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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16:58:53

존 위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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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파일:Wycliffe_by_Kirby.jpg
출생 미상[1]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힙스웰
사망 1384년 12월 31일[2]
잉글랜드 왕국 러터워스[3]
국적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칼리지
종교 기독교
직업 철학자, 신학자
축일 12월 31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롤라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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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번 보십시오. 고위 성직자들이 세상의 사치와 악덕에 얼마나 지독하게 물들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눈에 그들이 얼마나 부자로 비치게 되었는지.

잉글랜드의 철학자, 신학자로 종교개혁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생전에는 탄압을 받았고, 사후에는 부관참시되어 화형을 당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얀 후스, 신성 로마 제국(독일) 작센 선제후국마르틴 루터, 스위스츠빙글리가 차례로 나타나며 그의 행적과 주장에 대해여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마르틴 루터에 150년이나 앞선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성공회에선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12월 31일.

2. 생애

1320년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지방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생년은 현재 알 수 없다.

1340년대 잉글랜드에 흑사병이 돌아서 잠시 학업을 중단한 것을 제외하면 어린 시절부터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계속해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354년엔 머튼 대학교의 강사로 부임, 1360~1361년경엔 베일리얼 대학교 교수로 사역했다. 1365~1367년경엔 옥스퍼드의 켄터베리홀 교수를 지냈다.

1377년경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자 흑태자라 불린 장남 에드워드는 1년 전에 이미 사망했기에 에드워드 3세의 장손자이며, 흑태자의 외동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다. 그런데 리처드 2세가 10살에 불과한 미성년이라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며 리처드 2세의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곤트의 존)이 섭정을 맡았다. 섭정은 잉글랜드 학계에서 위클리프의 명망을 듣고 궁정으로 초빙했다. 당시 서유럽 정세는 교황, 그리고 교황청가톨릭양분된 상태라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었고 유럽 각 나라들이 서로 양측으로 갈라서서 편먹고 이래저래 외교전 중이었던 대혼란 상황이었다.

잉글랜드는 과거 아비뇽 교황이 유일한 교황이며 정통성이 있던 시절에도 백년전쟁프랑스 왕국 편만 드는 꼭두각시로 보고 대놓고 무시했으며 한때 전황이 잉글랜드에 유리할 땐 아비뇽 교황청 앞에 가서 대포를 들이대고 무력시위로 교황을 위협하거나 돈을 뜯을 정도로 아비뇽 교황과는 사이가 험악했다.

그런데 아비뇽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복귀하고 나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동안 위세를 누린 프랑스인 추기경들을 숙청하자 친프랑스 추기경들은 로마에서 탈출하여 자체적으로 교황을 뽑았고 이전 교황청 조직이 있던 아비뇽에서 교황을 옹립했다. 이로 인해 전 유럽이 국익에 따라 한쪽은 로마 편, 한쪽은 아비뇽 편으로 갈라졌는데 당연히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미는 아비뇽 교황을 거절하고 로마의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이 당시에 위클리프는 이런 유럽 상황에서 외교관과 논쟁가로 궁정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때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위클리프는 아비뇽과 로마 교황청의 이전투구 모습을 보면서 교회와 세속의 합법적 통치자들이 통치권을 어떻게 행사할 때 정당성을 제시했는데, '통치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섬김받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배자의 이득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득을 추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 통치자라면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고 교회권력이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 권력을 추구하고 확장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다.' 라고 주장했다.

보통 때라면 이런 생각은 코렁탕 몇 사발을 먹어도 부족했을 테지만, 당시 잉글랜드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이젠 양쪽에서 세금만 뜯어가려는 두 교황청(아비뇽, 로마)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잉글랜드 민중들뿐만 아니라 통치자와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이미 수준 이하의 병림픽을 벌이는 두 교황과 그 조직들에 대해서 도덕적인 비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두 교황청이 성경해석 권한을 독점하며 서로를 항해, 또 역사상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까지 이단 타령을 하는 걸 보고 '성경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교황보다 위에 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표준이며 교황의 권위나 제도는 성경상 전혀 근거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성경을 민중들에게 나눠주려 성경 번역은 시도했으나 불가타 직역 수준이었고 이마저도 살아생전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위클리프가 탄핵을 받은 것은 1381년경이었다. 위클리프는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가톨릭의 성체성사에 대한 교리로 확정한 화체설을 비판했는데 이는 그의 지지자였던 잉글랜드 권력자와 왕족, 귀족계층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위클리프는 성변화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실체적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을 미신을 조장하며, 성육신 원칙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에 따르면 화체설은 고대의 이단 가현설과 대동소이하다. 가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으로 오셨음을 부인한다.[4] 화체설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참 물질로 된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는 것을 부인한다. 축사가 끝난 후에도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다.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지만 빵의 본질은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비적 형태로 성찬에 임재하므로 빵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교 학자들도 의문을 제기했다.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옥스퍼드에서 1381년경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고 런던에서 열린 지역공의회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위클리프는 궁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은퇴하여 조용히 저술에만 집중했다. 생활고 때문에 왕실에서 하사한 전택이나 개인 소유의 교구를 팔아치워야 했다.[5]

1384년 병으로 사망했는데 이후 리처드 2세가 쫓겨나고, 섭정이었던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가 왕위를 찬탈했으며, 그의 아들인 헨리 5세 시절 위클리프를 따르는 무리들은 화체설을 부인했기에 이단으로 몰려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후 위클리프를 찬성하고 따르는 무리들은 당시 롤라드파(Lollards)로 불렸다. 결국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요한 23세[6]가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얀 후스를 이단으로 선고했고, 그에게 영향을 준 위클리프도 부관참시한 후 그의 저작들과 함께 태워졌다. 이단은 거룩한 땅에 묻혀선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3. 평가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릴만한데 100여년후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인 성서중시, 전통주의 반대, 성인 성유물 성상 숭배 반대, 죽은 자에 대한 미사 폐지 등 주장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 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 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일찍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무렵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대표적 학자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290–1349)의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과는 다른 길이었다. 일찍부터 잉글랜드는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같은 학자들은 파리 대학교스콜라주의, 즉 아퀴나스의 신학에 강한 비판자였는데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의 방식인 방법론(via moderna)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 칭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중세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세신학과 교회를 비판했고 종교개혁의 모토가 스콜라 철학에 오염된 신학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였는걸 감안하면 절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위클리프는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 안나[7]였는데 왕비를 따라 잉글랜드에 건너온 보헤미아인들이 위클리프의 학문과 신학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얀 후스에게도 이어진다.

4. 롤라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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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에 따라 1330, 1324 등으로 엇갈린다.[2] #[3] Lutterworth[4] 가현설은 교부시대 벌써 이단으로 선고되었는데 실제로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이 아니라며,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았고 바꿔치기나 환영(?)을 통해 그렇게 보여진 것이라 주장했다.[5] 당시 교구매매, 성직매매(simony)는 만연했으며 매우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교회개혁을 주창한 위클리프까지도 성직을 매매했을 지경이었다.[6]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로마와 아비뇽 교황을 퇴위시키고 선출한 교황. 1413년 독일왕 지기스문트[8]에게 공의회를 요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으나 정작 요한 23세가 폐위당했다. 당시로 보면 정통성에선 앞섰으나 행실에 문제가 심했기에 황제도 요한 23세를 버렸다.[7] 지기스문트의 누나로 카를 4세의 딸.


[8] 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한 것은 1433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