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3DDFF><colcolor=#000>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gley, 1st Duke of York | |
이름 | 에드먼드 플랜태저넷 (Edmund Plantagenet) |
출생 | 1341년 6월 6일 |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랭글리 | |
사망 | 1402년 8월 1일 (향년 61세) |
링컨셔 엡워스 | |
배우자 | 카스티야의 이사벨(1372년 결혼 / 1392년 사망) |
조앤 홀랜드(1393년 결혼) | |
자녀 | 에드워드, 콘스탄스, 리처드 |
아버지 | 에드워드 3세 |
어머니 | 에노의 필리파 |
형제 |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어널, 존, 에드먼드, 메리, 마거릿, 토머스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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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성인으로 장성한 아들들 중 4남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초대 요크 공작으로 요크 왕조의 시조이다.2. 생애
1341년 6월 6일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랭글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132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와 플란데런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군 아벤 가문 출신으로,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였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는 살아남은 자식들 중 4번째 아들이었다. 형으로 흑태자 에드워드,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곤트의 존이 있었고, 남동생으로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있었다. 그리고 누이로 이사벨라[1], 조앤[2]이 있었다.에드먼드가 출생했을 때, 에드워드 2세의 가까운 친구였던 서리 백작 존 워렌이 대부를 맡았다. 존 워렌은 1347년에 사망했고, 에드먼드는 요크셔에 있는 워렌의 땅 일부를 받았다. 1359년 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함께 했고, 1361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369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400명의 궁수병과 400명의 맨앳암즈를 이끌고 브르타뉴와 앙굴렘 원정을 수행했다. 1370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리모주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75년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함께 브레스트를 프랑스군으로부터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1376년부터 1381년까지 도버 성주이자 다섯 항구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1381년 7월, 곤트의 존은 그에게 2천 명의 분견대를 맡겨 포르투갈로 보내고, 자신은 또다른 군대를 일으켜 아키텐에서 카스티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는 1382년 1월 이 작전을 위해 필요한 6만 파운드를 지원하길 거부했고, 결국 존은 원정을 떠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포르투갈로 간 에드먼드는 본인의 우유부단함과 급료가 계속 밀린 것에 반발한 군대의 태업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는 1382년 8월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고, 잉글랜드군은 강제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385년 8월 6일에 요크 공작으로 승격되었으며, 1394년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원정을 벌였을 때 그를 대신해 잉글랜드의 호국경을 맡아 행정을 대리했다. 1396년 리처드 2세가 프랑스를 방문해 발루아의 이자벨과 결혼했을 때도 잉글랜드의 호국경로서 그를 대신해 통치를 행사했다. 1399년 여름 리처드 2세가 또다시 아일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3번째로 잉글랜드의 호국경를 맡았다. 그해 6월 말, 리처드 2세에게 추방되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요크셔의 브리들링턴에 상륙했다. 그는 처음에는 군대를 모아서 대항하려 했지만, 리처드 2세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대거 헨리에게 붙자 자신 역시 헨리와 합류하기로 했다. 그후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을 역임했다가 곧 물러났고, 1402년 8월 1일 링컨셔 앱워스에서 사망했다. 사후 랭글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575년 수도원이 헨리 8세에 의해 해체된 뒤 인근의 모든 성도 교회에 이전되었다. 사후에 장남 에드워드가 요크 공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카스티야의 이사벨(Isabella of Castile) | ||||
1남 |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 (Edward, 2nd Duke of York) | 1373년 | 1415년 | 필리파 드 모헌 |
1녀 | 글로스터 백작부인 콘스탄스 (Constance, Countess of Gloucester) | 1374년 | 1416년 | 제1대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 슬하 1남 2녀 |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 슬하 1녀 | ||||
2남 |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 (Richard, 3rd Earl of Cambridge) | 1385년 | 1415년 | 앤 모티머[3] 슬하 1남 1녀[4] |
모드 클리포드 |
- 카스티야의 이사벨(1355년 ~ 1392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딸.)
- 노리치의 에드워드(1373 ~ 1415): 제2대 요크 공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 요크의 콘스탄스(1374 ~ 1416): 제1대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의 부인. 남편 토머스가 1400년에 사망한 후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와 불륜을 맺었고, 그 와의 사이에서 딸 엘레노어 홀랜드를 낳았다.
- 코니스버러의 리처드(1385 ~ 1415): 대외적으로는 에드먼드와 이사벨 사이의 아들이었으나, 이사벨이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바람을 피워 낳은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바로 위의 누나인 콘스탄스와 나이 차이가 11살이나 났고, 아버지와 형의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다.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딸 앤 모티머와 결혼하여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를 낳았다. 즉,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 리처드 3세의 할아버지. 1415년 헨리 5세를 폐위하고 처남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던 사우샘프턴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 조앤 홀랜드(1380 ~ 1434):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사망한 뒤 제5대 윌로비 남작 윌리엄 윌로비와 재혼했고, 1409년 12월 9일에 윌리엄 윌로비가 사망한 뒤 메섬의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1415년 헨리 르 스크루프가 헨리 5세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뒤 초대 베시 남작 헨리 브롬플리드와 네번째로 결혼했다.
[1] 1332/1334 ~ 1379/1382, 쿠시 영주 앙게랑 7세의 부인[2] 1334/1335 ~ 1348, 카스티야 왕자 페드로와 약혼했지만 중세 흑사병에 걸려 결혼 전에 사망[3] 친사촌인 필리파(백부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의 외동딸)의 손녀로 6촌 손녀가 된다.[4]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