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660년경 | |||
사망 | 1744년 7월 (향년 79~80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03년 10월 4일 ~ 1705년 2월 13일 | |||
2차 | 1707년 7월 31일 ~ 1709년 10월 28일 | |||
3차 | 1716년 1월 5일 ~ 1726년 10월 7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30년 10월 17일 ~ 1731년 12월 25일 | |||
2차 | 1741년 9월 10일 ~ 1744년 6월 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오니차 라코비차 어머니: 미상 | ||
배우자 | 사프타 칸테미르, 아나 데디우 | |||
자녀 | 콘스탄틴 라코비차, 록사나, 이온 라코비차, 미하이 라코비차, 슈테판 라코비차, 아나스타샤 | |||
가문 | 라코비차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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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69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72대 보이보드.2. 생애
1660년경 몰다비아 보야르 이오니차 라코비차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모계 혈통을 통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를 여러차례 맡았던 칸타쿠지노 가문과 친척 관계를 맺었다. 170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3세에 의해 콘스탄틴 두카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노리는 여러 경쟁자들의 암투에 맞서야 했고, 안으로는 보야르들의 권세를 억제해야 했다. 그는 그리스인 추종자들에게 의존해 이들에 대적했으며, 특별세를 계속 부과하는 등 재정 마련에 골몰했다.1705년 2월 13일, 연이은 과세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 및 민중들의 소요로 몰다비아 공국에 불온한 기류가 흐르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폐위되었고, 안티오 칸테미르가 대신 부임했다. 이후 코스탄티니예로 이송된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고자 안티오 칸테미르에 대항할 음모를 꾸몄다. 2년간의 걸친 로비 활동 끝에,1707년 7월 31일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러나 로비 활동으로 쓴 자금을 메꾸기 위해 신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겼기 때문에, 인기가 극도로 없었다. 그러던 1709년 10월 28일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코스탄티니예로 소환되었고,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가 몰다비아의 새 공으로 부임했다.
그 후 수년간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1716년 1월 5일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던 오스만 제국 궁정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적대적인 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시켰다. 얼마 후,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에티엔 드 스테인빌이 프랑수아 에르나우 대위 휘하 세케이인 병사 300명을 몰다비아로 파견했다. 미하이 라코비차는 이들의 기습 공격으로 거의 사로잡힐 뻔했지만 겨우 도주할 수 있었다. 이후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아 이아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 장교 페렌츠를 사로잡아 참수형에 처했으며, 오스트리아군과 협조한 많은 몰다비아인을 학살했다.
이후 미하이는 오스만 제국의 요청에 따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했던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페렌츠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지만, 비스트리차에서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동부 카르파티아 산맥 너머로 철수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에 대응해 몰다비아로 별동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여기에 급료를 지불받지 못한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이 항의하자, 그들이 몰다비아의 보야르 영지들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이에 강한 반감을 품은 보야르들이 오스만 제국 궁정에 그를 쫓아내달라고 호소했고, 결국 1726년 10월 5일에 강제로 폐위된 뒤 그리고레 2세 기카로 교체되었다.
이후 코스탄티니예에서 연금 생활하던 미하이 라코비차는 1730년 10월 예니체리의 정변으로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폐위되면서 극적으로 입지가 바뀌였다. 마흐무트 1세를 새 파디샤로 옹립하고 실절적인 권력을 휘두른 파트로나 할릴은 아흐메트 3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마브로코르다트 가문을 정계에서 배제하기로 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를 폐위하고 10월 15일에 미하이 라코비차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그러나 1731년 예니체리에 의해 파디샤에 옹립된 마흐무트 1세가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입지가 허물어졌고, 1731년 12월 25일 폐위되었다.
이후 10년간 잠자코 지내던 그는 1741년 9월 10일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된 뒤 1744년까지 역임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개인 재산을 비축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신민들로부터 뜯어내는 데 집착해 백성의 원망을 사다가 1744년 6월 8일에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해임된 뒤 그해 7월 8일 코스탄티니예에서 사망했다.
미하이 라코비차는 생전에 몰다비아 보이보드인 콘스탄틴 칸테미르의 딸 사프타 칸테미르와 초혼, 보야르 데디우 코드레아누의 딸인 아나 데디우와 재혼했다. 그는 2차례의 결혼 생활에서 콘스탄틴 라코비차, 록사나, 이온 라코비차, 미하이 라코비차, 슈테판 라코비차, 아나스타샤 등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콘스탄틴 라코비차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를 역임했고, 슈테판 라코비차도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