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35년 | |||
오스만 제국 파로스 섬 마르마라 | ||||
사망 | 1790년 9월 30일 (향년 55세) | |||
오스만 제국 비알라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786년 4월 6일 ~ 1790년 9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페트로스 마브로예니스 어머니: 프레굴리나 | ||
배우자 | 마리아 스카나비 | |||
자녀 | 페트로스, 콘스탄티노스, 조세프, 스마라그다, 록사니, 에프로시니, 솔타나, 엘레니, 랄루 | |||
가문 | 마브로게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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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84대 보이보드.2. 생애
1735년경 오스만 제국 파로스 섬의 마르마라에서 부유한 영주 페트로스 마브로예니스와 프레굴리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파로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집안의 지원에 힘입어 학식을 두텁게 쌓았으며, 군사 기술도 잘 길렸다. 그러던 중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그를 눈여겨본 오스만 제국 해군 대장 하산 예자리리스 파샤의 초대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로 이주했다. 1770년 하산의 후원에 힘입어 오스만 제국 함대의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으로 발탁되었다.그는 드라고만으로서 탁월한 지능과 유연성을 보여주면서 오스만 함대 내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는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라핌 2세를 키오스 대주교인 사모트라케의 디오니시오스로 교체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지만 실패했다. 1770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마니에서 그리스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선동으로 오를로비카 반란을 일으켰다. 하산은 즉시 함대를 이끌고 달려가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하산이 반란에 최초로 가담한 프사라 섬 주민들을 학살하려 하자, 니콜라에는 그렇게 했다간 그의 명예가 실추될 거라며 간곡히 설득했고, 하산은 이를 받아들여 학살 계획을 중단했다. 1775년, 오스만 궁정의 지시에 따라 마니로 파견되어 그곳 주민들을 상대로 세금 납부에 대한 타협안을 논의한 끝에, 마니 지역이 카푸단 파샤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활개치는 왈라키아 산적단을 토벌하려는 하산의 노력을 옆에서 도왔다.
1786년 대총독으로 취임한 하산은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임박했으니 왈라키아에 군사적 재능이 있는 니콜라에를 보이보드로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만 궁정은 이를 받아들여 그 해 4월 6일 미하이 수추를 폐위하고 니콜라에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이때 체레비스 페트라키스가 궁정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4,000 발란디아를 파디샤 압뒬하미트 1세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하산의 꼬드김에 넘어간 파디샤가 오히려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둬서 고문을 가하게 했다. 얼마 후, 니콜라에가 파디샤를 알현하러 여정을 떠났을 때, 근위대 장병들이 고문으로 인해 처참한 상태에 있떤 죄수 체레비스를 데리고 그 앞으로 데려와서 말 발 앞에 엎드리게 했다. 체레비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니콜라에는 묵살했고, 뒤따라오던 하산은 사형 집행인을 불러 그를 참수했다.
니콜라에는 부쿠레슈티 외곽의 샘에서 점토관을 이용해 식수를 가져오는 사업을 성사시킴으로써, 그때까지 디보비차 강에서 식수를 구하던 주민들이 깨끗한 샘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줬다. 또한 도시 외곽에 여름 별장을 지었고, 림니코스 주교 필라레토스를 아기오스 사바스 아카데미(현재 부쿠레슈티 고등학교)의 교육감으로 선임했고, 학교 인쇄기를 확장하도록 했다.
이후 니콜라에는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왈라키아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1788년 4월 몰다비아 공 알렉산드루 입실란티가 러시아 제국 편에 선 오스트리아군에게 생포되자 몰다비아군도 이끌었다. 그는 1년간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는 등 선전했지만, 1790년 7월 26일 칼라파티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왈라키아에서 도주해 불가리아 해안의 비알라로 피신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그가 오스트리아군에 귀순하려 한다고 의심해 처단하기로 결의했다.
니콜라에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하산이 궁정이 니콜라에의 죽음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되자 그의 군대에 합류한다는 구실로 파견대를 파견했다. 니콜라에는 은인이 보낸 파견대를 의심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1790년 9월 30일에 그를 기습해 목을 베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군이 니콜라에의 군대를 포위하면서 저항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니콜라에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로 옮겨져 대중에 공개되었고, 유골은 나중에 친척들에게 전달되었다. 니콜라에는 생전에 마리아 스카나비와 결혼해 페트로스, 콘스탄티노스, 조세프, 스마라그다, 록사니, 에프로시니, 솔타나, 엘레니, 랄루 등 9명의 아이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