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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89><colcolor=#000000> 마리 만치니 Marie Mancini | ||
이름 | 이탈리아어 | 안나 마리아 만치니 (Anna Maria Mancini) |
프랑스어 | 안 마리 만치니 (Anne-Marie Mancini) | |
출생 | 1639년 8월 28일 | |
교황령 로마 | ||
사망 | 1715년 5월 8일 (향년 75세) | |
토스카나 대공국 피사 | ||
배우자 | 로렌초 오노프리오 콜론나 (1661년 결혼 / 1689년 사망) | |
자녀 | 필리포, 마르칸토니오, 카를로 | |
아버지 | 로렌초 만치니 | |
어머니 | 제로니마 마자로니 | |
형제 | 로라, 폴, 올랭프, 필리프, 알폰스, 오르탕스, 마리 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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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재상 쥘 마자랭의 외조카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첫사랑이었다. 마찬가지로 루이 14세의 애첩인 올랭프 만치니의 여동생이고 찰스 2세의 정부인 오르탕스 만치니의 언니다.[1]2. 생애
로마에서 이탈리아 귀족인 아버지와 쥘 마자랭의 여동생이었던 제로니마(지롤라마) 마자로니의 3녀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숙부의 소개로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이주했다. 외숙부 쥘 마자랭의 후광으로 마리와 형제들은 프랑스 왕궁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으며, 나이가 비슷한 루이 14세 및 그의 동생 필리프와 함께 자랐다. 쥘 마자랭의 여자 외조카들은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했는데, 마리는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녀는 검은 눈동자와 빛나는 흰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1658년에 일어난 됭케르크에서의 공방전 이후 루이 14세는 고열이 치솟아 앓아눕게 되었다.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이 14세를 위해 기도했다. 병이 쾌차한 후 이를 알게 된 루이 14세는 마리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왕은 아름답고 지적인 마리에게 점점 빠졌으며 둘은 사랑에 빠졌다. 마침내 루이 14세는 마리와의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모후였던 안 도트리슈와 쥘 마자랭의 생각은 달랐다. 두 사람은 국익을 위해 에스파냐의 마리 테레즈를 왕비로 결정했고 루이 14세는 마리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세의 정략결혼이 결정된 후, 마리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마리가 염려된 쥘 마자랭은 그녀를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이었던 로렌초 오노프리오 콜론나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에 1661년 마리는 로렌초와 결혼했다. 당시 마리가 루이 14세의 연인이라는 것을 온 유럽이 알고 있었는데, 첫날밤에 마리가 처녀라는 걸 알게 된 로렌초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둘 다 로마 출신이었고, 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어 무난한 부부생활을 했다. 신혼 때까지는.
연달아 세 아들을 낳은 마리는 이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부부 사이는 나빠졌으며 로렌초는 다른 여자를 만났고, 마리도 애인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렌초는 마리를 계속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으며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남편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마리는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침 똑같이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도망치기로 한 동생 오르탕스를 만난 마리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게 남장을 하고 함께 프랑스 왕궁으로 향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궁으로 돌아온 만치니 자매에게 초반에는 금전적인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매의 남편들이 도망간 아내를 추적하게 되면서 루이 14세는 마리와 오르탕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딱 잘라 말했다.[2] 프랑스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오르탕스는 잉글랜드로 향했다. 이때 여동생과 헤어진 마리는 회고록을 집필해 팔면서 경비를 마련해 유럽 대륙을 떠돌았다.
1689년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마리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1715년에 피사에서 사망했다.
3. 만치니 진주 귀걸이
만치니 진주 귀걸이 각각 50캐럿의 진주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
루이 14세는 마리와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이별선물로 진주 귀걸이를 선물했다. 이 진주 귀걸이는 잉글랜드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가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잉글랜드 내전 때 남편 찰스 1세를 돕기 위해 보석을 팔던 앙리에트 마리에게서 그녀의 조카였던 루이 14세가 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리 만치니가 갖게 된 뒤 만치니 진주 귀걸이, 또는 마리 만치니 진주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가 사망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나 1979년 10월,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시 나타났다. 경매에서 무려 253,000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