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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tres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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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부 상트르발드루아르 레지옹의 외르에루아르 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 파리에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2021년 기준 136,831명 정도가 살고 있다. 외르에루아르 주의 최대 도시이며, 투르, 오를레앙, 부르주, 블루아, 샤토루에 이은 상트르발드루아르 레지옹의 6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의 명칭은 고대 골족 중의 하나였던 카르누테스(Carnutes)족에서 유래되었으며, 카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전 골족에서 드루이드들이 이곳의 울창하고 광활한 숲으로 모이곤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4세기 즈음 샤르트르는 로마 제국 치세 하에서 교구로 설정되었으며, 17세기까지 관할이 확장되어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프랑스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한 교구가 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의회도 열렸으며, 대성당 자체도 연례 순례 대상지 중 하나였다.
2차 대전 중이였던 1944년 5월 26일 미-영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도시가 일부 파괴된 바 있다.
주변의 코아농(Coinon)과 외르(Eure)강에 의한 홍수 위험이 큰 편이며, 특히 하천의 범람이나 진흙의 토석류에 취약한 편이다. 급작스런 홍수와 진흙으로 인한 토석류 때문에 시 차원에서 1988년, 1997년, 1999년과 2018년에 자연 재해 상태를 선포한 바 있다.
2. 역사
도시가 있는 땅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인구가 완전히 정착했던 때는 철기 시대 끝자락 정도로 잡고 있다.개요에서 언급되었듯 이곳은 골족 중 하나였던 카르누테스(Carnutes)족의 영토였으며, 오트리쿰(Autricum)이라는 이름의 오피둠[1]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령 갈리아 시기, 샤르트르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2개의 수로, 하나의 원형경기장, 적어도 하나의 포룸 및 몇몇 신전들이 있었다고 한다. 도시는 중세 전설에 따르면, 3세기 정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되었다. 그리스도교 개종 이전 1세기 정도에 드루이드들에 의해 성모 신앙이 들어왔다고 한다.[2] 주교직 자체는 5~6세기부터 실질적으로 기능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도시 자체의 역사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중세 시기 많은 로마 제국 도시가 그랬듯 여러 작은 마을들로 쪼개져서 옛 흔적이 지워졌기 때문. 그래도 이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 덕분(?)에 침공당한 기록들은 여럿 남아 있다. 743년에는 아키텐 공작 위날드 1세(Hunald I)에 의해 침공 당해 불탄 기록이 있고, 9세기에는 당시 서유럽을 휩쓸고 다녔던 노르만족에 의해 도시가 불타고 추정컨대, 대성당도 타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도 876년에는 당시 왕이었던 대머리왕 샤를의 후원을 받고 도시가 번성했고 또 지역 차원에서 종교적으로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886년에는 덴마크 바이킹의 침략을 받았고[3], 911년에는 부르고뉴를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노르만족에 의한 침공을 받았다. 이 때 샤르트르의 주교는 푸아투 백작, 부르고뉴 공작, 뇌스트리(Neustrie) 후작 등 사방으로 지원을 요청하여 결국은 적들을 물리쳤는데, 일설로는 주교가 대성당의 주요 성유물인 '성모의 베일(Le Voile de la Vierge)'을 흔들어 적들을 후퇴시켰다고 한다(...).[4]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성모께서 중재하여 이 승리를 이끌어냈다고 믿었으며, 성당으로의 순례객들이 늘어나고 기부금도 여기저기서 쏟아지면서 성당은 재정적으로 풍족하게 되었다고.[5] 어쨌든 성당은 이러한 재정적 풍족함을 지적인 명성으로 승화시켰는데, 주교였던 샤르트르의 풀베르는 "샤르트르 학파"라고 불리는 학파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10세기에는 드디어 블루아 백작이었던 티보 1세(Thibaud I)에 의해 도시화가 다시금 진행되기 시작했고, 12세기 르네상스 시기[6]에는 20세기의 역사가 자크 르 고프가 "샤르트르의 정신"이라고 표현했던 플라톤주의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중세철학사에서 샤르트르는 나름의 입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담이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이 나무로 지어진 중세 시대의 도시들은 화재에 늘 취약했는데, 샤르트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7]
프랑스의 중심에 있는 지역이고, 왕령지의 심장이었기에 백년 전쟁에서도 이름을 몇 번 남겼다. 1360년 샤르트르 공방전도 있고, 같은 연도[8] 1360년 브레티니(Brétigny) 조약[9] 의 브레티니는 샤르트르 남쪽의 작은 마을이었고, "청어 전투"로 불리는 루브레 전투도 샤르트르 남쪽 근방에서 벌어졌다. 이런
16세기 종교 개혁에 따른 혼란 와중에도 샤르트르는 굳건히 가톨릭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비옥한 토지와 풍족한 도시를 보고 위그노든 가톨릭 교회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필리프 6세의 아버지[10] 대부터의 영지였던 샤르트르는 프랑수아 1세 대에 들어 샤르트르의 백작위를 공작위로 승격[11]시켜 주면서 계속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가, 위그노 전쟁 중이었던 1568년, 루이 드 부르봉콩데[12]의 공략 시도가 있었지만,[13] 결국 위그노 세력은 샤르트르를 얻지 못하였다[14].
16세기 종교적 혼란 와중에도 샤르트르는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데, 이는 1593년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앙리 4세가 다음 해인 1594년 2월 27일 프랑스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기 때문이다![15]
그 후 샤르트르 공작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루이 14세 대에 나중에 오를레앙 왕가의 시조가 되는 동생 필리프에게 주게 되어 루이 필리프 대까지 오를레앙 왕가에 내려져 오게 된다. 18세기에 다다르면, 샤르트르 공작위는 대귀족(Pairie de France)[16] 반열에 들게 되어, 사법적으로는 파리의 대법원(Parlement de Paris)[17]에, 군사적, 행정적으로는 오를레앙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18]
여담이지만, 17세기 말이었던 1696년, 루이 쇼베(Louis Chauvet) 신부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19][20]를 설립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는 반종교적 분위기로 인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원이나 성당들을 매각해 다른 목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샤르트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교회들이 매각되거나, 파괴되고, 변형되었다. 다만, 샤르트르 대성당만큼은 상대적으로 보호되었다고.
19세기가 들어오면서 중세의 성지였던 샤르트르는 근대의 기술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1849년에는 철도가 뚫려 역이 건설되었고, 1899년에는 트램이 설치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과 비교했을 때 꽤 빠른 시기인 1909년에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이 비행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여러 유명한 파일럿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유명했지만, 점차 다른 비행장들로 그 기능들이 넘어가면서 1997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
20세기 들어서 샤르트르는 다시 전쟁으로 인한 부침을 겪게 되는데, 1차 대전 중이었던, 1918년 8월 15일, 2차 대전 중이었던 1940년 6월, 1944년 5월에 포격(혹은 폭격)을 받은 바 있다. 1944년 5월의 폭격은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전, 원활한 진격을 준비하기 위한 폭격이었는데, 우연히(...) 폭격을 맞게 된 샤르트르에서는 50명의 사망자와 몇몇 옛 건물들의 화재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다.
1944년 8월 16일, 연합군은 독일군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대성당을 파괴하려고 했는데, 당시 미군 대령이었던 웰본 그리피스(Welborn Griffith)의 노력 덕분에 샤르트르 대성당은 그 위용과 웅장함을 오늘날에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21]
1944년 8월 16일 샤르트르는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총 11명의 여성들이 삭발당했다.[22] 그 중 시몬 투조라는 여성이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에 의해 찍혔는데, 이 사진은 라이프에 실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3. 참고 링크
[1] 라틴어로는 단순히 '방비된/요새화된'의 뜻이지만, 켈트족 특유의 요새화된 대규모 정착지라고 보면 된다. 오피둠 자체는 브리튼 섬부터 이베리아 반도, 심지어는 헝가리에서까지 발견되는데, 로마 제국의 정복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서서히 해체되고 로마의 도시들로 발전하거나 쇠락하여 버려졌다.[2] 이 성모 신앙은 도시의 주요 신앙으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공식 명칭도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샤르트르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은 성모를 뜻한다.)로 성모를 굉장히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그래도 침공은 막아서 바이킹들은 1,500명 정도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갔다고 한다.[4] 참고로 이 베일은 아직도 대성당에 성유물로서 안치되어 있다. 자세한 건 샤르트르 대성당 문서로.[5] 좀 더 현실적인 다른 문헌에 따르면, 성당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지역이 번창하여 이에 따라 번창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6] 우리가 흔히 아는 중세 말기 14~15세기의 르네상스와는 다른 개념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이른다.[7] 예를 들어, 1462년에는 한 빵집의 화덕에서 일어난 화재가 몇몇 가옥을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 1500년에는 성당 근처에서 불이 났을 때, 가장 가까운 우물이 수도원을 지나 반대편에 있었는데, 당시 수도승들은 고요함을 잃고 싶지 않다며 사람들을 수도원 경내로 들이지 않고 돌아서 물을 긷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후로 시 차원에서 거대한 물 호스(?)를 비치하여 효율적으로 불을 끄게 했다고...[8] 공방전은 4월에 일어났고, 조약은 5월에 맺었다.[9] 프랑스의 왕 장 2세 때 맺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휴전 조약. 백년 전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백년 전쟁의 116년 즈음의 시간동안 양국이 매년 박터지게 싸운 것이 아니라, 흑사병 때문에 싸움을 중지한 적도 있고, 십자군도 준비하고, 휴전 조약도 맺고 하느라 현대에 흔히 생각하는 "전쟁"보다는 느슨하게 싸웠다.[10] 발루아 백작 샤를(샤를 드 프랑스 혹은 샤를 드 발루아로도 부름), 발루아 왕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카페 왕조 직계가 단절되면서 방계였던 필리프 6세가 왕위를 이었기에 그 아버지는 프랑스 왕이 아니었다.[11] 7세기 메로베우스 왕조 대에만 해도 '공작'은 군사 작전에서나, 여러 백작위들로 구성된 사법 구획에서 국왕을 대신하여 그 권리를 이행하는 사람을 의미했으나, 프랑수아 1세 치세였던 15-16세기에는 이러한 봉건적 의미보다는 국왕의 통치 원리를 받들어 세우는 자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흔히 공후백자남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귀족 작위를 순서대로 높은 지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들 작위들은 대개 귀족의 출신 성분을 구별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하였으며,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위가 의미하는 바가 지속적으로 바뀌었다. 16세기 정도가 되면 어찌 되었든지 공작위가 백작위보다 높은 직위로 받아들여진 듯하다.[12]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나무위키에 존재하는 동명의 인물과는 다른 인물이다! 위그노측 군사령관으로 당시 부르봉 가문의 프랭스 뒤 상(Prince du Sang, 대개 왕실의 부계 적통 자손을 말함)이었다.[13] 이 공방전 역시 샤르트르 공방전이라 불리는데, 역시 앞서 언급된 14세기의 샤르트르 공방전과는 헷갈리지 말자![14] 1591년에 앙리 4세와 이에 맞선 가톨릭 동맹 사이의 공방전이 또 있었는데, 국왕 측이 승리하여 샤르트르를 점령하였다. 이 때 앙리 4세는 아직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결국 위그노 세력이 샤르트르를 먹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자세한 내용은 앙리 4세 문서나 위그노 전쟁 문서 참조.[15] 이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로,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은 랭스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에서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성스러운 기름을 프랑스 왕가에 주었다고 전해지기 때문. 당장 백년 전쟁 중 발등에 불이 떨어졌던 샤를 7세도 랭스를 되찾자마자 달려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던 걸 생각해보라...[16] 영어로는 Peerage of France, 프랑스 국왕 직속의 대귀족들로 전통적으로는 12개의 귀족 작위만이 포함되는 앙시앵 레짐 대의 가장 높은 귀족들이었다. 13세기 정도에는 12개의 작위 이외에도 새로운 작위들이 추가되지만, 추가된 작위들은 대개 의례적인 역할 정도밖에 못했다. 참고로, 12세기부터 있었던 최초원조 12개 작위들은 교회 귀족 6개와 세속 귀족 6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교회 귀족 6개로는 랭스 대주교, 라옹 주교, 랑그르 주교, 보베 주교, 샬롱 주교, 노아용 주교가 있었으며, 세속 귀족 6개로는 노르망디 공작, 기옌(아키텐) 공작, 부르고뉴 공작, 플랑드르 백작, 샹파뉴 공작, 툴루즈 백작이 있었다.[17] 여기서의 parlement은 현대에 존재하는 '의회'의 개념이 아니라 앙시앵 레짐 하에서의 법원을 의미한다.[18] 요즘이야 행정 구역과 사법 관할권같은 것들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앙시앵 레짐 하에서의 프랑스에서는 한 도시가 속한 사법 관할구역과 행정 구역이 다른 경우도 많았다. 거기에, 군사 구역 및 교구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덤...[19] 정확히 따지면 샤르트르 데파르트망 안에서 설립된 것은 아니지만, 신부가 샤르트르 교구 소속이었으므로 이 문서에 언급한다.[20] 도시의 정식 명칭은 '샤르트르'지만, 수녀회의 정식 명칭에서는 '샬트르'라고 한다.[21] 대령은 대성당 안에 독일군이 숨어 있을 수 있기에 이를 파괴해야 한다는 상부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자원병 한 명과 함께 자원해서 대성당 안에 독일군이 없음을 확인한 후 성당이 비어 있었고, 독일군이 없음을 확인하는 표시로 성당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같은 날 샤르트르 근처 레브에서 전사하였으며, 사망 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22] 종전 후 프랑스에서는 전쟁 중에 독일군과 연애하거나 성관계를 맺은 여성들을 '수평적 부역'이라 하여 처벌하기 전에 머리를 짧게 깎아 거리를 행진하게 하여 조리돌림을 시켰다. 다만, 독일군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저 업무상 독일군과 가까웠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독일인 아버지에 의해 이러한 '수평적 부역자'들이 낳았던 아기들은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