국의 바일리 맡김[1048] 28일이라고도. 이후 로마 출신 자코모 사벨리가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전임자의 아라곤 십자군 지지 기조 유지[1049] 25일이라고도. 기사들이 부근 지나던 상인들의 카라반 공격하여 히신 알 아크라드 (크락 데 슈발리에)의 아미르와 대립하게 된 것이 발단. 칼라운은 쇠뇌, 투석기, 화염방사기 등의 공성 병기와 함께 당도. 기사단의 약화된 이웃들인 베이루트의 에스키바와 티레의 마가렛은 도움 대신 칼라운과 휴전 의사 표하기에 급급[1050] 갱도 목축에 불질러 붕괴된 것. 다만 석축 무너지며 같은 시기 성벽 공격하던 맘루크 군 역시 피해 입고 철수. 방어 불가능하다 판단한 기사단과 성벽이 온전한 상태로 성채를 얻고 싶었던 칼라운 간의 협상 이어짐[1051] 무기 소지하고 말탄 채로 재산과 함께 당당히 후퇴. 다만 나머지 인원들은 무소유로 떠남. 이들은 맘루크 군의 호위 하에 타르투스 거쳐 트리폴리로 철수. 마르가트의 함락으로 라타키야 더욱 고립됨. 한편 칼라운의 위협에 질겁한 보에몽은 인근 마라키야 성채의 영주 설득해 항복시킴. 이후 마라키야는 성채 맘루크 군에 의해 곧바로 파괴됨[1052] 27일이라고도. 하지만 압도적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수비대가 완강히 저항해 점령하지 못하고 포위 장기화 됨. 이후 전염병 엄습[1053] 바이바르스 때의 휴전 갱신, 티레의 방어시설 증축 금지됨. 한편 그무렵 아르메니아의 레오 2세가 칼라운에게 사절 파견해 연공 대가로 휴전 체결[1054] 5일이라고도. 가뜩이나 점염병과 장기전으로 군대 약화된 상황에서 루지에로가 보급선 차단할 목적으로 후방 로사스에 병력 상륙시키자 철수 주장에 동의한 것.[1055] 향년 46세. 전자는 21세고 후자는 18세, 모후 콘스탄체가 시칠리아 섭정. 한편 필리프 4세는 당숙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아라곤과의 휴전 중재 부탁[1056] 해적이 기시 가문령 티노스 섬에서 당나귀를 약탈, 이를 공작 마르코 2세의 장남이자 시로스 섬의 영주인 굴리에모가 매입. 이에 기시 가문이 반환 요구하며 시로스 침공, 굴리에모의 성채 포위하며 내전 발발. 이에 마르코 2세는 주군 샤를에게 도움 요청, 인근 멜로스 섬에 정박 중이던 앙주 함대가 개입해 (멜로스의 상속녀 카산드라 사누도의 간청에 의한 것이라고도) 포위 풀림. 결국 당나귀 소유 문제는 네그로폰테의 베네치아 바일로에 넘겨졌는데 그는 두 가문의 화해와 평화 주선하는데 성공. 다만 그동안 당나귀 죽음 / 카탈루냐에서 아라곤측 포로로 지내던 샤를 2세, 마침내 시칠리아 (레지오 소유권 및 튀니스에서의 조공 등과 함께) 대한 권리를 아라곤측이 인정하는 하이메 2세에게 양도하기로 합의. 하지만 조약 성립에 필요한 교황 승인은 (그 후로도) 행해지지 않음. 한편 나폴리의 교황 특사 추기경 제라르는 섭정 정부에 (교황청이 주도하는) 신규 시칠리아 침공군 전비 부담 종용 / 칼라운의 맘루크 투란타이, 카라크의 바이바르스 손자들이 일으킨 반란 진압 /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당한 프러시아 인들 반란[1057] 앙리 2세가 함대 대동하고 국왕으로 환영받으려 아크레 당도. 다만 기존 약속과 달리 기사단장들은 앙주 측 자극하지 않으려 환영식 보이콧[1058] 총독은 루큰 앗 딘 이븐 알 바하 알 무갈리. 모술 측이 일 칸국군 도와 국경 습격한 것에 대한 보복[1059] 앙리 2세, 프랑스 병력과 오도에게 안전 보장하고 교회가 이를 중재. 결정적으로 기사단장들이 오도에게 퇴거를 제안하자고 결론 내리자 그가 동의 (혹은 합의안 수용)한 것. 한편 나폴리 측은 왕국내 기사단들의 영지 몰수[1060] 한편 시칠리아의 하이메 2세가 협상 제안하자 샤를은 석방 대가로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대한 권리 포기하겠다고 합의. 하지만 교황 호노리오 4세의 강한 반발에 무산되었다가 이듬해 그가 사망한 후 공위기 이어지자 협상 재개됨[1061] 글로리아 주교 본나코르소 주재 하에 치러짐. 레반트에서 거행된 마지막 예루살렘 국왕 대관식. 몇 주후 아크레 들른 후 귀국[1062] 알 말리크 앗 살리흐. 8월 28일 시타델 나와 만수르 문 근처 궁전에서 출정 준비[1063] 베르나르도 디 소리아노 휘하 함대. 프랑기파니 영주 아들에게 복수[1064] 테베의 공동 영주인 니콜라 드 생 오메르가 아카이아 공국의 바일리 계승 / 동로마 제국군, 본국에 관심 쏠린 앙주 수비대로부터 디라키온과 블로러 탈환 (1288년이라고도)[1065] 중과 부적임을 깨닫고 안전 철수 대가로 항복. 2백여 심복들과 부친 아부 우스만 사이드의 유해, 칼 50 자루 및 도서 등의 재산 챙겨 알폰소가 주선해 준 제노바 선박으로 마그렙 향하나 문타네르에 의하면 아프리카 근해에서 폭풍을 맞아 침몰하였고 생존자는 없었다고 한다[1066] 시리아 부왕 후삼 앗 딘 투란타이 (1월 21일 임명됨)가 파견한 것. 2월 5일 일 칸국군 철수 알리고 아나까지 나아감. 주민들 도주, 수비대가 시타델에서 농성하자 회군[1067] 이전 안티오크 공국령임으로 트리폴리 백국과의 휴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1068] 그날 포함 3일 연속으로 성 내의 투석기 파괴하는 효과 보임[1069] 토마스 스피놀라, 올란도 아스케리가 지휘. 전자는 맘루크 측 중립 보장받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향하고 후자는 피사 선박 공격하고 티레 상륙. 그곳을 거점으로 아크레의 피사 구역 공격하려 하나 현지 베네치아 공동체가 후자의 항만 폐쇄 도움[1070] 아르군 칸, 서유럽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랍반 바르 사우마 파견. 본래 대도(베이징)의 중국 네스토리우스 교회 출신 순례객인 그는 1282년 길을 나섰으나 일칸국-맘루크 전쟁으로 이라크 너머의 길이 막히자 자지라의 마르 미카일 (성 미카일) 수도원에 거주, 그의 동료 순례객이자 제자인 마르코가 총대주교 등극한 후 아르군 칸에게 그를 서방 사절로 추천해 성사된 것. 이후 이탈리아 향하던 길에 들른 것.[1071] 승전에도 입항 실패하자 예루살렘 왕국 봉쇄, 이집트에서 돌아온 스피놀라도 합류. 기사단장들이 중재 나서 피사-베네치아 측 설득하여 현지 선박들의 자유 무역 승인하게 함[1072] 18일 혹은 베수비오 화산이라고도[1073] 루지에로가 시칠리아 침공 도우려는 프랑스-앙주 함대 격파한 것. 샤를의 토스카나 총독이던 귀도 드 몽포르가 플랑드르 & 프로방스 귀족들과 포로가 되어 몸값 내고 석방됨. 귀도가 아닌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당피에르라고도[1074] 에드워드의 중재 하에 가스코뉴 남부 베른 부근에서 체결됨. 큰 아들 세 명과 주요 제후 50명 인질로 잡히기로. 또한 샤를은 모든 당사자들이 만족할 합의 주선해야 하고 3년 이내로 이를 이루어내지 못할 경우 다시 감금되거나 아라곤에 프로방스 백국 할양하기로. 프랑스와 교황청이 승인해야 함[1075] 필리프 4세,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세력에 대한 연합 작전 승인 표하고 지원 제안. 에드워드 1세는 더 확고한 열정 보임. 다만 둘다 원정 시일 정하지 않음[1076] 루시아는 앙주측 제독인 남편 나르조 드 투시와 아풀리아 거주. 주민들은 그들이 와서 통치하길 바라지 않아 태후이자 (보에몽, 루시아의 모친) 1275-77년간 섭정이었던 아르메니아 공주 시빌라를 군주로 추대. 하지만 시빌라가 바일리로 선임한 그녀의 동맹이자 인기없는 타르투스 주교 바르톨로뮤에 시민들이 반발, 과거 실정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간함. 그럼에도 시빌라가 지명을 고집하자 시민들은 그녀를 폐위하고 코뮌 선포, 보에몽이 죽인 비블로스 영주 기 2세의 동생 바르톨로메오 엠브리아코를 시장으로 선출. 루시아는 친정 아르메니아 귀환.[1077] 남편 나르조 드 투시와 함께 아풀리아에서 우투르메르 당도. 구호기사단 도움으로 트리폴리 백국 진입해 네핀 장악. 그럼에도 트리폴리 코뮌은 그녀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제노바 공화국에 지배권 제안. 이에 후자는 제독 베니토 자카리아 휘하 5척의 전함 파견. 이에 기사단장들이 코뮌 설득 위해 트리폴리 향하나 실패. 하지만 제노바 측이 더 많은 이권과 상업 구역 확대를 요구하고 (쫓겨난? 혹은 주바일 영주?) '시장' 바르톨로메오가 도시 장악 위한 맘루크 군사 지원 대가로 칼라운을 주군으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하자 코뮌은 태도를 바꿔 루시아를 지배자로 승인. 동시에 코뮌은 제노바 측의 공격 방지 위해 루시아에게 자카리아와의 합의에 도달할 것을 요구. 자카리아는 루시아가 제노바 측의 새 특권들을 확인한다는 조건 하에 그녀의 계승 인정. 이후 코뮌은 자신들의 권리 역시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루시아를 초대해 트리폴리 장악하도록 함. 한편 바트톨로메오는 칼라운에 지원 청함[1078] 에드워드 1세에게 기엔 총독 해임된 직후 떠난 것 / 여름. 안드로니코스 2세, 나폴리의 섭정인 샤를 2세의 차남 로베르 (형 샤를 마르텔은 부왕 샤를 2세의 석방 협상 중 인질인 상태)에게 사절 파견해 라틴 제국 주장의 상속녀 카트린느 (필리프 드 쿠르트네와 샤를 1세의 딸 베아트리스의 딸)과 자신의 장남 미카일과의 혼인 제안.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이를 승인해주지만 동시에 로베르에게 조심스럽게 진행하라고 말함. 이후 동로마 사절단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게로 향함 /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집트에 두명의 밀사 파견, 칼라운에게 제노바 측이 트리폴리의 무역 독점하게 두는 것은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혹은 레반트를 장악하고) 맘루크 측 무역을 방해 혹은 일소할 것이라며 (알렉산드리아 왕래 좌지우지 할거라며) 개입 청함 / 칼라운, 출생지인 크림 반도 솔카트에 사원 건립. 트리폴리 원정 준비, 연말 무렵 트리폴리에서 무슬림 상인 체포되었을 때엔 이미 준비 한창[1079] 일주일간 버티다 승낙. 첫 프란시스코회 출신 교황[1080] 새 교황 선출 소식에 협상 위해 서둘러 로마 향함. 성주간 (부활전 전 일요일) 미사 참석, 네스토리우스 교회에서 기념하는 법 보여줌. 부활절 지낸 후 맘루크 대한 공격 격려하는 교황 친서와 함께 아르군 칸 궁정 향함[1081] 인질로 있던 아들 샤를 마르텔과 함께 풀려남. 장기전 통해 아라곤으로부터 더 나은 조건 얻어내려던 필리프 4세는 별로 반기지 않고 전쟁 재개 준비하도록 그에게 군대와 대동시켜 이탈리아로 보냄[1082] 샤를 2세, 보스티차 (아이기오) 영주인 기 드 샤르피니를 아카이아 공국의 바일리로 봉함. 아카이아 기사들의 강한 요청에 따라 앙주 측 성채에 10여년간 감금되었던 상속녀 이사벨라 드 발라르두앵을 석방, 이탈리아로 오는 것과 적법한 지배 위해 귀국하는 것 승인. 한편 샤를은 평화 주선 실패 시에 다시 감금되겠다는 약속에 따라 아라곤 국경에 나타나나 아무도 체포하러 오지 않자 스스로의 명예에 만족감을 느끼며 필리프 4세와 아라곤 간의 평화 협상 주선 위해 파리 향함[1083] 선물을 대가로 그와 밀통하는 아미르 바드르 앗 딘 벡타쉬 알 파크리가 그에게 트리폴리가 목적이라 알려줌. 그러나 기욤의 통보에도 시민들이 거짓 정보로 정국 주도하려는 것으로 불신, 이에 그가 부관 파견해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코뮌 지도부가 방어 준비 시시작함[1084] 트리폴리 코뮌은 백작 루시아에 방어 지휘권 부여하고 단결. 템플기사단 원수 지오프리 드 번다크와 구호기사단장 원수 마티외 드 클레르몽이 현지 지원 병력을, 장 드 그라이는 아크레에서 파병된 프랑스 병력을 지휘. 상당수의 비전투원은 키프로스 피신[1085] 1만 맘루크 기병과 3만 보병. 다만 이들 중 공성전 직접 참여한 것은 1만 5천[1086] 10일, 17일이라고도. 항구에는 4척의 제노바 함선, 2척의 베네치아 함선과 피사 소유의 작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던 상태[1087] 두 성탑 중 전자는 동남쪽 모퉁이, 후자는 서쪽 성벽에 위치. 함락 예감한 베네치아 측이 소유한 선박에 소지품 실어 떠나자 이에 경각심을 느낀 제노바 인들도 뒤따르기로 결정[1088] 기습적으로 동남쪽 성벽이 기습적으로 뚫리고 맘루크 군이 진입하며 주민들 혼란에 빠짐. 루시아, 아모리 및 기사단의 원수들은 미리 준비된 배에 올라 키프로스 도주. 다만 템플기사단 지휘관 페드로 디 몽카다와 '시장' 바르톨로메오 엠브리아코 등은 전사. 도시는 약탈당하고 배로 피신한 일부 제외한 기독교도 성인 남성 대부분 학살됨, 나머지 노예 전락. 맘루크 측은 엄청난 전리품 얻음. 살아남은 프랑크 인들은 조각배를 타거나 헤엄쳐 항구 인근 교회당 세워진 바카르 섬으로 피신하나 결국 같은 운명[1089] 29일이라고도. 먼저 와있던 사절이 앙리에게 휴전 어겼다고 비난한 것. 이에 그는 휴전은 트리폴리가 아닌 예루살렘 왕국에만 적용된다고 답변, 만약 범위가 트리폴리까지였다면 칼라운이 먼저 어긴 샘. 무적의 논리[1090] 성 토마스, 바카라, 혹은 나카라 섬으로도 불림. 선박으로 접근해야 하는 평상시와 달리 유난히 파도가 낮아 맘루크 기병대가 건너가 고립된 프랑크 성인 남성들 중 1200명만 알렉산드리아에 신설된 술탄의 병기창에 일꾼으로 사로잡혀 행군, 나머지 학살됨. 맘루크 포위군 중 하마 병력의 일부로 참전한 시리아 지리학자 아불 알 피다, 약탈 후 병사들이 떠난 섬을 방문하곤 시체가 땅을 덮고 있어 그 악취로 인해 숨을 쉬거나 걸을 수 없었다고 기록. 칼라운, 십자군이 재점령 했을 시에 이용을 막기 위해 기존 트리폴리 파괴 지시하고 내륙 십자군 성채 (몽스 페렝두스) 일대에 새 도시 건설. (타라불루스 알 무스타잣다) 다만 시간 흐르며 기존 도시와 합쳐짐. 트리폴리 백국의 멸망, 휴전 유지된 타르투스와 복속한 비블로스는 더 유지됨[1091] 편지 발신일. 부활절에 파견했다고도.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파견해 자신이 1291년 초에 시리아 방면으로 출정할 것을 선언하고 따라서 기독교도들 역시 그 일정에 맞출 것을 권유함. 필리프 4세에게 전달, 에드워드 1세에게도 사본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1092] 교황 니콜라오 4세, 이탈리아 귀환한 샤를을 교황의 후원자 (혹은 투사?)로 환영하고 그가 표현상으로나마 복속하자 대관식 주선. 다만 그가 석방 대가로 시칠리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에 대한 전쟁 재개할 것을 역설. 이로써 캉프랑 조약 유명무실해지자 알폰소 3세가 아라곤 함대와 재차 레조 점령하고 칼라브리아 공격[1093] 5월이라고도. 트리폴리 '해방' 기념하며 시리아 각지에서 축하 행사 열림[1094] 1300년 3월까지로. 이후 다마스쿠스 상인들 아크레 왕래. 몽골 방해로 단절된 동방과의 무역 손실 메움[1095] 트리폴리 함락 소식에 에드워드 1세가 전쟁 중인 샤를과 알폰소에게 휴전 도달하고 새 십자군 준비할 것을 요청, 중재 나선 결과. 샤를, 가에타 공격 실패하고 오히려 봉쇄된 알폰소에게서 휴전 약속 얻어냄. 베네딕토 가에타니 (미래의 보니파시오 8세) 등을 포함한 샤를 진영의 교황 인사들이 합의 막으려 하나 실패. 다만 샤를은 시칠리아의 하이메와는 전쟁 이어감[1096]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나폴리 떠나 프랑스 귀환[1097] 순수한 발라르두앵 혈통의 후계자 원하는 아카이아 귀족들의 요구대로 남편감 물색하던 이사벨라가 플랑드르 출신인 플로랭 (플로리스)을 고른 것. 부친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당일 공작위를 부부에게 넘긴 것. 다만 공국은 여전히 나폴리 왕국의 강한 영향력 하에 놓임[1098] 1290년 겨울 ~ 1291년 봄 사이를 작전 시일로 정함. 십자군이 아크레 당도하는 즉시 이란에서 출정. 십자군에 2 ~ 3만 군마 제공. 이집트 정복 성사되면 예루살렘 하사[1099]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칠리아 지휘관 하인리히 폰 불랜트에게 지휘권 넘기고 떠나버려 오히려 사기 저하됨. 기사단장은 콘라트 폰 포이트반겐이 이음 / 교황 니콜라오 4세, 유럽 군주들에게 서신 보내 아크레 대한 군사 지원 요청하지만 확답을 얻지 못하자 쿠빌라이 칸에게 군사 지원 청하고자 사절 특사 지오반니 디 몬테코르비노 파견 / 가을. 에드워드의 사부아 출신 부관 오도 드 그랑디종, 기사 60명과 아크레 당도 / 킵차크 칸국군이 베사라비아 침공 / 트리폴리의 태후 시빌라 사망 / 델리 술탄국에서 노예 왕조가 킬지 왕조로 교체됨[1100] 1월 혹은 4월이라고도. 국왕과 주요 제후들 중엔 시칠리아만 응함, 보병 1만과 전함 30척 파견 제의. (다만 시칠리아의 만종 이어지며 대폭 축소됨) 그외에 롬바르드, 토스카나 지방의 소작농들과 도시 실업자들 호응[1101] 열정적이나 부실히 무장된 (토스카나, 롬바르디아 일대 소작농과 도시의 실업자 등 급조된) 십자군 자원자들이 교황의 부름에 응답하여 베네치아로 모여듦. 트리폴리의 망명 주교의 지휘 하에 장 드 그라이와 루 드 쉴리 등이 지원. 아크레와 그곳의 베네치아 공동체에 경각심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제 로렌초 티에폴로의 아들 니콜로 티에폴로 휘하 20척 대여해줌. 니콜로, 장 드 그라이, 루 드 쉴리는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각각 금화 1천닢씩 지원받음. 부활절 즈음 베네치아 출항, (교황청과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도움에 나선) 시칠리아의 하이메가 파견한 5척 함대와 합류함[1102] 모든 십자군과 (필요하다면?) 예루살렘 왕국이 협정 위배할 경우 그들에 대해서도 대해 술탄 지원하기로. 무역 자유화에 시칠리아도 포함된 것으로. 다만 체결 전에 시칠리아 함대 출항[1103] 프랑스 왕가 간의 협정. 그 직전에 샤를 드 발루아는 필리프 4세로부터 샤를 2세의 영지였던 앙주 & 마인 백작령 양도받음. 그리고 교황이 승인하자 아라곤 주장 철회한 것. 필리프 4세 역시 교황의 동의 하에 아라곤 측과 평화 협상, 동시에 교황청에 시칠리아 대한 전비로 금화 2만닢 지원[1104] 빚 일부 탕감, 29실링 지원, 이탈리아 상인들로부터 3천 마르크 대출 주선. 그외에 리치몬드 교구의 첫 과일과 채널 제도의 수입 하사. 1291년 십자군 세금 중 2천 파운드 할당 보장[1105] 1월까지 함대 준비되었고 부활절 무렵 아크레 당도했다고도. 다만 도착 직후 니콜로 티에폴로와 시칠리아 함대는 귀환. 전쟁 없자 상당수 귀환, 열정적이고 여비 없는 하위 계층이 주로 남음[1106] 새로 당도한 십자군은 의지 넘치지만 공세 나설 군사적 여건이 되지 못하였고 습격으로 맘루크 측에 도발할까 우려되어 시내에 수용됨. 그러나 무슬림 상인이 기독교도 여성을 유혹했다는 풍문으로 (혹은 부인이 무슬림 남성과 간통 중인 것을 본 남편이 둘 모두를 죽였다고도) 촉발된 '취중' 폭동에 앞장서 (물건 팔러 온) 아크레 부근 소작농 출신인 무슬림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 수염 기른 이들은 종교 막론하고 베어넘김, 무슬림들처럼 수염 기른 현지 기독교도들 역시 희생됨. 아크레 당국은 몇몇 무슬림들을 구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나 칼라운의 불만에 직면하게 됨.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새로 당도한 십자군이 도착하고 몇시간 되지 않아 시내 다마스쿠스 상인들 습격, 물건 훔치고 살해함. 그럼에도 칼라운은 휴전 유지했으나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자 칼라운이 휴전 깨졌다고 여긴 것이라고도. 상인 19명 희생되었다고도, 흑해 일대 출신 노예 팔러 카이로 향하던 무슬림 상단 습격한 것이라고도. 아크레 주변 농촌 약탈하고 현지 무슬림 농민들 학살한 것이라고도[1107]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피 묻은 옷을 카이로에 보냄. 칼라운, 항의하며 살해자들 엄벌 요청. 사절 파견해 체포된 가담자 전원 인도 요구함. 다만 도시 감옥의 수감자들 중 추려질 수 없자 비상 회의 열어 논의. 모든 수감자들을 넘겨주자는 주장이 여론의 반대로 저지되었고 결국 아무도 인도되지 않음, 맘루크 사절단은 빈 손으로 돌아감. 혹은 아크레 당국이 범법자들이 '외국 출신'이어서 그들의 사법권이 미치지 않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답변 보냈다고 함. (도시 내부인들도 통제 못하는 상황은 아크레의 약함을 더우 부각시켰을 뿐) 이에 칼라운은 휴전 깨진 것으로 간주, 아미르들 소집해 논의하나 충동적인 일이었다며 반대하는 다수의 의견에 외교 부서의 파스 앗 딘과 상의. 십자군 당도 두 달 전에 통보해야 한다는 조항 어겼다는 것을 찾아내 이를 기반으로 최후의 성전 선포, 정기적으로 행하던 가을 메카 순례도 포기. 우선 통신 업무 (무바쉬라트)의 비무슬림 해임 칙령 내리고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주둔군에게 카이사레아 방면으로 이동해 (겉으로는 아프리카 원정 목적이라며) 아크레 공격 위한 공성병기 주조 시작할 것을 지시. 트리폴리 때와 마찬가지로 아미르 바드르 앗 딘 벡타쉬 알 파크리가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에게 아크레가 원정 대상임을 알림, 기욤은 이를 아크레 정부에 알리나 그들은 불신. 그러자 기욤은 카이로에 사절단 파견, 칼라운은 그들에게 아크레 주민 당 1 시퀸 (베네치아 금화) 납부 대가로 전쟁 철회 수용하겠다고 말함. (인두세 느낌?) 기욤은 이 조건을 아크레 정부에 전달하나 그들은 (새로 당도한 십자군 믿고?) 기각. 오히려 기욤을 반역 혐의로 고발[1108] 3월이라고도. 스코틀랜드 제후들이 내전 피하고자 에드워드에게 중재 청함, 이에 에드워드는 십자군보다 스코틀랜드 문제에 더 집중[1109] 교황 니콜라오 4세, 필리프 4세, 샤를 2세, 샤를 드 발루아, 알폰소 3세, 시칠리아의 하이메,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 등이 대표단 파견. 중재 맡은 잉글랜드 측도 상주함 / 한편 아크레 근처 후닌 (샤텔 누프)의 아미르 순쿠르 알 마사흐는 아크레 주변 지나는 상인들 보호 위해 매일 출격하도록 명령됨, 전초전 모두 승리했다고 함.[1110] 9일 밤이라고도. 사망 장소는 마르자트 앗 틴이라고도. 이후 영묘 마련 사업으로 두 달간 매장되지 못함. 본래 장남이던 앗 살리흐 알리 다른 두 아들 중 막내 아흐마드는 칼릴 치세 도중 사망[1111] 전날 체포, 당시 그는 이집트 총독. 친히 고문 주관, 직접 때려 죽였다고도. 투란타이 측근인 후닌의 아미르 순쿠르 알 마사흐 역시 적과 내통 혐의로 감금. 이로써 아크레 원정 몇 달간 지연됨[1112] 아랍어로 '분노'를 의미함. 가을 무렵 칼라운은 아미르 샴스 앗 딘을 레바논의 와디 알 무랍빕 계곡으로 보내 10m까지 자라는 나무 벌목 지시, 엄청난 적설량으로 죽을 고비 넘기고 급히 도주. 다만 일부만 도착했음에도 바알벡에선 역대 최대 규모의 투석기 제작 성공, 분해하여 옮김[1113] 이후 키프로스로 향함, 니코시아의 티레의 성모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 보냄. 한편 베이루트 영주 에스키바는 앙리 2세와 아모리의 막내 동생 (후의 키프로스 대원수) 기와 결혼[1114] 20여년간 이어진 앙주-동로마 갈등 봉합하고 결혼동맹 맺기 위해. 하지만 샤를 2세와 로베르는 아카이아 공 플로렝에게 에피로스의 니키포로스와의 외교 관계 지속하도록 하고 자신의 삼남 필리프와 그의 딸 타마르 간의 결혼 제안됨 / 프란치스코회 수사 피덴치오 디 파도바가 성지 재정복에 대한 동기 부여 및 방책에 대해 집대성한 문학 작품 liber recuperationis terrae sanctae 완성해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헌정. 1266년 레반트 머물며 사파드 함락 목도한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지역의 상황 대한 조사 의뢰받음. 그는 맘루크 왕조 압박 위해 이집트 대한 해상 봉쇄 및 팔레스타인에서의 육상 원정을 위해 얼만큼의 군대가 필요할지와 지중해상 혹은 아나톨리아 통해 향하면 좋은지에 대해 조언. 하지만 헌정 직후 아크레 상실. / 봄. 제노바의 반디노, 우글리노 형제가 인도 향한 항해 나섬 / 전 맘루크 술탄 솔라미쉬, 콘스탄티노폴리스 망명지에서 사망[1115] 티레의 템플러에 의하면 사절단은 아크레 시민이자 아랍어 학자 필리프 밀레뵈프, 템플러 바르톨로메오 디 피사, 카탈루냐 인 로페 데 리나레즈, 비서 (서기 / 필경사) 조르주로 구성된 사절단 카이로 당도하나 편지와 선물 거부되고 감금됨. 로페는 1306년, 필리프는 1319년에야 석방됨. 한편 칼릴은 히슨 알 아크라드에 사절 파견해 그곳에서 만든 초거대 투석기 알 만수르 다마스쿠스로 옮기도록 함. 당시 십인대장이던 하마 왕자 아불 알 피다 역시 100개의 운반 짐들 중 하나 맡음. 눈비로 소들이 죽어 한달 걸림[1116] 전날 칼릴이 영묘에 돈 전달. 다음날 아침 쿠슈다쉬 바드르 앗 딘 바이다라와 알람 앗 딘 산자르 알 슈자이가 금을 쿠란 독경사 (하피즈)들에게 나눠줌[1117] 아이바크는 바이바르스 치세 초기의 원정 때부터 종군한 25년 경력의 설계자[1118] 19일이라고도. 브리뇰 조약이라고도. 교황 니콜라오 4세 주선으로 프랑스-아라곤, 아라곤-나폴리 휴전 체결됨. 샤를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이란 공식 직위 유지. 알폰소 3세, 숙부 하이메 2세에게 자신이 몰수했던 마요르카 왕국 돌려주기로. (다만 그해 사망하며 1295년에야 성사됨) 그후 알폰소는 교황청과의 화해 조건 논의 위해 로마 향함, 암묵적으로 동생 하이메의 시칠리아 포기. 이로써 샤를 2세는 재정복에 있어 좋은 위치에 놓임[1119] 초 혹은 말. 성밖 프랑크인들 성 안으로 피신. 나무 베어 전선 및 주둔지로 쓰일 땅 고름[1120] 희망차게 선포. 하지만 이후에 나타나듯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의 중재에 몰입[1121] 카라크의 아미르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 참전 지시 없었음에도 성전 종군 원하여 가자 당도해 칼릴의 허가 하에 참전[1122] 6일이라고도. 2km 두께로 아크레 감싸며 포진한 포위군은 시리아 역사상 최대 규모, 술탄의 막사 (디흘리즈)는 동남부 성벽 특사의 성탑에서 300m 떨어진 해발 30m의 텔 알 푸카르 (템플기사단 소유 포도 농장과 성탑 하나 있었음, 한세기 전 기 드 뤼지냥의 막사 있었던 곳)에 세워짐. 포위군은 민간인 자원자들까지 합쳐 6만 대군, (지하드 대한 열정으로 인한 자원자들이 정규 병력 상회했다고 함) 실제 투입된 병력은 2만명. 시리아 군대는 공성 포열과 함께 하마에서 해안 따라 아크레 방면 남하. 비전투원 민간인들은 배에 가득 실려 키프로스 향함. 베이루트, 시돈, 티레, 아틀리트 등의 수비대 차출된 것과 달리 티레의 제노바 공동체는 아크레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칼릴과 따로 조약 체결하고 아크레의 인원마저 철수시킴[1123] 동시에 포위군은 바리케이드와 장태 형태의 방어 도구를 이용해 해자 앞까지 전진. 수비대 측은 강력히 방비된 성문 열어둠[1124] 피사 인들이 건조한 투석기 탑재 가능한 선박 및 궁수, 보병들 태운 선박들이 항구 떠나 도시 우회하여 후방에 방비해두지 않은 하마 진영 공격. 동시에 성벽의 수비대 가담하여 양면 공격, 그때 파도로 수상 투석기가 부서지며 수비대 철수[1125] 장 드 그라이, 오도 드 그랑디종 이끔. 그리스의 불로 공성병기 불사르려는 목적으로 3백의 기사 & 보병과 생 라자르 문을 나서 성공적으로 기습하나 어둠 속에서 기사들이 막사 줄에 걸려 넘어짐. 1천의 맘루크 군이 반격 나서자 기사 18명의 전사자 (그 중 한명은 변소에 떨어져 살해됨) 남기고 철수, 당초 목표였던 공성 병기 파괴 실패했지만 보금품 등을 빼앗아가는데 성공. 동시에 기욤과 내통하던 아미르 알 파크리가 맡은 부분으로도 공격 이루어지나 술탄의 의심을 풀기 위해 알 파크리가 매복으로 반격해 20명의 포로 남기고 철수, 다만 며칠 후 알 파크리는 열이 난다는 핑계로 다마스쿠스로 철수함. 칼릴은 망신 초래한 아미르들 처벌[1126] 당일 그뭄이라 어두운 밤, 생 안톤 성문 통해 출격. 정보 누설 우려해 마지막까지 발설 금했음에도 맘루크 측이 불을 밝혀 쉽게 발각됨[1127] 성 금요일에 무슬림 포로들을 인간 방패 삼아 출격하기로 한 것을 성문 열어주는 자에게 파문 선고 위협하며 금함. 한편 블루아 백작 부인 성탑 부근에 갱도를 감지한 수비대 측이 대응 갱도를 파서 버팀목을 제거해 알레포 공병들 몰살시킴[1128] 이때 앙리 2세 역시 도주했다고도. 그럼에도 1만 2천의 보병, 8백의 기사 남음. 포위군은 포격과 땅굴 공격으로 약화된 지점의 해자 메움[1129] 의심 증폭된 칼릴은 다마스쿠스의 임시 총독에게 알 파크리 체포해 재산 압수하고 포위망으로 압송 지시. 이에 그와 친한 라긴이 밤을 틈타 짐 챙겨 떠남, 이를 포착한 아미르 알람 앗 딘 알 다와다리가 따라가 그에게 '무슬림의 대의'를 손상시키는 원인이 되지 말 것을 간청해 전선 복귀시킴. 다음날 칼릴은 라긴을 소환해 예복 하사하고 재신임. 하지만 3일 후 돌연 그를 체포해 사파드 성채로 압송/ 에드워드, 스코틀랜드 향함[1130] 기병 1백, 보병 2천이라고도. 병으로 파마구스타 출항 지연되었다가 니코시아 대주교와 함께 당도[1131] 방어 약해지고 사기 저하되자 앙리는 임시 휴전 청함, 이에 칼릴은 언덕의 본부에서 특사단 성탑 부근에 작은 막사로 옮김.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의 친척인 템플러 기욤 드 캉프랑과 기욤 드 빌리에가 방문, 왜 휴전 어겼는지와 (충족될만한) 도시 대한 요구 사항 물어봄. 이에 칼릴은 자신이 관심있을 유일한 사절은 도시의 열쇠를 지닌 이들이라 답변, 사절단은 주민들이 항복하는 자는 누구든 배신자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함. 칼릴은 다시 한때 자신처럼 어린 군주인 앙리의 명목으로 관용을 베풀어 도시의 석조 부분만 넘기라며 재산 챙겨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 참모들 반발하고 소식 접한 자원자들 역시 종교적 열정과 약탈물 대한 욕심으로 '순교자의 무덤에 있는 술탄 (칼라운)은 저주받은 자들과는 합의 이르지 않을 것'이라며 포위 지속 외침. 한편 사절단은 '바다 건너 사람들'이 자신들을 배신자로 여길 것이기에 그럴 수 없다고 답변, 이에 술탄은 더 제안할 것이 없으니 물러갈 것을 명령. 평화적으로 협상 끝날 무렵 벽의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이 근처에 떨어짐. 죽음을 맞을뻔한 술탄은 격노, 그들 역시 함께 있었음으로 무고하다는 아미르 산자르 알 슈자이의 설득으로 사절단 죽이려는 충동 억제, 돌려보냄[1132] 성탑에 불지르고 내벽과 이어주는 통로 파괴함. 이후 슈자이 휘하 병력이 앙리 왕 성탑 대해 갱도 작업 들어감[1133] 수비대 측의 대응 땅굴에 의해 무너졌다고도. 맘루크 군은 밤새 흙주머니 운반해 쌓아 해자 메우고 무너진 성탑과 같은 높이로 쌓아 진입로 만듦. 다만 생 안통 성벽 대한 공격은 성탑에서 밀려난 키프로스 병력과 템플러들이 격퇴. 키프로스 병력은 해질 무렵 튜튼기사단과 교대, 8시간 간격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그들은 나타나지 않음[1134] (더이상 라긴의 지휘받지 않는) 시리아 병력이 대대적으로 해자 메우고 진격해 백병전, 양측 모두 다수 전사자 낸 끝에 수비대가 성벽 버리고 '석궁의 사정거리'만큼 물러남. 다만 성문 자체는 굳게 닫힌 상태. 다수의 구호기사단 도움 거부, 수비대 온전한 상태로 도주하는 상황에서 마티외가 일단의 기사들과 나서 가장 용감해 보이는 아미르를 렌스로 쓰러뜨리고 돌격하자 맘루크 군 물러남. 이에 사기 회복한 보병들이 기사들과 집결해 반격 나서 시내의 맘루크 군 추격, 저녁 되자 칼릴은 후퇴 나팔로 전부 철수시킴. 수비대는 승리의 외침과 함께 성문을 나서 맘루크 측 부상병 사살하고 수비측 부상병 구해 귀환. 한편 앙리 왕 성탑은 맘루크 군이 흙 주머니 쌓아 점령하고 깃발 게양. 템플러들은 성탑에 투석기 쏘아 일부 적군 죽이나 몰아내진 못함. 그날 밤 수비대는 성탑 뒤편을 감싸는 임시 방벽 세우고 석궁과 궁병 배치함. 밤새 주민들은 성벽 보강 도움. 앙리 왕 성탑 남쪽의 저주받은 성탑 방어 구심점[1135] 에드워드가 세운 것. 블루아 백작 부인 성탑 역시 포기된 상황. 아침 무렵 외벽의 돌파구는 60여 미터에 이름. 동트기 한시간 전에 장교, 지휘관들 및 종교 지도자들이 구호기사단 병원에 모여 방책 논의. 몸 성한 수비대는 최대 7천에 불과. 대주교 니콜로가 두 손들어 좌중 진정시키곤 그리스도 이름으로 용기와 저항의 설교. 함락 시에 대규모 강간과 노예화의 가능성 강조, 주의 자비로 구원되어 영생을 얻는 희망 하에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라는 것으로 마무리. 주민들과 수비대 서로 격려하며 일전 준비. 칼릴은 모든 자재 동원해 내성과 외성 사이의 해자 메우도록 지시. 흙, 돌, 목재뿐만 아니라 동물과 전사자들의 시체까지 투하되어 엄청난 악취 유발. 한편 물라들이 종교적 열정 돋구고 열정적 예배, 칼릴은 최후의 공세 시에 용기 보이는 자에 대하 금전 보상 약속. 아크레 주민들 역시 시가전 대비해 바리케이드 세우고 옥상에 돌 준비하는 등 각지 방어 준비. 노약자 대피시키려 승선시켰으나 악천후로 파도 높게 일자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선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감[1136] 칼릴 본인도 말 타고 독려 나섬. 동틀 무렵 낙타 3백 마리가 짊어진 드럼과 나팔의 신호와 함께 성 안톤 성문부터 동남쪽 끝의 대주교 성탑에 걸쳐 전면적인 공세 개시됨. 죽기를 각오한 선발대와 함께 강요 혹은 선발된 현지 기독교도들이 인간 방패로 출정 (도시 함락되지 않은 채로 살아남으면 세금 2배로 증세될 것이고 싸우다 죽으면 후손들에게 영원히 세금 면제해 주겠다는 조건 내검) 자살 부대 뒤에는 큰 나무 방패 든 보병 배치, 그 뒤에는 횃불과 기름 주전자 든 그리스의 불 투척부대, 그 뒤엔 궁수들, 그 뒤엔 가죽 방패와 짧은 검을 든 근접 전투 부대가 사다리와 파성추 든 이들과 함께 배치됨. 그 외에 방패부대와 수비대에 타격을 줄 비무장 자원자들로 구성된 새총 부대. 그 뒤엔 투석기들이 폭격 이어감. 총공격 통해 십자군 병력 분산시킨 칼릴은 비밀리에 양익의 병력을 중앙의 돌파구에 집중시킴. 나팔과 함께 집중 공격 개시, 그리스의 불로 인한 화염으로 서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한 연기 속에서 싸우던 수비대는 발사무기 마저 동이나자 수적으로 압도되기 시작. 방패부대-화염 투척부대-투창 부대와 궁수들이 저주받은 탑의 목조 방어시설을 집중 공격해 결국 오전 9시경 그곳의 키프로스-프랑스 병력은 템플-구호기사단이 수비 규합하던 생 안톤 성문으로 철수. 맘루크 군대 중 절반은 피사 인들이 설치한 산 로마노 성당의 투석기 향하였고 나머지는 성벽 따라 생 안톤 성문 향함. 성문이 위중해지자 템플-구호기사단장이 반격 나서나 실패. 지쳐 본부 성채에서 쉬고 있던 템플기사단장 기욤 드 보주는 갑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로 12명의 기사들과 출정, 구호기사단장 장 드 빌리에 불러 그는 단원들과 키프로스 기사들 및 현지 기사와 보병 이끌고 합류. 하지만 반격 이끌던 기욤은 겨드랑이에 투창이 박히는 치명상을 입고 철수, 도중 피사 인들이 떠나지 말라고 간청하자 그는 '상처를 보라'며 더이상 할 수 없고 죽어간다고 답변하곤 쓰러짐. 가솔들이 큰 방패에 눕혀 본부 성채로 옮겨져 전투 지속된다는 말 듣고 사망 (25일 사망이라고도)[1137] 구호기사단 원수 마티외 드 클레르몽은 세차례에 걸쳐 맘루크 군의 진격 격퇴하곤 저주받은 성탑 수복 나섰으나 실패, 퇴각 도중 기사단장 장이 바리케이드에 걸린 랜스에 찔려 선박으로 옮겨짐. 기사단장들 물러간 후 맘루크 군이 성문에 불을 지르고 기병들이 선두로 돌파. 산 로마노 성당의 피사 측 투석기에 불지름. 성 니콜라스 성당의 템플러, 산 레오나르도 성당의 잉글랜드 측 성 토마스 기사단 전멸. 한편 구호/템플기사단이 중앙부로 이동하자 외곽 몽무사르 방어선 인원 부족해져 하마 군대의 공격에 버티지 못함. 홀로 방어 떠맡은 성 라자로 나환자 기사단 전멸하며 북쪽으로도 맘루크 군 시내 진입. 동남쪽 성벽 방어하던 장 드 그라이와 오도 드 그랑디종 역시 저주받은 성탑 장악한 맘루크 군이 성벽 따라 생 니콜 성문 장악하러 몰려오자 역시 철수. 이로써 항구마저 위험해지자 배에 타려는 이들이 바다로 뛰어내려 다수 사망. 맘루크 보병들은 방패병 앞세워 시내 진입, 끊임없이 투창과 그리스의 불 던지며 진군. 바리케이드 방어선 쉽게 붕괴됨, 시민들 항구 향해 도주. 마티외는 기사단장 피신시킨 후 소수의 템플러 포함한 동료 기사들과 제노바 구역의 광장으로 향하여 최후의 돌격 감행하고 전사 (돌격 끝에 말이 지쳐 길거리에 서자 곧 찔려 죽었고 그 역시 쓰러져 맘루크 기병들의 창에 찔려 사망)[1138] 맘루크 기병대는 해안의 철 울타리를 뚫고 후방 진입. 장 드 그라이와 오도 드 그랑디종이 맞섰으나 전자가 부상당하고 격파됨. 앙리 2세는 구호기사단장을 방문해 방책 논의하지만 전세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곤 각자의 갤리선에 승선하여 키프로스로 탈출, 후에 비겁함으로 비난받음. 항구에는 베네치아/피사 선박 외에 교황청과 키프로스 소유 6척 정박, 2척의 제노바 선박이 막 무역을 위해 당도. 제독 안드레아 펠라우는 악천후에도 최대한 많은 피난민 구출, (대부분 평민들) 제노바 악명 일부 해소. 템플기사단은 단 한 척이지만 당대 가장 큰 함선이라 불린 팔코 보유, 최소 1500명 승선 가능. (선장이던?) 템플러 루지에로 데 플로르는 다수의 부인들과 처녀들 구함. 다만 승선시켜주는 대가로 보물을 갈취해 사리사욕을 채웠고 빈자는 거부했다고 전해짐. 따라서 이후 기사단에서 제명되어 후에 카탈루냐 용병단 이끔. 사람들은 고깃배라도 차지하려 싸움, 다수의 여인들이 아이 끼고 배를 향해 수영하다가 익사하는 등 바다는 피빛으로 물듬. 한편 사기 진작시키려 다니다가 베네치아 상선으로 '대피당한' 대주교 니콜로는 더 많은 주민들 태우려다가 침몰해 익사. 혹은 혼란 통에 선원의 팔을 놓쳐 익사했다고도. 아이들이 군중과 말에 밟혀 죽는 등 참극 이어지자 무슬림들 역시 눈물 흘렸다고 함. 동시에 자원병들까지 가세한 점령군 간의 포로 쟁탈전 벌어짐, 성당과 수도원 약탈의 표적. 도주 거부한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은 기도문 읊으며, 수녀들은 찬송가 부르다 학살됨. 프란치스코 수사들 중엔 5명만 생존, 영웅적 죽음 일화 회자됨. 혼란에 빠진 도시에서 악천후로 배 출항 어려움, 급히 키프로스로 도주한 오도 휘하 잉글랜드 기사들은 옷과 말 등까지 본국에 요청해야 했음. 이후 오도는 아르메니아에서 현지 제후들과 만나고 베네치아-제노바 평화 주선하다가 1294년에야 잉글랜드 귀환. 그날 밤까지 맘루크 군이 기사단 및 피사/베네치아 구역 성탑 등 몇몇 거점 제외한 도시 장악, 주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거나 노예 전락[1139] 템플기사단 성채는 4만 인구 중 무려 1만이 넘는 인원 수용, 떠나가는 선박들 보며 대성통곡. 한편 내부에 고립된 성채들 결국 항복, 주요 인사들은 포로가 되었으나 아부 알 피다에 의하면 다수의 장정들은 100년 전 리처드의 포로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었다고. 다만 입구부터 7미터 두께의 성탑이 세워졌고 모서리마다 당나귀만한 (앞 발을 들고 있는) 사자 상이 있는 성탑이 있었으며 (4개 사자상 세우는데 1500 베잔트 들었다고) 피사 구역 향하는 거리에도 성탑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함. (뻗어있는 생 안느 거리의 궁전은 기사단장 거처) 바다 방면에도 살라딘이 세운 성탑 존재. (파도가 성탑에 부딪힘) 바다에 접해 있어 포위 불가능, 다만 바위 해안이라 해상 탈출은 안전 보장 없인 불가능. 원수 피에르 드 세브레가 (키프로스로의) 안전 철수 대가의 항복 제안하자 칼릴이 수용 (비무장 상태로, 각자 옷 한벌만 휴대), 보증으로 성탑에 백기 내걸고 사이프 앗 딘 아크부가 알 만수리 휘하 4백여 맘루크 병력이 철수 감독하기 위해 성채에 입성. 하지만 이들이 민간인들을 포로로 잡고 여자와 아이들을 탐하고 사이프 앗 딘이 통제하지 못하자 분노한 템플러들이 그들을 학살하고 백기 던져버림. (소수 생존) 성문 잠그고 사체를 내검. 피에르는 임시 기사단장 티보 고딘에게 밤을 틈타 작은 배에 올라 템플기사단 보물 챙겨 시돈 향하게 함. 연대기 작가 티레의 템플러도 함께[1140] 칼릴은 분노 감추며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며 자신은 기독교도들에 대한 악의 없고 기존 약속대로 안전 철수 보장. (무슬림측 기록에는 전날의 학살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상황이던 기사단 측이 협상 재차 청했다고함) 이에 피에르가 최종 철수에 앞서 조건 재논의를 위해 몇몇 기사들과 성채를 나왔다가 붙잡혀 복수로 성채 앞에서 처형됨 (아픈 기사들 제외하고 비무장인원 포함 2천여명 학살되고 노약자는 노예되었다고도) 그러자 수비대는 성문을 닫아걸고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 5명의 맘루크 포로 성탑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최후의 항전 준비[1141] 땅굴에 매설된 지뢰에 불을 붙여 폭발, 육지에 접한 성채 무너지기 시작. 이후 마지막 남은 성탑에도 모든 방향에서 갱도 작업 시작됨.[1142] 2백여 맘루크 군이 진입해 결전 벌이던 도중 천장이 무너지며 그중 절반 전사. (무슬림측 기록에 의하면 다수의 맘루크 병사들이 집입하자 갱도의 버팀목이 부서져 무너진 것이라고도) 혹은 마지막 남은 성채의 생존자들이 갱도 버팀목에 불 붙이면 되는 상황에 이르르자 더이상의 저항 무의미하다 여겨 항복하거나 사로잡혀 몸값 받아낼 만한 인사들 제외한 남자 대부분은 처형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고도. 사건 불과 몇 달 후에 기록된 에르푸르트의 성 피터 수도원의 연대기에 의하면 성탑으로 피신한 생존자들이 보급품 부족하고 원군 없는 상황에서 헌신적인 기도 후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맡기며 맹렬히 맘루크 군에게 돌격하여 다수를 쓰러뜨리고 전멸했다고 함. 이후 맘루크 군이 약탈을 위해 성탑 진입하자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탑이 무너지며 모두 죽었다고. 함락 후 아크레는 새 십자군 원정군이 당도하더라도 무용지물이도록 파괴됨, 다만 상당수 건축물과 성벽 남음[1143] Turcopolier, 30여년간 현지 전쟁 경험자. 기욤 사망 직후부터 사실상 이끔, 아크레 탈출 지휘한 것으로 입지 다짐[1144] 3일이라고도. 오전에 거행되었음에도 모두 촛불 들고 나와 환영. 사슬에 묶인 포로들과 궁전까지 행진. 무슬림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도들도 거리 나와 환영[1145] 알폰소의 요구대로 동생 페데리코에게 시칠리아 넘기지 않고 단지 그를 총독으로 봉하는데 그침, 앙주 & 아라곤-시칠리아 간의 평화 논의 무산됨. 다만 두 나라의 합병은 아라곤 대한 프랑스와 교황청의 군사적 압력으로 힘듦, 교황청과 샤를 2세가 시칠리아-아라곤 연맹 반대하여 하이메와의 전쟁 재개됨. 다만 120여년 후 성사됨[1146] 그들의 병력으로 긴 성벽 감당할 수 없어 시내 포기하고 항구에서 80m 떨어진 해상 성채로 후퇴, 포위군은 연결 통로 건설 착수[1147] 구호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한편 튜튼기사단은 베네치아로 본부 옮겼다가 곧 프러시아로 옮기는 것 고려. 구호기사단장 장은 성지 방어를 위해 '순교'하지 않고 아크레 떠난 것에 대해 비난받음. 교황은 더이상이 구호-템플기사단 간의 대립 방지하기 위해 두 기사단의 합병 제안함[1148] 192년만에. 같은날 칼릴이 타르투스 입성했다고도. 타르투스 근해의 루아드 섬이 레반트 해안의 유일한 십자군 소유로 남음[1149] 뜯겨진 문은 모스크 건설 자재로 쓰임. 이때 필리프 밀레뵈프의 사절단 석방되었다고도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774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774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