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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0000><colcolor=#FFF> 세르비아 공국 제2대 공작 밀란 오브레노비치 Милан Обреновић, кнез Србије | |
이름 | 밀란 오브레노비치 (Милан Обреновић) |
출생 | 1819년 10월 21일 |
세르비아 공국 크라구예바츠 | |
사망 | 1839년 7월 8일 (향년 19세) |
세르비아 공국 베오그라드 | |
재위 |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 |
1839년 6월 25일 ~ 1839년 7월 8일 | |
아버지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
어머니 | 류비차 부코마노비치 |
형제 | 페트리야, 사브카, 가브리옐라, 마리야, 토도르, 페타르, 미하일로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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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의 공작(크네즈)으로,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장남이다.2. 생애
현재의 베오그라드 대학교의 전신인 베오그라드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생전에 명석했다고 한다.밀로시가 의회와의 갈등으로 1839년 6월 13일 퇴위하자 즉위하였으나 불과 26일만인 1839년 7월 8일에 겨우 19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한다. 공작은 동생 미하일로가 물려받았다.
그의 치세 동안 세르비아는 친 오스트리아 외교를 했다.
아버지는 세르비아의 독립영웅이었지만 그게 다였을 뿐 독선적이고 전제적, 전근대적이라 정치인이자 군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을 받고, 동생 미하일로는 개혁적인 성향으로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으나 전제적인 끼를 못 버리고 개혁파와의 불통으로 인해 "계몽전제군주"라는 웃지못할 별명을 얻고 암살당하기까지 해서 명석했다는 밀란의 부재가 더욱 더 부각된다. 미하일로 사후에 당조카 밀란 1세와 당조카손자 알렉산다르는 군주로서의 역량 자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1] 결국 왕위를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에 뺏겼다는 점에서 더더욱.
3. 가계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780 ~ 1860)
- 밀란 오브레노비치 (1819 ~ 1839)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1823 ~ 1868)
- 예브렘 오브레노비치 (1790 ~ 1856)
- 밀로시 J. 오브레노비치 (1829 ~ 1861)
- 밀란 1세 (1854 ~ 1901)
-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1876 ~ 1903)
[1] 밀란 1세는 부인과의 불화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났고 알렉산다르는 모두가 반대하는 12살 연상인 시녀이자 과부와의 결혼을 해 놓고 왕비가 나이가 많기는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도 아닌데 자녀를 가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바로 후계자로 왕가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데다 이렇다 할 공적도 없는 처남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를 추방시키는 국제적 망신을 저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