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콘스탄틴 셰르반 Constantin Șerban | |||
출생 | 미상 | |||
왈라키아 공국 | ||||
사망 | 1685년 (향년 ?세) | |||
폴란드-리투아니아 반코비치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654년 4월 19일 ~ 1658년 1월 26일 | |||
2차 | 1660년 5월 ~ 6월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659년 10월 ~ 11월 | |||
2차 | 1661년 1월 말 ~ 2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라두 10세 어머니: 마르기네니의 엘리나 | ||
형제 | 아나(또는 안쿠사) 라둘레아, 엘리나 | |||
배우자 | 발라사 | |||
가문 | 크라이오베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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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59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57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52대 보이보드 라두 10세와 마르기네니의 엘리나의 아들이다. 누이로 아나(또는 안쿠사) 라둘레아, 엘리나가 있었다.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이자 여행가이며, 연대기 작가인 알레포의 바울에 따르면, 마테이 바사라브는 어린 콘스탄틴의 코에 표식을 새기라고 명령해, 차후에 보이보드에 선임되는 걸 방지하려 했다고 한다. 1644년 기병대의 수장에 부여되는 직책인 세르다르에 선임되었고, 마테이가 동맹을 맺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를 돕기 위해 파견한 6,000 병력과 함께 했다.1654년 4월 9일, 마테이 바사라브가 수도 트라고비슈테에서 봉급 인상을 요구하며 봉기한 세이멘[1] 분견대를 설득하던 중 급사했다. 그 후 콘스탄틴 셰르반이 4월 19일에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 덕분에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고, 1654년 6월 11일 오스만 제국 궁정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초기엔 마테이가 고용한 용병 부대 세이멘과 도로반츠의 호의를 얻으려 노력했지만, 1655년 2월 보야르들의 요청에 따라 용병들의 수를 줄이려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용병 집단은 1655년 2월에 반란을 일으켜 부쿠레슈티를 공략한 뒤, 그 직후 왈라키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보야르들에게 반감을 품었던 농노들과 연합한 뒤 보야르들의 집을 약탈하고 여러 보야르와 그들의 아내, 아이들을 살해했다. 이후 반란군은 고스포다르의 재무관인 크리시아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콘스탄틴은 이 혼란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다가 라코치 죄르지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지원군을 보낸 뒤, 진압군은 즉시 반격에 착수했다. 1655년 6월 26일,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군은 텔레아젠 강변의 쇼플레아 마을 인근에서 반군 20,000명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크리시아는 체포된 뒤 투옥되었다가 트란실바니아로 탈출했지만, 그곳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반란군 잔당은 1657년까지 반란을 이어갔다.
그 후 콘스탄틴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를 주군으로 섬기고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1658년 1월 26일에 콘스탄틴을 축출한 뒤 자신을 왈라키아 전임 보이보드 라두 9세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미네아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한 뒤 라코치 죄르지 2세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659년 10월 트란실바니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로 진군해 게오르게 기카를 몰아냈지만, 그해 11월 슈테파니타 루푸가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고 그를 몰아냈다.
1660년 5월 다시 추종자들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해 게오르게 기카를 밀어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올랐지만, 그해 6월 게오르게 기카가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틴을 축출했다. 1661년 1월 말 몰다비아로 진군해 슈테파니타 루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지만, 그해 2월 슈테파니타 루푸의 반격으로 축출되었다. 그 후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에게 빌려준 돈 일부를 회수하려 했다. 1666년 4월 15일 보르슈 성에서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전에 빌려준 5,000 굴덴과 검은 담비 모피를 사들이면서 지불했던 1,000탈러를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돈을 실제로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신테우 요새와 알레슈드 저택을 라코치 죄르지 2세의 미망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10,000 탈러를 받았다.
1672년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의 전쟁이 터지자, 이걸 기회로 삼아 왈라키아나 몰다비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673년 11월 23일 호틴 전투에서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을 때, 콘스탄틴은 루마니아 기병 100명을 이끌고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를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통치자로 세울 의사가 없었기에, 그는 통치권을 되찾지 못했다. 1675년 우크라이나에서 6,000명의 병력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
1681년 8월 21일, 아내 발라샤와 함께 라브로프에 있는 성 오누프리 교회에 예수의 십자가에서 나온 나무 조각을 기부했다. 이 교회 수도원의 연대기에서, 콘스탄틴은 "몰다비아의 영주, 웅그로블라히아의 주지사, 드네이스터의 통치자, 전체 땅의 군주"로 언급되었다. 1682년 6월 22일 얀 3세 소비에스키로부터 외니오비체 영지를 수여받았다. 1685년경 반코비치에서 사망했고, 성 오누프리 교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콘스탄틴 셰르반은 생전에 스톨니크 니콜라체의 딸 발라샤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발라샤는 성 파라스케비 교회가 소유한 이에나치샤 바카레스쿠 부지에 가난한 기독교인을 위한 숙소를 설립했다. 또한 품위가 있었고, 교양이 뛰어났으며,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트라고비슈테에 있는 "발라샤 돔냐" 예술 고등학교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 Seimen, 창으로 무장하여 궁정을 지킨 용병 보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