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 |
본명 | 안제이 타데우시 보나벤투라 코시치우슈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ściuszko |
출생 | 1746년 2월 4일 |
폴란드-리투아니아 브제시치주 메레초프슈치즈나 | |
사망 | 1817년 10월 15일 (향년 71세) |
스위스 졸로투른 | |
직업 | 군인, 독립운동가 |
경력 | 대륙군 준장 폴란드-리투아니아 육군 중장 코시치우슈코 봉기군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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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미국의 군인, 독립운동가.폴란드 위인으로 유명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벨라루스·미국·프랑스·스위스를 오가면서 활동한 발이 넓은 인물로 생전부터 영웅이자 애국자로 존경받았다.
미국 독립 운동 참여 후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나폴레옹이 주로 거주하던 퐁텐블로 인근에서 거주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 퐁텐블로까지 진격한 러시아 제국군이 거주하던 마을을 약탈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는 등 주민들에게 신임을 얻어 기념비가 세워졌다.
조국 폴란드 외에도 미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각지에 기념물이 남아 있다.
2. 생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 장교 출신이며 폴란드 기사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사랑하는 연인과 가문의 차이로 결혼이 반대되자 사제를 불러 비밀 결혼식을 올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가 들켜서 비극적으로 헤어지자 그녀가 없는 지구 반대편 미국으로 가서 죽을 작정[1]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가담하기로 홧김에 결정하였고 13개 식민지로 건너가서 대륙군 소속으로 생각보다 훨씬 잘 싸워 워싱턴에게 훈장도 받고 미군 준장까지 승진했다.한동안 미국에 머물던 코시치우슈코는 2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국에 위기가 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편하게 영웅으로 지내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한 뒤 1794년에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의 폴란드 침탈에 대항하여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등 애국자를 결집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코시치우슈코는 농노제 폐지를 공약에 넣어 봉기군의 세력을 키웠다.
코시치우슈코[2]와 포니아토프스키 |
하지만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반격으로 봉기는 진압당했고 코시치우슈코는 러시아로 끌려가 징역을 살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미국과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고, 미국 정부에게 받은 토지와 급료를 팔아 자기 명의로 된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흑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도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임관한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및 포니아토프스키와 달리 그는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고 낙향했으며 1817년에 사망했다.
3. 기타
- 폴란드의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에서도 얀 헨리크 돔브로프스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3]와 함께 언급된다. 하지만 폴란드 국가가 지어진 시기가 바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고 나폴레옹을 부정적으로 보던 코시치우슈코는 끝내 나폴레옹에게 협력하는 걸 거부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코시치우슈코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정식 국가에서는 빠지게 되었다.
-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집어삼킬 때 유럽으로 건너가 스위스에서 사망하였는데 유언으로 미국에 남은 모든 재산으로 미국의 노예들을 구입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주어 자유롭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후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 지하묘역에 역대 폴란드 국왕 및 위인들과 함께 묻혔다.
- 제2차 세계 대전 때 서방측 자유 폴란드군과 소련측 폴란드 동부군은 각자 부대를 편성하면서 그의 이름을 붙인 부대를 하나씩 만들었다. 서방측 부대는 영화에도 나온 303 전투비행단이며 소련측 부대는 제1보병사단에 이름을 붙였다.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당시 일부 시위대가 코시치우슈코 동상에 낙서를 하고 침을 뱉거나 소변을 보는 무식한 만행을 저질렀다.# 막상 코시치우슈코는 친우인 토마스 제퍼슨에게 노예제의 존재는 분명 신생 미국에게 두고두고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경고했고 죽어서는 제퍼슨을 집행인으로 지목하며 남은 재산을 노예 해방과 해방 노예 교육용 학교 설립에 써 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만큼[4] 18세기 말이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도 굉장히 진보적이었던 노예해방론자였기 때문에 시위대가 무식한 짓을 했다고 비판받았다. 해당 사건이 터지자 주미폴란드대사관은 해당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성명문을 발표하면서 유감을 표했다.
- 폴란드 포즈난에 주둔하는 미군 기지의 명칭이 캠프 코시치우슈코로 명명되었다.
- 40살이 넘게 여자 경험이 없었으며 44살 일적에 18살 귀족 아가씨[5]와의 첫사랑에서 매우 큰 상처를 입어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대단히 고통스러워하였다.
- 성은 한국에서는 옛날에 '코슈추슈코'라 표기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같다.
4. 둘러보기
[1] 가톨릭교도는 자살하면 안 되기 때문에 무모한 돌격 같은 편법을 쓴 것도 있다.[2] 백마에 올라 나폴레옹 모자를 쓴 사람이며, 모자를 벗은 사람이 포니아토프스키다.[3] 17세기 대홍수 당시 스웨덴 침략군을 무찌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원수.[4] 그러나 좀 많이 불편했던 제퍼슨이 유언 집행인이 되길 거부하고 죽기 전에 유언을 한 번만 작성한게 아니라서 사후 법적 공방에 휘말리다가 코시치우슈코의 유산은 유럽과 미국 사이 공중분해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5]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나이 차이 때문에 도둑놈 같아 보이지만 나이보다는 집안 차이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