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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슈코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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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미에슈코 3세 스타리
Mieszko III S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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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에슈코 3세.jpg
출생 1122년 에서 1125년 사이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202년 3월 13일 또는 3월 14일
폴란드 대공국 칼리슈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173년 ~ 1177년
1191년
1198년 ~ 1199년
12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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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어머니: 베르크의 살로메아
배우자 헝가리의 엘리자베트
키예프의 에우독시아
자녀 5남 5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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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2. 생애

1122년에서 1125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베르크 백작 하인리히의 딸인 베르크의 살로메아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복 형으로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가 있었고, 친형제로 볼레스와프 4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 카지미에시 2세 등이 있었다. 1136년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1138년 10월 28일,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랫동안 궁정백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이 유언장의 수탁자이자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공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5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대공이 나머지 공작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공의 특권에는 포메라니아 가신들을 봉신으로서 통제하고, 다른 공작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권리, 국경 방어 권리, 외교 정책을 수행할 권리, 성직자 감독, 화폐 주조 등이 포함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조치를 통해 모두가 영지를 공정하게 분할 상속받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즈비그뉴와 내전을 벌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미에슈코 3세는 초기에는 대폴란드 공작으로서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복종했다. 그러던 1142년, 키예프 대공 프세볼로트 2세의 딸 즈비에니스와바와 자기 아들 볼레스와프를 결혼시킨 브와디스와프 2세는 키예프 루스의 힘을 빌려 이복 형제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폴란드를 완전히 통합할 음모를 꾸몄다. 1142년 겨울,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프셰를 침공해 체르스크 요새를 파괴했고, 루스군은 많은 포로를 키예프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형제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144년 7월 27일,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살로메아가 관리하던 웽치차는 그녀가 사망하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 등은 이에 반대했다.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가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웽치차를 물려줘야 하니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무력으로 두 사람을 침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루스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두 이복 형제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마조프셰의 보이보이드인 비세보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졌지만, 프세볼로트 2세가 파견한 루스군이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덕분에 겨우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협상 결과, 윙체차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로 귀속되었고, 볼레스와프 4세는 위즈나를, 미에슈코 3세는 칼리슈와 그니에즈노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추가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프세볼로트 2세에게 폴란드의 여러 거점을 넘겨줘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두 이복 형제를 완전히 축출하려 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궁정백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거세게 반대하며 볼레스와프 3세의 뜻에 따라 화목하게 지내라고 촉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런 그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이복 형제들을 밀어내고 폴란드를 통합시키기는 요원하다고 판단했다.

1145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피오트르를 돌연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 사건에 반감을 품었고, 피오트르는 키예프 루스의 세력권에 속한 루테니아로 망명한 뒤 루스 공자들을 설득해 브와디스와프 2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게 했다. 1146년 초,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스군의 지원 없이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마조프셰를 석권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가 포즈난으로 피신하게 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를 포함한 교회 인사들은 당장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그가 무시하자 파문을 선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포즈난으로 진군해 두 형제와 대치했을 때, 그의 휘하에 있던 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두 형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두 형제가 그의 영지를 쳐들어오고 수많은 귀족들이 반란에 동참하자, 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 아그네스와 자식들과 함께 크라쿠프로 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으나 끝내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되자 프라하로 망명했고,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볼레스와프 4세가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을 칭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인수했다. 여기에 웽치차는 그와 볼레스와프 4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 의해 분할되었다.

한편, 브와디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궁정에 도착한 뒤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이 권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폴란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한 봉신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콘라트 3세는 이에 혹해 폴란드로 군대를 파견하려 했지만, 오데르 강이 범람한 데다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1세와 마이센의 콘라트가 자신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2세를 더이상 돕지 않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알텐부르크 성과 그 주변 지역을 영지로 수여받고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여전히 권좌를 되찾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 특사 귀도는 이에 호응해 정당한 통치자를 불법적으로 몰아낸 그의 이복 형제들과 폴란드 주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폴란드에서 그를 복위시키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교황청의 처벌을 무시한 폴란드 주교들을 엄중하게 질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147년, 미에슈코 3세는 대폴란드 기사단의 선두에 서서 폴라비안 슬라브족에 맞서는 북부 변경백 알브레히트의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이 원정 동안 일부 슬라브족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해 슈프레강 유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다. 여기에 알브레히트의 아들이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인 오토와 자신의 여동생 유디트를 결혼시켰다. 1150년에서 1154년 사이에 아내 엘리자베트가 사망하자, 키예프 루스 대공 이자슬라프 2세의 딸 에우독시아와 재혼해 신성 로마 제국이 폴란드로 침입할 때 키예프 루스가 이에 호응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115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폴란드로 진군했다.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함께 복종했으며,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지원군을 보내고 마그데부르크에 형제와 함께 출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약속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를 독일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가 돌아간 후, 그와 볼레스와프 4세는 약속과는 달리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지 않았다.

1166년, 볼레스와프 4세가 프로이센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진군했다가 마수리아 늪지대에서 프로이센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인해 전군이 궤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볼레스와프 4세, 미에슈코 3세의 형제이자 산도미에시 공작이였던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가 전사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볼레스와프 4세는 헨리크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도미에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1167년 가을 얀제이우프(Jędrzejów)에서 의회를 소집해 산도미에시 공국 전체를 카지미에시 2세에게 넘기고 미에슈코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려 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프로이센인들에게 참패해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반란군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보고 그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카지미에시 2세는 비실리카를 수여받았고, 미에슈코 3세는 알려지지 않은 영지들을 받았으며, 볼레스와프 4세는 산도미에시 지방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1172년 실레시아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볼레스와프가 형제 미에슈코와 조카 야로스와프의 반란으로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173년 볼레스와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고 실레시아로 진입하자, 그는 제국군이 이를 명분삼아 폴란드를 집어삼킬 것을 두려워해 볼레스와프 4세와 함께 8,000 그지브나(grzywna) 상당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실레시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볼레스와프는 프리드리히 1세 덕분에 브로츠와프 공작으로서 실레시아를 계속 다스릴 수 있게 됐지만, 형제 미에슈코와 조카 야로스와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

1173년 1월 5일, 볼레스와프 4세가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이후 대공에 오른 미에슈코 3세는 자신을 모든 폴란드의 공작(dux totius Poloniae)이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했다. 그러면서 대폴란드 영지에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소폴란드에 헨리크 키에틀리츠를 총독으로 세워서 감독하도록 했다. 이후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이루고자 했지만,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그의 장남 오돈이 아버지가 계모인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선호하고 자신을 수도원에 보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귀족들에게 가세했다.

1177년 부활절. 여러 공작과 귀족들이 그니에즈노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활절 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후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소폴란드 총독 헨리크 키에틀리츠도 가세했고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와 그의 장남 오돈도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고, 한 때는 실레시아의 미에슈코가 볼레스와프를 축출하고 그에게 충성하면서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가 반란군의 회유에 따르면서 전세는 점점 좋지 않게 흘러갔고, 1179년 추종자들과 함께 실레시아의 라치부시로 퇴각했다. 그후 카지미에시 2세는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되었고,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에서 분리된 시비에르츠, 오시비엥침, 비톰 등지의 영주에 선임되는 대가로 그를 저버렸다.

이후 적군이 라치부시를 압박해오자, 그는 보헤미아로 피신해 보헤미아 공작이자 사위인 소비에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다시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10,000달란트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오직 서부 포메라니아 공작이자 사위인 보구스와프 1세만이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섰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즈지스와프 역시 그를 지지했다. 1181년, 미에슈코 3세는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그니에즈노와 칼리슈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부를 탈환했다. 그 후 1182년 아들 오돈과 공식적으로 화해하고 오돈이 오브라 강 지역 남부를 다스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 폴란드 대공이었던 카지미에시 2세는 미에슈코 3세가 대폴란드 영지를 되찾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184년, 미에슈코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제공해 자신이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가 하인리히 6세에게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목표를 바꿔 형제 볼레스와프 4세의 아들이며 마조프셰 공작이었던 레첵을 설득해 카지미에시 2세가 아닌 자신의 아들 미에슈코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했다. 그러나 1185년, 레첵은 미에슈코가 통치를 무능하게 하는 데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라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 2세를 다시 후계자로 지명했다. 1186년 레첵이 사망한 후, 그는 카지미에시 2세와 협상한 끝에 마조프셰 일대를 카지미에시 2세가 가지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자신의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일부 영지를 수여받게 했다.

1191년, 카지미에시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미에슈코 3세는 이들에게 가담해 크라쿠프를 공략한 뒤 그곳의 권력을 아들 미에슈코 또는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에게 맡겼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는 신속하게 크라쿠프를 되찾고 그의 아들을 붙잡았다가 미에슈코 3세에게 돌려줬다. 1193년 8월 2일 아들 미에슈코가 사망하자, 그는 장남 오돈에게 미에슈코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오돈 역시 1194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 이후 미에슈코 3세는 남부 폴란드를 막내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에게 주고, 오도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칼리슈 공작으로 세우고 브와디스와프 3세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돌보게 했다.

1194년 5월 5일 카지미에시 2세가 사망하자, 미에슈코 3세는 소폴란드를 장악하고 폴란드 대공을 자처하려 했다. 그러나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인 레첵 1세를 대공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실레시아의 공작 미에슈코 4세와 야로슬로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195년 9월 13일 모즈카와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때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전사했고, 그는 중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레첵 1세를 따르는 귀족들과 교전했지만 곧 물러났다. 그는 무력으로 대공이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 2세의 마망인인 츠노쳄의 헬레나와 협상한 끝에 1198년 쿠야비야를 카지미에시 2세의 두 아들인 레첵과 콘라트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1199년, 크라쿠프 총독 미코와이와 페우카 주교가 미에슈코 3세를 폐위시키고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에 복위시켰다. 3년 후인 1202년, 귀족들은 그가 명목상 대공으로 복위하도록 허용했지만 모든 권력을 내놓게 했다. 미에슈코 3세는 그해 3월 14일 칼리슈에서 사망했고, 막내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 대공에 등극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