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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E5EB><colcolor=#000>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황후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María Anna de España | ||
이름 | 스페인어 | 마리아 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이 아우스트리아 (María Ana de Austria y Austria) |
독일어 | 마리아 안나 (Maria Anna) | |
출생 | 1606년 8월 18일 | |
카스티야 왕국 엘 에스코리알 | ||
사망 | 1646년 5월 13일 (향년 39세) | |
신성 로마 제국 린츠 | ||
배우자 | 페르디난트 3세 (1631년 결혼) | |
자녀 | 페르디난트 4세, 마리아 안나, 레오폴트 1세 | |
아버지 | 펠리페 3세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 |
형제 | 아나, 펠리페 4세, 카를로스, 페르난도, 마르가리타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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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차녀이자,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의 황후이다.2. 생애
2.1. 스페인의 공주
1606년 마드리드 근교 엘 에스코리알에서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1]의 3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1611년에 어머니 마르가레테가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나자 언니인 아나가 어린 여동생 마리아 아나를 비롯한 형제들을 돌봐주었고 이때문인지 펠리페 3세의 자녀들은 맏이인 아나에게 애정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2.2. 혼담과 결혼
1620년대 초 쯤 마리아 아나는 잉글랜드 왕국 제임스 1세의 차남인 웨일스 공 찰스와 혼담을 나눴다. 웨일스 공 찰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가톨릭교도 배우자를 맞이하길 원했고, 그와 절친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도 함께 스페인에 가서 마리아 아나를 데려오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는데 성공회 신자였던 웨일스 공 찰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마리아 아나도 성공회 교도랑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없었다.[2]이후 마리아 아나는 같은 가문인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결합을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이자 자신의 외사촌인 페르디난트와[3]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마리아 아나의 언니였던 아나가 30년 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을 갔지만, 프랑스 왕국이 반 오스트리아 정책 노선을 취하게 되면서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두터운 결속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의해 맺어진 결혼이었다.
마리아 아나는 결혼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떠났지만 당시가 30년 전쟁 시기였기 때문에 인질로 잡힐 뻔 하는 등 매우 위험한 과정을 거쳤다. 1년 2개월이 지난 1631년 1월 트리에스테에 도착한 마리아 아나는 대리혼을 치뤘고 다음 달인 2월에 사촌인 페르디난트 대공과 결혼하게 된다. 결혼 당시 오스트리아는 30년 전쟁 중이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후계자의 결혼이었기에 결혼식 이후 한달간 축제를 열었다.
2.3.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으로 정착한 마리아 아나는 그곳에서 마리아 안나(Maria Anna)로 불리게 되었고, 그녀는 스페인의 패션, 연극, 무용, 음악에 오스트리아 궁정에 도입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으로서 오스트리아 궁정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의 새어머니였던 엘레오노레 곤차가 황후와의 관계는 미묘했다고 한다.[4] 마리아 안나는 예술, 특히 회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었으며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으로 그린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1636년 12월 22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남편 페르디난트는 로마왕으로 선출되어 12월 29일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즉위했고 1637년 1월 21일 마리아 안나도 독일 왕비로 즉위하였다. 이후 1637년 2월 15일 시아버지 페르디난트 2세가 승하하자 남편 페르디난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안나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마리아 안나와 페르디난트 3세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져서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였다. 더군다나 페르디난트는 결혼 생활 동안 그 흔한 사생아도 두지 않고 마리아 안나에게만 충실했다. 마리아 안나는 지적이고 밝고 행복해하며 편안함을 주는 성격이었기에 자주 우울해하는 페르디난트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정치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페르디난트 3세가 궁을 비울 때면 관례에 따라 섭정을 맡아 궁정을 이끌었다.
페르디난트 3세의 정치적 고문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마리아 안나는 오스트리아-스페인 간 궁정에서의 중요한 중재자였다. 물론 주로 남편 페르디난트 3세의 의견을 옹호하는 쪽이었지만 형제들인 펠리페 4세와 인판테 페르난도 추기경의 정치적 의견도 수렴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공주였던만큼 오스트리아 궁정에 주로 스페인인들을 배치시켰고 이를 통해 스페인 대사와 여러 외교관들이 마리아 안나의 정치 토론에 참여했다.
2.4. 사망
30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궁정 사람들에게 힘든 시기였고 황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 안나를 죽음으로 몰고가게 되는데 1646년 1월에 황실 가족들은 서둘러 린츠로 갔는데 이때 마리아 안나가 임신한지 6개월이 지나서 알게 된다. 결국 1646년 5월 12일 린츠 성에서 막내딸 마리아를 제왕절개로 낳았지만 산모와 아이 모두 사망하게 되면서 마리아 안나는 향년 39세로 숨을 거뒀다.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Maria Anna of Austria) | <colbgcolor=#fff3e4,#331c00> 펠리페 3세 (Philip III) | <colbgcolor=#ffffe4,#323300> 펠리페 2세 (Philip II) | |
카를 5세 (Charles V) | |||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la of Portugal) | |||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 | |||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Mari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 of Austria) | |||
내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e of Bohemia and Hungary)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Maria Anna of Bavaria) |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 (Albert V, Duke of Bavaria) | |||
오스트리아의 아나 (Anna of Austri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페르디난트 4세 (Ferdinand IV) | 1633년 9월 8일 | 1654년 7월 9일 | |
1녀 |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나 (Mariana, Queen of Spain) | 1634년 12월 22일 | 1696년 5월 16일 | 펠리페 4세 슬하 2남 1녀[5] |
2남 |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1640년 6월 9일 | 1705년 5월 5일 |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슬하 1녀[6] |
오스트리아티롤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슬하 2녀 | ||||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슬하 2남 5녀[7] |
[1]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이자 페르디난트 2세의 여동생.[2] 훗날 찰스 1세로 즉위한 웨일스 공 찰스는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했다. 그의 자녀들 중 장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와 요절하거나 독신으로 산 자녀들을 제외하 찰스 2세, 제임스 2세, 헨리에타도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다.[3] 외삼촌 페르디난트 2세의 차남.[4] 마리아 아나와 엘레오노레 모두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서로 경쟁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5]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 프로스페로, 카를로스 2세[6] 바이에른 선제후비 마리아 안토니아[7]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6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