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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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의 칸 자니베크 칸 | ||
이름 | 보르지긴 자니베크[1] | |
왕조 | 보르지긴 왕조 | |
출생 | (불명) | |
사망 | 1357년, 사라이 | |
재위 | 킵차크 칸 | |
1342년 ~ 1357년 | ||
부친 | 우즈베크 칸 | |
모친 | 타이둘라 카툰 | |
종교 | 이슬람 | |
자녀 | 베르디베크 |
1. 개요
킵차크 칸국의 11대 칸. 부친 우즈베크 칸과 함께 칸국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1356~1357년 사이에 일 칸국의 붕괴 이후 혼란하던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추판 왕조를 멸망시키고 (명목상이지만) 일 칸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자니베크는 아들 베르디베크에게 암살당하였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킵차크 칸국의 황금기는 끝이 났으며, 이후 킵차크 칸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 이른바 '대혼란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2. 생애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342년인데 이때 모친 타이둘라 카툰의 지원을 받아 형제였던 티니베크를 제거하고 칸위에 올랐다.즉위 직후 자니베크는 루스 공국들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전자 중에서도 모스크바 대공 시메온과 그 아들 이반 2세에게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압박을 가하여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하였다.
1342년 말엽부터는 크림반도 연안의 제노바령 흑해 식민지였던 항구도시 카파 포위공격에 나섰다. 도시 함락은 그해 2월 도시구원에 나선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으나, 자니베크는 포기하지 않고 1345~1347년에 걸쳐 다시금 카파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돌면서 킵차크 군은 결국 후퇴해야 했다. 이때 킵차크 군대는 전염병을 이용하여 도시의 수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투석기에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담아 성안으로 쏘아보냈는데, 이후 이들은 카파에서 제노바, 메시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항해하며 중세 흑사병의 최초 전파자들이 되었다.[2]
1342년, 자니베크는 그전까지 면세 혜택을 누리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에 일시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다만 1347년 9월에 다시 면세 특권을 되돌려주었으며 1351년에는 칭기즈 칸 시기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실시하였다.
1356년, 자니베크는 당시 일 칸국의 붕괴로 혼란에 빠져 있던 페르시아를 침공, 추판 왕조의 근거지였던 타브리즈를 정복하고 군주 마렉 아쉬라프를 붙잡아 처형하였으며 또한 차가타이 칸국 방면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일시적으로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1357년에 잘라이르 왕조의 군주였던 우웨이스 1세의 복속 요청을 수락한 이후, 자니베크는 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브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잘라이르 왕조의 영향력이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흑사병까지 창궐하자 통치의 어려움을 직감한 자니베크는 곧장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수도 사라이에 도착했을 때, 자니베크는 갑자기 급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킵차크 칸국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의 사반세기(四半世紀)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아들 베르디베크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부친의 사망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부 러시아 연대기에서는 아예 그가 자니베크를 독살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