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세르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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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중세
2.1. 슬라브족의 이동2.2. 라쉬카2.3. 두클랴
3. 오스만 제국의 지배4. 세르비아 공국의 부활5. 세르비아 왕국6. 유고슬라비아 왕국7. 제2차 세계 대전8. 티토 치하9. 유고슬라비아 전쟁10. 코소보 전쟁11. 코소보 전쟁 이후12. 역대 국가수반2.3.1. 불가리아의 속국에서 왕국으로
2.4. 부칸에 의한 라쉬카의 부활(부카노비치 왕가)2.4.1. 우로시 1세(1112 ~ 1145)
2.5. 스테판 네마냐의 세르비아 왕국(1217 ~ 1346)2.6. 세르비아 제국(1346 ~ 1371)2.7. 세르비아 공국(1372 ~ 1459)12.1. 역대 국왕
13. 출처[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2. 중세
5세기 ~ 1459년현재는 슬라브계 국가들로 꽉 차있는 발칸반도지만, 실제 슬라브인은 기원후 5세기에나 최초로 발칸 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로마화된 일리리아인이나 켈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르비아인을 포함한 슬라브인들의 원래 고향은 지금의 동유럽 일대였다. 슬라브인들의 원주지 위치는 고고학적 증거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폴란드 일대, 우크라이나 일대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하나 아무튼 로마 제국 국경 너머의 게르마니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4~5세기 경 이웃의 게르만족이 쇠락해 가는 로마제국 하의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하자 슬라브인들이 이웃이 떠난 바로 그 자리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6세기 경에 동로마 제국 국경인 다뉴브 강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뉴브 강 남쪽의 주인인 동로마가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및 사산 왕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이들은 슬금슬금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인들의 땅인 발칸반도를 습격하였고, 이들의 행보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대담해져 원주민인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습격 대상인 발칸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2.1. 슬라브족의 이동
깔짝대긴 했어도 동로마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던 슬라브인들의 이주는 580년대부터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로 변화했다. 슬라브인 중에는 서쪽으로 떠난 슬라브인 외에도 원래 살던 곳인 동유럽에 잔류한 이들도 있었는데 동로마 당국은 제국 영내로 들어 온 슬라브인들을 스클라비니(Σκλάβηνοι), 동유럽에 잔재한 슬라브인들을 안테(Áνται)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안테들 역시 동로마 영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원인은 바로 558년 볼가 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인 아바르인들이 서진하여 '안테'가 주로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한 것인데 안테는 결국 아바르에게 패배했으나 아바르인들은 안테를 동맹으로 받아들여 같이 서진하였고,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이 580년경부터 동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공격 와중에 안테 역시 발칸 반도에 정착했다.
슬라브인들의 대규모 침공 당시 이를 통제해야 할 동로마는 흑사병-사산 왕조와의 전쟁-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이라는 연속 재앙 크리를 맞아 한동안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음은 물론[1], 주 관심사도 동쪽 전선에 몰려 있어서, 서쪽 전선에서 저그처럼 내려오는 이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슬라브인들이 밀려온 지역의 로마인들은 아직까지 동로마의 행정력이 미치는 몇몇 거점들로 도망치거나 들어오기 힘든 험한 산지 및 섬에 숨어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잔류해 슬라브인들과 통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에 동화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인두세 문제로 출산율이 낮았지만,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슬라브인들의 경우, 척박한 동유럽에서는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로 출산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고, 이로 인해 슬라브인들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결국 현지의 로마인들이 슬라브인들에게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발칸 반도는 8세기 초 정신을 차린 동로마가 회복한 그리스 일대를 제외하면 슬라브인들의 세상이 되었는데 스클라비니는 주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일대에 정착했고, 안테는 주로 오늘날의 불가리아 일대에 정착했다. 그리하여 스클라비니는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등의 조상이 되었으며, 안테는 불가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10세기 경에 저술한 《De Administrando Imperio》(제국의 통치에 관하여)라는 서적에서는 세르비아인들의 정착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전하고 있는데, 세르비아인들이 처음 발칸반도로 이주해왔을 때,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세르비아인들에게 테살로니키 남서쪽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 후 정착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던 세르비아인들이 다뉴브 강에 이르러 마음을 바꾸어 이라클리오스에게 다시 정착지를 달라고 부탁했고, 이라클리오스는 세르비아인들을 디나르 산맥[2]과 사바 강[3]에 정착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9세기 세르비아 공국들. 오른쪽의 회색 영역은 세르비아(Србија) 혹은 라쉬카(Рашка), 왼쪽은 북쪽부터 순서대로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자후믈례(Захумље),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두클랴(Дукља). |
2.2. 라쉬카
스클라비니, 즉 세르비아인들은 정착한 곳에서 라쉬카(Рашка)라는 국가를 이뤘으며, 아드리아 해안지방에도 세르비아계 공국들이 들어서 크로아티아 남부에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보스니아 서부에 자후믈례(Захумље), 헤르체고비나 서부에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몬테네그로에 두클랴(Дукља)가 있었다. 이 다섯국가 중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은 라쉬카였으며,[4] 해안의 세르비아계 공국들에는 로마인들이 남아 세르비아인 지배자들에게 공물을 바쳤다. 이 중 세르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국가는 라쉬카와 두클랴였다.라쉬카와 두클랴 중 먼저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건 라쉬카였는데, 라쉬카는 세르비아인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세르비아인들의 지도자였던 사람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었다. 라쉬카의 군주로서 최초로 언급되는 사람은 비셰슬라프(Вишеслав)[5]였으며, 그 후손인 블라스티미르(Властимир, 재위 830~851) 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역사가 기록된다. 블라스티미르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프레시안 1세(Пресиан I, 재위 836–852)와 3년간 전쟁을 했으며, 트라부니야 공국의 통치자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2.1. 기독교화(정교회): 9세기
세르비아의 기독교화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Constantinus VI, 905~959, 재위 913~959)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이라클리오스 재위기에 발칸 반도로 이주해온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독교화는 9세기에나 이루어졌는데, 먼저 두클랴가 교황의 도움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라쉬카는 블라스티미르의 아들인 무티미르(Мутимир, 재위 850~891)대에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무티미르는 동·서 두 교회 중 어느 쪽에 설지 고민하다 불가리아의 예에 따라 동쪽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다. 그의 아들에게는 세르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스테판(Стефан)이라는 기독교식 이름이 붙여졌다.2.2.2. 동로마 제국 편입
라쉬카는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재위 927?-960?)의 재위기에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데, 그는 이미 페타르 고이니코비치(Петар Гојниковић, 재위 892~917)에 의해 이미 병합되어있던 파가니야를 제외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했다. 하지만 그는 마자르족(헝가리 대공국)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손발이 묶인 채로 강물에 내던져져 익사한다. 그가 죽은 후 얼마 안되어 라쉬카는 동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2.3. 두클랴
2.3.1. 불가리아의 속국에서 왕국으로
세르비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라쉬카가 동로마 제국에 정복당해 테마로 편입되자, 세르비아의 주도권은 두클랴가 쥐게 된다. 두클랴는 요반 블라디미르(Јован Владимир, 재위 1000?~1016) 재위기에만 해도 불가리아의 속국이었지만, 스테판 보이슬라프(Стефан Војислав, 재위 1018~1043) 때는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고 영토를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포드고리아까지 확장하고,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례비치(Михаило Војислављевић, 재위 1050~1081)의 재위기였던 1077년에는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아 두클랴를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두클랴의 왕국 승격은 후대의 네마니치 왕가의 군주들이 세르비아가 예전부터 왕국이었음을 주장할 때 그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스테판 보이슬라프 재위기의 두클랴.
두클랴는 콘스탄틴 보딘(Константин Бодин, 재위 1081~1099)의 재위하에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하지만, 그의 사후 두클랴는 권력다툼으로 몰락했다.
2.4. 부칸에 의한 라쉬카의 부활(부카노비치 왕가)
두클랴 왕국이 몰락한 이후, 콘스탄틴 보딘에 의해 라쉬카의 영주로 임명되었던 부칸 1세(Вукан, 재위 1091~1112)에 의해 다시 라쉬카가 부상하게 되었는데, 부칸을 시조로 하는 이 왕가를 부카노비치 왕가(Вукановићи)라고 한다. 이 왕가의 치세를 기점으로 '라쉬카'라는 명칭보다 '세르비아'라는 명칭이 많이 쓰이기 시작한다. 부칸은 두클랴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코소보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등, 세르비아의 영토확장을 꾀했다.2.4.1. 우로시 1세(1112 ~ 1145)
그의 조카인 우로시 1세(Урош I, 재위 1112~1145)때 헝가리 왕국과 인척관계에 기반한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을 견제했다. 이후 데사 부카노비치(Деса Вукановић, 1162~1165)가 동로마에 의해 세르비아의 공위에서 폐위되었고, 동로마 황제는 그 자리에 티호미르 자비도비치(Тихомир Завидовић)를 임명했다. 티호미르는 1168년 라쉬카 동부를 다스리고 있었던 자신의 동생이자 네마니치 왕가(Немањићи)의 시조인 스테판 네마냐(Стефан Немања, 재위 1166~1196)에 의해 시해당했다.2.5. 스테판 네마냐의 세르비아 왕국(1217 ~ 1346)
세르비아는 스테판 네마냐 재위기에 동로마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네마냐의 뒤를 이은 스테판 네마니치(Стефан Немањић, 재위 1196~1228)대인 1217년에 교황에게서 받은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름으로써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했고, 2년뒤인 1219년에는 네마니치의 동생이었던 성 사바(Свети Сава, 1174~1236)에 의해 세르비아 독립교회가 설립되었다.이후, 네마니치 왕조 휘하에서 번영하여, 이어지는 스테판 두샨 대의 세르비아 제국의 초석을 놓았다. 라틴 제국 성립(1204) 이후 패권자가 사라진 발칸 남부에서 세력을 대폭 넓히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을 격파했고, 1261년에 복구된 동로마 제국과도 싸워 1300년경이 되면 현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2.6. 세르비아 제국(1346 ~ 1371)
그러다가 14세기 중반, 스테판 두샨 대왕의 통치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두샨 대왕은 스스로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며 차르를 칭해 동로마 제국과 맞먹는 황제국임을 선언했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지만, 이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스테판 두샨이 1355년에 급사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그의 치세에 세르비아는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하고 제국을 칭하게 되었지만 황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제국의 내정이 안정되지를 못했다. 이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마케도니아 제국이 무슨 꼴을 당했는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디아도코이). 그나마 스테판 두샨에게는 당시 20세였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있었으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모후와 궁정 관료들에게 매달리는 등 통치자로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 치명타였다.
실제로 스테판 두샨[6]은 '강인한 왕'(Душан Силни)이라는 별명을 받은 한편, 스테판 우로시 5세가 받은 별명은 '약한 왕'(Урош Нејаки)이었다. 결국 스테판 우로시 5세 시대에 제국은 사분오열되기 시작했고, 1371년에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세르비아는 전국시대로 돌입하였다.
여담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발칸반도 대부분을 세르비아의 영토이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옛 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일으킨 사건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2.7. 세르비아 공국(1372 ~ 1459)
- 1차 코소보 전투 문서 참조
그 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하고, 세르비아의 통일을 내걸며 세력을 넓혔지만, 하필이면 이 때 발칸 반도를 동쪽에서부터 먹어치우고 있었던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이에 맞서 라자르는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자기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7]
그리고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로 뒤를 이은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를 비롯한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힘을 인정하고 신하국이 되었지만, 스테판은 이후 세르비아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로서 상황을 보아가며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를 교대로 오가면서, 나름대로 경제, 문화적인 부흥을 이룩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자국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세르비아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신하국이 되는 조건으로 영토도 일부 할양해 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탓에, 문서상으로는 신하국이었지만 사실상 동맹국에 가까운 관계였다.
이때 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내어준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였다. 당시 베오그라드는 헝가리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로, 스테판은 이 도시를 받자 세르비아의 수도로 정했다. 다만 그가 사망하자 다시 헝가리에게 돌아갔으며,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1521년에 정복하게 된다.
하지만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뒤를 이은 친척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1456년에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계승분쟁이 일어나자, 그러지 않아도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던 세르비아 공국은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심지어 세르비아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나라인 보스니아 왕국의 왕이 계승분쟁에 끼어들더니, 주군으로 삼고 있었던 헝가리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만들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더 강력한 완충국이 될 거임. OK?' 라고 제안까지 했고. 헝가리의 마차시 1세가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결국 1459년에 이르러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는 보스니아 왕의 생각대로 보스니아 왕자가 세르비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는 기울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던데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는 관대했던 반면 보스니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보스니아 왕국의 왕 스테판 토마세비치는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오자 제대로 방어도 못하고 세르비아 지역을 버리고 보스니아로 달아났다.[8] 이후 세르비아는 400년 가까이 지배를 받게 되었다.
3. 오스만 제국의 지배
1459 ~ 1817오스만 제국 지배기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은 룸 밀레트에 소속되었다. 오스만 지배기 동안 정교회가 아닌 보고밀파 보스니아 교회에 속해 있었던 이웃 보슈냐크인들이 17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으나 이들의 생활 풍속에도 알레비파 수피 이슬람으로부터 많은 터부가 유입되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를 보슈냐크인이 아닌 세르비아인 위인으로 가르친다. 다만 굳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경우라도 세르비아 지주 계층은 오스만 제국 군대 등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암흑 시대로 묘사하며 심지어 세르비아 관광청에서는 “오스만 제국은 500년 가까이 세르비아를 식민 지배하면서 세르비아 엘리트 계층을 뿌리뽑고, 이슬람 국가로서 세르비아인 기독교도들을 농노로 다루며 모욕하고 착취했다.”는 다소 격앙된 말투로 이 시기를 설명한다.
물론 서구 역사학계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발칸지배기가 어느 정도 재평가 되기도 한다. 오해를 방지하자면, 오스만 제국이 불가리아인을 포함한 기독교도들에게 관대[9]했다고 재평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이 발칸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보스니아 일부 지역과 도나우 강 연안의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을 제외한 기존 발칸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거의 제거되어 버리고 그 빈자리를 수조권만을 가질 수 있는 지주로 교체되면서 역설적으로 발칸의 농민들이 세금 부담이 경감되고 이동의 자유도 얻게 되어 동시대 동유럽 다른 지역의 농민들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장점[10]도 있었지만, 관료주의 및 종교적 제약으로 인한 인쇄술과 과학지식의 확산 제약, 마케도니아 일대의 정치투쟁, 정비되지 않은 도로 때문에 산업화와 기업농의 발달이 저해되어 훗날 발칸의 국가들이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처지는 등 단점도 명확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11] 물론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하게 되면서 이후 근세시대부터 서유럽에서 일어나게 될 르네상스, 종교개혁, 대항해시대, 절대왕정, 그리고 근대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성립까지를 모두 경험하지 못해서 다른 유럽 지역들에 비해 낙후된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도 몇몇 유화책 및 각종 근대시설 투자, 수풍댐 건설, 군장교와 의회 중의원의 조선인 비중 등의 이유를 가지고 일제강점기는 명암이 모두 공존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위와 같은 사실을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지역 국가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1804년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가 제1차 세르비아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고[12], 1815년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2차 봉기에 성공[13]하고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1828년에 러시아와 에디르네 협정을 체결하면서 1830년에 자치권을 부여받고 세르비아 공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다만 이 두 차례의 봉기는 민족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예니체리에 저항하는 농민봉기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 모두 술탄에 대해 충성을 맹세했다.
4. 세르비아 공국의 부활
1817 ~ 1882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으로서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때 반 오스만 봉기를 이끈 오브레노비치 왕조와 카라조르제비치 왕조가 경쟁하게 되었다.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을 도와서 오스만에 승리하면서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5. 세르비아 왕국
1882 ~ 1918독립 이후 마케도니아를 둘러싸고 주변국과 갈등이 지속되어 1878년 완전 독립 이후로도 두 차례나 발칸 전쟁을 벌였으며, 완전 독립과 함께 보스니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친 오스트리아 성향이던 세르비아 왕국 제2대 왕인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비밀결사인 '검은 손'에 의해 1903년 암살되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에게 왕권이 넘어갔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검은 손'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며 세르비아 침공이 발발,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을 불러왔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915년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참전하면서 결국 세르비아는 1915년 말 두 나라에 의해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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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을 강제 합병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긴 이름의 국가가 되었으며, 1929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이 변경되었다.그러나 단일 국가로 묶여본 적이 없는 민족 집단들을 강제 합병해 억지로 묶은 나라들이라 내부적으로 민족, 지역 간 분란이 심화되었고[14] 권력을 세르비아인이 독식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국왕 알렉산다르 1세에 의해 의회가 뒤집히고 전제 왕정이 돼버리면서 분란은 커졌다. 불만에 차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이탈리아, 헝가리, 마케도니아인들과 불가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알렉산다르 1세가 암살당하고 11세의 페타르 2세가 즉위하는 등 혼란이 이어지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7. 제2차 세계 대전
그리스를 쳤다가 피박을 쓴 베니토 무솔리니를 돕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가 발칸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무렵, 섭정 파블레 왕자[15]는 페타르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3월 25일 추축국과 삼국 동맹 조약 가입을 선언했다.[16] 이에 페타르 2세는 군부의 친영파를 결집하여 협정 조인 이틀만인 27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친정을 시작했는데, 독일이 싫다기보다는 파블레의 전횡에 불만이 있었던 만큼 추축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영파의 집권에 당황&분노한 독일[17]은 종전의 '마리타 작전'을 수정하여 알바니아 전선을 지원할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그대로 돌파해 그리스 국경까지 닿을 생각을 품게 되었고, 4월 6일 선전포고도 없이 베오그라드를 잿더미로 만들며 침공을 시작했다. 일단 전쟁이 터지고 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의 뒷통수를 치고[18] 독일군에 가담했으며,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헝가리군은 간단히 조약을 파기하고 남진해왔다. 동시에 불가리아에서 건너온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이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간신히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우며 10일만에 나라를 내주었다. 지금의 세르비아 영토에는 독일의 군정청인 세르비아 군정청과 군정청 내에 자치 정부로 잠깐동안 세르비아 위원정부가 들어섰다가 세르비아 구국정부로 바뀌었다. 문제는 그 다음. 유고 각지에서 반독 빨치산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 빨치산들이 왕당파, 공화파, 공산당 등 아주 가지가지였고, 무엇보다 서로 잡아먹으려 들었다.특히 유고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게릴라 조직 '체트니치(Четници)'를 이끌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의 지원까지 받았지만, 반공 왕당파로 언젠가 연합군의 탱크가 베를린 의사당 정문을 까부수고 들어가 유고 왕정이 부활할 날만 기다리며 독일군을 공격하기 보다는 당시 세르비아인 50만명 가량을 잔혹하게 학살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Ustaša)과 이에 맞서 싸우던 파르티잔(빨치산) 공격에 열을 올렸으며 20만명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을 학살했다. 체트니크의 공격에 질린 티토의 호소와 킴 필비 등 정보 기관에 암약하고 있었던 간첩들의 공작으로 인해 1944년 연합군은 지원을 끊어버리고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도 체트니크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실제로 체트니크 조직 중에서 동료들의 뒷통수를 치고 독일군에 포섭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 또한 주요했다.
어쨌든 체트니크 대신 선택받은 티토의 파르티잔이 전후 주도권을 쥐고, 전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이 때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 연방 내 구성체로 성립되면서 현재의 세르비아 국경(코소보 제외)이 대략 형성되었다. 유고 연방은 일단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간섭을 배제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중립,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이로 인해 소련과 마찰이 심했다.
8. 티토 치하
티토 정부는 파르티잔 시대의 경험을 토대로 소련이 침략해올 경우를 대비하여 범 국민적인 방어체계를 만들었다. 이 방어체계는 청소년 이상의 모든 국민이 각각의 게릴라 부대에 소속되며, 국민 개개인은 독자적인 저항권을 지니고 있어서 정부가 함락되어 항복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침략자에 대한 항전을 계속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물론 전국민이 정규군으로 처리되어 제네바 협약까지 적용된다. 당연히 각지에 무기를 잔뜩 챙겨두고 훈련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티토의 죽음 이후 내전이 벌어졌을 때, 아주 열심히 싸울 수 있었다. 다만 티토 통치시기때는 티토가 민족주의를 억누르고 모든 민족을 공존과 융합을 추구하는 통치를 하였기에 민족간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는 아니었다.[19]9. 유고슬라비아 전쟁
본디 티토는 세르비아인이 아닌 크로아티아인이었고[20] 거기다 파르티잔 활동을 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지도력과 통제력을 유지하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티토 사후 통제력을 상실한 유고 연방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민족주의 선동을 막지 못하고 붕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제외한 전 연방 구성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퍼져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부터 재독립을 하려고 들었던 것으로, 이를 진압하려는 신생 크로아티아/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인들을 후원하는 베오그라드 정권 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인종청소와 포로 학살,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포격으로 인해 대두된 동정적 감정이 서구의 개입을 불러왔으며, 베오그라드 정권은 크로아티아 동부와 중부, 보스니아 등지의 세르비아인들을 모두 내팽개치고[21]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신 유고연방)로 국가를 개편하였다.이로 인하여 타민족 지역에서 수백년 넘게 살아오던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 고향에서 추방당한다.
10. 코소보 전쟁
그러나, 권좌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대세르비아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정적 살해와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1999년 신유고 연방은 NATO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신유고 연방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듬해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세르비아 국영 RTS[22]방송국을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나고[23] 전범으로 기소되면서 정권까지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대통령선거에서 투표율 미달로 대통령이 세 차례나 선출되지 못하는 혼란상이 잇따랐고,[24] 2003년에 조란 진지치 총리가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6년 5월 21일에는 몬테네그로 공화국이 분리독립투표를 찬성으로 의결함으로써 신 유고연방이 해체되어[25] 세르비아는 내륙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26] 이런 가운데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었는데 죽기 전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정보를 듣곤 죽기 얼마 전까지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유고 구성국들의 연쇄독립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행하며 구성국들 간의 증오와 대립을 초래한 밀로셰비치의 책임도 큰 편이다. 코소보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타협할 수도 있었던 사안에[27] 제노사이드를 저질러 잃어버린 게 한두 개가 아니다.[28]11. 코소보 전쟁 이후
한편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코소보 역시 세르비아로부터 강력하게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유고 연방 국가들의 분열로 위축되다시피한 세르비아는 더 이상의 분리 독립은 용납될 수 없다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코소보라도 부여잡고자 코소보의 독립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코소보의 독립을 막고자 각종 압력과 회유책을 동원하며 코소보를 압박했다.[29][30]이에 마르티 아티사리 핀란드 대통령과 유럽연합, 국제연합 등이 코소보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평화 협상과 세르비아와 코소보 간 화해를 중재, 주선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코소보의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2008년 2월 코소보는 일방적으로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이러한 일방적 독립 선언을 무효라며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고 코소보가 독립하자 세르비아 전역에서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을 규탄하는 독립 반대 시위가 벌어졌으나[31] 독립한 즉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해버렸다. 대한민국, 폴란드, 이집트 또한 비록 미수교국이긴 하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수단, 아르헨티나, 중국, 스페인, 인도네시아, 슬로바키아, 러시아, 그리스, 인도, 이라크, 모로코 등 대다수 나라들이 코소보를 정식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코소보는 현재 그 지위가 상당히 애매한 미승인 국가로 남아있는 상태다.
역사적으로 침략과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고 현재에도 전범의 처리문제와 지속되는 민족 분쟁, 종교 분쟁으로[32] 한동안 EU 가입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UN 가입 역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2년 UN 안전보장이사국의 유고 제재 결의에 따라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2000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신 유고 연방의 국호를 달고 다시 가입했다.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물러나고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혼합체제가 실시된 세르비아는 극도의 정치 혼란을 겪는데 대표적으로 2003년 총리 조란 진치치가 정치적 라이벌들과 영합한 세르비아 마피아에 암살당하고 내부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했다. 2004년에는 코소보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정교회 건물과 시설이 파괴됐다.
한편 몬테네그로는 2006년 독립 이후 EU 가입의 청신호가 켜진 상태다. 그러나 이런 국내외적 악조건 상황속에서도 세르비아는 현실적으로 EU 회원국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2009년 12월 세르비아는 EU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 세르비아 주변의 이웃한 나라들이 EU에 가입했거나 EU 가입을 추구하면서 세르비아 내부에서도 지금 당장이라도 EU에 가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질 못하고 있다. 허약한 자국의 경제력도 그렇고 EU의 기준에 맞게 고쳐져야 할 법률이나 제도 등이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얻어진 건 EU 회원 후보국 지위 뿐. 일부에서는 아예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EU 가입을 이뤄냈듯이 세르비아도 이들 나라처럼 EU 가입 문제를 국민투표로 해결지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헌데 실제 국민투표를 해서 세르비아 국민 과반수가 EU 가입에 찬성한다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 승인해줄지는 글쎄...[33]
2019년 3월 17일에 뉴욕타임스는 세르비아에서 언론 자유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2020년 6월 21일에 세르비아는 코로나19가 퍼진 상황에서 총선이 진행됐다.# 총선에서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이 승리했다.#
2020년 6월 22일에 미로슬라프 라이차크 EU 특사는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을 면담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르비아와 코소보 평화협상을 유럽 연합이 중재한다고 밝혔다.#
1년 8개월만에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EU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세르비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법관·검찰 임면에 대한 정치권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헌법개정안이 62%의 찬성으로 통과됐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이번 국민투표는 세르비아의 EU 가입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으로, 이번에 통과된 헌법개정안은 법관과 검찰의 임용과 해임에 행정부, 의회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사법부 구성 권한을 법원에 귀속시켜 사법부 독립을 강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12. 역대 국가수반
12.1. 역대 국왕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of_Serbia대수 | 왕조 | 이름 | 재위 |
1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 1817년 ~ 1839년 |
2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밀란 오브레노비치 | 1839년 ~ 1839년 |
3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 1839년 ~ 1842년 |
4 |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 1842년 ~ 1858년 |
5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 1858년 ~ 1860년(복위) |
6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 1860년 ~ 1868년(복위) |
7 | 오브레노비치 왕가 | 밀란 1세 | 1868년 ~ 1889년 |
8 | 오브레노비치 왕가 |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 1889년 ~ 1903년 |
9 |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 페타르 1세 | 1903년 ~ 1918년 |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병합되던 시절
대수 | 왕조 | 이름 | 재위 |
9 |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 페타르 1세 | 1918년 ~ 1921년 |
10 |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 알렉산다르 1세 | 1921년 ~ 1934년 |
11 |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 페타르 2세 | 1934년 ~ 1945년 |
13.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유럽 왕가 세르비아 왕가 파트 (블라스티미로비치 왕가, 보이슬라블례비치 왕가, 부카노비치 왕가, 네마니치 왕가)
- 두샨 바타고비치 外, 정근재 역, 《세르비아 역사》, (선인, 2001)
- 이정희, 《동유럽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1] 식자층 및 문자 기록이, 땅을 대거 뺏기고 연이어 페르시아, 이슬람과의 사투를 벌였던 7, 8세기에 확 줄어든다.[2] 발칸 반도 서부의 산맥[3]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남쪽에 있는 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쪽 국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4] 그래서 보통 세르비아를 지칭할 때 라쉬카라고 했다.[5]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그를 이었다는 라도슬라프(Радослав), 프로시고이(Просигој)도 마찬가지.[6] '두샨' 은 별칭이고, 원래 이름은 스테판 우로시 4세였다.[7] 사실 코소보 전투 자체는 말이 패배이지 무승부에 가깝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무라트 1세도 전사했고,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병사들까지 일부 빼내 와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코소보 전투 한번에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세르비아에게는 '다른 곳에 주둔한 병사들'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회전력에서 밀린 탓에그대로 굴복하고 만다.[8] 몇년 후인 1463년 보스니아까지 쳐들어온 오스만 군에 의해 스테판은 붙잡혀 참수되고 보스니아 왕국도 완전히 멸망한다.[9] 단순히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도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면 당연히 규모가 큰 교회가 모스크로 전환되고 교회의 신축허가도 제한되거나, 무슬림들과 함께 지내는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이 무슬림들 눈치를 보면서 종소리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해 딱다기로 널빤지를 쳐서 신자들을 불러모아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대했다기보다는 오스만 제국이 여느 이슬람 국가들과 비슷하게 비무슬림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과 제한을 두는 대신 어느 정도 숨통을 터준 것에 가까웠다. 비무슬림들이 전부 이슬람으로 개종해버리면 세금 낼 사람이 없어지니. 오스만 제국에서 발칸의 비무슬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려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쿠란에 근거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나서 철회해야 했다.[10] 이마저도 2~3세기가 지나면서 서유럽과 오스만의 격차가 커진 상태에서 오스만이 서유럽과 대립하게 되어 징세가 가혹해지면서 중세와 다를 바 없어지긴 했다.[11] 출처: 마크 마조워, 이순호 역, 《발칸의 역사》, 2014, p60-p62, p72-p73[12] 1차 봉기가 실패한 이유는 오스만 술탄이 기독교도들이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어도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기독교도들의 무장을 허용시키는 것은 꺼림칙해했던 데다가, 오스만 술탄에 대해 지원을 거절당한 세르비아 봉기군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았던 러시아도 오스만 제국이 와해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13] 이 때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망명한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가 오스만 제국으로 귀국했다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에게 살해되어 목이 술탄에게 보내졌다.[14] 사실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등 구 유고 출신 국가들은 민족 혈통상으로는 남슬라브족이 맞다. 허나 지역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지라 이질감이 심하였다. 애초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모든 지역이 언어적, 혈통적으로 동일한 민족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슬로베니아 지역이나 마케도니아 지역은 남슬라브 계통의 민족이긴 하지만 언어 자체가 달랐고, 헝가리인이나 알바니아인, 튀르키예인 같이 혈통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민족들이 소수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다 사라예보 사건 발생 이후에도 보슈나크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있기를 원했지 세르비아에 복속되기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암살당한 황태자 복수를 명목으로 세르비아인들을 살해했다.[15] 이전 버전에선 친독파라고 서술되었는데 《2차 대전의 마이너 리그》에선 친영파였지만 사방이 추축국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축국에 가입했다고 했다.[16]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1930년대부터 꾸준히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특혜적인 대우를 해준데다가,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실상은 '독일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혜적이고 실질적인 중립 보장을 얻어냈다.[17] 사실 그동안 엄청나게 유고슬라비아에 투자했는데도 뺨을 맞았으니 열받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법. 그것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베오그라드의 시민들이 독일의 국기와 외교관을 모독하기까지 했으니, 속좁은 히틀러가 뭔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18] 크로아티아 온건파 세력이 섭정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1940년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어내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설립했지만, 이탈리아의 입김을 받은 강경 파시스트 우스타샤가 반란을 일으켰다.[19] 다만 티토의 노력에도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요직은 세르비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20] 정확하게는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21] 밀로셰비치가 생각이 없어서 내팽개친 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의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과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은 세르비아의 미수복지구일 뿐이지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을 세르비아 본국이 고수하였기 때문이다.[22] Radio-televizija Srbije/Радио-телевизија Србије[23]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당시 세르비아인들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이기만 했던건 아니었고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결과가 세르비아 이미지의 추락과 경제악화라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밀로셰비치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약화되었다.[24] 당시 세르비아에서 투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하면 재선거가 치러지도록 하는 법안이 있었는데 세 차례 대선에서 투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해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25] 사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독립을 추진하려고 하자 국명을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폭넓은 자치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제시하는 등 몬테네그로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26] 때문에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흑해를 접한 다른 동유럽 이웃국가로부터 항구도시들을 빌려 해상무역을 하고 있다.[27] 사실 코소보 전쟁의 경우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부여된 자치권을 밀로셰비치가 박탈하면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분노가 확산된 면도 없지 않았다.[28] 보스니아 전쟁은 이 중 가장 악랄한 악행이라고 볼 수 있다.[29] 당시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코소보 측이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자치 허용과 더불어 세르비아 중앙정부의 국회 의석 절반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출신들에게 양분하겠다는 제안도 내걸었으나 코소보의 알바니아계가 독립하겠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실패했다.[30] 그럼에도 코소보 전쟁이 종전된 이후에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사람들을 제대로 자국민으로 대접해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밀로셰비치 정권 시절과는 다르게 학살과 억압만 안 했을 뿐 오히려 선거 투표권과 시민권 등을 허용하지 않는 등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차별대우를 이어갔으며 자치권만 돌려주면서 외려 이들의 민의를 무시,홀대하는 태도를 보였다.[31] 말이 좋아 반대 시위였지, 사실상 폭동이었다.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으며, 미국 국기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32] 그런데 이런 민족 분쟁들이나 종교 분쟁들은 세르비아 말고도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도 다 대부분 겪었다. 세르비아의 옆나라이자 한국에서는 요구르트와 장수국가로 유명한 불가리아도 과거 터키계와 이슬람교를 믿는 자국 내 슬라브인들을 민족,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하거나 군경을 동원해 유혈진압한 전례가 있었고 헝가리도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 문제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와 갈등을 빚었으며 구소련권 국가인 몰도바나 우크라이나도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민족, 지역간 대립과 갈등이 전쟁과 지역감정으로 폭발한 적이 있었다.[33] 사실 세르비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와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이 나라들의 경우 최소 EU 가입을 위한 EU측과 협상이 완료된 상태에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 덕분에 EU 가입이 수월했다. 허나 세르비아의 경우 뒤늦게 EU에 가입신청서를 냈고 가입 협상도 겨우 시작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세르비아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설사 찬성표가 많이 나온다고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을 받아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