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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알프레드 노벨 Alfred Nobel | |
본명 |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 |
출생 | 1833년 10월 21일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스웨덴 스톡홀름 | |
사망 | 1896년 12월 10일[1] (향년 63세) |
이탈리아 왕국 산레모 | |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화학자, 발명가, 기술자, 기업인, 자선가 |
부모 |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 (1801~1872) 어머니 안드리에트 노벨 (1805~1889) |
형제자매 | 형 로베르트 노벨 (1829~1896) 형 루드비그 노벨 (1831~1888) 남동생 에밀 노벨 (1843~1864)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불가지론 → 무신론)[2][3]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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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화학자, 발명가, 기술자, 기업인, 자선가.2. 생애
어린 시절부터 폭약에 관심이 많아서, 깡통에 흑색화약을 꽉꽉 채워넣고 터트려서 대폭발을 일으키고 온 동네를 난리나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노벨도 크게 다쳐서 한 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아들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도 발명가로서 크림 전쟁 당시 동갑 친구 모리츠 폰 야코비와 같이 기뢰와 지뢰를 개발해 러시아 제국군에 납품한 바 있고, 염산화약이란 것도 개발했던 인물이었다. 1855년 영국군이 이 수중 기뢰로 어마무시한 피해를 당했고, 한동안 영국 해군 함대가 무수히 불타고 터진 그 바다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러시아 제국은 그에게 보상하지 않았고 승자인 연합군에게도 찍혀서 무기공장은 파산했다. 다행히도 노벨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무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계속 연구할 수 있었다. 채권자들이 공장을 인수받았으나 생산품이 워낙 전문적이고 고난도의 영역인지라 자기들도 뭘 어떻게 굴려야 할지 알수가 없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벨 형제들에게 채무의 일정 부분 변제를 조건으로 실질적인 경영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노벨과 두 형은[4] 유럽 각지에서 온갖 일을 하며 빚을 갚으면서 돈을 모아 공부해야 했다.
나중에 러시아 제국 바쿠 현(Бакинская губернія)의 바쿠[5] 유전을 두 형과 함께 개발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쿠 유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다 타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좀 많이 입었다고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약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질을 제조하는 공장을 환영하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에 달군 쇠를 넣어 보이는[6] 등 안전성을 홍보했다고 하는데 그다지 믿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게 공장을 지어 잘 돌아가는 듯 했으나, 1864년 9월 공장이 폭발해서 간부인 동생 에밀과 직원 4명 및 행인 1명이 사망하는 참사 이후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으며 배상을 치른 다음 할 수 없이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그곳에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에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다가 1872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벨은 폭약을 안전하게 만드는 연구를 해야 했고, 마침내 1866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초반에 약간의 저작권 분쟁도 있었지만 폭발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매우 안전하고[7] 폭발력을 조절하기도 편하며 취급하기에도 편리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업에 쓰이는 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쟁터에도 투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신나게 날려버릴 때 참 많이 썼다. 노벨이 프랑스군에게도 영업을 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거절했다는 썰도 있다. 어찌됐든 이 덕에 노벨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후 무연화약의 발명을[8] 두고 특허권 분쟁으로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 시골에서 나머지 5년을 살다가 1896년 세상을 떠났다.[9]
그의 막대한 재산을 두고 친척들이 서로 차지하려 소송을 했으나 결국 그의 뜻대로 노벨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만든 다이너마이트의 군사적 사용에 회의감을 느꼈고, 인류에 공헌을 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부하여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정설이다. 반면 형 루드비그 노벨이 죽었을 때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고 오보를 낸 신문에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칭해진 것에 충격을 받고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해당 오보의 원본이 발견, 확인된 바가 없어서 근거없는 풍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 평가
사실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진짜 전쟁에 투입된 것은 콜로디온과 니트로글리세린을 배합한 발리스타이트(Ballistite).[10] 이는 노벨이 어떻게 하면 다이너마이트를 강력한 군사 무기로 쓸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만들어진 대작이다. 그렇다고 노벨이 전쟁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으니 이제 다들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사이좋게 지내겠지?"라는 생각이었다. 허나 비슷한 생각을 했던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의 개틀링 기관총이 그랬듯, 두 사람의 발명품은 모두 훌륭한 살상 무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의 이상이 비슷하게라도 이루어진 것은 핵무기가 개발되어 상호확증파괴 개념이 성립한 이후다.노벨의 명성은 오히려 다이너마이트보다도 노벨상의 제정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안전한 폭탄을 만들었다' 정도의 업적으로 백 년 이상 이름을 기억해 줄 만큼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니트로글리세린 합성자인 아스카니오 소브레로의 이름을 세상이 전혀 기억해 주지 않는 것[11]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의 유명한 말인 "내 발명품이 평화 조약보다 더 빠른 평화를 불러올 것이다"는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이 노벨에게 평화 회의 참석을 부탁했을 때 대꾸한 말로 유명하다. 현대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벨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과거엔 독가스나 기관총이 평화를 만들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으며, 지금도 핵무기의 공포로 인해 유지되는 평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다이너마이트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였을법한 연발 화기들을 개발한 리처드 조던 개틀링이나 하이럼 맥심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 이런 생각이 1차대전 이전엔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5. 가족관계
- 임마누엘 노벨 (1801 ~ 1872) :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건축학교 졸업 후 평생 사업가/발명가의 길을 걸었다. 초기에는 사업 성공을 거두면서 꽤 잘나갔고 유명해졌지만, 공장이 화재로 인해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다.[12] 하필 그 당시 임마누엘은 사업을 한창 확장하고 있어 이곳저곳에서 빌린 부채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컸다. 빚을 갚기 위해 온 가족들이 동분서주하던 중에, 러시아 시장의 미래를 보고 그곳으로 진출하기로 마음먹는다. 러시아로 건너가 무기제조/납품 사업을 하며 당시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선전에 크게 기여한다. 사실 임마누엘은 이전의 트라우마도 있기도 하고 전쟁이 끝날 경우를 생각하여 사업 확장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부채변제 보증서까지 써주면서 공장 확충을 강권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전쟁을 종전하면서 보증서를 무효화시키고 만다. 결국 임마누엘은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러시아에서의 모든 사업에 손을 떼고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이후 아들들과 함께 니트로글리세린 연구에 몰두하다가 공장 폭발 사고로 막내아들 에밀을 잃고 그 충격으로 몸져 누웠으며 화약과 관련된 일에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3남 알프레드가 화약을 계속 연구하는 것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과학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여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합판 개선 연구에 몰두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 로베르트 노벨 (1829 ~ 1896) : 임마누엘 노벨의 첫번째 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큰형. 상기 설명되었듯이 집안의 장자로서(작격엔 -로서)어려운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러 이곳저곳 다니는 등 상당히 고생하며 성장했다. 나중에 회고하기를 “언젠가 하루종일 일하며 번 돈을 퇴근길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집에서 배고파 울고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었다.” 라고 회고했을 정도. 나중에도 아버지가 러시아를 떠날 쯤에 로베르트는 루드비그, 알프레드와 함께 러시아에 남아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여러 사업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의 빚을 갚느라 고생한다. 동생 루드비그와 함께 석유사업에 참가했고, 램프 등유와 조명 제작에 관심이 많아 관련 제품을 발명했으며 그 외 이런저런 제품을 발명하는 등 아버지처럼 평생을 사업가이자 발명가로써 살았다.
- 루드비그 노벨 (1831 ~ 1888) : 임마누엘 노벨의 두번째 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작은형. 큰형인 로베르트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러시아에 머무를 때는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면서 “북유럽의 록펠러” 라는 별칭도 붙었다고 한다. 소련-아제르바이잔 최대의 유전 지대인 바쿠 유전 지대의 개발도 그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 외에 세계 최초로 유조선을 만들었으며, 석유를 공급하는 송유관 개선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신문에서는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 라고 오보가 뜨기도 했으며, 알프레드는 큰 충격을 받아 자신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노벨상을 구상했다고도 전해진다.
- 에밀 노벨 (1843 ~ 1864) : 임마누엘 노벨의 막내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일한 동생. 형제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과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 공장을 들락날락거리며 공장 내 제품을 꼼꼼이 훑어보고 연구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셋째 형 알프레드와 같이 니트로글리세린 연구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화약공장 폭발 사고에 휘말리면서 목숨을 잃었다. 노벨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일찍,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 그때 향년 21세였다.
6. 기타
- 노벨은 스웨덴인이었지만 정작 일생 동안 스웨덴에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으며 이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부유해지자 독일 제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등지에 집을 구해 돌아가면서 살았다. 빅토르 위고는 노벨을 "백만 달러를 가진 방랑자"라고 불렀을 정도. 다만 노벨의 공장은 에밀의 죽음 이후 스웨덴에서 재건되었고 이후 독일인의 투자로 독일로 옮겨가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다이너마이트 발명에 밀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그의 회사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근무 여건들을 생각할 때 매우 파격적으로 직원들의 급여와 복지 수준이 높았다. 말단 사원이나 공장 막노동자조차 다치게 되면 의무실로 가서 의사에게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는 노벨 가 형제들 모두가 다 똑같았다. 알프레드 노벨의 큰 형인 로베르트 노벨은 본래 총기제작자였다가,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하는 도중에 망해가던 석유 회사 한 곳을 견학하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로베르트가 석유의 수송을 위해 송유관을 설치하자 기존에 석유 배럴을 실어나르는 업무를 하던 마차의 마부들이 실직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게 됐다. 송유관에 대한 사보타주 시도까지 일어나는 등의 마찰이 있었는데, 로베르트는 실직자 신세가 된 마부들 전원을 송유관을 경비하는 용역으로 재고용하는 것으로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고용 조건을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등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병으로 쓰러진 이후 회사를 그의 큰 남동생이자 노벨 형제의 둘째인 루드비그 노벨에게 물려줬다. 루드비그는 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함은 물론, 주말을 보장해주고 직원용 기숙사를 설립하였으며, 직원들을 위한 테니스장을 설치하였다. 심지어는 회사가 있는 러시아 제국령 아제르바이잔 바쿠 현의 혹독한 기후로 인해 건강을 해친 형의 선례를 생각해서 회사 곳곳에 나무를 심는 등, 직원들에 대한 복지를 크게 증진시켰다. 그야말로 난형난제인 셈이다. 참고로 루드비그 노벨은 우리가 아는 유조선을 처음 구상하고 설계한 인물이기도 하다.
- 그는 심장병이 있어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약으로 먹었는데 현대 의학에서도 협심증 및 심근경색 등 심장질환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한다.
- 노벨은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교 모임도 멀리한 그 시대의 가장 소박한 세계 최고의 갑부로 유명했다. 그 때문인지 특별한 사생활의 논란도 없이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반대하여 끝내 헤어진 적도 있다. 프랑스에서 여자를 만나 한 차례 사귄 적도 있으나 여인의 사망으로 인해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그밖에 너무나도 짝사랑하여 1년에 216통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상대는 노벨을 개무시했던 적도 있다. 우습게도 노벨이 죽고 나서 노벨상으로 유명해지자 그 편지를 팔아 돈을 벌던 그 여성은 노벨의 아내로서 막대한 재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뻥을 치다가 실컷 욕을 먹었고 말년에는 정신 이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 외에도 중년의 노벨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의 조언으로 베르타 킨스키(1843–1914)라는 이름의 여비서를 고용하였고 서로 연인관계로 발전하나 싶었는데, 그녀는 첫사랑을 찾아 떠났다가 후에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노벨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반전 문학가로 활동하여 <무기를 버려라>는 책을 쓰면서 ‘인류가 총과 더 강한 무기에 집착하는 한 평화는 없다’라는 주장을 했고 이런 활동으로 1905년 제5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여자로는 2번째[13]이자 여자 홀로 단독 수상이다. 또한 생전의 노벨을 직접 만나본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다.
[1] 노벨상 시상식을 매년 그의 기일인 이 날 개최한다.[2] "... He declared himself an agnostic in his youth, an atheist later" / Michael Evlanoff · Marjorie Fluor, "Alfred Nobel, the Loneliest Millionaire" (1969), 88쪽, # #[3] "- Människan Alfred Nobel -", biphost.spray.se[4] 막내 에밀은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삼형제들은 에밀이 자기들처럼 고생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할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학비를 지원하였다.[5] 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6] 사실 노벨이 니트로글리세린의 특성을 잘 알아서 이런 곡예를 해보인 거라고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충격을 가하지 않는 이상 불에 넣어도 타기만 한다. 물론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된다. 이런 거 별거 아니네 따라했다가 시체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죽은 사람이 해외에 여럿 있다.[7] 다이너마이트는 순수한 니트로글리세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 강한 충격에도 폭발하지 않을뿐더러 뇌관을 제거하고 불을 붙이거나 화염에 넣어도 연료처럼 서서히 타들어간다.[8] 1887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이용한 신형 무연화약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했다. 다만 노벨이 만든 발리스타이트가 인류 최초의 무연화약인 것은 아니고, 프랑스의 화학자 폴 비에유가 1884년에 만든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에테르화한 니트로셀룰로오스, 파라핀으로 만든 B화약(Poudre B)이 인류 최초의 무연화약이다.[9] 그의 큰형 로베르트도 같은 해에 죽었지만 몇개월 일찍 죽어서 알프레드가 형제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10] 바리스타이트로도 불리며 더블 베이스 무연화약의 일종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이의 채택을 제안했으나 프랑스 군부는 이미 폴 비에유의 싱글 배이스 무연화약인 B화약을 쓰고 있어서 이를 거부했고, 이에 노벨은 이탈리아에 공장을 세워 이탈리아에서 이를 생산했다.[11] 이탈리아의 화학자. 생몰기간 1812–1888. 그래도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큰 돈을 벌고 나서 그를 잊지 않고 경제적 보상을 하기도 하며 우대한 바 있다.[12] 당시 그의 아내가 3남 알프레드를 임신중이었다.[13] 첫번째는 1903년 마리 퀴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