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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9A38E><colcolor=#000000> 마리 투셰 Marie Touchet | |
이름 | 마리 투셰 (Marie Touchet) |
출생 | 1549년 프랑스 왕국 오를레앙 |
사망 | 1638년 3월 28일 (향년 88~89세) 프랑스 왕국 파리 |
배우자 | 샤를 드 발자크 당트라그 (1578년 결혼) |
자녀 | 샤를, 카트린 앙리에트, 마리샤를로트 |
아버지 | 장 투셰 |
어머니 | 마리 마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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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국왕 샤를 9세의 애첩.2. 생애
1549년에 장 투셰라는 군인의 딸로 태어났다. 언제 샤를 9세와 처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샤를 9세가 15살 때 어머니와 왕국을 둘러보다 만났다는 말도 있고 18살 때 사냥을 하다가 마을에서 마리 투셰와 마주쳤다는 기록도 있다. 공통적으로 샤를 9세는 한살 연상의 아름다운 마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마리는 매우 아름답고 지적인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동시대 문헌에서는 그녀를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과 큰 눈, 둥근 얼굴과 곧은 코, 장밋빛 입술에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완벽한 미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마리 또한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1570년에 샤를 9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마리는 엘리자베트의 초상화를 구해서 보고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나 샤를 9세는 계속 마리와 만났다.
샤를 9세는 권력을 장악한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부터 마리를 숨기고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몰래 만났다. 그러나 마리가 임신했을 무렵 카트린은 마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카트린이 샤를 9세에게 마리를 없애라고 말하자 샤를 9세는 그녀를 사보이아 공국으로 보내 숨겼다. 거기서 마리는 아들을 낳았지만 태어난지 며칠 만에 아이는 사망했다. 이후 마리는 프랑스 왕국으로 돌아왔다.
1573년에 아들 샤를을 낳았다. 샤를 9세는 유일한 아들의 탄생을 기뻐했지만 이듬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샤를 9세는 죽기 전에 동생 앙리 3세에게 마리와 아들을 부탁했다. 왕위에 오른 앙리 3세는 마리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
1578년에 샤를 드 발자크 당트라그라는 귀족과 결혼했다. 이후 파리에서 살면서 발루아 왕조의 종식을 지켜보고 루이 13세가 즉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장수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3. 자녀
앙굴렘 공작 샤를.
샤를 9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샤를은 앙굴렘 공작위를 받았다. 후술할 이부여동생 카트린 앙리에트의 루이 13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으나, 공모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하고 여동생도 앙리 4세에게 버림받은 와중에 선처를 받았다고 한다.
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
당트라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들은 모두 자라서 앙리 4세의 애인이 되었다. 그중 장녀인 카트린 앙리에트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앙리 4세가 애첩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잃고 슬픔에 잠겼을 때 그를 꼬드겨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했고, 카트린 앙리에트는 매우 격분했다. 이후에도 앙리 4세의 총애를 받아 아들과 딸을 낳았다. 자신의 아들이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보다 사랑받자 의기양양해진 카트린 앙리에트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앙리 4세의 적장자 루이 13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결국 들켰지만 약간의 처벌을 받은 뒤 풀려났다. 몇년 뒤 앙리 4세는 다시 그녀를 찾았으나, 또다시 음모에 연루되자 완전히 연을 끊었다고 한다. 이후 앙리 4세가 1610년에 암살당하면서 오랫동안 카트린 앙리에트를 미워했던 마리 드 메디시스가 미성년인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이 되자 그녀는 궁정에서 완전히 추방당했고 결국 1633년 55살의 나이로 홀로 쓸쓸히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