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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프라하의 봄 Pražské jaro | |
▲ 폴란드 인민군 소속 T-54 전차[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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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
당시 대한뉴스 보도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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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슨 사건이었을까? |
1968년 1월 5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당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둡체크에 의해 시작되어 1968년 8월 21일 바르샤바 조약 가맹국들의 침공 때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며 제국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원투펀치를 맞은 유럽의 시민들은 이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도피처를 갈구하게 되었는데 소련의 독소전쟁 승전을 통해 확산된 공산주의도 이 중 하나였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된 중부유럽의 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또한 공산화 열풍에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신속하게 이 작은 나라의 적화를 진행시킬 프로젝트를 계획 및 진행했는데 그 프로젝트에는 비공산계 야당 탄압 계획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1년간은 공산당이 레지스탕스를 주도한 업적도 있고 공산당의 지지율이 독일인 추방과 신속한 국유화로 높았기 때문에 연정을 주도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념적인 이유로 마셜 플랜을 거절하자 공산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1948년 총선에서의 패배로 실각이 확실시되었다. 결국 차선책으로 공산당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쿠데타를 모색했고 신생독립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음모의 책임을 야당 인사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이들을 탄압하였는데 이에 반발하여 1948년 2월 국민사회당, 인민당, 민주당 등 야당 인사들이 공산당의 야당인사피소에 대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게 된다.
당연히 공산당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6인의 공화국 경찰간부를 모두 공산당 계통 인사로 갈아치워 이에 맞섰다. 의회의 다수파와는 달리 공산당 계통이 아니었던 공화국 대통령인 에드바르트 베네시와 그의 행정부는 의회에게 야당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의회는 이를 일축했다. 야당 인사들은 최후통첩으로 행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원 전원이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공산당은 되려 얼씨구나 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위기상황 선포&프라하 및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파업 투쟁을 일으키는 등 실력행사를 통하여 야당 의원 사퇴를 끝까지 거부하던 행정부를 "설득"시켜 일당독재 체제를 본격적으로 형성했는데 이 사건을 2월정변 혹은 '프라하의 쿠데타'라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승리는 곧 대규모 숙청을 암시하였고 머지않아 20만 명에 달하는 비공산계열 시민들이 직장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이러한 시민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념과는 관계없이 공산당에 입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머지않아 공산당 내부에서도 티토주의자 혹은 반스탈린주의자들이 쓸려나갔다. 하지만 1개년 계획의 성과는 썩 신통치 않았다. 중공업 부문과 슬로바키아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으나, 통제경제가 비효율적으로 작용하였고, 1개년 계획 말미에는 물가상승까지 일어나면서 화폐개혁까지 단행하는 혼란을 겪었던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의 난맥상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은 곧 공산당 정권에게 실증을 느꼈다. 그나마 2차 5개년 기간 중에는 경제문제가 어느정도 수습되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 통제되어던것은 여전했다.
1956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뒤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안토닌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3차 5개년 기간 동안 부분자율화 정책을 시행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통제경제로 돌아왔으며, 경기침체는 지속되어 1963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감소되는 일까지 벌어졌고, 물자공급 문제가 심각해져서 지하경제가 활성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체코 지역에 비해서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었다.
이러한 연이은 실패에 의해 정부의 권위가 실추된 그 틈새로부터 정부 비판 여론이 다시금 쇄도하기 시작했는데 지식인과 문학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숙청작업과 경제계획을 비판하고 이러한 내용에 대해 일단의 당 관료들조차 수긍하게 되자 공산당은 결국 수정주의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고, 수정주의적 경제정책의 부분적인 도입을 모토로 4차 5개년 계획을 짰는데, 이러한 수정주의의 도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웃 나라인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서는 1968년 1월 1일 헝가리 사회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신경제메커니즘(New Economic Mechanism, 헝가리어: Új gazdasági mechanizmus)'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모델은 정부의 경제 개입 제한, 그리고 시장경제의 원리 도입을 그 골자로 하였다. 둡체크가 집권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를 본받은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바람을 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동'스러운 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2]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1967년 12월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였던 노보트니[3]와 동시에 다른 유망인물들 또한 대면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만난 알렉산데르 둡체크(이하 둡체크)에게 유독 호감을 표시하였다. 둡체크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란 엔지니어 출신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여 급성장한 인물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둡체크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의 기대와는 반대로 둡체크는 보다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당해 3월부터 개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개혁운동과 함께 과거의 실패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정부의 언론 검열 제도가 폐기된 데 기인하며 언론·집회·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자유가 회복된만큼 시민사회도 재활성화되었다. 과거 정치적인 문제로 숙청된 인사들도 사회에 활발하게 복귀하여 사회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공산당 내부에도 인사교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 주요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안에 대해 바르샤바 조약기구 측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5월에 모스크바에서 둡체크를 배제한 채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한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 합동훈련을 개최함으로서 일련의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가시적인 채찍을 함께 활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안보상의 위협을 느낀 둡체크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인사들은 소련과의 독대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에서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맹세를 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소련 측의 개혁 프로그램 포기 요구는 거부하였다.
3. 전개
3.1. 소련의 개입
<colbgcolor=#808080><colcolor=#fff> 다뉴브 작전 Operace Dunaj опера́ция «Дуна́й» | ||
시기 | 1968년 8월 20일~8월 21일 | |
장소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전역 | |
교전국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인민공화국| ]] [[틀:깃발| ]][[틀:깃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 [[틀:깃발| ]][[틀:깃발| ]][[헝가리 인민공화국| ]] (군사지원국) (외교지원국) [[틀:깃발| ]][[틀:깃발| ]][[북베트남| ]] (외교지원국) (외교지원국) (외교지원국) | ]][[틀:깃발| ]][[소련| ]][[틀:깃발| (외교지원국) (외교지원국) (외교지원국) (외교지원국) |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의 의장 [[틀:깃발| ]][[틀:깃발| ]][[알렉세이 코시긴| ]] 수상 [[틀:깃발| ]][[틀:깃발| ]][[안드레이 그레치코| ]] 국방장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야쿠봅스키| ]] 바르샤바 조약 기구 통합군 참모총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콘스탄틴 프로발로프 남부군집단[4]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폴란드 제1서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리안 스피할스키 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틀:깃발| ]][[틀:깃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 폴란드 국방장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볼레스와프 호하 폴란드 인민군 총참모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플로리안 시비츠키 폴란드 지상군 2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토도르 지프코프| ]] 불가리아 서기장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도브리 주로프 불가리아 국방장관 [[틀:깃발| ]][[틀:깃발| ]][[카다르 야노시| ]] 헝가리 제1서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치네게 러요시 헝가리 국방장관 [[틀:깃발| ]][[틀:깃발| ]][[발터 울브리히트| ]]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 ]][[틀:깃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서기장[[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루드비크 스보보다| ]]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올드리히 체르니크 체코슬로바키아 수상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르틴 주르 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틀:깃발| ]][[알렉산데르 둡체크| ]]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
전력 | 바르샤바 조약군 25만 명(20개 사단) 전차 2000대 항공기 800대 |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 23만 명(18개 사단)(동원 금지) 전차 2000대(동원 금지) 프라하 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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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광장에서 소련군 T-55 전차에 올라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라하 시민들 |
<colbgcolor=#808080><colcolor=#fff> |
만평 |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만평.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분명한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자'였다, 전간기 당시 소련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함락을 막기 위해서 군사연합을 맺었고 전쟁 중에는 반 나치 봉기를 일으키던 체코인과 현지 유대인들이 소련군과 협력해 현지의 독일인과 나치 부역자들을 추방하거나 몰살하면서 나치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뿌리뽑을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도래하자 공산 블록의 붕괴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소련과 민주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체코인의 목표가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이은 또 다른 압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진압을 위해 투입된 T-10M 전차[5] | 프라하 시내로 진입한 소련군 T-55 전차부대 |
프라하 시내에서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차량을 밀치는 소련 공수군 ASU-85 자주포 | 프라하 시내를 질주하는 소련 공수군 ASU-57 자주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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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레츠 시내로 진입한 소련군 T-62 전차대[6][7] |
체코슬로바키아 영내 밀로비체믈라다(Milovice-Mladá) 비행장에 배치된 MiG-21S 전투기[9] | 체코슬로바키아 영내 흐라데크 호랄로베 비행장에 배치된 소련 공군 42근위전폭기연대 소속 MiG-17 전투기 |
"나는 온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흘을 토할 것 같아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한 말. 그는 무력침공에 부담을 느꼈고 최대한 이를 피하고자 했지만 소련의 핵심 국익을 위해서 결국 침공을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한 말. 그는 무력침공에 부담을 느꼈고 최대한 이를 피하고자 했지만 소련의 핵심 국익을 위해서 결국 침공을 결정했다.
소련은 이 상황을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 하나의 민주화로 끝날 게 아니라 공산권 전체로 파급될 것이 분명했는데 결국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그 예상이 맞았음이 증명됐다. 게다가 서방 국가들이 개입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처럼 전쟁 상황으로 가면 동유럽의 여론도 나빠지는 건 물론 서방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제압은 하되 인명피해는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나마 희생이 최소화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50년대와 달리 분위기가 달라진 1960년대 말에는 무력진압은 소련이라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어쨌거나 브레즈네프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에게 서신을 보내 미국 정부가 얄타와 포츠담에서의 조약을 준수할 의도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 측에 의한 반자유주의적 압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베트남 전쟁에 신경 쓰느라 프라하의 봄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전쟁 피해를 복구한 뒤 전성기를 누리던 서유럽 국가들도 개입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묵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연히 공화당은 존슨 행정부의 이런 대응을 까댔지만 정권이 공화당으로 넘어간 뒤에도 욕은 엄청 했어도 추가 조치는 없었다. 한편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묵인에도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미군과 나토군의 개입에 대비해 소련 전략로켓군과 소련 해군은 최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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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전개 |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침공군의 주축들이었던 폴란드와 헝가리도 옛날에 반소 시위를 겪었던 적이 있다. 게다가 당시 폴란드의 국가원수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아예 반소 시위 강제진압의 여파로 스탈린주의파의 위세가 위축되자 폴란드 공산당 내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발판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덕택에 주도권을 잡아 집권한 사람이다! 12년 만에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 것. 그리고 2년 뒤에 생필품 가격을 인상하자 인민들의 반발로 인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8월 21일 새벽 2시, 프라하 공항을 향해 소련군 An-24 수송기가 접근했다. An-24 수송기는 공항 관제탑측에 기기 이상으로 비상착륙한다고 밝혔고 공항 측도 순순히 착륙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는 기만이었고 소련 공수군 7근위공수사단 선두 병력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소련군 공수부대원들은 무혈로 프라하 공항의 관제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삼아 An-12 수송기들이 대거 착륙해 소련 공수군 병력들과 장갑차들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동독 주둔 소련군 소속 제20근위군 소속 전차사단들과 폴란드군, 헝가리군, 불가리아군 소속 병력들이 프라하와 브르노로 진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제사회에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의 부당한 침입을 호소하였으나 그 어떤 나라도 이를 듣지 않았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동구권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고, 영국, 프랑스, 서독 등 서유럽 국가들도 68운동의 여파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신경쓸 처지가 아니었다.[11]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과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소련군도 시민들의 단순한 항의 시위 정도는 무력으로 진압하지는 않았다. 정치지도자들은 정치 보복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순순히 투항했으며 결국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연행되었다. 그래도 1956년 헝가리 혁명 때와 달리 처형된 사람은 없고 대부분 징역 혹은 추방으로 끝났으며 항의시위를 하던 시민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브레즈네프가 둡체크를 밀어서 체코슬로바키아 수반으로 앉힌 원죄도 있고 헝가리에서 너지 임레를 처형했다가 지속적인 반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을 참고하여 체코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또 둡체크는 소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기에 둡체크를 처형하면 체코 내부에 있는 소련파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질 가능성이 높은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둡체크는 소련에 끌려간 지 몇 년 만에 석방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굴라크로 가지 않고 구치소에서 강제노동 없이 감금만 됐다고 한다.[12] 최종적으로는 진압과정에서 72명의 민간인 사망자 및 226명의 중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구스타우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투입되었던 폴란드군[13]과 헝가리군은 1968년 10월 31일에 철군했지만 소련군은 계속 주둔했다.
팔라흐와 자이츠가 분신했던 장소에 설치된 추모 십자가 | 얀 팔라흐의 사진 |
당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소련군에 맞서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당부하면서 헝가리 혁명과 같은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분노한 시민들은 조약기구군을 상대로 시위를 벌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소련 침공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는 분신을 한 청년들도 소수나마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얀 팔라흐(Jan Palach, 1948 ~ 1969)로 1969년 1월 16일에 분신자살했으며 얀 자이츠(Jan Zajíc, 1950 ~ 1969)는 그의 뒤를 이어 2월 25일에 분신자살을 했다. 이들의 분신은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를 두렵게 했고 반정부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프라하의 중심가인 바츨라프 대로 광장에 그들을 기리는 동판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진압군 파견국 중 하나인 폴란드에서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출신인 리샤르트 시비에츠(Ryszard Siwiec, 1909 ~ 1968)가 59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25건 이상의 분신이 발생했고 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68운동의 영향이 전 세계로 퍼진 상황인 데다 사회주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변혁운동이 되어 반스탈린, 반권위주의 운동이어서 기존 좌파 정치세력이 소련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길 꺼린 것과는 달리 68운동 당시의 신좌파들은 동유럽 내 민주화 세력에게 호감과 연대 의사를 표현했다. 신좌파들은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 체제에 영합하고 관료화된 공산당 등의 체제 내 좌파정당에 의해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3.2. 정상화 정책과 그 이후
그 뒤 구스타우 후사크가 정권을 잡아 소위 정상화(normalizace)정책을 실시하였다. 말그대로 프라하의 봄 이전 시대의 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이 당시 개혁파 당원들은 대규모로 좌천되거나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 당시 숙청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76만명 가운데 무려 32만명이 제명되었을 정도였다. 비율로 따지면 그 악명높은 대숙청 이상이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검열이 강화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주기적인 단속과 탄압이 이루어졌다. 물론 3S정책과 비슷하게[14] 3H라는 경제적인 유화정책도 단행하여,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값싼 임대주택을 제공하거나 저리 대출을 제공하고, 양육수당도 크게 올리면서, 경공업 발달에 매진하여 생필품 공급은 원활해지는 등 1980년대 외채위기 이전까지는 호경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정치적 희망이 좌절된 체코슬로바이카인들은 한동안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197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베이비붐이 분 이유가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정치적인 희망이 좌절되자 섹스에 관심을 두어서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도 나돌 정도였다.[15] 이러한 정치적인 무관심은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체제개혁과 민주화 요구가 재차 확산되었지만, 후사크 정부는 끝까지 외면했다가 1989년 동유럽 혁명의 도미노가 연쇄적으로 넘어가면서 벨벳 혁명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21년 전 소련의 압력으로 강제로 쫓겨났던 알렉산드르 둡체크는 벨벳 혁명에 동참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며 재기에 성공한다.'프라하의 봄'이란 체코 필하모니 결성 50주년을 기념하여 1946년부터 5월마다 열린 프라하의 음악제의 이름이다. 당시 한 외신기자가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고 타전한 이후 이 '봄'이라는 단어는 부다페스트의 봄, 바르샤바의 봄, 서울의 봄, 그리고 최근의 아랍의 봄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3.3. 조약군 편제
동독/폴란드 → 북부 보헤미아 축선 담당- 북부군집단 - 사령관 이반 파블로브스키(Павловский,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동독/헝가리/자카르파탸주 → 슬로바키아/ 중남부 보헤미아/프라하 축선 담당
- 남부군집단 - 사령관 콘스탄틴 프로발로프(Провалов,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소련 공수군 - 프라하, 브르노 점령 담당
- 제7근위공수사단 -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우나스 주둔
- 제103근위공수사단 -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비텝스크 주둔
개입 취소 부대
4. 여러가지 이야기
- 당시 같은 시기에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벌어졌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자칫하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중국 전면 침공은 보류했다.
- 체코를 빛낸 아이스하키 선수인 야로미르 야그르(Jaromír Jágr)는 68번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야그르의 할아버지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토지를 몰수당하고 집단농장으로 만든 것에 대해 반발하다가 프라하의 봄 때 옥사한 비극적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달았다고 한다. 한편 야로미르의 조부는 둡체크 서기장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비틀즈의 Hey Jude를 당시 체코 시민들이 공산당 보수파에 대항하는 의미로 Hey Jude를 국가처럼 부르고 다녔다. 시위대를 상징하는 곡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비틀즈가 공산권에 퍼뜨린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16]
-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바가 있었고 그 결과로 프라하의 봄이 끝난 뒤 쿤데라의 소설들은 체코에서 거의 대부분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프랑스로 이주한 후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걸작 소설이다.
- 세계적인 육상선수 에밀 자토펙도 프라하의 봄에 가담했다가 숙청되었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지만 그 뒤 청소부, 광산 노동자 등을 하면서 철저한 냉대를 받았다가[17] 벨벳 혁명으로 복권되었다. 둡체크가 민주화 얼마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18]과 달리 그는 80대 직전까지 장수했고 20세기 말에 사망했다.
- 체코가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1990년에는 최초로 프라하의 봄 축제가 개막되었는데 전야제 행사로 "프라하의 봄 콘서트"가 열렸다. 이 콘서트의 피날레에서 체코가 낳은 명 지휘자인 라파엘 쿠벨릭이 42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76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와 체코 관현악단을 이끌고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저 유명한 블타바(몰다우)를 연주할 때 지휘자, 연주자, 관객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상
-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도입부에 이 사건이 언급된다. 작가가 프라하의 고서점에서 중세 수사인 아드소의 수기를 구했지만 프라하에 갑자기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급히 몸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는 사이 번역을 했지만 중간에 동행자가 원본을 가지고 어디론지 가 버렸고 작자는 원전을 구하려고 했으나 정작 찾아낸 원전은 자신이 번역한 내용과는 전혀 딴판인 책이었고 그래서 원본을 영영 구할 길이 없어졌다는 이야기.
장미의 이름은 소설 내에서 듣는 이야기나 회고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른바 액자소설이지만 이는 아드소가 노년에 이 수기를 쓰면서 다시 회고하게 되는 구성. 책의 입수 과정은 그냥 서문에만 언급된 설정이다. 세상에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도 존재한다는 말이 복선으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 체코 영화계를 비롯해 갓 융성하던 체코 문화의 정점이자 엄청난 후폭풍을 안긴 사건이었다. 소련 당국의 검열에 된서리를 맞은 밀로스 포먼과 이반 파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렸다. 포먼의 '소방수의 무도회' 당시 벌어졌던 검열 스캔들은 누벨바그 일원들이 항의 성명을 낼 정도로 큰 스캔들로 꼽힌다. 베라 치탈로바 역시 9년이나 커리어가 단절되어 버렸다. 얀 슈반크마예르도 그렇고 이 시절 작가나 감독들 중 검열의 된서리를 맞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얀 슈반크마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엔 제작 체계가 국영이라 검열도 검열이지만 기획 단계에서 퇴짜맞은 게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획서를 쌓아두다가 민주화 이후 꺼내서 만들었다고. 화장터 인부나 귀, 줄 위의 종달새 같은 체코 뉴웨이브 걸작들도 대다수가 개봉 금지당하고 소련 붕괴 후에나 공개되었다. The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 활동 역시 프라하의 봄에 영향을 받아 결성했으며, 활동 기간 동안 엄청나게 탄압받았다.
-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에서 주인공 게릴라 일행이 납치한 미군 장교 맥두걸이 "어차피 혁명해 봤자 러시아처럼 될 거다."라고 조롱하자 게릴라 중 한 명이 "우린 절대로 그 관료주의자 놈들처럼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물론 현실은...
- 이 사건이 있은 후 안 그래도 소련과의 관계가 나빴던 알바니아는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데 대한 항의 표시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했다.
- 공산독재의 정점을 찍은 김일성의 북한은 역시나 프라하의 봄을 '체코 정부의 강압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제대로 못해서 벌어진 사건' 이라고 비난했다.
- 프라하의 봄 이후 1970년대 말 대한민국과 중국에서 유사한 사례인 서울의 봄, 베이징의 봄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다행히 체코의 동유럽 혁명과 마찬가지로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었으나, 중국은 아직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체제 하에 있다.
- 2015년 5월 말 러시아 TV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가 온 건 쿠데타 진압을 위해서였으며 고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프라하의 봄을 왜곡보도하자 체코 정부에서 불쾌감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 여담이었지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한 동안 루마니아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소련군이 진입하기 며칠전에 직접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면서 둡체크를 지지했고, 루마니아로 귀국한 이후로 소련군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연설을 펼쳤으며, 이를 통해 반공정서가 강한 사람들도 이 연설에 감동을 먹어서 공산당에 앞다투어 입당시키면서 자신의 지지자로 만든것은 물론, 서방권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획기적으로 상승하면서 1970년대 내내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에서 신이나 다를바없는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물론 외채가 막대하게 불어난 1980년대에는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인민들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지지를 까먹어서 자기 자식들이 충고를 해줘도 인기가 많았던 1970년대의 모습에 취한 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5. 등장 매체
프라하의 봄 직후 상황을 다루는 영화로는 카렐 카치나의 귀(Ucho)가 있다. 프라하의 봄 좌절 후 개혁파들이 숙청당하고 감시당하는 상황을 다루는 영화로, 제작 직후 상영 금지 당해 1990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했다.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 시기를 다룬다. 1988년 영화화되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쥘리에트 비노슈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자체는 원작을 그다지 잘 영화화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이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원제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프라하의 봄'으로 제목을 바꿔서 수입되었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의 냉전 시나리오의 하위 이벤트 중에 등장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주 혁명이 발발했다는 메세지와 함께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원래는 적이어야 할 체코 진영이 아군으로 등장해서 바르샤바 조약과 같이 싸운다.[19]
폴란드와 체코가 합작하여 만든 작전명 다뉴브(2009)가 이 사건을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다. 콜드 워로 유명한 토마즈 콧과 이리 멘젤이 출연한다. 한때 쿡TV에서 결제하여 볼 수 있었다.
6. 언어별 명칭
체코어: Pražské jaro슬로바키아어: Pražská Jar
영어: Prague Spring
러시아어: Пра́жская весна́
폴란드어: Praska wiosna
헝가리어: Prágai tavasz
불가리아어: Пражка проле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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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라하를 진압한 군대는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4개국 군대로 사진 속 전차는 폴란드 인민군 소속이다.[2] 사실 경제정책의 경우에는 소련도 알렉세이 코시긴가 총리로 재직하면서 소련경제의 효율성 향상을 목표로 경쟁시스템 도입 및 자율성 강화로 모토로 한 코시긴 계획을 한창 시행했을 때라 크게 할말이 없기는 했지만, 임레 너지의 경우처럼 정치적으로 자유주의 정책을 펼것으로 우려했었다. 흐루쇼프가 헝가리의 임레 너지를 사형시킨것도 탈스탈린화를 주도해서가 아니라 중립국을 선언하려 했기 때문인것과 비슷했다.[3] 대면 당시 그를 향해 불신임 제스쳐를 팍팍 보냈다.[4] 헝가리 주둔 소련군[5] 이때가 T-10의 유일한 실전 기록이다. 이 전차는 프라하 민중들한테 낙서를 당한 것 빼고는 별 일 없이 귀환했다고 한다.[6] 소련은 나토군의 개입을 우려해 당대 최신 병기들도 적극적으로 투입했고 T-62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BMP-1도 실전투입했다. 그러나 나토군의 개입은 일어나지 않았다.[7] 시기적으로 72년 이전 생산분이기 때문에 대공기관총이 존재하지 않는다.[8] 위 사진의 T-55들은 기관총을 사용하고 나서 정리하지 않아서 기관총이 제멋대로 돌아가 있다.[9] 소련 공군 159근위전투기연대 소속으로, 159근위전투기연대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주둔 제4전술항공군의 일부이다. 나토군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영내로 재배치되었다.[10] 당시 동독군도 처음엔 동원하려 했지만,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하는 모양새가 과거 나치 독일의 기억과 겹쳐보일 것을 우려해서 막판에 철회해 동독군은 투입되지 않았다.[11]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조약군의 침공 시 나토군이 즉각 개입하려 했다.# 오스트리아는 비록 중립국이지만 실질적으론 서독과 이탈리아를 보호하는 완충지대였기 때문이었다.[12]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뒤 슬로바키아 산림청에서 잠시 근무했고, 벨벳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88년에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여튼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덕에 벨벳 혁명 때 빠르게 복권되고 군중들 앞에서 다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다만 민주화가 되고 얼마 가지 않은 199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3] 30,000명의 병력과 2,000여 대의 차량, 750대의 전차, 592대의 장갑차[14] 3S정책은 문화적으로 유화정책을 펼친거라면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으로 유화정책을 폈던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15] 그래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1969~1980년대 초반에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을 후사크의 아이들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베이비붐은 198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자 재정상 이유로 출산장려정책을 축소하여 출산율이 2명대 초반 수준으로 줄어들며 끝났고, 벨벳 혁명 직후에는 신혼부부를 상대로한 아파트 저리대출정책이 중단되면서 1990년대 기간 동안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국의 출산율이 1명대 초반대로 격감하기에 이를렀다. 그래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국에서 신혼부부 대상 아파트 저리대출 중단을 큰 실책으로 손꼽고, 해당 정책을 재시행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16] 의외로 동구권, 특히 소련의 경우 서방과 가까웠던 레닌그라드에 비틀매니아들이 상당수 있었다.[17] 다만 자토펙은 끝까지 소련에 협조를 거부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18] 정확히는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이 악화되어 향년 71세로 사망하였다.[19] 물론 이 행위를 하려면 많은 수의 자금을 지불하고 소련에 선전포고해야 한다. 바르샤바 조약의 본거지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점령하면 동유럽 전역이 나토 영역으로 편입된다. 만약 소련과의 데프콘이 최고 상태라면 핵을 날리려고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