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38:43

트라이데니스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21601, #e52301 20%, #e52301 80%, #921601);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민다우가스 왕조 모노마크 왕조 민다우가스 왕조
민다우가스 트레니오타 바이셀가 스바르나스 트라이데니스
민다우가스 왕조 게디미나스 왕조
다우만타스 부티게이디스 부트비다스 비테니스 게디미나스
게디미나스 왕조
야우누티스 알기르다스 요가일라 켕스투티스 요가일라
게디미나스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
비타우타스 스비트리가일라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카지미에라스 요가일라이티스 알렉산드라스 요가일라이티스
야기에우워 왕조
지기만타스 세나시스 지기만타스 아우구스타스 }}}
}}}}}}
<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5대 대공
트라이데니스
Трайдзень
파일:트라이데니스.jpg
출생 미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망 128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269년 ~ 1282년
아버지 비트?
자녀 가우데문다
종교 발트 신화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5대 대공.

2. 생애

트라이데니스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16세기에 작성된 벨라루스-리투아니아 연대기인 <볼호비츠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폴로츠크 공작 비트의 아들로, 일찍이 아버지 및 형제들과 함께 루스군에게 사로잡힌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팔려갔다가, 아랍 전선에 투입된 뒤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리투아니아로 돌아간 뒤 아버지가 마련한 영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1269년 리투아니아 대공 슈반 다닐로비치노브고로드 공국에 속했던 헬름에서 사망했고, 그가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가 대공이 될 수 있었던 경위는 알려진 바 없지만, 리투아니아 역사가 에드바르다스 구다비치우스(Edvardas Gudavičius)는 그가 슈반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대공위를 찬탈했다고 추정한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는 그가 헤로데, 네로보다 훨씬 더 사악하며, 평생을 전쟁과 숙청으로 낭비했다"고 악평했다.

트라이데니스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우선 날시아 공국을 공략하고 날시아 공작 폴리우시를 튜튼 기사단의 영역으로 몰아냈다. 1270년 2월, 그는 리보니아로 쳐들어가서 사레마 섬을 약탈했다. 이후 귀환하던 중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단장인 오토 폰 루텐부르크가 지휘하는 기사단에게 가로막혔다. 이후의 전투에서, 그는 최대 1,600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지만 오토와 52명의 기사를 전사시키고 적군을 패퇴시켰다. 얼마 후 리투아니아군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재차 맞붙었고, 베스트팔렌의 부단장 안드레아스가 20명의 기사와 함께 전사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보복하고자 세미갈리아를 공략했고, 1273년 트라이데니스의 영역에 속했던 다우가프필스에 요새를 세웠다.

1273년, 트라이데니스는 홀룸 원정에 착수한 요트빙거족 지도자 스코만드를 지원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의 공세를 피하려는 요트빙거족과 고대 프로이센 주민들의 리투아니아 망명을 받아줬다. 1274년에는 갈리치아 공작 레프 다닐로비치에 속한 드로히친을 습격해 함락시키고 막대한 재물을 약탈했다. 레프 다닐로비치는 이에 보복하고자 킵차크 칸국의 군주 멩구티무르 칸에게 리투아니아를 함께 공격하자고 요청했다. 뭉케테무르 칸은 야구친 사령관이 이끄는 타타르군을 레프에게 보내는 한편, 체르니고프 공작 로만 미하일로비치, 스몰렌스크 공작 글렙 로스티슬라비치 및 투로프와 핀스크 공작들에게 리투아니아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마찰을 빛는 바람에 노브고로드 외곽까지만 이동한 뒤 돌아갔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르드는 당시 트라이데니스의 영역에 속했지만 1275년에 갈리치아-볼히니아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한다.

1277년 트라이데니스는 튜튼 기사단이 세운 다우가프필스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4개의 대형 이동식 공성 탑과 발리스타를 건설했다. 그러나 4주간의 공세에도 함락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갈리치아-타타르 연합군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하기 위해 물러났다. 한편, 갈리치아-타타르 연합군은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었지만, 도중에 지휘관들끼리 갈등을 빛다가 자기들 땅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1278년, 트라이데니스는 마조프셰 공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요트빙거족을 돕기 위해 형제 시르푸치우스에게 군대를 맡겨 마조프셰를 공격하게 했다. 리투아니아군은 루블린을 공략하고 마조프셰 각지에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마조프셰 공국은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끊고 트라이데니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278년 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리투아니아로 깊숙이 진격했다. 그들은 1279년 케르나바를 포위했다. 리보니아 기사단 연대기에는 이 도시를 "트라이데니스 땅의 도시" 또는 "트라이데니스 도시"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케르나바가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거나 트라이데니스가 대공이 되기 전에 이 도시를 소유했다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기사단은 케르나바 공략에 실패한 뒤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귀환길에 올랐다. 트라이데니스는 이들을 추격해 1279년 3월 5일 아세라덴에서 따라잡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라투아니아 군대 일부가 도주하는 척하자, 덴마크 기사단은 그들을 추격했다. 이후 그들이 따라잡는데 실패하고 전장에 복귀했을 때, 나머지 군대는 이미 격퇴되었다. 덴마크 기사들은 전장에 고립된 채 사방에서 몰려오는 리투아니아군에게 에워싸여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장 에른스트 폰 라스부르크와 기사단원 71명이 전사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참패하자,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세미갈리아가 반란을 일으켜 리보니아 기사단의 잔여 수비대를 몰아냈다. 세미갈리아인들의 지도지 나메이스는 트라이데니스에게 충성 서약을 맺는 대가로 보호받았다. 여기에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2세는 1279년 트라이데니스의 딸 가우데문다와 결혼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트라이데니스는 여세를 몰아 1280년 아욱슈타이티야[1] 일대를 병합했으며, 1281년 헤르지케 성을 공략하고 다우가프필스 성을 리보니아로부터 단절시켰다. 이에 튜튼 기사단이 협상을 요청하자, 그는 헤르지케 성을 돌려주는 대가로 다우가프필스 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1282년, 트라이데니스는 돌연 피살되었다.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2명의 용병인 스투만드와 기르드젤라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두 용병은 곧장 튜튼 기사단의 영토로 피신했다. 학자들은 그가 집권 초기에 축출했던 날시아 공작 폴리우시의 사주를 받았을 거라 추정한다. 반면 비호베츠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형제 다우만타스가 사주한 6명의 전사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사후에 다우만타스가 대공으로 집권했지만 곧 사망했고, 부티게이디스부트비다스 형제가 나란히 리투아니아의 권력을 잡았다.


[1] 리투아니아 고지대라는 뜻으로, 사모기티아와 리투아니아 마이너 일대를 제외한 리투아니아 전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