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흐루다크 Навагрудак | ||
【언어별 명칭】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101A> 벨라루스어 | Навагрудак, Navahrudak |
러시아어 | Новогру́док | |
리투아니아어 | Naugardukas | |
폴란드어 | Nowogródek | }}}}}}}}} |
[clearfix]
1. 개요
나바흐루다크는 벨라루스의 도시로, 오늘날에는 인구 3만여 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이다. 중세에는 흑루테니아의 중심 도시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다. 1252년 쓰여진 히파티아 연대기에 따르면 나바흐루다크는 작은 신도시라는 뜻이라 한다. 1044년 키예프 루스의 야로슬라프 1세 현공의 지휘 아래 슬라브인과 발트인이 함께 건설한 것이 시초이다. 1581년부터 1775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 최고법원 소재지이기도 했다.2. 역사
2.1. 나바흐루다크 공국 & 리투아니아 대공국
키예프 공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던 동슬라브족 크리비치족의 일파가 나바흐루다크를 중심으로 나바흐루다크 공국을 세웠다. 1241년 몽골 제국에 의해 한 차례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폴로츠크 공국[1]에 비하면 피해의 정도가 덜 했고, 이 덕분에 나바흐루다크가 오늘날 벨라루스 일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몽골 제국에 신종하던 나바흐루다크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흑루테니아 일대로 팽창하자 베체의 결정 하에 리투아니아 측에 투항하였다.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왕 민다우가스[2]는 중심지를 나바흐루다크로 이동한 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적루테니아 일대로 팽창을 시도했다. 13세기에는 타타르,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여러 차례 공성을 시도하고 14세기 5차례에 걸쳐 튜튼 기사단이 나바흐루다크의 공략을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나바흐루다크 주둔군이 방어에 성공했다. 나바흐루다크는 단순히 리투아니아인의 지배를 받는 도시가 아닌 루테니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전쟁 기지였다. 당시 루테니아인들은 동쪽에서는 타타르족의 노예 사냥과 약탈, 서쪽에서는 정교회를 이단시하는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체계적이고 철저한 파괴와 학살로 생지옥을 경험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리투아니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결혼을 통한 동군연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요가일라와 야드비가의 결혼식이 나바흐루다크에서 비타우타스가 새로 지은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바흐루다크는 정교회 도시였으나 새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받은 리투아니아인을 위한 조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동군 연합 이후 튜튼 기사단을 그룬발트 전투에서 격퇴한 이후 전성기에 이르며, 나바흐루다크도 1511년에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았다. 도시의 주민들은 봉건적 의무에서 면제되었고, 세금은 돈으로만 내면 되었다. 이로써 나바흐루다크는 상공업 중심지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1505년에는 크림 타타르인들에게 도시가 포위된 적도 있었으나 이를 격퇴해냈다.
나바흐루다크의 정교회 성당 |
2.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나바흐루다크는 16~17세기 네 차례에 걸친 대화재에 계속된 외침으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대홍수 와중에 1655년 루스 차르국 군대가 나바흐루다크를 점령하였으나 1661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도시를 탈환하고 복구를 위해 4년동안의 세금을 면제했다. 그러나 1706년 스웨덴군의 점령 후 약탈, 1751년 러시아 제국군의 약탈로 도시가 큰 타격을 입었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가 거의 완전히 폴란드화한 것과 다르게 나바흐루다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초창기 다종교 사회의 면모를 상당부분 유지하였는데 18세기 말 무렵 5체의 가톨릭 성당과 3체의 정교회 성당이 이슬람 모스크, 유대교 회당과 공존했다. 도시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통적인 루테니아인(벨라루스인) 시민들 외에도 상당수의 립카 타타르 무슬림 인구가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였다.나바흐루다크 모스크 |
2.3. 러시아 제국
폴란드 분할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등을 겪으면서 나바흐루다크는 초토화당했고 1817년 기준 나바흐루다크는 목조건물 428채에 석조건물 9채(...)를 보유한 초라한 작은 마을로 전락하였다.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던 학교는 해체되고 러시아 제국에서 신설한 학교가 세워졌으며 1861년 1월 봉기 이후 폴란드 귀족 세력의 부흥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이 벨라루스 일대에서 가톨릭을 뿌리뽑는 과정에서 잔존한 가톨릭 성당들은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당했다.
1896년에는 랍비 호로비츠가 예시바(유대교 학교)를 건설하는데 이 학교에는 근교의 유대인 학생들이 모이면서 축소된 도시 규모에 걸맞지 않게 2차 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시바였다고 한다. 예시바를 중심으로 유대인 학생들이 몰리면서 나바흐루다크는 다시 소도시 수준으로 인구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10년 기준 나바흐루다크에는 석조건물 76채에 목조건물 1074채를 보유한 소도시가 되었다.
2.4. 현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제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한 이후 전간기 이 지역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후 다시 독일 국방군이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나바흐루다크의 예시바는 파괴당하고 많은 유대인과 벨라루스인, 폴란드인이 학살당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유럽 영토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나바흐루다크는 폴란드에서 소련 내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로 편입되었고, 소련 붕괴 이후 오늘날 벨라루스의 도시가 되었다.3. 여담
아직 벨라루스가 관광친화적인 국가가 아닌 관계로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관광지 개발이 덜 되어 있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민다우가스 대공이 건설한 나바흐루다크 성채가 1706년 스웨덴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어 현재 그 폐허가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의 민족시인[3]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생가 및 그가 세례 받았던 교회도 있다.재러드 쿠슈너의 조부, 조부모가 모두 나바흐루다크 출신으로 알려졌다.
[1]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폴로츠크 공국의 다우가바강 무역로를 봉쇄한 이후 몰락했다.[2] 잠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가 배교하면서 취소되었다(...).[3] 당시 아직 이 지역에 공교육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뚜렷한 기준을 가진 민족주의가 발달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