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24년 | |||
사망 | 1779년 10월 12일 (향년 55세)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64년 3월 18일 ~ 1767년 1월 23일 | |||
2차 | 1774년 9월 ~ 1777년 10월 1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68년 10월 28일 ~ 1769년 11월 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렉산드루 마테이 기카 어머니: 헬레나 유프라지오티사 | ||
자매 | 카테리나, 디미트리에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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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79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제79대 보이보드.2. 생애
아버지 알렉산드루 마테이 기카는 왈라키아 공국 74대 보이보드이자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역임한 마테이 기카의 아들로, 1741년 코스탄티니예에서 러시아 제국과 내통한 혐의로 참수되었다. 형제로 그리스의 헤트만 드미트루 술게아로글루의 부인인 카테리나와 왈라키아 공국 91대 보이보드 그리고레 4세 기카의 아버지 디미트리에가 있었다. 몰다비아 보이보드이자 왈라키아 공국 73대 보이보드 그리고레 2세 기카는 그의 삼촌이었다. 1764년 3월 29일 그리고레 칼리마치를 대신하여 몰다비아 보디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세금 징수를 정례화하고 특별세 남용을 종식함으로써 과중한 세금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지지아 강 인근 치피레슈티에 펄프 공장을 설립했으며, 메트로폴리스 인근에 학교를 세웠다.1767년 1월 23일 그리고레 칼리마치로 대체된 뒤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하다가 1768년 10월 28일 사촌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가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그러나 1769년 11월 5일에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러시아 제국으로 끌려갔다. 1774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평화가 성립된 뒤 풀려난 그는 그 해 9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775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러시아와 비밀리에 협상해 몰다비아 북서쪽 포아르타 일대를 장악하고 부코비나로 칭했다. 이리하여 체르너우치, 스토로지네츠, 푸트나[1], 그리고 수체아바 상당 부분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저들이 점령한 지역은 부와 가치 측면에서 남은 몰다비아를 능가한다"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만행을 좌시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가 강력하게 반발해 협약이 깨지면, 가뜩이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자국이 더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을 우려했다.
1777년 9월, 압뒬하미트 1세는 집행 대리인인 아흐메트 카라 히살리아가를 몰다비아에 파견했다. 그는 몰다비아의 수도 이아시에 도착한 뒤 병에 걸린 척하면서 역대 튀르크 총독이 거주하는 베일리츠 저택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레 3세가 10월 1일에 문병하러 찾아가자, 아흐메트는 무사들을 시켜 그를 곧바로 체포한 뒤 폐위를 선언했다. 그 후 10여 일간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던 그는 10월 12일 이아시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콘스탄틴 모루지가 몰다비아의 새 공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