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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2대 공작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초대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 Břetislav II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브르제티슬라프 2세 (Břetislav II) |
출생 | 1033년 | |
사망 | 1092년 1월 14일 (향년 58~59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061년 ~ 1085년 | ||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 ||
1085년 ~ 1092년 | ||
자녀 | 브라티슬라프 2세, 바츨라프,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루드밀라, 볼레슬라프, 보르지보이 2세, 블라디슬라프 1세, 유디트 그로이치스카, 소베슬라프 1세 | |
아내 | 성명 미상의 여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 | |
형제 | 스피티흐네프 2세, 콘라드 1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 | |
아버지 | 브르제티슬라프 1세 | |
어머니 |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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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2대 공작,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초대 국왕.2. 행적
1033년경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노르트가우 변경백 하인리히의 딸인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스피티흐네프 2세가 있었고, 동생으로 콘라드 1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있었다. 1054년경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장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 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1055년 1월 10일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이 된 스피티흐네프 2세는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아 역시 온전히 독차지하기 위해 세 형제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영지를 회수했다. 어머니 유디트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 계속 있다간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1057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와 결혼했다. 1058년, 그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 스피티흐네프 2세의 부름을 받고 귀환해 형과 화해한 뒤 올로모우츠 공작에 재선임되었다. 1061년 1월 28일 형이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고, 형제 콘라드 1세와 오타 1세에게 모라비아의 영지를 돌려줬다.
1061년, 독일왕 하인리히 4세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슈바벤의 루돌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다. 이때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보헤미아의 영역이었던 실레시아 서부 지역인 오파비안 실레시아를 침공해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 시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 보헤미아군이 도중에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도주했다.
1062년 아들레타 우헤르스카가 사망헌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와 화해하고 그의 누이인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와 결혼했다. 1063년 다른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함께 셜러몬을 헝가리 왕위로 올리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성사시켰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1070년경 보헤미아인들이 폴란드로 쳐들어왔다가 볼레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고, 볼레스와프 2세는 그들을 모라비아까지 추격했다고 한다.
1067년, 프라하 주교 세비르가 사망했다. 수도자로서 성직 생활을 하고 있던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막내 동생 야로미르는 자신을 프라하 주교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자신의 집사 렌크가 프라하 주교가 되기를 원했지만, 형제들과 여러 보헤미아 귀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선임했다. 다만 야로미르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올로모우츠에 주교구를 설립해 프라하 주교구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야로미르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폐지하기 위해 형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070년, 야로미르와 올로모우츠 주교 얀과의 재산 분쟁이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야로미르는 교황청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1071년 모라비아로 가서 얀 주교를 체포한 뒤 채찍질을 가했다. 또한 얀 주교가 이를 고발하기 위해 로마로 보낸 사절단을 도중에 붙잡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2세가 보낸 교황 특사가 이 일을 문제삼았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즉시 법원을 소집하고 야로미르에게 출석 명령을 내렸다. 야로미르가 이에 불응하자, 교황 특사는 주교직 수행을 금지했고, 야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1071년 가을,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는 마이센에 있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연대기 작가인 헤르스펠트의 람페르트에 따르면, 황제는 두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현재 국경에 만족하라고 명령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1072년, 볼레스와프 2세는 마이센 협약을 파기하고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이에 진노한 하인리히 4세는 1073년 5월 폴란드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센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로의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공의회에서 프라하 주교구와 올로모우츠 주교구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 편에 섰고, 그레고리오 7세 편에 선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이 독일 본토를 노리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편에 선 그에게 보답하고자 루사티아 변경백과 마이센 영주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마이센과 루사티아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고, 그 대신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동부의 변경백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저 허울 뿐인 칭호였다.
1079년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폴란드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 이후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보헤미아 공국과 폴란드 대공국간의 오랜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교황청에 슬라브 전례의 복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며 거부했다.
Quia nobilitas tua postulavit, quo secundum Slavonicam linguam apud Vos divinum annueremus celebrari officium, scias nos huicpetitioni tuae nequaquam posse favare.
그대와 귀족들이 슬라브어에 따라 성무일도를 거행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입장으로서 여러분의 요청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대와 귀족들이 슬라브어에 따라 성무일도를 거행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입장으로서 여러분의 요청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1082년, 콘라드 1세, 오타 1세와 함께 그레고리오 7세 지지를 천명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침공해 그 해 5월 12일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2세를 메일베르크 전투에서 격파했다. 1085년 4월,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자신을 충실하게 섬긴 브르제티슬라프 2세에게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1] 단, 이 왕위는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의무 수수료를 면제하는 대신 독일왕이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여해야 했다. 1086년 6월 15일,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의 주관하에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왕이라는 칭호도 주어졌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칭호였을 뿐 실권은 없었다. 이때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도서인 비혜흐라드 코덱스가 제작되어 그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야로미르를 궁재로 삼은 하인리히 4세의 요청에 따라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프라하 주교구에 통합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1088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야로미르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도중에 사망했다.
1087년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사망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공국을 오타 1세의 아들 오타 2세가 아닌 자신의 아들 볼레슬라프에게 넘겼다. 오타 1세의 아내 에우페미아는 이에 맞서 브르노 공작 콘라드 1세 등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고, 볼레슬라프는 그 와중에 사망했다. 그는 이를 응징하고자 1091년 모라비아를 침공해 브르노를 포위했지만, 도중에 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본토에서 아버지를 축출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장로들의 권고에 따라 콘라드와 화해하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했다.
1092년 1월 14일,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낙마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콘라드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고, 브라티슬라프 2세가 헝가리에서 보헤미아로 돌아와서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 1056): 독일 출신인 것만 전해진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형 스피티흐슬라프 2세의 숙청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했을 때,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함께 따라가지 않고 올로모우츠에 남겨졌다가 스피티흐네프 2세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나중에 석방된 뒤 남편을 따라가려고 헝가리로 가던 중 조산한 뒤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 아들레타 우헤르스카(1040 ~ 1062):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
- 브라티슬라프 2세(? ~ 1100): 보헤미아 공작
-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1056년에서 1058년 사이 ~ 1086):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아내.
- 바츨라프(1062): 요절
- 루드밀라(? ~ 1100년 이후): 수녀.
-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1046년에서 1048년 사이 ~ 1126):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