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 루이 14세의 일생을 정리한 문서이다.2. 어린 시절과 프롱드의 난
어린 시절 | 10살 때의 루이 14세 |
제우스로 분장한 루이 | 1654년의 루이[6] |
프롱드 중에 2차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파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고, 영향을 받은 지역민의 25%가 죽었다.[7] 하필 소빙기가 가장 심할 때 터진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대타격을 입었고 1652년부터 스페인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잉글랜드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간신히 플랑드르에서 우세를 점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에게 밀리자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전쟁에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고 결국 피레네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1659년 피레네 조약은 과거에는 "프랑스의 패권이 시작되고, 스페인의 몰락을 보여준다."고 여겨졌지만 현재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프롱드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고 국가가 초토화되었다. 이것은 루이 14세의 친정 이전까지 왕의 권위를 비참할 정도로 추락시켰다.
3. 친정 초반, 여러 개혁을 실시하다.
1661년의 루이 14세 |
4. 자연국경설과 그에 잇따른 전쟁
불란 전쟁 중 마스트리흐트 공성전을 지휘하는 루이 14세. 아담 프란츠 판데르묄렌 작, 1675년 |
루이 14세 시대 동안 그가 확장한 영토. 연도는 획득한 해이다. |
흔히 루이 14세가 고대 갈리아의 영토와 같은 자연국경을 프랑스의 국경으로 삼고자 공격적인 팽창을 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이론은 19세기에 알베르 소렐이 주장한 이론이고,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학자들은 루이 14세의 국경 정책이 국경을 따라 방어하며 오갈 수 있는 지역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즉, 루이 14세 시절의 자연국경이라는 용어는 필립스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가 있는 라인강이나 포 강의 카살레처럼 강 건너편에 대한 영토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를 암시하는 것으로 봐야 하며 오히려 라인강을 통째로 프랑스 국경으로 삼자는 자연국경설은 오히려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존 린(John Lynn)은 루이 14세가 주도한 다섯 번의 전쟁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외정책 전반이 당시 국제 정치 체제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즉, 갈리아 국경 복원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루이 14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참조]
1667년 ~ 1668년 귀속 전쟁: 루이 14세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진격하여 플랑드르 대부분을 석권하는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프랑스의 성과에 놀란 네덜란드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스웨덴과 함께 삼중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하고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섭정이었던 카를로스의 어머니 마리아나가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프랑스를 고립시켰다[13]. 이에 루이는 플랑드르의 12개 도시만 차지한다는 엑스라샤펠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동맹국이었던 네덜란드의 배신에 격노한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응징하기로 한다.
1672년 ~ 1678년 네덜란드 전쟁과 1683년 ~ 1684년의 재결합 전쟁: 1670년에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점령했고 잉글랜드와 스웨덴을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고 오히려 프랑스의 동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루부아의 군제개혁으로 증가한 13만 병사를 이끌고 튀렌 원수의 작전에 따라 네덜란드를 기습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수문이 열리고 프랑스 해군이 패배하면서 암스테르담으로의 진격이 실패하고 만다. 이때 네덜란드는 프랑스에게 브라반트와 마스트리히트를 양도하겠다고 했으나 루이 14세는 그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참에 아예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고 이에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결국 오라녜 공 빌럼 3세가 정권을 잡고 스페인-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보급선을 끊어버리자 프랑스는 네덜란드 정복을 포기하고 프랑슈콩테, 알자스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1674년부터 프랑스는 많은 플랑드르 영토와 프랑슈콩테 전역을 확보했고 3년 후 1677년에는 카셀에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대승을 거둔 덕분에 프랑스는 네덜란드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플랑드르 영토 대다수와 프랑슈콩테 합병을 확정지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1678년 네이메헨 조약이 프랑스가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다고 판단하여 점령지에 재결합 회의소를 설치하여 주변지역을 추가로 합병했는데 그 일환으로 제국도시 스트라스부르를 강제로 합병하자 신성 로마 제국 전역이 프랑스를 적대했고 여기에 프랑스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부추긴 것 때문에 프랑스는 전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었다. 1684년 레겐스부르크 휴전으로 프랑스는 "재결합" 영토와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점령을 인정받았으나 이제 프랑스의 동맹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만 남게 되었다.
1676년 ~ 1688년 보방의 요새화 정책: 프랑스는 오랫동안 수도 파리가 국경 가까이에 있어 전쟁시 함락될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파리를 요새화할 만큼의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는데 위의 네덜란드 전쟁과 재결합 전쟁에서 충분한 영토를 확보하자 루이 14세는 보방에게 프랑스 국경을 철저하게 요새화시킬 것을 명령했다. 보방은 기대에 부응하여 프랑스 국경을 철의 국경으로 만들었다.
1688년 ~ 1697년의 9년 전쟁과 스페인 분할 협상: 1688년부터 오스만 제국은 본격적으로 신성동맹에 그 세력이 밀리기 시작하여 가을에는 벨그라드까지 상실했다. 이에 불안해진 루이 14세와 루부아 후작[14]은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에게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조약"으로 격상할 것을 요청했으나 당연히 거부당했다. 한편 오스만 주재 프랑스 대사 피에르 지라르댕이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자 다급해진 루이 14세는 팔츠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오스만 제국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전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는 결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상태였고 국경을 요새화시켜두었기 때문에 전 유럽을 상대로 존버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전 유럽을 상대로 한 9년 간의 전쟁때문에 경제가 괴사 상태에 이르자 루이 14세는 결국 로렌, 룩셈부르크와 재결합 영토 대부분을 반환한다는 레이스베이크 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오스만의 붕괴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경제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고 이 사실을 잘 알던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죽음이 임박하자 1698년 헤이그 조약에서 그랑 도팽 루이에게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떼주고 나머지 지역은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차지한다는데 동의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급사하자 2년 후 1700년 런던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그랑 도팽 루이에게 할당된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공한다는 조약에 다시 서명했다. 카를로스 2세는 이 런던 조약에 불만을 품었으나 카스티야 귀족들이 강력하게 부르봉 왕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데다가 스페인 분할을 막기 위해 전 유럽을 상대로 버틴 프랑스라면 스페인을 지켜줄 수 있다고 설득하자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고 만일 스페인 영토를 분할할 시 왕위가 취소된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1700년 ~ 1714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 내용을 들은 루이 14세는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만일 유언장을 받아들이면 당연히 전쟁이 날 것이고 이미 경제가 약해진 프랑스로서는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처음에는 유언장을 거부하기로 했으나 평소에는 무기력하던 그랑 도팽 루이가 자기 아들을 위해 유언장 수락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결국 유언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부르봉 왕조와 아들, 손자를 위한 것일 뿐 프랑스의 영토확장 야심은 전혀 없다고 전 유럽에 알렸으나 그런 말과 달리 프랑스가 스페인을 속국처럼 부리자 당연히 루이 14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잉글랜드-네덜란드는 이미 전쟁을 선포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프랑스는 또 전쟁에 휘말렸다. 루이 14세는 프랑스가 9년 전쟁 시기 전 유럽을 상대로 버텼고 이번에는 스페인-바이에른도 동맹인데다가 방어전이어서 프랑스가 도박을 벌일 만 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너무 허약해진 상태였다. 튀렌, 대 콩데, 뤽상부르 등 명장들은 이미 죽었고 빌라르, 베릭, 방돔이라는 뛰어난 원수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전임자들의 능력에 훨씬 못 미쳤다. 결정적으로 이전에 강력했던 프랑스 보병은 이미 잉글랜드 보병에 밀리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핵심인 기병은 경제난으로 약해져서 잉글랜드 기병에게 밀렸다. 결국 프랑스에게 남은 카드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인해 전술이었지만 전선이 너무 많아서 이를 활용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초반에는 바이에른 군과 함께 빈을 위협했으나 1704년 블레넘에서 말버러 공작의 기병돌격에 털렸고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에 정복당했다. 그래도 빌라르, 방돔 원수의 활약으로 1706년 초반까지는 다시 동맹군을 밀어붙이다가 라미예 전투에서 빌레루아 원수의 실책으로 또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 털려 플랑드르를 내주고 본토까지 위협당했다. 자신을 배신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5]를 참교육하고 알프스산맥 통로를 통제하는 사보이아 공국을 제압하여 프랑스와 스페인령 이탈리아를 연결하기 위해 침공한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라 푀이야드 원수의 삽질로 토리노 공방전에서 털리면서 토리노 함락은 커녕 이탈리아 전역에서 부르봉 동맹군의 영향력이 일소당했다. 그래도 베릭 원수의 활약으로 이베리아 전선에서는 우세를 점했다. 1708년 프랑스는 공세로 나섰으나 프티 도팽 루이(부르고뉴 공작)의 삽질로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게 또 털렸고 때마침 찾아온 1708~1709년 겨울의 대한파[16]로 인해 대기근이 돌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60만 명 넘게 사망하는 등 전국이 초토화되자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진 루이 14세는 사실상 항복의사를 동맹군에게 전달했다. 루이 14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복한 모든 영토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할테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앙주 공작 필리프를 앉혀 달라고 요청했으나 동맹군은 루이 14세에게 둘째 손자를 강제로 쫓아내라는 모욕적인 요구와 함께 프랑스를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추가 요구를 했고 루이 14세는 이 요구만은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랑스인 백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손자를 쫓아내라는 요구 이외에는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동맹군은 거절하고 파리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런 동맹군에 분노한 프랑스인들이 모금 운동과 함께 자진입대를 하고 프랑스군이 말플라케 전투에서 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동맹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동맹국 중 잉글랜드가 이탈해버렸다. 프랑스가 항복 선언을 하기는 했어도 존버에 성공하자 끝없는 전쟁에 염증이 난 잉글랜드 백성들이 전쟁을 계속하려는 휘그당을 버렸고 여기에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잉글랜드는 이퍼르, 니우포르트, 투르네 등을 할양하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는 대신에 이전에 프랑스에 요구했던 정복지 완전반환과 스페인 왕위를 카를 6세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취소했다. 잉글랜드 탈퇴 후 남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 군은 다시 파리를 향해 진군했으나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군에게 드냉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동맹에서 이탈했고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라슈타트에서 단독강화를 맺으며 전쟁은 드디어 종결되었다. 전쟁에서 프랑스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재정이 심하게 망가져 이후 수십년동안 이를 회복해야 했고 프랑스 군이 더 이상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플랑드르 일부를 제외한 정복지를 지켜냈고 오랑주 공국과 같은 일부 영토를 오히려 추가한데다가 합스부르크 포위망을 드디어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5. 위그노 탄압과 낭트 칙령 철회
1685년의 루이 14세 |
무엇보다 낭트 칙령 이후에도 위그노들도 공존은커녕 가톨릭 교도들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프로테스탄트 천하로 만들려고 폭동과 반란을 자주 일으키면서 사회질서가 혼란스럽다보니 루이 14세도 극단처방을 한 것이다.
6. 장기 집권
중장년기 |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에 들어서 프랑스에는 천연두와 홍역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자신의 자손들이 전염병으로 몰살당하는 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1711년경에는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죽었고[21], 왕세손 프티 도팽 루이는 29세에 홍역으로 급사했다. 둘째 손자 필리프는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왕위 상속권을 영구적으로 포기했다.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은 무사히 성년으로 자랐지만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결국 맏증손자마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할 만한 적통은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남았다. 손자들이 계승한 장수왕이나 영조, 구스타프 6세 아돌프보다 한수 위.
참고로 이러는 동안 이웃 나라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그의 재위 동안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 (잉글랜드 내전 후) 올리버 크롬웰과 리처드 크롬웰의 신정 공화국,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제임스 2세, (명예 혁명 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공동 왕), 앤 여왕[22],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가 차례로 재위했다. 최종적으로 왕이 7명, 호국경이 2명, 총 국가원수가 9명이나 바꼈으며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절대왕정 국가였던 영국이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의회가 확고한 승리를 거두면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워낙 오래 집권하는 바람에 아들과 손자가 먼저 죽는 것을 보고 본인의 왕위는 결국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7. 죽음
말년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23]와 만난 루이 14세 |
“얘야, 짐만큼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드시 피하도록 하거라. 그 전쟁들은 신민을 파멸시켰다. 짐은 종종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겨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하였지.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쓰거라. 짐이 밟은 나쁜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구나..."
"Je m'en vais, mais l'État demeurera toujours."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24]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24]
사후 부검된 뒤, 심장은 암모니아에 담겨져 남았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속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들이 100프랑으로 팔아치웠다.[25]
이걸 영국 성공회의 윌리엄 버클랜드 주교가 1,000프랑에 사가면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주교의 후손인 의사 프랭크 버클랜드(1826년 ~ 1880년)가 이걸 먹어치웠다... 이 사람이 워낙에 별미를 찾던 미식가로 전 유럽에서 알아주던 기인이었다.[26]
그런 버클랜드가 루이 14세 심장을 먹어보곤 특별한 맛은 없고, 그저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루이 14세가 죽자 전쟁과 세금으로 고통받았던 백성들은 사망 직후에는 그의 죽음을 기뻐했으나 얼마 안 되어 루이 15세의 유약한 모습과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의 스캔들 등으로 백성들이 루이 15세 치세를 실망하게 되자 루이 14세와 그 치세는 다시 재평가받게 되었다. 후대에 즉위한 나폴레옹 역시 루이 14세의 후손들은 몰라도 루이 14세와 그 치세만큼은 프랑스의 위상을 키웠다며 좋게 평가했다.
[1] 프랑스어: Anne d'Autriche(안 도트리슈).[2] 거기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는 루이 14세 탄생 당시 모두 37세였다. 당시로서는 손주를 봐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한 술 더 떠 할아버지 앙리 4세는 아버지 루이 13세를 48세에 보았으며 고모 헨리에타는 무려 55세에 보았다. 다만 앙리 4세의 경우 전처 마르그리트가 사실상 불임이라서 이혼(혼인무효) 후 후처와의 사이에서 루이 13세를 본 거라 이 정도로 심하게 나이차가 난 것이고 루이 13세와 안은 한쪽 혹은 양쪽 모두 가임능력에 문제가 있었기에 루이 14세를 결혼 23년이 지난 37세가 되어서야 보게 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3] 루이 13세도 불과 8살에 왕이 되었음에도 왕의 신분으로 훈육을 가장한 체벌을 많이 당했는데, 그걸 자식들에게도 대물림 한 셈이었다. 다만 이는 앙리 4세 사후 왕이 된 후에 신하들에게 당한 것이고, 앙리 4세는 생전 자식들에게 목마를 태워주는 등 자식을 매우 아꼈다.[4] 하다못해 그 영조도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는 사도세자를 아꼈었는데, 루이 13세가 오래 살았으면 루이 14세가 프랑스판 사도세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5] 사실 명목상으로는 루이가 13세에 달하고 어머니 안이 섭정직에서 물러난 1651년부터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이후에도 마자랭이 사망한 1661년까지는 마자랭의 영향력이 컸다. 그래도 이 기간 동안은 마자랭 밑에서 실권을 점점 키워나갔기에 마자랭의 완전한 허수아비는 아니었다.[6] 루이 14세 스스로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 왼손에 들고 있는 손이 달린 막대는 국왕의 종교적 권위 그리고 사법적 권력을 나타내는 정의의 손이며,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남긴 초상화(앵그르의 작품)에도 이것이 등장한다.[7] David Parrott, 1652(2020)[8] David Parrott, 1652(2020)[9]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담당했다.[10] 아버지 르텔리에와 아들인 루부아 후작[11] David Parrott, The Business of War(2012)[참조] Cathal Nolan,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2008), John Lynn, The wars of louis xiv,1667-1714(1999)[13] Silvia Mitchell, Mariana of Austria and the Government of Spain(2019)[14] 장바티스트 콜베르 사후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15] 루이 14세의 조카 안 마리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결혼했고, 안 마리의 두 딸은 자신의 손자 프티 도팽 루이, 펠리페 5세와 결혼했다. 결혼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하려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6촌인 사부아 공자 외젠을 믿고 루이 14세의 통수를 거하게 치며 오스트리아 측에 붙었다.[16] 지난 500년간 유럽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고 한다.[17] William Doyle, Louis xiv(2017)[18] Rene Chartrand,The Cavalry of Louis XIV(2020)[19] 2022년 9월 8일 향년 96세로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가 98세가 되는 2024년 5월 27일까지 왕위에 있었다면 루이 14세보다 오래 재위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20] 구체적인 날짜를 알 수 없는 군주까지 포함하면 문헌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유럽 대국의 군주는 고트왕국의 왕 에르마나리크 1세(?~376)로, 무려 80년을 재위했다고 기록되었다. 대국의 군주 외에 소국의 군주까지 포함할 경우 이베리아 왕국의 미리안 3세가 77년, 바흐탄그 1세가 75년을 집권했다. 다만 워낙 옛날이어서 정확한 재위 기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21]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에게 얻은 유일한 적자였으나 루이 14세의 정책에 비판적이어서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다. 그럼에도 그랑 도팽 루이가 죽어갈 때 루이 14세는 하루종일 아들의 쾌유를 기다렸고, 결국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22] 영국은 제임스 1세 때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동군연합이었다가 앤 여왕 때인 1707년 통일하여 본격적으로 영국이 된다.[23]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아우구스트 2세다.[24] 사실 왕가가 무너지더라도 프랑스 자체가 멸망했다든가 그런 적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따진다면 맞는 말이긴 하다. 국가란 개념 자체는 없어지진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그 비시 프랑스 시절에도 독일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스를 살려두었고 히틀러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받는 페탱 또한 히틀러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는 않았고 사사건건 히틀러와 대립해 독일로 소환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가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국가주의적 정치 시민문화상 프랑스란 나라의 특수성은 대혁명을 겪으며 사라지긴 커녕 오히려 '자코뱅 민족주의'라는 더 강력한 형태로 재탄생했고, 나폴레옹도 루이 14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20세기에도 '드골주의'란 유산을 통해 존속하고 있다. 이러니 볼테르 같은 인물은 종교적 불관용, 비대한 중앙 왕실 권력 같은 루이 14세가 실제로 남긴 정치적 유산은 혐오하면서도 막상 그의 치세를 '위대한 시대'라 추켜세웠고, 심지어 사상적으로 왕가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훗날의 자코뱅 같은 좌파들마저도 루이 14세에 대해선 '위대한 프랑스'를 근세에 현실에 구현했던 낭만적 시각, 로망을 버리기 힘든 인물로 굉장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보일 때가 많았고, 나폴레옹 1세 역시 루이 14세의 후손들인 부르봉 왕조에 저항했던 전력이 있었음에도 루이 14세를 제법 높이 평가하기도 했었다.[25] 참고로 이때 루이 14세의 조부 앙리 4세의 머리 유해 또한 파헤쳐 도난당했고 고손녀들이 되는 루이 15세의 딸들도 같이 묻혀 있었다가 이때 부관참시되었다. 이후 앙리 4세의 머리 유해가 발견된 건 한참이 지난 1933년으로, 앙리 4세의 유해가 맞는지 진위여부를 파악하지 못해 박물관에 있다가 진짜가 맞음이 판명된 후 2010년이 되어서야 본래 위치에 안장되었다.[26] 참고로 버클랜드는 개고기나 고양이고기 따위는 진작에 먹었으며, 이후 다람쥐, 코뿔소, 타조, 돌고래, 원숭이, 온갖 새고기, 뱀, 코끼리, 기린, 해삼, 달팽이, 풍뎅이, 집게벌레, 악어 등등 지금 봐도 엽기적인 고기를 다 먹어봤다고 한다. 해삼 같은 경우엔 지금도 유럽에서 못 먹는 음식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단 두더지와 돌고래 고기는 그도 요리해서 먹다가 너무 맛이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