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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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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ιώρυγα της Κορίνθου
Corinth Canal

1. 개요2. 역사3. 한계점4. 운영5. 여담

1. 개요

파일:그리스 터키 코린트 운하.jpg
코린토스 운하 일대의 위성사진
촬영위치 관계로 남북이 바뀌어 상단 우측이 코린토스, 하단이 루트라키이다
코린토스 운하의 위치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이다. 이오니아 해의 코린토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이어주고 있다.

길이 6.3km, 수면 너비 24.6m, 바닥 너비 21.3m, 깊이 8m, 선박통과높이한도 52m의 소규모 운하로, 화물선이 지나가기엔 너무 좁기에 관광용 여객선 위주로 통행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돌아가는 것에 비해 이오니아 해에서 에게 해까지 약 700km가량 단축되니 그만큼 소요시간도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코린토스가 코린토, 코린트, 고린도 등 언어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에 이 운하 역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2. 역사

파일:그리스 터키 코린트 운.jpg
운하 개통식 (1893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오니아해에게해의 양쪽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지점에 바닷길을 내면 해상운송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 운송의 효율성이 올라갈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있어왔다. 더구나 그 시기는 다른 운송수단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기라 배를 사용하는 해상운송의 중요성이 지금보다도 훨씬 큰 시기였다. 그리고 바다로 돌출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을 돌아가는 항로로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면 복잡하고 절벽과 돌출물이 많은 해안선과 충돌해서 선박이 난파할 가능성도 높기에 운하의 필요성이 높았다.

그래서 이 지점을 다스리는 코린토스의 지도자들은 이곳에 운하를 만들고자 했다. 코린토스의 참주중 한명인 페리안드로스(Περίανδρος)가 최초로 코린토스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하지만 코린토스 지협의 지형 자체가 중앙부에 거대한 언덕이 있고 언덕 자체도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구조라서 당대의 상황으로는 굴착기술 부족과 깎아내야 하는 엄청난 땅의 분량 때문에 공사에 막대한 자원과 비용을 투입해도 운하의 건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결국 운하건설을 포기하고 디올코스(Δίολκος)라는 궤도를 만들어 마차로 끌어올리는 방식을 통해 지협 간에 선박을 이동시켰다.

이후에도 코린토스 운하 건설이 논의되었으나 수리학과 지질학의 미비로 인해 운하가 건설되면 양쪽 바다간의 수위의 격차가 심해서 홍수가 발생하고 주변 섬에 쓰나미가 닥칠 것이라고 연구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다들 구상 단계에서 포기했으며 처음 운하 건설을 시도한 것은 로마 제국 네로 황제 시기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잡은 6천명의 유대인 포로들을 이용해 양쪽 바다에서 동시에 작업을 시작하여 40m~50m의 너비를 가지는 운하를 10m~30m 깊이로 굴착했고 중앙부의 언덕지대에는 암석의 품질을 조사할 목적으로 깊은 갱도를 굴착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700m 정도의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전체 구간의 10% 수준의 작업진척도가 이루어졌으나, 네로 황제가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죽은 후 중단되었다. 네로의 공사구간은 현재의 코린토스 운하 건설에 그대로 사용되면서 흔적이 사라졌다.

네로의 시도가 실패한 후 오현제 시대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권력자가 운하 건설 재개를 생각해보기도 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점유한 시기인 1687년에도 코린토스 운하를 건설할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생각에만 그쳤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현재의 코린토스 운하는 1882년 4월 23일에 착공해서 1893년 7월 25일에 완공되었다. 고대부터 시도는 해왔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실현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알프레드 노벨이 상용화한 다이너마이트 덕분이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그리스 정부는 이 운하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고자 했고, 프랑스 사업가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파나마 운하 건설이 실패로 끝나고 주관 회사가 파산하면서 이 사업 역시 중단되었다. 사업은 1881년 건설사에 99년간 운영권을 주는 조건으로 재개되었으며, 1882년 4월 그리스 국왕인 요르요스 1세가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중간에 초기 자본금인 3천만 프랑이 순식간에 고갈되고 500프랑의 액면을 가지는 채권 6만장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려는 계획도 채권이 절반도 팔리지 않아서 무산되는 바람에 회사 대표가 파산하고 자금을 빌려준 은행도 파산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1년 만에 완공하기는 했다.

3. 한계점

파일:코린토스 운하.jpg
운하 전경
코린토스 운하는 예측한 것과는 달리 수요가 미약했다. 연간 물동량이 400만톤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한참 뒤인 1906년에도 50만톤에 불과했다. 1913년에는 150만톤으로 증가했으나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물동량이 크게 감소했다.

우선 운하의 폭이 너무 좁아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없었고, 60m~70m에 도달하는 깊은 계곡처럼 만들어진 운하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코린토스 만과 사로니코스 만의 조수간만 시간차로 인해 운하의 유속이 빨라 선주들이 운하 이용을 꺼렸다.

그리고 지진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운하를 건설하면서 만들어진 운하 양 옆에 있는 80도 경사를 자랑하는 수준으로 깎아지른 석회암 절벽이 양옆에 있어 산사태에 취약하다. 얼마나 운하벽이 취약한지 코린토스 운하가 개통하자마자 산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1894년 11월이 되어서야 운하의 정상적인 이용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더해서 운하를 선박이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항적이 운하의 양쪽 벽을 침식시키는 바람에 산사태가 추가로 발생할 위험이 높아져서 전체 운하 길이의 절반 이상의 구간에 걸쳐서 수변을 따라가며 165,000㎥의 석재를 사용해서 옹벽을 건설하면서 추가적인 보수비용이 투입될 정도였다. 이런 식의 보수 공사가 1회만 있던 것도 아니라서 1893년부터 1940년까지의 기간동안 운하의 양쪽 벽면의 안정화를 위해 유지보수가 필요해서 총 4년간의 기간동안 운하가 폐쇄되었다. 심지어 2021년 초에도 산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운하가 폐쇄된 후에 긴급조치 후에 2022년 6월부터 10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임시운영한 후 다시 폐쇄되었다가 본격적인 수리 및 안전조치 추가가 이루어진 후 2023년 6월 1일에 코린토스 운하가 다시 정상운영을 시작했을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절벽지대 위의 고지대에서 홍수등의 원인으로 운하로 쏟아지는 폐기물도 매우 많았다. 1923년 한 해에만 41,000㎥ 분량의 쓰레기와 폐기물이 운하로 유입되었고, 이를 제거하는 데 2년이 걸렸다.

기본적으로 운하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만 따져봐도 주기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한데다가 운하의 양쪽이 절벽으로 구성된 특성상 전쟁이나 테러로 인한 인위적인 파괴나 손상이 발생하면 운하가 쉽게 폐쇄된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그리스 침공으로 나치 독일군이 진격해올 때 코린토스 운하 위를 지나가는 교량을 연합군이 폭파하는 바람에 교량의 잔해가 운하를 가로막은 적이 있으며 1944년 10월에 나치 독일군이 전황 악화로 그리스에서 철수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작하여 코린토스 운하의 절벽을 폭파해서 운하를 막아버리고 그 위에 교량을 폭파해서 잔해를 투기한 후 증기 기관차나 기타 중요 시설물과 교통 수단으로 이루어진 잔해를 추가로 뿌리는 방법으로 코린토스 운하의 운영을 장기간 중단시켰다. 워낙 파괴범위가 넓고 증상이 심각해서 전쟁 이후에나 코린토스 운하의 복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미국 육군 공병대의 노력으로 1947년 11월부터 운하 복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48년 7월 7일부터 흘수선이 얕은 작은 선박의 통행이 가능해졌고 1948년 9월에서야 코린토스 운하의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해졌다.

4. 운영

파일:코린트 그리스 터키 1.jpg
크루즈 선박 통행 사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우회하는 항로를 거치지 않아도 되므로 항로 단축거리가 700km이나 발생하지만 흘수선이 7.3m 이하, 선폭이 17.6m 이하인 선박만 통행이 가능하므로 현대적인 대형 선박은 코린토스 운하를 통과할 수 없다.

운하의 통행방식은 일종의 호송대 방식으로 양쪽에 선박 집단을 만들어놓고 일방통행식으로 시간에 맞춰서 호송대를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가며 일정 수준 이상으로 큰 선박은 예인선으로 견인해서 통과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본격적인 상업용이나 운수용으로는 코린토스 운하를 사용하지 않으며 주로 관광용으로 관광용 선박이 이용하게 되며 1년에 약 11,000척이 코란토스 운하를 통과한다.

2019년 10월 대형 크루즈 선 브레마(Braemar)호가 코린토스 운하를 통과했다. 이 배는 선체 폭이 22.5m에 달하는 큰 배인데, 운하의 수면부위 폭 25m에서 겨우 2.5m의 여유를 가지고 통과한 것이다. 이로 인해 코린토스 운하를 통과한 가장 큰 배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

5. 여담

코린토스 운하가 만들어지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반도가 아니라 엄밀하게는 이 되었다. 물론 김포섬처럼 섬으로는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코린토스 운하 위로 철도, 도로, 고속도로가 교량을 통해서 지나가므로 육상교통로는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코린토스 운하의 중앙부에 절벽이 위치하므로 번지점프의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