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483년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사망 | 1546년 9월 3일 (향년 63세) | ||
몰다비아 공국 수체아바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527년 1월 20일 ~ 1538년 9월 18일 | |||
2차: 1541년 2월 19일 ~ 1546년 9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슈테판 3세 어머니: 마리아 | |
형제 | 보그단, 페트루, 엘레나, 일리아슈, 보그단, 보그단 3세, 마리아 크네아즈나, 슈테판 5세 | ||
배우자 | 마리아, 엘레나 브란코비치 | ||
자녀 | 일리아슈 2세 라레슈, 슈테판 6세 라레슈, 콘스탄틴, 룩산드라, 아나, 마리아, 치아나, 이오안 5세 사술(사생아)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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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22대 보이보드.2. 생애
2.1. 초년기
그리고레 우레체(Grigore Ureche, 1590 ~ 1647)의 <몰다비아 연대기>, 이온 네쿨리스(Ion Neculce, 1672 ~ 1745)의 <전승 모음집>, 그리고 디미트리에 칸테미르의 <몰다비아에 대한 설명>은 페트루의 기원에 관한 주요 출처이다. 이 저서들에 따르면, 그는 1483년생이며, 몰다비아 공국 제19대 보이보드 슈테판 3세의 사생아이고, 젊었을 때 생선 무역을 다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갈라치 인근의 브라테슈 호수를 포함하는 광대한 토지의 소유자인 하부 몰다비아 귀족 가문의 일원이라고 추정한다.전승에 따르면, 페트루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이며, 바이아에서 알렉산드루 1세 때부터 로고파트(logofăt, 총독)을 역임한 집안의 일원이라고 한다. 여기에 몰다비아 대주교 그리고리에 로슈카는 그의 사촌이었다. 이온 네쿨리스는 그가 젊었을 때 갈리치 지역의 생선 상인이었으며, 생선들을 마지(maje), 즉 소 4~6마리가 끄는 대형 수레로 운반했고, 이 때문에 페트루 마지룰(Petru Măjerul)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밝혔다.
2.2. 1차 재위기
1527년 1월 12일, 몰다비아 공국 제21대 보이보드이자 페트루의 조카인 슈테판 4세가 사망했다. 슈테판 4세는 생전에 아들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를 낳았지만,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슈테판 3세의 아들인 그가 소규모 귀족, 상인, 자유 농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1527년 1월 20일 수체아바 요새에서 대관식과 기름 부음을 거행했다. 이후 슈테판 4세의 숙청을 피해 망명 생활 중이던 보야르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했고, 그중 일부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초기에 폴란드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1527년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와 몰다비아 중 한 나라를 침공할 시 상호 지원을 제공하는 동맹 조약과 상업 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헝가리 왕국에도 경의를 표해 슈테판 3세가 확보했던 트란실바니아 일부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딸인 아나와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블라드 6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왈라키아와의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1526년 모하치 전투 이후,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헝가리 대귀족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헝가리를 온전히 편입하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서포여이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봉신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했고, 헝가리 왕국은 양분되었다. 페트루 5세는 상황을 쭉 살펴보다가 트란실바니아 내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확장할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1529년 여름, 페트루 5세는 군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비스트리차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그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페르디난트 1세 편을 들은 이들을 징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해 10월 21일, 페트루 5세는 펠디오아라에서 비스트리차를 구하러 파견되었던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고 대형 야전포 50문을 포획했다. 이후 비스트리차 요새를 함락하고, 브라쇼브를 압박한 끝에 4,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가 자기를 돕는 게 목적이 아니라 트란실바니아를 뜯어먹으려는 야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당장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쉴레이만 1세에게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페르투 5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상당한 전리품을 가져갔다.
1530년 말, 페르투 5세는 폴란드 왕국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몰다비아를 지배하려는 열망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꺾기 위해 포쿠티아를 침공했다. 초기에는 페트루 5세가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포쿠티아를 거의 완전히 점령했지만, 1531년 8월 22일 오베르틴 전투에서 폴란드 헤트만 얀 타르노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에게 패배했고, 3개의 상처를 입은 채 몰다비아로 물러났다. 이렇듯 그가 폴란드와 마찰을 벌이자, 헝가리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폴란드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쉴레이만 1세는 불만을 품었다.
1534년, 이탈리아 출신 상인었다가 오스만 재상 이브라힘 파샤의 심복이 된 알로이시오 그리티가 혼란에 빠진 트란실바니아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곳에 갔다가 트란살비나 보이보드 이슈트반 마일라트에게 체포되어 메디아슈에 감금되었다. 페트루 5세는 쉴레이만 1세로부터 그리티를 풀어주라는 명령을 받았고, 가신 후루를 보내 그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루는 그리티를 돕는 대신 그를 유인해 적에게 넘겼고, 적들은 그 자리에서 그리티를 죽였다. 이후 라레슈는 몰다비아에 들어간 그리티의 아들들을 죽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군은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에, 페트루 5세를 당장 응징할 수 없었다.
1538년, 폴란드 왕국은 그를 몰아내고 꼭두각시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실패했다. 이에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쉴레이만 1세에게 그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8월, 쉴레이만 1세는 "몰다비아를 위한 성전(Gazây-i Kara Boğdan)"이라고 칭하며 군대를 일으켰고, 도브로게아 남부에 도착한 뒤 기독교인 시난 켈레비를 페트루 5세에게 보내 당장 자신에게 출두해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다. 보야르들은 승산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조언했지만, 페트루 5세는 파디샤의 명령을 거부하고 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7세가 파견한 왈라키아 병사 3,000명을 포함한 20만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진군해 9월 9일 이아시 인근에서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과 합세했다. 페트루 5세는 보토샤나 인근의 숲이 우거진 드라샤니 언덕에 자리를 잡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첫번째 전투가 벌어진 직후, 여러 보야르들이 그를 배신하고 오스만 제국군에 투항했다. 결국 페트루 5세는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했고, 9월 27일 키세우 성채에 숨었다. 그는 훗날 1546년 헌장에서 키세우로 갈 때까지의 고난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많이 욿었다. 수도원장과 공의회 전체도 나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리고 나는 약속했다. (중략) 선한 성품을 유지하고 승리해 복위할 수 이싸면, 적에게 짓밟힌 거룩한 수도원을 복구하겠다. (중략) 그리고 아버지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나를 존경하고 그들에게 입맞춤을 하며 기도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아버지들이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나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헤어지고, 황량한 곳을 지나며 (중략) 이겨내고 다시 자리에 앉아 약속을 기억했다.
1538년 9월 17일, 쉴레이만 1세는 수체아바에 입성한 뒤 슈테판 3세의 검을 포함한 몰다비아 왕국 금고를 압수했다. 이후 슈테판 3세의 또다른 아들인 슈테판 5세가 쉴레이만 1세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여기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는 즉위한 직후 파디샤를 반드시 알현해 경의를 표해야 하며, 공물은 15,000 굴덴에서 30,000 굴덴으로 2배 늘어났으며, 드네스트르강 우안(티기나와 그 주변 18개 마을) 일대가 오스만 제국에 양도되어 튀르크인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튀르크린들이 새로 정착한 이 지역은 일명 '티하나 지구'로 일컬어져 19세기까지 존재했으며, 몰다비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통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3. 망명기
페트루 5세는 키세우 성채에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호칭을 유지했고, 트란실바니아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할 수 있었으며, 비스트리차 요새 수비대장의 경의를 받았다. 또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몰다비아 내에서 그를 여전히 지지하는 보야르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외교 활동을 통해 오스만 제국군을 물리치고 몰다비아에 입성하고 싶었지만, 지그문트 1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모두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쉴레이만 1세와 대결해가며 그를 복위시키려고 애쓸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쉴레이만 1세에게 편지를 보내 용서를 청했다. 1540년 1월 25일 쉴레이만 1세의 자유 통행 보증서를 받은 뒤 키세우를 떠나 1540년 2월 말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했다. 이후 막대한 뇌물을 쉴레이만 1세의 측근들에게 헌납하며 보이보드로 복귀할 기회를 노렸다.1540년 12월, 슈테판 5세가 보야르들에게 살해된 뒤 알렉산드루 3세 코르네아가 쉴레이만 1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페트루 5세에게 뇌물을 받은 신하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슈테판 5세를 복위하기로 했다. 1541년 1월 9일 쉴레이만 1세로부터 서품기를 받은 후 몰다비아로 떠난 페트루 5세는 브라일라에서 보야르들의 환대를 받은 뒤 갈라치에서 알렉산드루 3세 코르네아를 체포해 처형했다. 여기에 지난날 자신을 배신했던 보야르들인 미후, 트로투샤누, 크라스나슈, 코즈마는 로만 요새에서 체포된 뒤 1541년 3월 11일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루 3세와 보야르들의 수급은 쉴레이만 1세에게 전달되었다.
2.4. 2차 재위기
1541년, 페트루 5세는 쉴레이만 1세의 지시에 따라 파가라슈에서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을 체포해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했다. 1542년 비스트리차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은밀히 참여 의사를 밝혔고, 십자군 수장으로 내세워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2세에게 20만 플로린을 빌려줬다. 그러나 십자군은 1542년 부다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격퇴되었다.이후 페트루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생각을 접고,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프로보타와 라슈카 수도원을 설립했고, 몰도비타 수도원과 비스트리차 수도원을 복구했고, 아토스 수도원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 1546년 9월 3일에 숨을 거두었고, 프로보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사후 아들 일리아슈 2세 라레슈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3. 가족
- 마리아(? ~ 1529): 체르나트 보야르의 딸.
- 엘레나 브란코비치(1490 ~ 1553): 명목상 세르비아 데스포티스인 요반 브란코비치의 딸.
- 일리아슈 2세 라레슈(1531 ~ 1553): 몰다비아 공국 제25대 보이보드.
- 슈테판 6세 라레슈(1532 ~ 1552): 몰다비아 공국 제26대 보이보드.
- 콘스탄틴(? ~ 1553): 1553년 어머니 엘레나가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를 축출하고 그를 보이보드로 세우려 했으나 발각되어 어머니와 함께 피살당했다.
- 룩산드라(1538 ~ 1570): 몰다비아 공국 제27대 보이보드 이오안 1세 졸데아와 초혼, 제28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와 재혼.
- 아나(? ~ ?):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블라드 6세의 부인.
- 마리아(? ~?): 로고파트(logofăt, 총독) 이오안 모빌라의 아내. 미래의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왈라키아 및 몰다비아 보이보드인 시미온 모빌라의 어머니.
- 치아나(? ~ ?):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르체아 5세의 부인.
- 위르겐 바이스: 색슨인 정부.
- 이오안 5세 사술(? ~ 1582): 몰다비아 공국 제34대 보이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