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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11대 대공 야우누티스 Jaunutis | |
출생 | 1300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 |
사망 | 1366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
재위 |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
1341년 ~ 1345년 | |
아버지 | 게디미나스 |
어머니 | 야우네 |
형제 | 나리만타스, 알기르다스, 켕스투티스 등 |
아들 | 시메온 자슬라브스키, 그르제고르츠 슬루키, 미하일 자슬라브스키 |
종교 | 발트 신화→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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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1대 대공.2. 생애
리투아니아 대공국 10대 대공 게디미나스와 폴라츠크 출신의 야우네 사이의 아들이다. 이복 형제로 나리만타스, 알기르다스, 켕스투티스 등이 있었다. 게디마나스는 1315년에 집권한 이래 25년 동안 리투아니아를 통치하면서 리투아니아에서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 영토들을 관리하기 위해 수많은 아들들에게 나눠주면서, 야우누티스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지명했다.야우누티스가 대공으로 지명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대공의 마지막 아내이며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에서 정교회를 신봉하는 이들 사이에서 명망 높았던 야우네의 첫 아들인 점 때문에 대공으로 선택되었을 거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게디미나스의 다른 두 아들이자 그의 형인 나리만타스와 알기르다스가 대공의 자리를 놓고 갈등을 벌였고, 게디미나스는 두 사람 중 한 명을 택하면 분열이 일어날 거라 여기고 차선책으로 그를 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야우누스티스의 치세와 관련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다만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그의 형제들은 호전적이었다. 알기르다스는 모자이스크를 공격하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침공으로부터 프스코프를 구원했으며, 켕스투티스는 나리만타스가 갈리치아-볼히니아 일대에서 벌어지는 분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도왔다. 그가 이들의 이같은 행위를 방임했는지, 아니면 이를 제지할 군사력이 없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343년 또는 1344년, 튜튼 기사단이 서유럽의 여러 주권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낸 뒤 벨류오나 시를 침공했으나 공략에 애를 먹다가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반격에 직면하자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이후 두 사람은 1344년 하반기에 튜튼 기사단 및 폴란드 왕국과 일시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44년 12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리투아니아인들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는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모라비아의 카렐, 부르봉의 피에르 1세, 에노의 기욤 2세도 참여했다. 십자군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인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무렵, 야우누티스의 어머니 야우네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야우누티스의 입지는 약해졌다. 여기에 최근에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이 드높아졌고, 대규모 십자군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여긴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1345년에 야우누티스를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결국 그는 두 형제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체포된 후 빌뉴스 성의 감옥에 갇혔고,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전담하고 알기르다스가 리투아니아 대공에 선임되었다.
야우누티스는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에 망명했다. 당시 모스크바 대공 시메온의 아내 아나스타샤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정교회로 개종하고 세례명으로 요한을 받았다. 이후 시메온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아나스타샤마저 1345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지원을 받을 길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른 형제인 나리만타스와 힘을 합쳐 켕스투티스를 처단하고 알기르다스를 폐위하려 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의 반격으로 인해 오히려 나리만타스가 축출되어 버렸고, 그는 나리만타스와 함께 킵차크 칸국에 망명했다. 나리만타스는 자니베크 칸의 신임을 받았지만, 그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고,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따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1347년 빌뉴스로 돌아온 뒤 대공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알기르다스, 켕스투티스와 화해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자슬라에 공작에 선임되었고, 1352년, 1358년, 1366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대공국간의 평화 협약이 성립될 때 협상가로서 활약했다. 1367년 리보니아 기사단과 리투아니아간의 협약이 체결될 때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1366년에서 1367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 중세 역사가 얀 텡고브스키(Jan Tęgowski)에 따르면, 그는 세 아들 시메온 자슬라브스키, 그르제고르츠 슬루키, 미하일 자슬라브스키를 낳았다고 한다. 이 중 미하일 자슬라브스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슬라에 공작에 선임된 뒤 1399년 8월 12일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과의 일전을 벌이던 중 전사할 때까지 그곳을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