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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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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
몰다비아 제29대 보이보드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
Ioan II Iacob Heracl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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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jpg
출생 1527년
로도스/사모스/히오스/크레타/몰타 동부 비르키르카라
사망 1563년 11월 5일 (향년 36세)
몰다비아 공국 수체아바
재위 몰다비아 보이보드
1561년 11월 18일 ~ 1563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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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이오안 헤라클리데스 바실리코스(양아버지)
어머니: 미상
자녀 키프리안 바질리크(양자)
가문 헤라클리드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
2.1. 기원2.2. 초년기2.3.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탐하다2.4.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행적2.5.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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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29대 보이보드.

2. 생애

2.1. 기원

그리스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본인이 자신의 기원과 초기 생애에 대해 상충되는 설명을 여러 차례 밝혔고, 일련의 상충되는 가계도를 제시하면서 혼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역사가 안드레이 니콜라에 피피디(Andrei-Nicolae Pippidi, 1948 ~)는 그를 "자신의 출신과 신분을 거리낌없이 위조해 출세를 거듭한 전문적인 사기꾼"이라고 묘사했다.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총리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는 그를 "비정상적인 인물로, 존재하는 모든 군주의 왕좌에 대한 관리를 주장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출생지 역시 불분명하다. 별도의 상충되는 공문에서, 이오안은 자신의 출생지가 로도스 또는 사모스라고 밝혔고, 다른 공문에서는 키오스크레타라고 주장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시칠리아 왕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1558년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에서 본인이 공개한 가계도에 따르면, 그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집권 가문이었던 브란코비치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몰다비아 보이보드 작위를 주장할 때는 자기가 슈테판 3세의 조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왕국키프로스 왕국의 통치 가문이었던 뤼지냥 가문의 후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로도스 기사단몰타 기사단과 연관성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오안 본인이 1548년에 자기가 로도스 가톨릭 대교구에 속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 기사단의 기록에서는 그를 'Basilicus Melitensis' 또는 'Basilico Maltese' 등으로 기술하는 등, 몰타 출신이라고 밝혔다. 몰타의 한 연대기에서는 그가 몰타 동부 지역의 도시인 비르키르카라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했다. 루마니아의 여러 연대기는 그를 어부의 자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그를 폭군으로 매도한 연대기 작가들의 악의적인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2.2. 초년기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인문주의자, 시인, 루터교 목사인 크리스티안 셰사이우스(Christian Schesaus, 1535 ~ 1585)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쪽 지역에서 통용되는 '아르골리스' 그리스어를 익혔고, 나중에 이탈리아에 유학간 뒤 최대 6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학자 헤르모도루스 레스타르쿠스에게 히오스에서 교육받았다고 한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이온 네쿨리스(Ion Neculce, 1672 ~ 1745)는 그가 브란코비치 가문의 하인이 되었다가, 자기가 1493년부터 1502년까지 명목상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맡았던 요반 브란코비치의 조카이자 이오안 헤라클리데스 바실리코스의 양자라는 내용의 서류를 위조해, 브란코비치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주장했다. 교황청 외교관인 안토니오 마리아 그라치아니는 그가 바티칸 도서관에서 필사자를 맡았다고 밝혔다. 반면, 니콜라에 이오르가는 이오안이 스페인에서 성장기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이오안은 나중에 프랑스로 넘어간 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및 종교개혁가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1493 ~ 1555)를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종교 개혁 이념을 소개받았다. 1548년 몽펠리에 대학교에 입학한 뒤 의학을 공부했다. 당시 대학 동창생이었던 식물학자 카롤루스 클루시우스(Carolus Clusius, 1526 ~ 1609)는 그의 이름을 '자크 마르게티(Jacques Marchetti)'로 밝히면서, 그가 난잡한 연애를 했으며 결투를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입양아에게 옷장이 떨어지도록 해 죽여버렸다고 주장했다. '마르케티'는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프랑스를 떠나야 했는데, 클루시우스는 그의 범죄적인 생활 방식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위그노 탄압이 극렬해진 것에 불안을 느껴 프랑스를 떠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랑스를 떠난 이오안은 개신교도인 바덴 변경백 필리베르트의 보호를 받았고, 나중에 루터교가 지배하는 지역인 어퍼 작센 일대를 여행했으며, 슈바르츠부르크 백작 귄터, 루터교회 신학자이자 마르틴 루터의 동지인 필리프 멜란히톤과 교류했다. 1553년 카를 5세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브뤼셀을 방문했고, 1554~1555년 전역 때 플란드르의 테루안에서 벌어진 공방전에 참전했으며, 1554년 8월 13일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렌티 전투를 치렀을 때 신성 로마 제국 소속으로서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연대기 작가 장프랑수아 르 프티에 따르면, "그리스 신사이자 대장인 바실리 마르셰"는 결정적인 반격을 가해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가 렌티 전투를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1555년 10월 22일, 카를 5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사모스와 파로스에 대한 세습권을 가진 궁정백으로 선임했다. 그 후 이오안은 자신을 사모스의 데스포티스ㅣ자 파로스 변경백이라고 칭했으며, 황제로부터 연금을 지불받고 군사 수행원을 받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그는 테루안 공방전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전쟁 연대기인 <그들이 테로바눔이라고 부르는 마리니족과 헤딘 족 정복에 관하여(De Marini quod Terovanum vocant atque Hedini expugnatione)>를 집필해 카를 5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에게 바쳤다. 뒤이어 <첫번째 군사 전략서(Artis militaris liber primus)>와 <군사 전략집(De arte militaria liber)>을 연이어 출간했다. 그는 이 책들에서 스페인의 보병 전술인 테르시오를 무적의 전법이라고 극찬했다.

1556년 비텐베르크에 정착한 이오안은 독일 고전학자 요아킴 카메라리우스(Joachim Camerarius, 1500 ~ 1574), 독일 인문학자이자 종교 개혁가 카스파 푸세르(Caspar Peucer, 1525 ~ 1602), 교황 특사였다가 개신교 개혁가로 전향한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Pier Paolo Vergerio, 1498 ~ 1565)와 교류했다. 카롤루스 클루시우스에 따르면, 이오안은 비텐베르크에서 이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정교회개신교를 통합할 마음을 품고,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해 중반, 이오안은 폴란드 복음 교회의 문제에 관여했다. 그는 자기를 "정직하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칭찬한 멜라히톤의 추천서를 가지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으로 건너가 로스토그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1556년 11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이동한 그는 프로이센 궁전에서 환대받은 뒤 리투아니아의 총리 미콜라이 라지비우를 알현했다. 1557년 빌뉴스에서 얀 라스키를 포함한 폴란드 개신교 인사들과 교류한 뒤, 소폴란드 일대를 여행했다. 1557년 후반에 크라쿠프에 머물면서 여러 개신교 운동가들과 친분을 맺었고, 폴란드 복음주의 교회와 칼뱅파를 폴란드 국립 교회로 재통합하자는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2.3.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탐하다

당시 폴란드에는 몰다비아 공국 제28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몰다비아 보야르가 여럿 있었다. 이오안은 이들과 접견하면서,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1558년, 그는 자신이 계보상으로 알렉산드루 4세의 부인이자 전임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의 장녀 룩산드라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얀 라스키의 후원자 중 한 명으로, 몰다비아 공략에 관한 계획을 가지고 자기에게 접근한 키프리안 바질리크를 양자로 삼았다. 이후 폴란드 칼뱅파와 알렉산드루 4세에게 반감을 품은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몰다비아로 향했다.

니콜라에 이오르가에 따르면, 이오안은 알렉산드루 4세의 궁정에 손님으로 와서 자신의 계보를 꾸며냈고, 카를 5세 휘하에서 맹활약한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밝혀 알렉산드루 4세 및 궁인들을 매료시켰지만, 프랑스에서 저지른 범죄는 숨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인 궁정 의사 조르지오 비안드라타, 몰다비아 정교회 총대주교 요아시프 2세와 공모해 알렉산드루 4세를 독살하려 했지만 발각당하자 몰다비아에서 탈출한 뒤 동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기회를 엿보던 그는 1560년 3월 3일 합스부르크 제국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 경의를 표했고, 5월에 사절단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내 자신이 몰다비아의 진정한 보이보드가 되게 해준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으며, 공물을 주기적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1560년 후반, 이오안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원정군을 구성했으며, 폴란드 귀족이자 외교관 올브라흐트 라스키에게 몰다비아의 요충지인 호틴 성채의 소유권을 약속하는 대가로 10,000 두카트를 받아냈다. 그는 이 자금을 스페인 아르케부스 부대를 고용하는 데 썼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는 알렉산드루 4세가 폴란드의 봉신으로서 충실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 관계가 파탄날 것을 우려해, 이오안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오안은 루테니아 사령관 미콜라이 시에니아프스키의 군대에게 무장해제된 뒤 몇 달간 구금되었다.

이후 석방된 이오안은 20,000 굴덴에 달하는 뇌물을 오스만 궁정에 퍼부었다. 그 결과, 낙소스 공국의 명목상 공작이자 궁정 권력자 조셉 나치의 회의를 얻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는 걸 용인받았다. 이후 올브라흐트 라스키의 협력을 토대로 자포로제 카자크를 회유해 대규모 병력을 구성했다. 1561년 11월 18일, 스페인 아르케부스 부대와 자포로제 카자크, 폴란드 자원병들로 구성된 이오안의 군대는 베르비아 마을 인근에서 알렉산드루 4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루 4세는 후시로 후퇴한 뒤 다시 맞섰지만 2번째로 패한 뒤 킬리야로 이동했다가, 몰다비아 국고를 가져온 부인 룩산드라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했다. 그러나 1562년 3월 오스만 궁정에 의해 로도스로 추방되었다.

2.4.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행적

알렉산드루 4세를 몰아내고 몰다비아의 수도인 수체아바에 입성한 이오안은 1561년 12월 2일 몰다비아 내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몰다비아 내 개신교도들을 정교회로 강제 개종시켰던 알렉산드루 4세의 정책을 규탄했고, 개신교 교회를 송유주들에게 돌려줬으며, 다른 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개신교도들을 몰다비아로 초대했다. 또한 색슨족 루터교회의 주교를 임명해, 그동안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도록 했다. 그는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알렉산드루 4세가 무차별 살인자이자 정교회 광신자라고 규탄하고, 개신교 선교사 7명을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그를 절대로 지지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는 뒤이어 바슬루이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에서는 루마니아인이 본래 로마인이었다고 암시하며, 보야르들이 조상들의 로마적 미덕에 따라 살도록 격려했다. 또한 부자크에 대한 몰다비아의 통치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뒤이어 왈라키아 공국을 합병한 뒤 그리스를 탈환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고대 다키아를 제건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1562년 2월에는 동헝가리 왕국에 트란실바니아 내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터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헝가리 왕국을 섣불리 공격했다간 그들의 주권자인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무력 행사를 자제했다.

1562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수체아바 외곽에서 거행된 의식을 통해 이오안을 가신으로 인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를 위해 15,000 두카트와 말 100마리를 오스만 술탄의 공식 사절인 페르하트에게 넘김으로써 이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제 자신감을 얻은 이오안은 그해 6월 트란실바니아에 소속된 세케이란트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뒤 몰다비아와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대기 작가 니콜라에 코스틴에 따르면, 이오안은 서포여이 야노시가 중병에 걸려 운신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하자 병사 700명을 이끌고 트란실바니아 국경으로 진군했지만, 서포여이 야노시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트로투스 강변에서 진군을 멈췄다고 한다. 그 후 보야르 오라슈를 보내 서포여이 야노시와 세케이족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면서도, 용병대장 폴 세케이에게 세케이란트의 독립적인 군벌로 활동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서포여이 야노시가 세케이란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면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이오안은 심복 피에르 루셀을 포함한 사절들을 서유럽 국가들에 잇달아 보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결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62년 상반기, 이오안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페트루 1세의 누이인 도브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페트루 1세의 어머니인 치아나에게 사절을 보내 다이아몬드 반지를 예물로 바쳤다. 이에 왈라키아에서도 말 2마리, 보석이 박힌 쿠카 모자, 24,000 두카트를 보내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곧 화려한 결혼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취소되었고, 양국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오안이 페트루 1세를 페위할 음모를 꾸민다는 정보가 치아나에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오안은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직후 폴란드에서 친분을 맺었던 개신교 인사들에게 몰다비아를 방문해달라고 촉구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이에 폴란드의 저명한 칼뱅파 주교 얀 라스키가 찾아와 주민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벌였고, 뒤이어 코트나리에 콜레기움을 설립하고 인본주의 학자 요하네스 좀머를 학장으로 세웠으며, 몰다비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고, 독일의 개신교 인문주의 학자들을 대거 초대해, 몰다비아를 동유럽 종교 개혁의 교육 중심지로 만들려 했다. 또한 로고테테(국무장관)에 루터교를 받아들인 몰다비아 학자 루카 스트로이치가 선임되었다. 그러면서 몰다비아 내 가톨릭 교회 재산을 루터교 신자들에게 넘기는 등 가톨릭 억압 정책도 은밀히 추진했으며, 이혼에 대한 효과적인 금지 조치를 포함한 새로운 법률과 관습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교회 신학자 니콜라에 코스틴은 이오안이 이혼에 대한 금지를 빙자해 몰다비아 신민들을 억압하고, 유물함, 오클리드, 성배를 압수해 금괴로 만들어 신민들의 분노를 샀다고 비판했다.

이오안의 급격한 서구화 개혁과 몰다비아를 동유럽의 개신교 전파지로 삼으려는 계획 추진은 몰다비아 내 정교회 성직자들과 보야르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그는 반대 세력이 준동하는 걸 막기 위해 강경책을 동원했다. 1562년 성 조지의 날(4월 22일)에 잠재적인 보이보드 경쟁자로 여긴 전 스톨니치 안드레이카를 수체아바의 헝가리 수비대의 주관하에 처형하게 했으며, 대 보야르 7명을 체포해 모조리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정교회 성직자들의 반발이 그치지 않자, 그는 개신교를 몰다비아에 전파하려는 계획을 중단하기로 했다. 안드레이카로부터 몰수한 페레데니의 영지를 정교회에 속한 모르 수도원에 반환했으며, 한스 폰 운그나트가 남슬라브어로 번역한 개신교 서적을 몰다비아에 퍼트리기 위해 파견한 볼프강 슈라이버를 박대했다. 또한 주님 공현 대축일에 참석하고, 복음에 입맞춤하기 위해 절하는 등 정교회 의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62년 10월, 서포여이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오안이 페르디난트 1세와 공모해, 트란실바니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으며,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의 모든 도적이 그의 휘하에 모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일한 해결책은 알렉산드루 4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몰다비아에서 용병을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페르디난트 1세는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전력 공백이 발생하자, 이오안은 민심을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1563년 1월 6일 수체아바 대성당에서 정교회 방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몰다비아 '왕'이라는 비전통적인 칭호를 사용했고, 동전 외에도 새로운 왕관과 독특한 인장을 주조했다. 주화에 새겨진 그의 초상화에는 머리띠, 칼, 홀이 그러졌으며, 동전엔 "나라의 아버지이자 데스포티스인 헤라클리스(Herclis Despote Patris Patria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돌아선 민심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도리어 그의 지지층이었던 개신교도들이 그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등을 돌리는 결과만 초래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이자 개신교 신자 마르친 즈보로프스키의 딸과 결혼해 폴란드군의 후원을 받으려 했지만, 보야르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자 취소했다.

1363년 1월, 이오안은 올브라흐트 라스키를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라스키에게 진 빛을 갚는 게 지연되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오안은 그해 2월 호틴에 대한 라스키의 권리를 불인정하고 수비대를 호틴에 배치해 라스키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후 폴란드 왕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기로 하고 지그문트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몰다비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폴란드군 7,000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오안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몰다비아 가정에 두카트라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자,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2.5. 암살

1563년 8월, 자포로제 카자크의 헤트만 드미트로 이바노비치 비슈네베츠키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차지하기 위해 올브라흐트 라스키와 손잡고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오안은 이에 깜짝 놀라 드미트로에게 평화를 제안해 말 1,000마리와 소 수천 마리를 선물로 약속했다. 드미트로는 협상에 응했지만, 나중에 그와 다툰 라스키가 입장을 바꿔 드미트로를 공격했고, 결국 드미트로의 군댄는 궤멸된 뒤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져서 갈고리에 꿰어졌다. 그 후 올브라흐트 라스키는 몰다비아 헤트만 슈테판 7세 톰샤와 동맹을 맺고 이오안에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뒤, 이오안을 수체아바에 가두고 3개월간 공성전을 벌였다. 여기에 보야르들은 이오안의 용병들을 시포테니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초대했다가 매복 공격해 모조리 죽였으며, 슈테판 7세 톰샤는 반개신교 포그롬을 조장해 여러 개신교 가문을 몰살했다.

이오안은 수체아바 내부에서 수비대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려 한다고 여기고, 그들의 지휘관인 데르비치 대위를 처형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수비대의 반감을 샀고, 결국 수체아바 내부의 헝가리 용병대가 반기를 들고 다른 부대들은 그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오안은 항복하기로 하고, 1563년 11월 5일에 정식 예복을 입고 수체아바 성벽 바깥의 아레나 평원에서 슈테판 7세 톰샤와 대면했다. 이후의 전개 과정은 기록마다 상이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7세 톰샤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철퇴를 휘둘러서 이오안의 머리를 가격해 죽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오안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사형 집행자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18세기 연대기는 그의 유해가 푸트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밝혔고, 크리스티안 셰사이우스는 "광적인 군중"에 의해 조각조각 났다고 주장했으며, 요하네스 좀머는 그의 수급이 방부 처리된 뒤 코스탄티니예에 선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1916년, 체르니우치 대주교 티옥티스트 블라예비치의 조카인 슈테반 코치진스키가 수체아바 인근 평원에 세워진 오래된 수도원 정원 근처 공동묘지에서 이오안의 관을 발견했다. 관 뚜껑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Johanes Jacobus Heraclides Basilicus despota dominus, regni Moldaviae, ingratitudine nefanda, proditus miserime trucidatus interit nonis novemberis MDLXIII RIP
몰다비아 공국의 데스포티스 요하네스 야코부스 헤라클리데스 바실리쿠스는 배은망덕으로 인해 배반당하고 처참하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