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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칸타쿠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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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라키아 카이마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
Constantin Cantacuz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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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콘스탄틴 칸타쿠지노.png
출생 1791년/1793년/1798년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사망 1877년 12월 7일(향년 ?세)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부쿠레슈티
재위기간 왈라키아 카이마캄
1848년 9월 22일 ~ 184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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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게오르게 칸타쿠지노
어머니: 마리쿠차 파르셰코베안카
형제 그리고리에 칸타쿠지노
배우자 조이 슬라티네아누
자녀 이온, 그리고레, 아돌프, 알렉산드라
가문 칸타쿠지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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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

2. 생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출신으로, 출생년도는 사료마다 1791년, 1793년, 1798년 등 다양하게 명시되었다. 아버지는 게오르게 칸타쿠지노이고, 어머니는 반(Ban) 슈테판 파르스코비아누의 딸인 마리쿠차 파르셰코베안카였다. 그는 코스탄티니예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정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하일 칸타쿠지노스 세이타노글루의 후손이었다. 형제 그리고리에 칸타쿠지노는 왈라키아의 보이니크(Vornic: 사법과 내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를 역임했다.

1813년 왈라키아 89대 보이보드 이오안 카라제아에 의해 보야르가 되었고, 왈라키아군 사르다르(Sardar: 군 지휘관) 칭호를 받았다. 1820년에는 아가(Aga)에 발탁되어 왈라키아 경찰을 지휘했다. 1821년 왈라키아에서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봉기가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브라쇼프로 피신했다. 1822년 반란이 수습된 뒤 왈라키아에 돌아왔고, 1828년 그리고레 4세 기카 치하에서 왈라키아의 경찰을 규제하는 최초의 법령을 발표했다. 그 해에 왈라키아 극장의 에포르(Efor)에 선임되었다.

1828년 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도중 러시아 제국군이 왈라키아에 진주했다. 그는 이들을 환영했고, 파벨 드미트리예비치 키셸레프 총독 휘하 관료로 발탁되었다. 1829년 에디르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종식된 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31년, 부쿠레슈티의 왈라키아 경찰 보르니크에 발탁되었고, 이 자격으로 1831년 11월에 치러진 시의회 첫번째 선거를 조직했으며, 11월 28일 키셸레프의 검증을 거친 시장 5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832년에도 여전히 아가로 활동하던 그는 왈라키아에서 횡행하던 산적 이오니타 툰술을 처단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키셸레프에 의해 부쿠레슈티 거리의 포장 및 미화를 감독하는 위원회에 배정되었다.

1834년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알렉산드루 2세 기카 당국의 포스텔닉(국무장관) 및 로고테테스(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838년 <유기적 규제(Органический регломент)>[1]에 왈라키아의 내부 독립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라는 러시아 영사 표트르 뤼크만의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1841년 7월 다뉴브 공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파괴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군사 개입을 촉구하려던 브라일라의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 조직원들을 대거 체포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또한 칼라파트에서 알렉산드루 2세를 대신해 오스만 제국 감독관 후세인 파샤를 맞이한 뒤,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1842년까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성 안나 훈장 2등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을 수여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광의 훈장( نشانِ افتخار)'을 수여받았다.

1842년 10월 7일 알렉산드루 2세가 해외로 망명한 뒤 12월에 군주 선거가 열렸을 때 후보로 나섰지만 188표 중 41표만 득표해 낙선했고,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게오르게 비베스쿠는 처음엔 그를 왈라키아 학교의 에포르로 임명하는 등 대우해줬다. 하지만 그는 반 비베스쿠 정파와 힘을 합쳐 게오르게 비베스쿠의 입법 계획을 가로막았다. 그러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다.

1848년 6월 왈라키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전복되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콘스탄틴은 왈라키아로 돌아갔고, 두 아들 이온과 그리고레는 임시정부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콘스탄틴은 자기 집을 이오안 보이네스쿠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8월에 오스만 사절 술레이만 파샤를 맞이하는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오스만 제국군이 러시아 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왈라키아에 진주하자 일시 피신했다가, 9월 21일 부쿠레슈티로 돌아간 뒤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의 권유를 받아들여 9월 22일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에 발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들 이온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런 종류의 직책을 받지 마십시오!"라고 외쳤지만 묵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콘스탄틴은 압뒬메지트 1세의 지시를 받은 푸아드 파샤의 권고에 따라 혁명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해 코트로체니 수도원에 감금했다. 또한 이전 정권의 핵심인물인 코스타체 아리스티아, 세자르 볼리악, 이온 브라티아누, 디미트리 브라티아누, 슈테판 골레스쿠, 콘스탄틴 알렉산드루 로세티, 이오아사프 즈나고베아누, 보이네스쿠 2세 등을 추방했다. 한편, 그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영지를 약탈하고 방화한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해, 이와 관련된 농민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유배했다. 그리고 급진적인 교사들의 숙청을 시작했으며, 11월 1일 혁명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학교들을 모조리 폐쇄했으며, 왈라키아 정교회 주교구에서 혁명을 동조하는 수도자들을 추방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1848년 11월, 콘스탄틴의 장남 이온 칸타쿠지노가 아버지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러시아군에 소속된 카자크에게 체포되어 코트로체니로 끌려갔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1849년 3월, 또다른 아들 그리고레는 부쿠레슈티의 모물로에서 연극을 조직해 헝가리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동정을 표했다. 이 행사는 오스만 제국의 검열 칙령에 어긋났지만, 콘스탄틴은 눈감아줬다. 1848년 9월 28일, 칸타쿠지노는 푸아드와 함께 임시정부의 노예 제도 폐지를 취소하고 해방되었던 로마인들에게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1849년 2월에는 임시 정부가 140만 탈러를 불법적으로 지출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이 적자를 왈라키아에 있는 혁명가들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여 메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혁명 동안 거의 완전히 파괴된 부쿠레슈티의 러시아 군인 기념비를 복원하기 위한 기금을 따로 마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통치는 명목상으로만 이뤄졌으며, 실제 권력은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와 러시아 위원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뤼더스 백작이 행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왈라키아인들은 러시아군의 유지비를 지불해야 했으며, 오스만제국에 바쳐야 하는 공물이 20% 증가했다. 왈라키아 정부는 300,000 루블의 대출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러시아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자연히 왈라키아인들은 강한 반감을 품고,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곳곳에서 횡행했다.

1849년 6월 카이마캄 임기가 만료된 뒤, 콘스탄틴은 1848년 11월 초 왈라키아 보이보드 후보로 출마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고 러시아 제국에 뇌물을 제공한 바르부 슈티르베이에게 밀렸다. 그 후 슈티르베이 정권에 참여해 대 보르니크(내무 장관)로 진급했으며, 보야르와 소작농간의 거래를 자유화하는 걸 반대하고 계약 노예제와 매우 유사한 임대 제도 하에 농민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카이마캄을 맡았을 때와는 달리 투옥된 자유주의자들을 사면하자고 권고했고, 혁명가 타나시 마코베이가 결핵균성 경부 림프절염에 시달리고 있으니 선처하자고 권고하기도 했다. 콘스탄틴은 슈티르베이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그를 축출하고 자기가 보이보드로 등극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1851년 6월, 그는 라이벌 게오르게 비베스쿠와 함께 프랑스 공화국을 방문해, 슈티르베이를 밀어내고 자기를 보이보드로 세워줄 것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853년 10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크림 전쟁을 치렀다.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왈라키아를 떠난 뒤, 1854년 7월 31일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고르차코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왈라키아의 행정을 콘스탄틴이 의장을 맡은 행정 위원회에 맡겼다. 콘스탄틴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테센 공작이자 합스부르크 제국 장성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루돌프 도미니크에게 편지를 보내 오스트리아군이 왈라키아를 점령하라고 권유했다. 이후 오스만군이 왈라키아로 들어서자, 그는 오스만 지휘관 오마르 파샤를 환대하고 호화로운 마차를 빌려줌으로써, 자기를 카이마캄 또는 보이보드로 선임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오스만 당국은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귀환할 때까지 왈라키아 행정을 맡을 임시 정부를 세우면서, 콘스탄틴과 콘스탄틴 나투렐-헤레스쿠가 이 정부를 이끌도록 했다.

1854년 9월 23일 빈에서 왈라키아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때 자신을 배제하자, 그는 별 수 없이 물러났다. 이후 그는 루마니아 예술계를 후원하며 조용히 지냈지만, 세간에서는 그가 독일 연방의 여러 신문에 자신이 정권을 맡았을 때의 활약상을 칭찬하는 글을 게재하도록 하는 등 권력을 쟁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856년 7월 4일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왈라키아 카이마캄으로 발탁된 뒤 장관으로 선임되었고, 1859년 1월 차기 보이보드 선거에 출마했지만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에게 밀려 낙선했다. 그는 그 대신 국가의회 부의장으로 발탁되었고,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당선을 인정하고 그를 통치자로 인정받기 위한 연설문에 서명했다.

이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정권에 참여한 그는 정부 지출을 급격하게 늘리는 정책에 반대했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62년 6월 20일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초대 총리 바르부 카타르주(Barbu Catargiu, 1807 ~ 1862)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괴한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했을 때 그를 병원으로 운송하기 위해 자기 마차를 제공했다. 1866년 보수파의 반란으로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가 타도되자 정계를 은퇴하고 말년을 조용히 보냈고, 1877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사후 부쿠레슈티의 성 요한 대성당에서 부모와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나중에 성 요한 대성당이 철거되었을 때, 이들의 유해는 벨루 묘지에 이장되었다.

3. 가족



[1] 1831년 러시아 제국이 공포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최초의 준헌법적 유기법. 두 공국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러시아식 법 체계로, 크림 전쟁 이후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