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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1:27:07

퐁파두르 부인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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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aeb9,#C78790><colcolor=#000000,#ffffff> 퐁파두르 여후작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Madame de Pompadour
파일:Madame_de_Pompadour.jpg
이름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Jeanne Antoinette Poisson)
출생 1721년 12월 29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764년 4월 15일 (향년 42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반려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 (1741년 결혼)
자녀 샤를 기욤 루이, 알렉상드린-잔
부친 프랑수아 푸아송
모친 마들렌 데 라 모트

1. 개요2. 생애
2.1. 평민 시절2.2. 왕의 애첩이 되다2.3. 7년 전쟁에 개입하다2.4. 사망
3. 업적4. 고된 궁전생활5. 자식6. 특기사항7. 오늘날의 유산8. 인간관계9. 대중매체에서10.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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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것은 퐁파두르 여후작[1]인 그녀의 작위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만 세간에선 보통 본명보단 이쪽으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루이 15세로얄 미스트리스(왕의 정부) 중 한 명으로, 1744년 루이 15세의 눈에 띄어 공식 정부가 된 이후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한 로얄 미스트리스의 정도로 끝나지 않고 정치,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신성 로마 제국마리아 테레지아 황후, 러시아 제국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와 함께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는 3각 동맹을 구축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을 동맹의 역전이라고 하며, 프랑스 외교사에서 꽤 중요한 사건이다.

2. 생애

2.1. 평민 시절

집안은 부유했지만 평민 출신으로, 원래의 성은 푸아송(Poisson)이었다.

아버지는 다소 무능력한 사람이었는데 횡령 혐의를 받고 국외로 도주하여 그녀가 어릴 때는 아버지가 부재 중인 가정이었다. 게다가 퐁파두르의 어머니는 상당히 미인이었는데 코르티잔(courtesan, 고급 매춘부)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한 뒤에도 매춘 행위를 해서 평가가 매우 좋지 못했다.[2] 이 때문에 퐁파두르 부인은 생부가 어머니의 애인들 중 한 명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역사학계에서도 상당히 강력하게 의심하는 사항이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라는 인물인데, 부유한 사람으로 아버지가 가출해 생활이 어려운 푸아송 일가를 강력하게 후원하고 어린 잔의 공부에 많은 돈을 들였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는데, 잔이 성장한 후에는 자신의 조카와 그녀를 결혼시키고 재산을 물려주기로 약속했으며, 나중에 그녀가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아내 잔이 왕의 정부가 되는데 분개했던 자신의 조카를 설득해서 아내를 포기하게 하기도 했다. 이러니 다들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성씨인 푸아송도 '물고기'라는 뜻으로,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갔을 때 이 출신 성분으로 인해 귀족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곤 했다. 왕의 애첩이란 자리는 아무리 정실 부인이 아니어도 거의 대부분이 귀족이었던 데 반해 그녀는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탓에 귀족 작위는 얻었어도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3]

후에 그녀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데투알의 조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Charles Guillaume Le Normant d'Étiolles)과 혼인했는데 루이 15세가 사냥을 하러 왔을 때 다이아나 여신으로 분장[4]을 하고 접근해서 그의 애첩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도팽(왕세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서였다고 한다. 이때 루이 15세가 나무로 분장하고 지나가는데, 퐁파두르 부인이 떨어트린 손수건을 왕이 주워 준 것에서 세기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한편 그녀가 루이 15세를 직접 본 것은 아직 그녀가 아주 어릴 때로, 그의 결혼식 행렬이 집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지켜봤을 때라고 한다.

원래 그녀는 어릴 때부터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5]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가족들도 그걸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여러 차례 루이 15세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왕의 다른 애첩인 샤토루 여공작 마리 안 드 마이넬이 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그녀가 죽은 후에야 작업에 성공한 것이었다. 일설에는 잔이 어렸을 때 점쟁이가
"이 소녀는 왕의 애첩이 될 것이다."
라며 예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녀를 '작은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잔과 그녀의 남편이었던 데티올은 강제적인 별거 신세가 되었다.

하여간 잔과 왕의 첫만남에 대해 일화가 많아 불확실하나, 분명한 것은 1745년 2월 25일에 열린 가면무도회에 참석해달라는 루이 15세의 공식 초청장을 받은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루이 15세의 당시 공식 정부였던 마이넬 가문의 네 자매들인 마이 백작부인, 뱅티미유 후작부인, 로라게 공작부인, 샤토루 여공작은 귀족 출신이었고 그녀들의 어머니는 루이 13세때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의 종손이었다. 반면에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부르주아였지만 평민 신분이었다. 그때까지 부르주아 신분의 여인이 공식적인 정부로 베르사유 궁에 입성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거기다 부모의 막장 사생활과 출생의 비밀을 생각하면 더더욱 입장은 좋지 않았다.

하여간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루이 15세에게 인정받아 퐁파두르 지방의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아 퐁파두르 여후작이 되었다. 공식적인 정부가 되려면 왕족 중 누군가가 대모가 되어 궁에 소개하는 절차가 필요했는데, 루이 15세가 직접 콩티 공(Prince de Conti)[6]의 미망인이었던 루이즈 엘리자베트에게 빚을 대신 갚아주며 부탁해서 해결되었다. 그렇게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최초로 부르주아 출신의 메트레상티트르가 되어 개천에서 용 난 격이 되었다.

2.2. 왕의 애첩이 되다

남아있는 초상화들을 보면 마담 드 퐁파두르는 달걀형의 얼굴, 흰 피부, 밝은 갈색 머리, 여리여리하고 비율 좋은 몸매의 소유자였고 당대의 미인상이었다. 하지만 루이 15세가 무조건 미모에 홀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퐁파두르 부인 이전의 공인 정부로 슬하에 아이까지 있었던 뱅티미유 후작부인은 루이 15세보다 키가 큰 거구에 뻣뻣한 머리카락, 생기 없이 누런 피부에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이 공식 정부였던 시기가 1745 ~ 1750년으로 의외로 길지 않고, 그 뒤로는 베르사유 궁의 2층 침실 위층에 머물면서 루이 15세의 곁에 있으며, 공식 정부 시절보다 더한 권세를 누렸다.

퐁파두르 부인의 살롱은 당대의 사상가와 문학가가 모이는 지적 향연의 장이 되었고, 이때 나중에 혁명 사상을 퍼트리게 되는 명망 높은 사상가들이 많이 드나드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의 숨은 후원가로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당시 사상이 불순하다며 판매가 금지되어 있었던 《백과전서》를 판매 가능하도록 한 것만 봐도[7] 퐁파두르 부인이 프랑스 혁명을 앞당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8] 사실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살롱이 대유행을 했고, 이 살롱으로 공화파 귀족들이 성장했으며, 그 귀족들에게 강의를 하는 수많은 학자들[9]이 먹고 살았다. 장 자크 루소를 후원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부인, 지롱드파의 대부였던 롤랑 자작부인 등 엄청나게 많았다. 퐁파두르 부인 본인은 과학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지구본이 책상에 올려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이 터지기 이전, 소위 '계몽군주'들이 주름잡던 시대만 하더라도 진짜 권력에 핵심에 있었던 귀족들에게 자유주의와 계몽사상은 전반적으로 세련되고 긍정적인 트렌드로 유행했고, 몰리에르 같은 권력 풍자적인 예술가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정치문화적 권력 구도에선 진짜배기 핵심 권력자들은 오히려 가식적으로나마 계몽주의적 사상을 옹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0][11]

외적인 아름다움도 있긴 했지만, 상당수 왕의 정부들이 20대만 지나도 총애가 위험해졌던 것과는 달리 퐁파두르 부인은 높은 교양과 지적 매력을 무기삼아 루이 15세를 매혹시켰다. 지금도 남아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높은 확률로 책이나 악보를 보고 있거나 장소가 서재이기까지 하다. 18세기에 그려진 어느 여자의 초상화에도 퐁파두르 여후작 수준으로 많은 책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없다. 여자가 주인공인 초상화에 흔히 등장하는 도 없으며, 동시대의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보석 하나 걸치지 않고, 큰 가발도 쓰지 않은데다가 고급스럽지만 요란하지는 않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퐁파두르 부인이 완성시킨 로코코 시대의 대표 복식이었던 '로브 아 라 프랑세즈'는 루이 16세 시대까지 프랑스 궁정의 공식 예복이 되었다. 이런 모습과 옷차림은 화려함보다는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퐁파두르 부인 본인도 자신의 교양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그림을 보면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 본인도 탁월한 연기력과 성악 실력을 가져서 루이 15세를 위한 연극을 여러 차례 공연하고 그 노래 실력으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12]에게 무안을 주기도 했다.[13] 뿐만 아니라 패션 감각도 대단해서, 착 붙여 땋은 소박한 머리스타일[14]과 세련된 머리장식은 온 유럽의 귀족 여성들이 다 따라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왕세자비 시절의 마리 앙투아네트도 퐁파두르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루이 15세를 진심으로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루이 15세는 증조부였던 루이 14세의 과시적이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많이 알려진 외향적인 성격과 달리, 너무 까다로워서 역사가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루이 15세는 가정교사이자 양육 담당인 마담 방타두르와 먼 친척[15]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을 제외하면 고아나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2살 때 양친을 홍역으로 잃고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증조부 루이 14세도 5살 때 죽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루이 15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성장했으며, 사람을 새로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인사도 안 하고, 구면이라도 격식을 차린 의례적인 말도 하지 않았기에 본심이야 어떻든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으로 보이기 쉬웠다. 심지어 몇 시간 전까지 친절히 대한 장관에게 편지로 경질하는 등 주위 사람들은 위선적인 사람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줍은 성격 때문에 면전에서 말하기 뭐해 편지로 대응한 것으로, 매일마다 장관들을 모아 회의를 한 증조부 루이 14세와 달리 사람을 직접 만나기 꺼려 편지로 지시를 했다.

반면에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활발하고 수다스러운 성격으로 증조부가 남들 앞에 모든 생활을 보인 것과 달리 공식적인 침실 뒤에 개인 침실과 살롱을 만들어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아 어울리곤 했다. 살롱에서 손수 커피를 만들어 내놓거나 쉴 새 없이 농담을 늘여놓는 등 격식 없는 모임을 열곤 했다. 침실에서 잠든 시종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손수 촛불을 켜기도 하고, 가정교사인 마담 방파두르에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듯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자식들에도 매우 다정했는데, 왕세자가 9살 때 턱에 큰 종기가 나자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의 방에 들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종기를 제거할 때 내지른 비명소리에 큰 충격을 받아 주변 사람들이 왕이 앓아눕는 게 아닐까 걱정할 지경이었다. 2살 때 부모를 여읜 탓인지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 자주 장례식이나 해부, 각종 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종종 "내가 죽으면..."같은 사망 플래그를 말하곤 해서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외향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야영과 사냥을 즐기고 저녁에 궁으로 돌아와 식사를 한 후 곧바로 파리로 가서 오페라를 본 뒤에 새벽 6시에 잠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8시에 거뜬히 일어나 왕의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정력적이었다. 하지만 차분하고 신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는 불안이나 사회공포증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남편 루이 15세와는 잘 맞지 않았다. 마리 레슈친스카는 종종 커튼을 내리고 방에 틀어박혀 울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루이 15세의 비위를 맞추기에는 너무 다른 성격이었던지라, 결혼 후 12번이나 출산한 후에는 임파선염을 핑계로 부부관계도 거절했다.

이런 루이 15세의 성격을 제일 잘 받아준 사람이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1757년 1월 5일 트리아농 궁 앞에서 마차를 타고 가려던 루이 15세가 베르사유 궁의 방문객으로 가장한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사내에게 칼로 찔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미앵의 칼은 8cm 짜리 단도였고 루이 15세의 부상도 겨울이라 두꺼운 모피를 입은 덕분에 경상이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큰 루이 15세는 '백성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는 의심이 겹쳐 사회공포증에 빠지게 되었다. 10일 동안이나 침상에서 못 일어나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왕이 하느님께 참회하고 퐁파두르 부인을 쫓아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퐁파두르도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서 짐이나 싸고 있었다. 그런데 17일 만에 침소에서 나온 루이 15세는 몇 시간 만에 다시 생기발랄해진 채 퐁파두르를 찾았고, 퐁파두르의 입지는 이로써 더욱 공고해졌다.

심지어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호의를 얻기까지 했다. 왕비가 여행갈 때 숙소의 관리를 자청한 다음, 당대의 패션 리더였던 감각을 살려 왕비의 숙소를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미자, 돌아온 왕비는 크게 만족한 나머지
"국왕 폐하에게 정 이 있어야 한다면 퐁파두르가 좋다."
라는 발언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레슈친스카 왕비가 역대 왕비들과 비교했을 때 남편의 정부에게 관대한 편이긴 했다. 특히 퐁파두르 부인이 궁에 들어와 처음 왕비에게 인사했을 때도 왕비는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다. 물론 그녀도 질투심이 없지는 않아서 이따금 퐁파두르 부인을 괴롭히긴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꽤 약했다.

이쯤 되면 최종병기 그녀같은 느낌이지만 프랑스 국민들과 사제들은 퐁파두르 부인을 죽도록 미워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에서 국민들은 원래 왕의 애첩을 미워했고, 사제들은 그녀가 진보적인 살롱까지 운영하는 것을 더더욱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적이 많았지만 아무도 퐁파두르 부인을 해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루이 15세의 총애가 깊었으며, 진정한 궁중암투와 정략의 달인이기도 했다.

2.3. 7년 전쟁에 개입하다

다만 외교적인 성과는 그만큼 뛰어나지 못해서, 반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해 7년 전쟁에 개입했다. 하필 이때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은 훗날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명군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퐁파두르의 원래 성인 푸아송(Poisson)을 가지고 "생선집 아가씨"라고 비웃은 게 프랑스에 퍼졌고, 이로 인해 퐁파두르의 이미지가 비호감이 되었다고 한다.[16]

애초에 외교적으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주도한 건 오스트리아 대사 카우니츠였고, 프랑스에서는 방어동맹 정도만 관심이었지만 현재의 벨기에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7]를 동맹의 대가로 바친다는 꾐에 빠져 공격동맹까지 덜컥 맺어 버렸다.

그 결과 프랑스는 러시아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및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손을 잡게 되었다(동맹의 역전). 단,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루이 15세가 한 것이 맞다. 군국 대사를 왕의 허락없이 또 사회 경제적 이유없이 단지 친하다거나 누가 싫다고 해서 하던 시대는 분명히 아니었기 때문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정부 관료도 고위 귀족도 아니었고, 왕의 비호로 권세가 조금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왕의 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3부인 동맹이라고 불렸을 정도이기는 했다.

7년 전쟁은 초반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로스바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같이 개박살이 난 뒤 하노버 방면에 지속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민덴 전투. 바르부르크 전투, 빌링하우젠 전투, 빌헴스타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번번히 패배해 프로이센군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오스트리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의 영국과의 싸움이 주 전장이었다.

프랑스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루이 14세 때 유럽 최강이던 군대가 한번에 박살난 건 퐁파두르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거나 다른 이가 제공한 뇌물을 받아챙기고 무능한 똥별을 기용한 탓이 컸다. 대표적으로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이 있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가문빨과 퐁파두르와의 친분으로 원수가 된 후 로스바흐 전투를 말아먹었다.[18][19][20][21]

그래도 수비즈 공작은 상대가 프리드리히 2세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고, 나중에 1차 루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공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22],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는 최악이었다. 그 유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종손이었던 그는 하노버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이끌고 대부분의 하노버 영토를 점령한 뒤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하노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고 연합군이 해산되게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엔 하노버를 심각하게 약탈해 하노버 국민들의 적의를 샀고,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4분의 3을 횡령하며 병사들에게 들어갈 봉급을 가로채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비즈 공작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패배한 뒤 연합군이 재결성되어 공세를 재개했을 때, 리슐리외 공작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나다가 1758년 2월에 경질되었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중죄를 지은 그였지만, 퐁파두르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군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그쳤다. 이후 프랑스와 연합군은 승승장구하여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포위하고 그 독한 프리드리히 2세를 한때 자살 생각[23]까지 할 정도로 몰아붙였을 정도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붕어하고, 이어 즉위한 외조카이자 독일 출신[24]표트르 3세가 구제불능의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라서 중요 동맹인 러시아 제국이 빠지는 바람에 전세가 급변, 전쟁 막바지에 다시 한번 기회를 틈타 영국동군연합하노버 선제후국에 찝적거려 봤지만 영국 하노버 연합군에 패배하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참전의 대가로 받기로 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못 받는 등 7년 전쟁의 유럽 전역은 아무 소득 없이 자원 낭비만 하고 끝이 났다.

더구나 이 7년 전쟁으로 엄청난 재정난과 더불어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북아메리카에서까지 영영 패권을 잃은 계기가 되는 등 엄청난 후폭풍을 맞아야 했다. 특히 캐나다의 퀘벡주와 몬트리올,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을 포함한 해외 식민지를 날린 것도 모자라 그 식민지들이 하필 얄밉기 그지없는 영국이 북아메리카까지 꿀꺽하고 말았다. 하지만 설령 7년 전쟁에서 이겼다고 할지언정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그렇다 쳐도 프랑스의 실익은 미미했다. 유럽 전역의 지상전에선 활약한 것이 없어서 오스트리아에서 당초 대가로 주기로 한 것도 철회했기 때문에 인도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패퇴는 유럽 전역의 결과와 달리 이미 쳐발리는 게 기정사실이었기에 프랑스는 유럽전의 승리로 대가를 조금 챙겼더라도 밑지는 장사였을 것이다. 그래도 리슐리외 추기경 이후 계속 오스트리아에 적대 노선을 걷던 프랑스의 방향을 선회시켜, 오스트리아와의 평화노선을 추구하게 되었고, 덕분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긴장 상태를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특히 이 평화노선의 결실로 그녀 사후 그녀의 후임인 슈아쥘 공작을 통해 그 유명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2.4. 사망

어쨌건 계속 권력을 잃지 않던 퐁파두르도 결국 42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병에 대해서는 루이 15세에게서 옮은 성병이라는 설, 열감기가 폐렴으로 번졌다는 설이 있지만 가래기침 등의 증세 정황으로 볼 때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는 폐결핵이 꼽힌다. 어쨌건 일세를 풍미한 여걸의 죽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후 마담 퐁파두르의 재산은 경매에 붙여 처분되었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에 루이 15세가 흘린 눈물은 단 두 방울뿐이었다는 야사가 있다.[25] 한편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퐁파두르가 죽던 날 루이 15세는 몇몇 친한 친구만 데리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고도 한다. 퐁파두르의 시체가 궁을 나가는 것을 보면서 '짐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눈물뿐이다.'라고 탄식했다고도 하고, 당시 비가 왔던지라 '부인의 여행길에 날씨가 썩 좋지 않군'이라 안타까워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왕족이 아니기에 원래는 궁전에서 죽을 수 없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궁전에서 죽을 수 있도록 머무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고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다는 것을 봐서는 루이 15세도 퐁파두르에 대해 상당히 애정을 가졌던 듯하다. 하지만 5년 뒤 뒤바리 부인을 정부로 들여 사실상 궁의 안주인으로 삼은 걸 보면 결국 잊은 모양이다.

3. 업적

로코코 시대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화려한 전성기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복식인 로브 아 라 프랑세즈루이 16세 시대까지 프랑스 궁정의 공식 예복이었고, 마담 드 퐁파두르는 당대 유행을 좌지우지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모든 것을 루이 15세에게 바친 사람이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왕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궁정 안에 조립식 무대를 만들어 왕의 측근들이 나오는 몰리에르의 희극과 륄리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는데, 가까운 사람들과 친밀한 루이 15세에게 이건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사냥을 좋아하는 왕을 위해 파리 근교의 성을 사서 새로 장식해 보이기도 했는데, 직접 대공사를 할 뱃심은 없었지만 설계 도면을 보는 걸 좋아하는 왕이라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소일거리를 주었다.

처음에는 왕을 기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계속 성을 개축한 덕분에 프랑스 장식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자기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장식한 벨뷔 성이 대표적인 예다. 이 벨뷔 성의 벽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부셰가, 식당 벽은 사냥 그림으로 유명한 장-바티스트 우드리가 담당했다. 전체 리모델링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그린 왕실 화가 샤를 반 루였고, 정원은 18세기 대표적인 조각가 피갈과 에티엔 팔코네의 조각으로 장식했다. 즉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를 총동원한 공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벨뷔 성은 프랑스 혁명 때 "반동분자의 악습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퐁파두르 스타일은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전원적인 느낌을 자아내는데, 대표적인 것이 '프렌치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파스텔 색조의 랑브리다. 민트색과 병아리색 등 흰색이 섞인 파스텔 토느이 랑브리는 공간에 온기와 생기를 주지만, 당시에는 페인트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죄다 퇴색되어 버렸다. 가구 또한 파스텔 색상을 선호해 금칠한 의자는 위압감을 주지만 퐁파두르 색을 칠한 의자는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이 스타일은 마리 앙투아네트로 이어졌다. 나무에 색을 칠하는 '레샹피'라는 기술은 돼지 털로 만든 둥근 붓을 일컬었다. 가구 표면처럼 조각과 곡선이 많은 부분을 섬세하게 칠해 가구에 색을 칠하는 기술로 불리게 된다. 레샹피 기법으로 칠한 가구들은 오래 보존하기가 어려워 보기 드물다.

현재의 콩코드 광장을 건설하고, 현재의 프랑스 사관학교를 후원한 적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립자를 후원한 쪽인데, 그의 돈줄이 프랑스 왕실에서 나왔다 생각하면 업적이라고 하긴 뭣하다. 사관학교 개혁도 루이 15세7년 전쟁에서의 프랑스군의 추태에 충격을 받아, 평소 국사에는 무관심했던 그가 귀족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끝까지 강행한 거의 몇 안되는 업적이었다.

색채 감각이 뛰어난 퐁파두르가 가꾼 성들은 파스텔 색조의 랑브리로 유명했다. 여기에 어울리는 여성스러운 가구들을 직접 스케치할 만큼 인테리어에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이런 곳은 대부분 철거되어 베르사유 궁정의 퐁파두르의 방에서만 간신히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발명을 낳기도 했는데, 루이 15세를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한 무더기의 가짜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이 꽃다발은 뱅센 왕실도자기 제조장에서 만든 도자기 꽃으로 왕실 도자기 제조장을 후원하던 퐁파두르가 제조장을 자신의 벨뷔 성 근처로 옮겨 세브르 왕실 도자기 제조장을 세웠다.

영국이나 독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대세이던 시절, 퐁파두르의 후원 덕분에 세브르 왕실 도자기 제조장은 유럽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는 도자기 제조장이 되었다. 이 시대 세브르 도자기의 대표 스타일은 퐁파두르 컬러라는 이름이 붙은 파스텔 핑크와 파스텔 민트색을 바탕으로 우아한 꽃 문양과 섬세한 장식 문양이 돋보이는 여성스러운 도자기다. 퐁파두르는 도자기를 좋아하여 세브르 도자기 외에도 중국과 일본 도자기를 컬렉션으로 모았다.

그렇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하면 퐁파두르 부인이 루이 15세를 치마폭에 휘어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앙시앵 레짐 시대의 선전물은 그렇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 정부는 엄연히 정부였다. 왕의 정부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린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글쎄... 이미 왕의 공식 정부 자리 자체는 원래가 비공식적인 데다가 워낙 말이 많은 자리고 보장이 되지 않는 자리기도 했다. 고소득, 고위험의 비정규직이라고 이해한다면 쉬울 것이다. 왕이 정신적으로 약해져서 의논 상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실제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실제로 모든 판단은 루이 15세가 담당했으며, 그녀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불편해 했던 왕의 비서 역할 또는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 수 있는 도우미 정도로 일해야 했다. 다만 왕이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그 정도 일이어도 굉장히 많은 업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4. 고된 궁전생활

"내 인생은 끔찍해요. 단 1분조차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어요. 끝없는 접견과 반복되는 의무적인 행사들, 1주일에 2번 넘게 뮈에트 성 같은 작은 성들 사이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의 연속,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 왕비나 왕세자, 왕세자비에 대한 의무..."
1749년에 퐁파두르 부인이 보낸 편지. 고된 궁정생활에 대한 퐁파두르의 고뇌가 잘 느껴지는 내용이다.

겉으로는 화려해보여도 사실 퐁파두르 부인의 업무는 정부 관료나 정치가가 하는 일을 겸하는 중노동이었다. 심지어 퐁파두르가 낳았던 유일한 자식인 딸 알렉상드린이 죽고, 외손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퐁파두르의 친정 아버지도 연달아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장을 하고 왕을 위해 웃고 떠들면서 연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런 퐁파두르 부인을 지켜본 주변의 몇몇 귀족들도 그녀를 동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퐁파두르 부인이 부르봉 왕조의 역대 정부들 가운데 욕을 많이 먹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출신이 부르주아였기 때문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문란한 행실로 유명했고 아버지 또한 세금을 떼먹고 도망간 전적이 있는데다가, 그 아버지가 퐁파두르의 친부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출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정부가 된 이후로 항상 루이 15세를 위해 오페라와 희곡를 열고 도자기와 보석, 그림을 사들이는 퐁파두르를 두고 "부르주아 출신 주제에 사치를 부린다" 라며 비난했다. 거기다 퐁파두르가 20년 동안 루이 15세의 곁에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꼬워했다. 루이 14세의 말년을 지킨 그의 정부였던 맹트농 후작부인[26]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하면서 왕비 자리가 공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퐁파두르가 정부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멀쩡히 살아있었다. 게다가 이 마리 레슈친스카는 후계자를 낳고 공식적인 업무를 이행하는 등, 왕비로서 딱히 흠이 없는 여인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일개 정부에 불과한 퐁파두르 부인이 아니라, 현 왕비이며 왕세자의 모후이자 신실하고 조용한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의 편이었다.

퐁퍼두르 부인의 측근도 입에 오르내렸다. 남동생인 아벨 푸아송(1727~1781)도 누나가 루이 15세의 애인이 된 덕으로 마리니 후작에 임명되어 왕의 건축 담당자로 출세했다. 파리 시민들은 왕실 해양 서기관 모르파 백작의 실각 뒤에 퐁파두르가 있다고 믿어 공공연히 푸아송에서 딴 노래인 <푸아소나드>를 부르며 조롱했다. 하지만 퐁파두르는 나라에서 지급하는 50,000리브르의 연봉 외에 여타 수입은 없어 자주 빚을 졌고, 빚을 갚기 위해 선물로 받은 보석이나 그림을 팔았다. 또한 평생 자선사업도 많이 한 탓이기도 했다. 결국 퐁파두르가 사망한 뒤 남긴 돈이라고는 책상 서랍에 있었던 370리브르가 전부였다. 당시 파리 오페라의 6개월치 좌석을 예매하는 금액이 600리브르였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이 항상 자기 근처에서 식사하기를 요구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만큼 대식가가 아니었지만, 왕인 루이 15세가 요구했기 때문에 대식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에 허용하는 양 이상이어도 무조건 먹어야만 했다. 기름진 고기 위주의 궁중식단은 퐁파두르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만찬 자리에서는 억지로 다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억지로 대식을 한 것도 힘들었지만 문제는 그 먹은 음식들이 살로 가지 않도록 운동도 빡세게 해야 했다. 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 삶은 퐁파두르에게 있어서 매우 고된 것이었다는 점은 위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게다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왕과 오랜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왕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1746년과 1749년에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하긴 했으나 모두 유산했고 몸이 허약해져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퐁파두르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고, 루이 15세도 많은 적자녀와 서출들이 있었던 만큼 일단 양쪽 모두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가 남편과 살 때도 몇 차례 유산한 데다가 그나마 살아서 낳은 아이들은 허약해 모두 요절한 점, 그녀가 당시에는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한 부인과 질환을 달고 살아서 나중에는 시침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정도였던 점을[27] 감안하면 원체 몸이 좋지 못했던 그녀가 고된 궁정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더 허약해져 후천적 불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각종 식이요법을 동원해 가며 간절히 낳길 바랐던 왕의 자식을 끝내 낳지 못했고, 이것은 그녀를 심적으로 상당히 괴롭혔다.

이에 대한 비화도 있다. 퐁파두르의 말년에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모함했던 한 귀족 여인이 루이 15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그 귀족 여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루이 15세의 아들을 낳자 자신의 갓난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책을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유 수유를 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퐁파두르 부인은 변장을 하고 그 모자의 모습을 멀리서 말없이 지켜봤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낳지 못한 왕의 아이를 낳은 그 귀족 여인을 상당히 부러워했던 듯. 더구나 그 상황에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모두 요절해서 심적인 고통이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기숙학교에 있었던 딸 알렉상드린이 겨우 10세의 나이로 병사해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을 때, 퐁파두르는 아예 자신의 삶에서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고 말할 정도로 상심했다.

<푸아소나드>가 유행한 1756년부터는 살해 위협에 늘 시달렸고, 언제 독살당할지 몰라 반드시 자기 처소에서 하녀를 시켜 만든 음식만 먹었다. 실제로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미모를 잃고 말았다. 극한의 경쟁과 암투가 난무하는 궁정생활은 아름답고 건강하던 퐁파두르 부인을 말라 비틀어진 쇠약한 노인으로 만들었고, 이후 퐁파두르는 편두통신경증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죽었다.

5. 자식

아들 샤를 기욤 루이 (1741년 ~ 1742년) : 남편 데티올 사이에서 낳은 첫 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Alexandrine_Le_Normant_d%27%C3%89tiolles_%28daughter_of_Madame_de_Pompadour%29%2C_playing_with_a_Goldfinch.jpg
딸 알렉상드린(1744년 ~ 1754년)
남편 데티올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 남편과 별거하게 된 후에는 친정 아버지에게 맡겼다. 루이 15세가 '팡팡'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후원해줬다고 한다. 퐁파두르 부인은 알렉상드린을 좋은 가문으로 시집보내기 위해 굉장히 애를 썼다. 처음에 그녀가 희망한 상대는 루이 15세가 다른 애인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루이 15세가 난색을 표해 무산되었고, 다른 상대들도 퐁파두르 부인의 부르주아 신분을 탐탁찮게 여겨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와 약혼시키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정작 기숙학교에 들어가 있었던 알렉상드린이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퐁파두르 부인은 직계 자손이 없으며, 생전에 그녀가 기거했던 엘리제 궁전은 루이 15세에게 상속되었다가 현재 프랑스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참고로 퐁파두르 부인은 신분이 신분인지라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화장을 하고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28] 당시 궁정에 출입하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그런 퐁파두르 부인을 동정했다고 한다. 어떤 귀족은 퐁파두르 부인을 위로하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동경해도 나는 당신을 동정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건넸다는 비화가 있다.

6. 특기사항

그 당시 사람 치고는 초상화가 매우 많았다. 잘 알려진 문서 최상단의 초상화를 포함해 초상화가 4점이 넘어간다. 그 중에서도 장 부셰라는 화가가 그린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초상화(문서 상단 초상화)가 대중에겐 가장 잘 알려져있다. 참고로 부셰는 유독 퐁파두르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가 그린 12점의 초상화 중 무려 8점이 퐁파두르의 초상화일 정도. 더 의외인건 사실 부셰는 초상화 전문 화가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퐁파두르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덕분인지 퐁파두르도 부셰를 좋아했다고.

생전엔 독서를 좋아했다고 하며, 초상화에서도 독서를 하는 장면으로 많이 그려졌다. 다만 본인이 독서를 좋아한 것 외에도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 '벨 사방'(미모의 지식인 여성) 컨셉으로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을 타기도 했던 것도 있었고, 독서하는 모습이 강조된 초상화들과 그 초상화들의 배경에 놓인 주변 사물들은 그녀의 지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다고도 한다. 사실 이런 기법은 그 당시 다른 귀족들의 초상화에도 쓰였다. 다만 퐁파두르 부인의 경우 마냥 허세라 하기 뭣한 것이, 그녀는 루이 15세의 눈에 들기 위해 입궁하기 이전부터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해[29] 왕의 눈에 들 만큼 지식과 교양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위에서도 나와 있지만, 저 시대에 왕의 정식 정부(애첩)는 그냥 미모만 좋다고 해선 절대로 될 수 없었으며 신분과 교양, 지성, 외모 등등 많은 조건들이 다 갖춰져야 가능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기 위해 괜히 피눈물 날 정도로(?) 노력하고 자기 신분을 뒷받침해줄 발판용 남편을 구해 1차로 결혼한 것이 아닌 셈이다.

사후 소장하고 있었던 예술품을 정리하는 데만 1년이 걸렸을 정도로 예술광이기도 했다. 보통 문화-예술 후원에 대해 오해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사비를 털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워낙 자선 사업을 많이 하기도 했고. 그 덕에 퐁파두르가 죽었을 때 남겨진 전 재산은 오페라좌의 고급 좌석을 예매하는 데 드는 비용만도 못했다고 한다. 뭐 왕의 정부니까 이런저런 이권도 많이 챙길 수 있었고, 사업에서도 비교도 되지 않은 신용과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업들 자체도 그녀가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퐁파두르는 대부분의 재산을 루이 15세 앞으로 남겼고, 나머지 재산은 남동생 아벨과 친구들에게 물려줬다. 프랑스 곳곳에 있었던 퐁파두르 명의로 된 저택은 생전에 자금을 마련하려고 매각하거나 사후 다른 용도로 바뀌거나,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고, 엘리제 궁전프랑스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30]

이 심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의 유럽식 비데를 만들었다고 한다.

7. 오늘날의 유산

로코코 패션의 주도자들 중 한 명답게 퐁파두르가 살아있을 땐 퐁파두르 스타일이라는 헤어가 유행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부풀리지 않고 깔끔하게 뒤로 넘긴 후 조화, 리본, 진주 등으로 장식하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이것이 남성 헤어로서 현대적으로 해석된 것이 바로 리젠트(Pompadour, Regent)이다.

또 그녀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초상화에서 입은 의상은 퐁파두르가 살았던 당시, 유행했던 로브 아 프랑세즈(robe a la francaise)[31]라는 로코코 시대의 대표적인 복식 중 하나이다.

그녀의 명칭 중 하나였던 '퐁파두르'는 나중에 장미꽃 품종의 이름으로도 쓰이게 되는데, 짙은 분홍색 계열의 꽃잎과 크고 화려한 겹꽃 모양의 꽃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녀와 관련된 미술작품들이 하나같이 예쁜 탓인지, 로코코풍 도자기에도 제법 활용되는 편이다. 보통 표면에 프린팅되는 식이다.

8. 인간관계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부인은 항상 루이 15세에게 순종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화를 안내지는 않았는데 루이 15세에게 딱 2번 분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2번 다 왕의 공식 정부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친척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려 13살짜리 어린애였다고 한다. 이 13살짜리 여자아이는 어린애라곤 하지만 왕의 총애를 노리고 루이 15세를 유혹했고, 결국 성공했을 뿐 아니라 퐁파두르 부인을 쫓아내겠다는 왕의 각서까지 얻어냈다. 문제는 이 성공에 기뻐한 그 소녀가 그 각서를 친척에게 자랑했는데, 그 친척이 하필이면 친 퐁파두르파였다. 결국 그 각서는 퐁파두르 부인의 손에 들어갔고, 그녀는 그날 저녁에 찾아온 루이 15세의 면전에 이 각서를 보여주며 격분했다. 루이 15세는 그 길로 그 소녀를 궁중에서 추방했고, 그 소녀를 부추겼던 반 퐁파두르파도 얼마 뒤에 쫓겨났다. 그리고 퐁파두르 부인에게는 사과의 뜻으로 작위를 한 단계 높여서 여공작으로 만들어주었다.[32] 이후 퐁파두르는 자신에게 그 각서를 보여줘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해 준 사람에게 외교의 중직 자리를 내주면서 섭섭치않게 보상해 주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패션감각을 한껏 살려 왕비의 방을 꾸며주는 등,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를 극진히 대우해서 왕비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꾸며 준 자기 거처를 본 마리 레슈친스카가 "폐하께 정부가 꼭 있어야 한다면 퐁파두르가 좋겠다"고 말했다고. 당시에는 정부가 정실부인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고 받들어 모시는 것을 좋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하며, 마리 레슈친스카가 역대 프랑스 왕비들 중에서도 유독 남편의 정부에 대해 관대했던[33] 것도 있다.

퐁파두르 부인이 루이 15세에게 유부녀인 것을 밝혔을 때 그는 이미 부인에게 빠져버린 까닭에 남편인 데티올은 강제로 별거를 당했다. 애처가였던 데티올은 아내를 바친 이후에 심한 배신감을 느껴 아내를 평생 용서하지 않고, 대신 오페라 여배우와 사실혼 관계로 살다가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이후에 바로 재혼했다.[34] 사랑하는 아내를 루이 15세에게 뺏기는 수모를 당하긴 했지만 그 대신 요직을 얻어 큰 수익을 올렸고, 사실혼 관계였던 여배우 마리 에메 말타(Marie-Aimée Maltha)와 재혼해 (아내 퐁파두르와의 사이에서는 두지 못했던) 여러 자녀를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퐁파두르 부인 사후엔 아예 정식으로 결혼하여 사생아들을 적자로 만들었다.

9. 대중매체에서

<잃어버린 세계: 쥬라기 공원>에서 롤랜드 템보파라사우롤로푸스에게 붙여준 별명이기도 하다. 근데 동료인 디에터가 못 알아먹어서 엘비스머리한 놈이라고 정정한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후반에도 뜬금없이 등장한다. 히틀러가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는 장면에서 옐리자베타 여제와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스쿨데이즈의 히로인으로 패러디되어 나온다. 당연히 프리드리히 대왕이토 마코토(...)

9.1. 닥터후

닥터후 뉴 시즌 2 에피소드 4 "벽난로 속의 여인"에서 등장. 배우는 소피아 마일즈.

어릴 때의 이름은 '르넷'으로, 7살 때 벽난로 벽을 지나온 닥터와 만나게 된다. 방 안에 태엽로봇이 있었지만 닥터가 격퇴한다. 1745년에도 태엽로봇이 공격하지만 10대 닥터, 로즈, 미키가 나타나 구해준다. 1753년에 로즈가 나타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5년 후 태엽로봇의 습격을 알린다.

1758년 37번째 생일 때 베르사유 궁전은 태엽로봇 무리의 공격을 받게 되나, 백마 아서를 타고, 거울을 깨트리며 나타난 닥터가 태엽로봇을 격퇴하고 마담 드 퐁파두르를 구한다. 닥터는 그녀를 우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닥터가 베르사유 궁전으로 되돌아 갔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그녀는 닥터를 다시 보지 못하고 1764년에 사망하며, 닥터에게 남긴 편지는 루이 15세가 대신 전해준다. 태엽인간들이 그녀의 를 원한 원인은 아마 태엽로봇들이 있었던 우주선 이름이 'SS[35] Madam de Pompadour'(마담 드 퐁파두르 호)였기 때문인 듯.[36]

닥터가 드로이드들이 왜 그녀의 뇌를 노리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정신과 교감(스캔)하는데 이때 닥터의 기억과 접선하게 된다. 이후 닥터에 대한 마음이 점차 사랑의 감정으로 짙어지는데 이때부터 닥터를 '나의 외로운 천사'라고 부른다. 닥터도 그녀에 대해서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 같다. 특히 닥터가 가지는 인생의 고독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연모와 모성애적 감성을 퐁파두르가 보였다는 점에서 끌린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똑똑하다. 닥터가 마담 드 퐁파두르의 머릿속을 스캔할 때 그 과정을 문이 열린 방을 드나드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그녀의 기억을 살펴보느라 닥터가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도 닥터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 닥터에게 "한 번 열린 문은 양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며 "닥터...닥터 누구? 진짜 이름은 숨겨져 있군요."라고 말한다. 이때 닥터가 "뭘 본거지?"라고 묻는데, 어물쩡 넘어가는 것으로 봐서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닥터의 본명을 알게 된 것 같다. 또한 태엽로봇이 장차 다시 나타날 것을 경고하러 온 로즈가 닥터와 르넷의 시간축을 설명할 때 "하늘을 나는 배가 있고, 그 배의 안에는 당신의 인생이 벽에 걸려 있다."며 금방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자 "배 한 척이 있고 그 안에는 내 인생의 나날들이 책의 페이지처럼 정리되어 있어서, 닥터는 그 페이지를 자유로이 넘나들어도 나이를 먹지 않지만 외롭고 지친 여행자인 나는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닥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로군."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닥터의 머릿 속을 이미 본 상태라 자기도 다른 별로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벽난로의 연결이 느슨해서 결국 닥터와는 인연이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어도 이미 시간여행을 했다. 걸개 그림을 사이에 두고 51세기의 우주선에 잠시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그것.

이 에피소드를 썼던 작가 스티븐 모팻(!)이때부터 잘도 닥터의 이름이라는 떡밥을!이 컨피덴셜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를 가리켜 "아름답고 우아하며 교양과 지성을 갖춘 근대적인 여인"이라며 "닥터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르넷과 같은 여인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스티븐 모팻은 이 에피소드의 소재인 태엽로봇과 우주선이라는 소재를 시즌 8 1화에서, 침대 밑의 괴물과 두려움이라는 소재를 시즌 8 4화 등에서 사용하였다.

11대 닥터가 에이미 폰드를 기다리는 소녀라고 부르곤 하는데 사실 마담 드 퐁파두르 역시 기다리는 소녀였다. 자신의 일생을 전부 닥터를 기다리는데 썼고 최후에 결국 닥터와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어쩌면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게 했었다는 죄책감이 에이미를 컴패니언으로 삼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준 듯하다.

닥터후 뉴 시즌 2 에피소드들 중에서 IMDb 평점 최고점이다.
무려 9.3점을 받았는데 이는 시즌 2 피날레 에피소드였던 'Doomsday'보다 0.1점 높은 평점이며 많은 사람들도 이 두 에피소드를 시즌 2 최고의 에피소드로 평가한다.

이 에피소드는 2007년 휴고상/최우수 드라마틱 프레젠테이션 - 단편상을 수상했다.

9.2. 슈발리에

애니메이션에선 왕의 정부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프랑스 궁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혁명교단 측 시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하지만 후반에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막시밀리앙에게 암살당했다. 후반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왕비가 부리는 사역마인 벨은 실존 인물인 퐁파두르의 딸 알렉상드린이며, 슈발리에의 알렉상드린은 퐁파두르가 왕궁에 들어갈 때 방해된다며 죽였다는 설정이 있다.

그 외에 애니 5화에서 퐁파두르가 앉아서 생제르맹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앉은 자세는 부셰가 그린 초상화를 참고한 걸로 추정된다.[37]

원작 만화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온다. 여기에선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어린 외모로 나온다. 또한 시인 측과는 전혀 친분이 없다.

10. 참고자료


[1] 후작의 부인으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그녀 본인이 퐁파두르 후작령을 수여받았다.[2] 애초에 그녀가 결혼을 한 것은 쓸데없는 스캔들과 혹시나 낳을 사생아를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남편 또한 이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고위층 사람들과 연줄을 맺어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긍정적이었다고 한다.[3] 퐁파두르 여후작이라는 작위와 문장(紋章)은 기존의 퐁파두르 가문이 단절되어 왕가 소유로 넘어온 것을 루이 15세가 그녀를 애첩으로 맞으면서 하사한 것이었다.[4]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분장을 하여 초상화를 그리거나 그 배역을 맡아 연극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루이 14세의 경우 태양신 아폴론으로 자주 분장하고 춤을 췄기에 '태양왕'으로 불렸다.[5] 원래 로얄 미스트리스는 어디까지나 '왕의 내연녀'에 불과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메트레상티트르라고 하여 일종의 '공인 로얄 미스트리스'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왕의 여러 정부들 중에서도 한 번에 한 명만이 임명되는 자리였는데, 다른 정부들과 달리 남편의 집이 아닌 왕궁에 거주하며 왕에게 조언을 하거나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등의 공식적인 권한을 가졌고, 그 자식들도 왕의 자식으로 공인되며, 작위도 받았다.[6] 부르봉 왕가의 방계 가문이었던 부르봉-콩티 가문의 수장들이 보유하던 작위였다.[7] 퐁파두르 부인이 《백과전서》의 발행을 크게 후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퐁파두르 부인을 그린 그림 가운데 《백과전서》로 추측되는 책이 같이 있는 그림도 있다.#[8]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의 죽음에 대해 "늙은 나는 살아있는데 한창 때의 여인이 죽다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라고 애도할 정도였다.(Amanda Foreman, Nancy Mitford (2001). Madame de Pompadour. p. 272) 볼테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아서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지 않고서는 어지간하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왕의 정부인 사람한테...[9] 수학, 철학, 정치, 천문학 등 엄청나게 다양했다.[10] 때문에 훗날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후, 혁명 직전의 시대적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조제프 드 메스트르라는 한 정치철학자는 "프랑스 혁명은 참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정부체제에서 멀어져, 계몽사상 따위나 향유하며 희희낙락거리던 타락한 부르봉 프랑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란 논점에서 현대까지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특유의 보수주의적, 반동주의적 정치 사상을 펼쳤다.[11] 이는 당시의 정치적 갈등구도를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닌데, 소위 근세 절대왕정의 절정기에 최대의 권력자였던 국왕, 그리고 국왕의 총애에 의존하는 궁정귀족들의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는 왕권을 위협할만한 대귀족들, 그리고 지주귀족(영주)이나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봉건적 권력의 계승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로써는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자들의 세력이 보잘것 없었기에 당대의 절대군주(계몽군주)들은 계몽주의를 후원하고 이들을 육성하여 관료로 등용함으로써 대귀족 및 교회 세력 등의 정국 장악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루이 16세 문서에서도 서술된 것처럼, 사람만 착했지 정국 장악력은 약했던 루이 16세가 부르주아들이 주축이 된 혁명에 의해 몰락한 것이 오히려 특이한 사례이고, 비슷한 시기(또는 약간 앞선 시기)의 강력하고 기민한 절대군주들은 오히려 부르주아들을 육성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경쟁자들을 찍어누르는 수단으로 활용했기에 계몽군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계몽주의 세력 및 부르주아 세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물결이 온 유럽 대륙을 쓸어버린 이후, 즉 이들에게 군주의 모가지를 쳐서 자신들에게 맞서는 다른 군주들의 발 밑에 던져줄 수 있는 힘이 있음이 입증된 이후의 일이며,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의 주축이 <왕-궁정귀족 vs 대귀족-봉건권력>의 구도에서 <왕+귀족+교회 vs 부르주아+자유주의 세력>의 구도로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앞의 주석에서 거론된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관점 역시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는 것이, 중세 이래로 가톨릭 교회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근세 절대왕정기에는 주로 왕권이 이러한 교회권을 견제하려 드는 입장이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계몽주의로 무장한 시민의 정치적 세력이 급성장하게 되면서 절대군주정보다 더 급진적인 공화주의, 자유주의가 더 강경하게 교회권과 갈등을 벌이게 된 반면 시민권에 위협을 느끼게 된 왕권+귀족권은 교회권과 손잡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는 정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정 옹호자이자 강경한 교권주의자였던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관점에서는 "그러게 계몽주의를 왜 키워줘서 이 사단을 만드냐?" 는 비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2] 폴란드 공주 출신[13] 다만 그러한 지성과 능력이 당대에 제일 가는 수준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마리 레슈친스카 역시 모국어인 슬라브어는 물론 5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으며, 라틴어로 된 중세 종교서와 철학서를 읽고 탐구하기를 좋아했다. 또 아마추어 성악가였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14] 현재 퐁파두르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앞머리를 부풀린 머리스타일은 사실은 퐁파두르 부인과는 관계가 없다.[15] 그런데 스페인의 국왕이 되어 떠난 숙부 펠리페 5세와 사촌들을 제외하면 동시에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 숙부는 루이 15세 즉위 초기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전쟁을 4국 동맹 전쟁(War of the Quadruple Alliance)이라고 하며,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왕이 된다는 것은 곧 위트레흐트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지원하여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16] 프리드리히 2세가 얼마나 퐁파두르를 미워했냐면 기르던 개들 중에 밉살맞은 개한테 퐁파두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생각날 때마다 괴롭히며 때렸다고 한다. 당연히 이 얘기를 들은 퐁파두르는 그야말로 격분했다.[17] 산업혁명 이전 벨기에 지역은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 하나였다. 괜히 15세기 ~ 16세기의 부르고뉴 공국이 프랑스 왕국에서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다. 루이 14세가 자연 국경선 드립치면서 계속 침략했지만 현재 프랑스의 지방의 코딱지만큼만 정복했을 정도로 그다지 성과는 없었고, 불과 십수년 전이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도 침공할 정도로 탐을 냈다.[18] 참고로 이 사람은 prince estranger(프랭스 에스트랑주)인데 이 경우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취급을 받는다. 다른 prince estranger는 로렌-기즈 가문(엘뵈프 분파의 경우 1825년 단절, 기즈 본파는 1674년. 참고로 마지막 당주는 혁명 이후 망명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죽는다. 참고로 이 사람은 프랑스 혁명 당시 기병대로 군중을 습격하여 다치게 했다고.), 사부아-카라냥 가문(이탈리아어로는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훗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된다 - 여전히 존재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삽질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말디(Grimaldi) 가문(존속), 곤차가 분파(곤차가느베르 공작, House of Gonzaga-Nevers. 1629년 본가 단절로 만투나 공작이 됨. 페르디난트 3세의 3번째 부인이었던 엘레오노라 디 곤차가의 가문), 라 투르 도베르뉴(La Tour'd Auvernue)(튀렌으로 대표되는 - 부이용 공작령 소유 가문으로 그 공작령은 주권을 가진다. 1913년 단절), 라 토레모이유(La Tremoilie) 가문(15세기 나폴리의 왕위 계승 예정 가문, 남계는 1933년 단절 - 참고로 여계는 계속 이어지고 현재 벨기에의 리네 가문이 이어받아 성이 de Linie-La Tremoilie가 되었다.)이 있다.[19] 이 사람의 로앙(Rohan) 가문은 과거에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인 덕에 이 칭호를 얻었는데 이 사람이 당주인 수비즈(soubise)파는 이 사람 때 단절되었고, 종가인 게메네(guemene)파는 혁명 때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파의 당주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법대를 나와 외교관으로 일했고 현 유럽의회의 의원이다. 프랑스에도 분파가 하나 있는데 이 분파의 당주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측근이다. 그 외에도 30년 전쟁 중에 망명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에두아르트가 만든 비텔스바흐-팔츠-지메른(Wittelsbach-Palantine-Simmern) 가문, 뤽상부르-피네(Luxemburg-Piney) 가문 등이 있다.[20] 참고로 프랭스 에스트랑주는 외국의 왕족들 중 프랑스로 온 방계 왕족(기즈, 사부아-카라냥, 곤차가느베르, 뤽상부르피네, 팔츠-지메른) 혹은 외국 왕실과 연결된 고위 귀족이(로앙, 라 트레모이예, 라 투르 도베르뉴) 받는 칭호였다. 참고로 이들의 경우 국왕이 작위를 인정해 주어야만 왕족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인정해 주지 않은 경우 신성 로마 제국으로 떠나기도 했다고. 프랑스로 망명한 외국의 통치자들(ex. 제임스 2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경우 에스트랑주가 아닌 공식적인 통치자 대접을 받았다.[21] 하지만 외국과 연결된 귀족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에스트랑주인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뤽상부르피네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한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윌리엄 3세의 숙적 몽모랑시 원수)는 에스트랑주가 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뮐랭(Melun) 가문, 라 로슈코필드 가문(당주가 낭트 칙령 당시 영국으로 망명했음) 역시 외국과 연계된 대귀족임에도 되지 못했다. 즉 국왕의 선호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22] 그러나 빌링하우젠 전투빌헴스타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삽질도 했다.[23] 프리드리히 2세는 훗날 "이 당시, 나는 독약이 든 로켓을 늘 목에 걸고 다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24] 정확히는 덴마크와의 접경지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었다.[25] 다른 야사에 비해 왜 뜬금없이 냉혈한이 되었나 생각할 수 있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끊기지 않고 한없이 흘렀기 때문에 왼쪽 눈에서 한 방울, 오른쪽 눈에서 한 방울 도합 두 방울을 흘렸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26] 루이 14세의 정부들 중 가장 총애받은 여인으로, 왕비 마리 테레즈의 사망 이후 루이 14세와 결혼식까지 올렸다. 다만 귀천상혼인지라 프랑스의 왕비로 인정받지는 못했다.[27] 심한 냉증이 있어서 성적불감증이 왔다고 한다.[28] 언제라도 루이 15세가 원하면 정말 심각하게 아프지 않은 이상, 단장을 하고 연회에 불려 나가야 했던 처지였던데다가, 루이 15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커서 딸 알렉상드린이 죽었다는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29] 무려 음악, 미술, 춤과 예법, 수학, 역사학, 지리학, 각국의 언어, 시문학, 철학 등 다방면으로 교육받았다.[30] 참고자료: 《권력과 욕망》 164~166페이지 및 244~247페이지.[31] 프릴과 러플 등의 주름장식과 레이스, 리본, 등을 장식 요소로 사용하고, 스퀘어/깊은 U자 네크라인으로 네크라인을 처리하며, 로브의 앞자락을 러플과 리본으로 장식하는 패션이었다. 뒤에 긴 망토 같은 천자락이 달린 것도 포인트였다.[32] 그 전에는 여후작이었다.[33] 정확히는 남편이 하도 이 여자 저 여자 끼고 살다 보니 하나하나 잡자면 끝이 없어서 그냥 눈 감고 귀 막기를 택한 것도 있었다.[34] 다만 뭔가 비뚤어진 성향이 있었기에, 요새로 치면 어린 여자아이에게 외설적인 행위를 한 혐의로 피소되기도 했다.[35] Space ship의 약어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우주선 이름에 SS를 붙이는경우가 종종있다.[36] 코로나 19의 여파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닥터후 팬들을 위한 '닥터후 록다운'이라는 시리즈에서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태엽로봇들이 여러번 마담 드 퐁파두르를 습격했을때 뇌를 스캔한 데이터를 우주선의 컴퓨터에 저장했는데, 우주선의 컴퓨터가 저장된 데이터들 때문에 오류가 발생해서 자신을 마담 드 퐁파두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고한다.[37] 부셰가 그린 초상화에서 퐁파두르는 슈발리에처럼 주황색 드레스를 입진 않았으나, 앉은 자세가 비슷하다.[38] 2010년 국내에 개정판+재번역본인 《침실 권력》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