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콘스탄티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Μαυροκορδάτος | |||
출생 | 1711년 2월 27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769년 12월 15일 (향년 58세)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730년 9월 15일 ~ 10월 17일 | |||
2차 | 1731년 10월 24일 ~ 1733년 4월 16일 | |||
3차 | 1735년 11월 27일 ~ 1741년 9월 16일 | |||
4차 | 1744년 7월 ~ 1748년 4월 | |||
5차 | 1756년 2월 20일 ~ 1758년 8월 14일 | |||
6차 | 1761년 6월 16일 ~ 1763년 3월 |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733년 4월 16일 ~ 1735년 11월 27일 | |||
2차 | 1741년 9월 16일 ~ 1743년 7월 29일 | |||
3차 | 1748년 4월 ~ 1749년 8월 31일 | |||
4차 | 1769년 6월 29일 ~ 12월 1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어머니: 풀케리아 추키스 | ||
형제 | 이오안, 알렉산드루(이복형제) | |||
배우자 | 스마란다 칸타쿠지노, 예카테리나 로세티 | |||
자녀 | 이오안, 알렉산드루 1세, 드미트리에, 마리아, 예카테리나, 스마란다 | |||
가문 | 마브로코르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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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71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제72대 보이보드.2. 생애
1711년 2월 27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의 풀케리아 추키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이오안, 알렉산드루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박학다식했고,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계몽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30년 9월 14일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역임하던 아버지가 역병에 걸려 사망한 뒤, 9월 15일에 보야르들 끼리의 선거를 통해 보이보드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일, 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용인했던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예니체리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그 후 예니체리가 아흐메트 3세와 관계가 깊었던 마브로코르다트 가문 인사들을 정계에서 배제하기로 하면서, 그는 10월 17일에 폐위되었다.1731년, 예니체리에 의해 파디샤에 옹립되었던 마흐무트 1세가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예니체리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워졌던 미하이 라코비차가 폐위되었고, 그는 1731년 10월 24일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되었다. 1733년 4월 16일,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왈라키아로 돌아가길 희망했고, 코스탄티니예에 로비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 결과 1735년 11월 27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할 수 있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3번째로 옹립된 뒤, 그는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본격적으로 단행했다. 일련의 간접세를 폐지하고 연간 10 탈러의 일반세를 4년 '분기'로 납부하는 정책을 도입했으며, 농민들이 수수료를 내면 한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이동할 권리를 가지도록 했으며, 농노들이 보야르에게 돈을 지불하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보야르들이 이에 대한 불만을 갖지 않도록 농민들이 12일간 그들을 위해 노역해야 하며, '대 보야르'로 지명된 60개 가문은 국가 세금을 면제받도록 했다.
콘스탄틴은 여기에 더해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이스프라프니치(Ispravnic)를 각 지역에 파견해 행정을 돌보고 판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 보야르들이 임의로 지역을 다스리던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적으로 급여를 받는 이스프라프니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보이보드들의 전통적인 개인 금고를 왈라키아 행정부의 금고와 통합했으며, 공직을 맡지 않은 가족 구성원에게 보야르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추진했던 문화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루마니아어 및 문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교를 관리했으며, 루마니아어로 교회 서적을 인쇄했다.
1741년 9월 16일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그리고레 2세 기카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한 후에도 왈라키아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가 농노제를 억제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의 로비 활동에 넘어간 오스만 제국 궁정이 1743년 7월 29일에 그를 폐위하고 형제 이오안을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면서,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야 했다. 1744년 7월 미하이 라코비차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4번째로 선출되어 1748년 4월까지 역임하다가 1748년 4월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자리를 바꿔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3번째로 부임해 1년간 맡다가 1749년 8월 31일에 요르다케 스타브리치에게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1756년 6월 16일 콘스탄틴 라코비차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다섯번째로 선임되어 1758년 8월 14일까지 역임하다가 스카를라트 기카에게 자리를 넘겼고, 1761년 6월 16일 스카를라트 기카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귀했다. 이 시기에 올테니아의 반(Ban)은 크라이오바에서 부쿠레슈티로 옮겨졌고, 크라이오바는 카이마캄(Kaymakam: 군주를 대신하여 행정 임무를 수행하는 오스만 제국 고위 관료)이 군림했다. 1763년 3월에 물러났고, 콘스탄틴 라코비차가 재차 부임했다. 1769년 6월 29일에 4번째로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지만, 그해 11월 5일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해 몰다비아를 침공한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다 한 러시아 장교가 칼을 휘두르면서 머리에 상처를 입고 러시아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이아시로 끌려갔다가 상처가 괴저로 변하면서 1월 15일에 사망했다.
콘스탄틴은 두 번 결혼했다. 1728년에 스마란다 칸타쿠지노와 결혼했지만, 1730년 스마란다가 사망할 때까지 자녀를 낳지 못했다. 1732년 예카테리나 로산티와 두번째로 결혼했고, 세 아들 이오안, 알렉산드루 1세, 드미트리에, 세 딸 마리아, 예카테리나, 스마란다를 두었다. 알렉산드루 1세는 1782년부터 1785년까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역임했고, 드미트리에는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초대 공인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아내인 조이 비베스쿠의 증조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