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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18:37:57

페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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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초대 국왕
페타르 1세
Петар I Карађорђевић
파일:Peter I of Yugoslavia.jpg
출생 1844년 7월 11일
세르비아 공국 베오그라드
사망 1921년 8월 16일 (향년 77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베오그라드
재위기간 세르비아 국왕
1903년 6월 15일 ~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왕
1918년 6월 15일 ~ 1921년 8월 16일
서명 파일:페타르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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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00><colcolor=#fff> 가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아버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어머니 페르시다 네나도비치
배우자 몬테네그로의 조르카[A][2]
자녀 옐레나, 밀레나, 조르제, 알렉산다르, 안드레이 }}}}}}}}}
파일:KIng.Peter.of.Serbia.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아내와 자녀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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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

2. 생애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오브레노비치 왕가와의 세르비아 왕위다툼에서 밀려나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재야에서 지내며 살아갈 운명에 처해졌었다.

그러나 오브레노비치 왕가 출신의 알렉산다르 1세가 폭정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기껏 살벌한 다툼 끝에 왕위에 올라놓고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는 알렉산다르는 입헌군주제전제군주제로 바꾸고, 세르비아인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12살 연상의 평민 과부인 드라가 마신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엄청난 추문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결혼을 반대한 자신의 부모마저 추방시키고 국민들도 탄압했다. 결국 민심이 폭발한 결과 1903년 6월 11일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알렉산다르 1세는 드라가와 함께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당시 59세였던 페타르 1세가 어부지리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자세한 건 알렉산다르 1세(세르비아) 문서 참조.

제1차 세르비아 봉기 100주년이 되는 1904년 대관식을 올렸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제군주제든 입헌군주제든 군주제 체제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전임자를 살해한 쿠데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페타르 1세의 대관식에도 처가인 몬테네그로 왕국불가리아 왕국만 대표를 파견했다. 다만 전임 왕인 알렉산다르 1세는 타국 왕족들과 귀족들까지 폐위를 납득할 정도로 온갖 삽질과 폭정을 벌인데다, 신분부터 평판까지 떨어지는 평민과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비난도 형식적일 뿐이었다.[3] 게다가 알렉산다르 1세는 귀천상혼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난리를 쳐서 결혼한 드라가 마신이 아이를 못 낳자 그녀의 남동생, 즉 오브레노비치 왕가와는 피 한방울 안섞인 자신의 처남을 멋대로 후계자로 선정하면서 나라를 분열시킬 뻔했기 때문에 세르비아 국내 여론은 말할 것도 없다.

발칸 전쟁 때 세르비아군 최고 사령관이기도 했다. 70세[4]라는 초고령에 건강 문제를 이유로 1차 대전 직전인 1914년 6월 24일, 그것도 사라예보 사건 나흘 전 알렉산다르 왕태자를 섭정(대리청정)으로 내세웠다.

1차대전 당시의 행적이 독특한데 당시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직접 참호에서 적군에게 총을 발사했다고 하며 1915년 독일 제국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침략으로 세르비아가 점령당하자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국왕이 친히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항전을 했다고 한다.

이후 세르비아가 승전국이 되면서 그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를 병합해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해방자 페타르 왕(Kralj Petar oslobodilac)으로 평가받으며, 사후에도 국부로 평가받았지만 티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격하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재평가되었고, 현재는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위인으로 평가된다.

2.1. 아내와 자녀

몬테네그로 왕국 국왕 니콜라 1세의 큰딸 조르카(Кнегиња Зорка, 1864 ~ 1890)[A]와 1883년 결혼하여 3남 2녀(실질적으론 2남 1녀만 성년기까지 생존)를 낳았다. 3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이유는 결혼 당시 아버지가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의해 대공위를 뺏기고 본인 또한 오랫동안 재야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조르카 왕비는 1890년 출산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고 이후 페타르 1세는 재혼하지 않았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러시아의 옐레나 페트로브나 공자비
(Княгиня Елена Петровна Российская)
1884년 11월 4일 1962년 10월 16일 러시아의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자[6]
슬하 1남 1녀
2녀 밀레나 공주
(принцеза Милена)
1886년 4월 28일 1887년 12월 21일
1남 세르비아의 폐세자 조르제[7]
(принц Ђорђе)
1887년 9월 8일 1972년 10월 17일 라드밀랴 라도니치
2남 알렉산다르 1세
(краљ Александар I)
1888년 12월 16일 1934년 10월 9일 루마니아의 마리야[8]
슬하 3남[9]
3남 안드레아 왕자
(принц Андрија))
1890년 3월 16일 1890년 3월 16일

3. 여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1868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이라는 페타르 1세를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했다.

[A] 원래 이름은 류비카였으나 결혼하면서 개명하였다.[2] 몬테네그로의 국왕 니콜라 1세의 장녀이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 옐레나의 언니이기도 하다. 결혼 당시 페타르는 39세 노총각이었고, 류비카는 19세였다. 25세에 출산 중 사망.[3] 유럽 왕실과 일반 평민간의 결혼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야기이다.[4] 당시의 70세는 21세기의 90대와 다름없는 나이였다.[A] [6]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의 장남으로 니콜라이 1세의 증손자.[7] 정신질환 때문에 폭력적인 성격이었고 급기야 시종까지 죽였다. 결국 왕실에서 세자의 살인 행각을 필사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는데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세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후에도 여러 번 폐세자 처분을 번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8] 페르디난드 1세에든버러의 마리의 차녀.[9] 페타르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