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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49:00

헨리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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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헨리크 4세 프라비
Henryk IV Prawy
'''
파일:헨리크 4세.jpg
출생 1257년 또는 1258년
폴란드 대공국 브로츠와프
사망 1290년 6월 23일
폴란드 대공국 브로츠와프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88년 ~ 12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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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브로츠와프의 헨리크 3세
어머니: 마조프셰의 유디트
배우자 브로츠와프의 콘슈탄치어
브란덴부르크의 마틸다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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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브로츠와프 공작이었던 아버지 헨리크 3세의 넘버링을 이어서 헨리크 4세라고 칭했다.

2. 생애

1257년 또는 1258년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3세와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의 딸인 유디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266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삼촌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브와디스와프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가 보헤미아 왕국의 재상이 된 뒤 잘츠부르크와 브로츠와프를 끊임없이 오가야 했기 때문에 어린 조카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자, 1267년 헨리크 4세를 프라하로 보내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의 궁정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1270년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한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 브로츠와프의 가장 가까운 고문이었던 시몬 갈리쿠스의 보살핌을 받았다.

헨리크 4세는 어릴 때부터 기사 문학에 깊이 빠졌고, 기사가 되기 위해 무예를 갈고 닦았다. 12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초반까지 135명의 시인들이 집필한 노래 및 시들을 모은 <코덱스 마네세(Codex Manesse)>에 따르면, 그는 마상창시합에서 우승해 "브로츠와프의 헨리 공자"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코덱스 마네세에는 그가 중세 고지 독일어로 작곡한 두 곡의 노래도 수록되었다.

1271년 브로츠와프 공작의 자격으로 오타카르 2세의 헝가리 원정에 참여했다. 이에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볼레스와프 5세가 루스 공작들과 함께 브초츠와프 공국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1273년 성인으로 인정된 그는 보헤미아 왕국에 의존하던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 포즈난 공작 프셰미수 2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276년 독일왕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가 전쟁을 벌였을 때, 루돌프 1세로부터 보헤미아와의 동맹을 끊어주면 신성 로마 제국의 왕자라는 칭호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을 잘 보살펴줬던 오타카르 2세를 끝까지 지지했다.

한편, 레그니차 공작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는 헨리크 4세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오타카르 2세가 루돌프 1세와의 전쟁으로 인해 약해지는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루돌프 1세와 동맹을 맺은 뒤 그에게 브로츠와프 공국의 1/3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헨리크 4세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볼레스와프 2세는 1277년 2월 18일 헨리크 4세를 납치해 레그니차 성에 가두었다. 이에 브로츠와프 기사들이 주군을 구하기 위해 결집했고,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 포즈난 공작 프셰미수 2세 역시 헨리크 4세를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레그니차로 진군했다.

1277년 4월 24일, 볼레스와프 2세와 아들 헨리크 5세가 이끄는 레그니차군과 브로츠와프-그워구프-대폴란드 연합군이 스톨레츠 전투를 벌였다. <실레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두려워해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헨리크 5세는 포기하지 않고 레그니차군을 지휘했다. 이후의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프셰미수 2세와 헨리크 3세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볼레스와프 2세는 비록 승리를 거뒀지만 오타카르 2세가 개입하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마침 오타카르 2세가 두 공작들이 루돌프 1세의 궁정에 넘겨지기 전에 실레시아의 상황을 정상화하고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자, 볼레스와프 2세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이어진 협상 결과, 볼레스와프 2세는 헨리크 4세와 스톨레츠 전투에서 사로잡힌 이들 전원을 석방하는 대가로 스로다 실롱스카 등 브로츠와프 공국의 1/3을 받아냈다.

1278년, 헨리크 4세가 파견한 브로츠와프 기사단은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가 맞붙은 수체 크루티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 편에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가 전사하자, 헨리크 4세는 프라하로 가서 바츨라프 2세의 섭정으로서 보헤미아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공작 오토 5세가 그보다 먼저 프라하에 도착한 뒤 섭정이 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루돌프 1세로부터 크워츠코 일대를 인계받았고, 1279년 크로스노오잔스키에 시의 지배권을 인계받았다. 그후 그는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는 프르셰미슬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루돌프 1세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했다.

1280년 3월 빈 회의에 참석해 상부 실레시아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함께 루돌프 1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의 딸 콘슈탄치어와 결혼했다. 이때에 맺은 결혼 계약에 따르면, 폴란드 대공위가 비게 될 경우 브와디스와프 1세가 헨리크 4세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 대공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이 해에 레그니차 공국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침입이 있었지만 어렵게나마 격퇴했다.

1281년 2월, 헨리크 4세는 브로츠와프 공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상호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 브르주하티의 헨리크 5세,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이들을 모조리 체포해 투옥한 뒤 정치적 양보를 햐도록 강요했다. 폴란드 대공 레첵 2세는 공작들을 구출하겠다는 명분을 걸고 브로츠와프 공국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크라쿠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그후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2세에게 비엘룬을 넘기고 풀려났고, 다른 공작들 역시 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무장 병력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조를 하고 풀려났다.

1282년 초, 헨리크 4세가 교회가 점유한 영지를 회수하고 브로츠와프 교구의 사법적 면책권을 자주 침해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시 2세가 교황 특사인 페르노의 필립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필립은 헨리크 4세에게 시정을 촉구하는 판결을 내렸고, 헨리크 4세는 이에 불복해 일반 법원에 항소했다. 이 법원은 그의 지지자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크 4세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렸다. 헨리크 4세는 1283년 니사에서 공작들을 대거 끌여들여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는데, 그 동안 니사 주교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곡물이 말 사료로 사용되었다.

토마시 2세는 헨리크 4세의 이같은 행보에 분노해 1284년 3월 파문을 선고하고 브로츠와프 공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헨리크 4세는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파문을 풀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브로츠와프 주교구 내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들은 토마시 2세의 성무 금지령을 무시하고 성직 활동을 이어갔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프 스윈카가 양자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85년 헨리크 4세가 니사 주교구에 속한 오트무초우 성채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토마시 2세는 이웃한 라치부슈 공국으로 피신했다. 1287년 헨리크 4세가 라치부슈 공국을 공격하자, 더이상 탈출할 방도가 없었던 토마시 2세는 마침내 헨리크 4세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헨리크 4세는 이로 인해 브로츠와프 주교구와 성 프란치스코 대학 교회에 있던 넉넉한 기부금을 자기 뜻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헨리크 4세는 1284년 대폴란드 공국의 귀족인 자렘바 가문이 프셰미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자렘바 가문의 영지인 칼리슈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프셰미수 2세가 군대를 일으켜 칼리슈를 포위한 끝에 자렘바 가문을 처벌하지 않는 대가로 칼리슈를 탈환했다. 이후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4세에게 올로보크 성을 넘기는 조건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그후 1287년 이전에 오포에 공작 브와디스와프의 딸인 콘슈탄치어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아내가 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브와디스와프의 형제인 라치부슈 공작 미에슈코 2세가 토마시 2세의 망명을 받아준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브와디스와프는 교황청에 헨리크 4세가 콘슈탄치어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후 1287년 또는 1288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의 딸인 마틸다와 재혼했다.

1287년 6월 14일,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가 헨리크 4세가 교회 측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일전에 그에게 내줬던 올로보크 성을 기습 공략했다. 뒤이어 1282년에 그에게 납치된 뒤 풀려나는 조건으로 헌납해야 했던 비엘룬 역시 탈환했다. 당시 내분 수습에 급급해야 했던 헨리크 4세는 프셰미수 2세의 이같은 행위를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1288년 9월 30일, 폴란드 대공 레첵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크라쿠프를 위시한 소폴란드 일대에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헨리크 4세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2세는 친히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진군했지만, 헨리크 4세를 대공으로 옹립한 니에지에비츠의 수웨크가 농성하는 크라쿠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1289년 2월 26일, 시웨리츠 인근에서 볼레스와프 2세와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헨리크 4세 추종자들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볼레스와프 2세가 승리를 거두었고, 헨리크 4세를 지지했던 시치나와 공자 프젬코는 전사했으며, 오포예의 공자 볼코 1세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대공을 계승하려던 것을 돌연 그만두고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에게 떠넘겼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을 받아 바벨 성을 공략하고 스칼라와 시비앵치체에 요새를 세우면서 크라쿠프를 압박했다. 이에 헨리크 4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격했고, 1289년 여름 크라쿠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를 격파했다. 이후 헨리크 4세는 크라쿠프 대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올린 뒤 자신이 폴란드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신의 메시지가 담긴 표징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는 포기하지 않고 산도미에시에서 계속 도전했다.

1290년 6월 23일, 크라쿠프에서 브로츠와프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이던 헨리크 4세가 돌연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인 스티리아의 오타카르에 따르면, 헨리크 4세는 교황에게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그는 교황에게 선물로 12,000 그지브나(grzywna)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사절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동 중에 400 그지브나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헨리크 4세와의 모든 협상을 취소했다. 헨리크 4세가 어떻게든 횡령범을 잡으려 들자, 그 자는 헨리크 4세를 제거하기로 했다. 헨리크 4세의 궁중 의사 중 한 사람의 형제가 브로츠와프 궁정에 고용된 뒤 소량의 독극물을 음식에 타서 천천히 독살시키려 했다. 하지만 헨리크 4세의 중독 증상을 눈치챈 군젤린이라는 의사가 헨리크 4세의 구토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치유했다. 암살자는 이번에는 헨리크 4세가 빵을 자르는 데 사용하는 검에 독을 발랐다. 헨리크 4세는 이로 인해 중독되어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 긴 이야기는 다른 출처에서 일부 요소만 확인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며, 여러 학자들은 아예 허구적인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얀 드우고시의 <폴란드 왕국 연대기>를 비롯한 여러 연대기에도 그가 중독 증세를 보이며 죽었다고 기술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브로츠와프 공국의 권력을 얻고자 했던 헨리크 5세가 암살극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별다른 증거는 없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헨리크 4세는 죽어가면서 2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하나는 오트무초우 성채를 니사 주교구에 돌려주는 등 브로츠와프 공국에 속한 교회들의 정책을 다루었고, 다른 하나는 상속 문제를 다뤘다. 두번째 유언장에 따르면,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비롯한 소폴란드는 프셰미수 2세에게 넘기고 그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며, 브로츠와프 공국은 자신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이 자녀 없이 사망하면, 그가 가지고 있던 영지는 다른 한 공작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두 번째 유언장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의 유언이 온전히 집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을 맡고 1295년 폴란드 국왕을 칭했던 프셰미수 2세가 1296년 2월에 암살된 후,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는 다른 폴란드 공작들과의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폴란드 대공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1300년에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국왕을 칭하면서, 피아스트 왕조는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3. 사후

헨리크 4세의 유해는 브로츠와프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과학자들은 그가 아리아인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묘지를 파내서 유해를 꺼낸 뒤 연구에 사용했다. 이후 유해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라졌고, 묘비는 현재 브로츠와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