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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9대 대공 비테니스 Vytenis | |
출생 | 미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
사망 | 131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
재위 |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
1295년 ~ 1316년 | |
아버지 | 부트비다스 |
형제 | 보인?, 게디미나스? |
종교 | 발트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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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9대 대공.2. 생애
리투아니아 8대 대공 부트비다스의 아들이다. 일부 학자들은 게디미나스 치세 때 폴로츠크 공작으로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및 노브고로드 공국과 협약을 맺었던 보인과 게디미나스가 그의 형제라고 추정하나 분명하지 않다. 뒤스부르크의 페트루스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292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8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마조프셰를 침공해 웽치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고 한다. 1295년경 아버지의 뒤를 이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그는 전임 대공 트라이데니스의 딸 가우데문다와 결혼한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2세가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에 대적하는 것을 도왔다. 여기에 루테니아 왕국을 공격해 핀스크와 투로프를 공략했다.한편, 튜튼 기사단은 1290년대에 프로이센족과 발트 부족들을 정복한 뒤 리투아니아족과 사모기티아족에 대한 대대적인 십자군을 계획했다. 그들은 비테니스 치세 동안 네만 강과 주라 강 유역을 따라 성채를 건설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연결하기 위해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는 사모기티아인들을 복속시키려 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20 차례에 걸쳐 사모기티아에 대한 크고 작은 원정을 감행했다.
1297년, 리가 주민들이 리가 대주교 및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마찰을 벌였다. 그는 이 때를 틈타 리보니아를 침공해 리가 북쪽의 카르쿠스 성을 함락했으며, 투라이다 전투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장 브루노와 22명의 기사를 살해했다. 뒤이어 리가 성에 수비대를 배치시키면서, 자신이 리가 시민들을 지켜주겠으며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리가 시와 무역 거래를 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 1307년 주요 교역소인 폴라츠크를 리투아니아에 완전 합병시켰으며, 1312년엔 나바흐루다크에 거주하는 독일 상인들을 위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을 초대해 가톨릭 성당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리보니아 수비대는 1313년 도시 주민들에 의해 축출되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리가에 재입성했다.
1306년, 비테니스는 리투아니아로 쳐들어온 기사단을 물리치려 했으나 격파당했고, 기사들은 리투아니아 각지를 황폐화시킨 뒤 돌아갔다. 1311년, 그는 바르미아 주교구를 습격해 성과 요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중 라스텐부르크 인근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격파되었고, 뒤이은 보프와프키 전투에서 기사단장 하인리히 폰 플록이 이끄는 튜튼 기사단에게 또다시 패배했다. 1314년에는 기사단이 그로드노를 공격해왔지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 후 네만강 유역에 있는 크리스트메멜 성을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1316년, 그는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연사했다고 한다. 반면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게디미나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후기 연대기에 따르면, 비테니스는 번개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게디미나스가 리투아니아 대공에 오른 뒤,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