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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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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헨리크 1세 브로다티
Henryk I Brodaty
'''
파일:헨리크 1세.jpg
출생 1165년 또는 1171년
폴란드 대공국 실롱스크
사망 1238년 3월 19일
폴란드 대공국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32년 ~ 12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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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비소키
어머니: 크리스티나
배우자 실롱스크의 헤드비히
자녀 4남 3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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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실롱스크 공작으로서 여러 정적과의 대결 끝에 대공위를 획득하고 다수의 폴란드 영지를 확보했다.

2. 생애

1165년 또는 1171년 실롱스크 공작 볼레스와프 1세와 2번째 아내인 크리스티나의 4남으로 출생했다. 3명의 친형 볼레스와프, 콘라트, 얀은 일찍 죽었고, 이복형인 야로슬라프는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1190년경에 유일한 상속인이 되었다. 이후 이스트리아 변경백 베르톨트 4세의 딸인 실롱스크의 헤드비히와 결혼했다. 1201년 12월 7~8일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한 뒤 실롱스크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202년 초, 그의 삼촌이자 라시보르츠 공작인 미에슈코 4세가 그의 영역이었던 오폴레를 공략했고, 뒤이어 실롱스크의 중심지인 브로츠와프를 빼앗았다. 이후 살레시아 공작을 칭했지만,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 크라쿠프 주교 펠카, 브로츠와프 주교 키프리안 등 여러 성직자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그와 협상한 끝에 1,000 그지브나(grzywna)를 보상받는 조건으로 실롱스크 공작위를 넘겨줬다.

1203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벨프 가문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딸 거트루드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지지자인 오토 비텔스바흐와 약혼했기 때문에 호엔슈타우펜 쪽의 잠재적인 동맹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벨프 가문과 동맹을 맺은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1세에 의해 보헤미아에서 축출된 인사들을 자신의 궁정에 받아들였다. 그러던 1204년, 슈바벤 공작 필리프가 그에게 오토 비텔스바흐가 매우 거칠고 난폭하다고 경고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 오토 비텔스바흐와 딸 게르트루트와의 약혼을 파기했다. 이에 오토 비텔스바흐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자신을 향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고, 그들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급기야 1208년, 오토 비텔스바흐는 필리프를 살해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국외로 도피했다.

1206년, 헨리크는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와 협의해 칼리슈를 받는 대가로 루부시를 넘겼다. 1209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하우지차 변경백 콘라트 2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루부시를 빼앗겼다. 이에 헨리크가 분쟁에 개입했고, 콘라트 2세가 1210년 5월 6일에 사망한 후 하우지차 변경백국에서 후계 자리를 놓고 분쟁에 벌어진 틈을 타 1210년 8월부터 1211년 3월까지 원정을 감행해 루부시를 탈환한 뒤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돌려줬다.

한편, 명목상 대폴란드 남서부 공작을 맡고 있었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야 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삼촌이 자기 영지로 여겼던 칼리슈를 헨리크에게 넘긴 것에 반감을 품었다. 당시 16살이었던 오도니치는 일부 대폴란드 귀족들을 회유했는데,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도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교회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도니치에게 가세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당했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헨리크에게 망명했다. 헨리크는 이들을 받아들였고, 오도니치에게 칼리시 공국을 제공했다.

이후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파문을 선고했고, 로마로 사절을 보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를 규탄하는 서신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여러 폴란드 공작들에게 키에틀리츠가 그니에즈노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권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헨리크 키에틀리츠, 브로츠와프 주교, 루부시 주교, 포즈난 주교가 글로고프에 모여서 헨리크의 중재하에 논의했다. 그 결과 헨리크는 파문을 해제하는 조건하에 그니에즈노로 돌아갔고, 그동안 입은 손실에 대한 보상도 받았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실롱스크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실롱스크의 미에슈코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셰크 1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군주가 사망한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권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 교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미에슈코 4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함께 바벨로 들어간 뒤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 16일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헨리크는 루부슈 공작에 선임되었다.

13~14세기에 익명의 실롱스크 수도자가 작성한 <폴스카-실롱스크 연대기>에 따르면, 헨리크는 자신의 모든 유산을 장남 헨리크 2세에게 물려주려 했다. 이에 또다른 아들 콘라트가 반발하면서, 헨리크 2세와 콘라트간의 갈등이 불거졌고, 급기야 내전이 벌어졌다. 헨리크 2세는 독일인들의 지원을 받았고, 콘라트는 폴란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1213년 오폴레 인근의 스투드니카 전투에서 맞붙은 결과, 콘라트가 패배했다고 한다. 19~20세기 초 폴란드 문인들은 콘라트를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 영웅으로 승화시켰지만, 현대 학자들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으며, 콘라트는 1213년 사냥 중에 말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다른 연대기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다고 본다.

1217년, 레셰크 1세와 브와디스와프 3세는 남성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상호 상속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헨리크와 브와디스와프 3세는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우호적 중립을 약속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의 영지를 공격해 오도니치를 쫓아냈고, 1217년 말 또는 1218년 초에 포즈난 주교 파웰의 중재하에 헨리크로부터 칼리시를 인계받는 대가로 독일 제후들을 상대하는 헨리크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1224년, 폴란드 대공 레셰크 1세는 프로이센인이 국경을 습격했을 때 이를 막을 의무가 있던 기사 근위대(stróże rycerskie)가 뿔뿔이 도주한 것에 격분해, 적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 근위대 지휘관을 추방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은 폴란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라이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라이펜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1225년 헨리크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마침 레셰크 1세가 우지차인들의 국경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동진하자, 헨리크는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때 튀링겐 방백이 예기치 않게 루부시를 침공하자, 헨리크는 본거지가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해 회군했다. 레셰크 1세는 동생 콘라트와 함께 맹렬히 추격했고, 드우브니아 강 유역에서 헨리크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유혈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양자는 협상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돌아온 헨리크는 튀링겐 방백의 침공을 잘 막아내 루부시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227년, 대폴란드의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가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내전에서 밀린 끝에 레셰크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레첵 1세는 이 기회에 아들이 없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대폴란드를 상속받기로 마음먹고 중재에 나섰다. 마침 포메렐리아 공작 시비앵토페우크 2세의 지원이 끊어져서 내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도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11월, 그는 대폴란드 국경지대에 있는 고싸바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레셰크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헨리크,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이 회담 결과에 관심이 가장 많았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1227년 11월 24일 아침, 그날 열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목욕을 하던 공작들은 암살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헨리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직한 기사인 비젠부르크의 페레그리누스가 자기 몸으로 가려서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반면에 레셰크 1세는 반쯤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마르싱코보 마을로 달아났지만,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렐리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렐리아를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피살당한 레셰크 1세에게는 1살짜리 아들 볼레스와프 5세가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볼레스와프 5세가 너무 어리기때문에 자신이 폴란드 대공을 대신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레첵 1세의 형제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이에 불복해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과 주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그 대신, 브와디스와프 3세는 교회에 몇 가지 특권을 보장하고 레첵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소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률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선거에 의해 선임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의 조카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브와디스와프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재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를 토벌하러 가야 했지만,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언제라도 크라쿠프로 쳐들어와서 대공 직을 탈취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헨리크를 크라쿠프 총독으로 세우고, 대폴란드에 대한 상속을 약속했다.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가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헨리크 2세가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에서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헨리크는 친족간의 갈등을 진정시키기로 마음먹고, 스피트코비체에서 콘라트 1세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에 콘라트 1세의 추종자들에게 공격당해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프워츠크에 투옥되었다. 이후 헨리크의 아내인 실롱스크의 헤드비히가 프워츠크로 향해 콘라트 1세를 간절히 설득하자, 마음이 약해진 콘라트 1세는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 대신, 헨리크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자신에게 넘기게 했다. 하지만 그는 브로츠와프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교황에게 협박에 따른 맹세로부터 자신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1229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라시보르즈에 있는 오폴레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이후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헨리크에게 양도해 동맹을 갱신했다. 1231년 봄, 헨리크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함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그니에즈노 성벽에서 대폴란드 귀족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스로다 실롱스카로 이동했다가 1231년 11월 3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제 헨리크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콘라트 1세의 지배하에 놓인 소폴란드와 대폴란드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콘라트 1세는 소폴란드를 장악한 뒤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해 소폴란드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헨리크를 따르기로 했다. 여기에 레첵 1세의 미망인인 루츠크의 그지미스와바는 아들 볼레스와프 5세의 영지였던 산도미에시를 1230년에 빼앗아간 콘라트 1세의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헨리크에게 아들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한 헨리크는 1232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향한 공세를 시도했지만, 실롱스크 귀족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는데다 교회 인사들이 오도니치를 지원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33년, 헨리크는 콘라트 1세와 헤움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여전히 콘라트 1세의 영지였던 웽치차(Łęczyca)와 시에라츠(Sieradz)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고, 그 대가로 크라쿠프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폴란드에서 양측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지속되었다. 1234년 여름, 헨리크는 대폴란드에 다시 개입하기로 했다. 당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그리에즈노 대주교 펠카에게 공작들의 특권 중 일부를 부여함으로써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 이 전쟁에서 속절 없이 밀린 오도니치는 교회 인사들의 중재하에 헨리크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헨리크는 바르타 강까지에 이르는 대폴란드의 절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칼리슈와 포즈난은 두 세력의 경계선이 되었다. 하지만 대폴란드는 소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양측간의 무력 충돌이 종종 벌어졌다. 가령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1235년에 은밀히 스렘 요새를 무력으로 탈환했다. 헨리크는 칼리슈와 루다를 오포예 공작에게 할당하고, 그 대가로 오포예를 직접 통제했다.

헨리크는 실롱스크에 이어 소폴란드, 대폴란드에서의 지배력을 꾸준히 강화하는 한편, 기사단을 후원해 귀족들의 강대한 권력을 억제하려 했다. 특히 성주들의 권력을 억제해, 대공 및 공작의 뜻과 어긋나는 행보를 걷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그지마와, 리스, 그리피체 등 대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협조하에 통치를 행사했다. 한편, 그는 가톨릭 교회와 심각한 마찰을 벌였다. 특히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속해 있던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에서 나오는 수입을 자신에게 돌리자,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스 1세는 그가 역대 대공들이 보장했던 교회 재산에 손을 댔다며 반발했고, 급기야 파문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루부슈 주교들에게 할리치나 공국의 선교 관리를 맡기는 등 교회와 마냥 마찰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는 경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실롱스크 일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국고를 증진하고자 하였고, 수데텐 산기슭과 국경림의 무인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며, 여러 도시에도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때 독일인들을 실롱스크에 대거 끌여들였는데, 후대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명백한 폴란드인의 영토였던 실롱스크가 급격히 독일화되었다"고 비판했다.

헨리크는 자신의 직위를 아들 헨리크 2세에게 물려주려 노력했다. 1234년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영지와 권한을 분할했다. 이때부터 헨리크는 실롱스크 공작과 크라쿠프 공작을 맡았고, 헨리크 2세는 실롱스크 공작과 대폴란드 공작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이 대공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회와 갈등을 벌이면서 대관식 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다가 1238년 3월 19일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파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수도원에 안장되는 게 거부되었지만, 헨리크 2세가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 수입을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해 아버지에게 걸린 파문이 풀리게 한 덕분에 겨우 안장될 수 있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생전에 세운 트셰브니차의 성 야드비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