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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3:54:22

스테판 네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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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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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тефан Немања}}}
파일:스테판 네마냐.jpg
출생 1113년
두클랴 왕국 리브니차[1]
사망 1199년 2월 13일 (향년 85~86세)
할키디키 반도의 아토스 산 힐란다르 수도원
재위 세르비아 대공
1166년 또는 1167년 ~ 1196년
아버지 자비다
형제 티호미르, 스트라치미르, 미로슬라프, 바니카 보이슬라바
배우자 안나
자녀 부칸 2세 네마니치, 스테판 네마니치, 성 사바, 제피미야 네마니치
수도명 시메온
가문 네마니치 왕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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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7대 대공.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던 라쉬카의 독립을 이뤄내고 세르비아를 통합해 세르비아 왕국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2. 생애

1113년 리브니차 지방의 제타(현재 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포르고리차 인근)에서 자후믈례(Zahumlje)의 추판(Zupan: 공작) 자비다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티호미르, 스트라치미르, 미로슬라프. 바니카 보이슬라바[2]가 있었다. 자비다는 세르비아 대공국의 초대 대공 부칸 1세 또는 부칸의 조카 우로시 1세의 아들로 추정되는데, 형제들과 대립하다가 자후믈례로 피신한 뒤 리브니차의 주판이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가톨릭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네마냐는 가톨릭 방식의 세례를 받았다. 이후 자비다 가족이 라쉬카의 중심지인 라스에 돌아간 뒤, 그는 정교회에 의해 세례를 다시 받았다.

1153년, 데사우로시 2세를 축출하고 라쉬카 공작이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 노릇을 더 이상 하지 않고 헝가리에 붙기로 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압력을 행사해 1155년 데사를 니스 처의 덴드라의 통치자로 삼고 우로시 2세를 복위했다. 1162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우로시 2세를 축출하고 벨로시를 새 대공으로 세웠다. 벨로시는 곧 대공위를 데사에게 넘겼다. 마누일 1세는 이를 승인했지만, 덴드라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데사는 덴드라를 넘기길 거부했고,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의 지원을 토대로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1164년, 마누일 1세는 헝가리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때 네마냐는 세르비아 보병대를 이끌고 황제의 원정에 함께 했다. 동로마군은 1165년 제문과 스렘을 정복하였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라스카, 보스니아를 가로질러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진격했다. 그들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스플리트에서 바르까지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게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아드리아 해의 서쪽 해안인 안코나 항구를 공략했다. 헝가리 왕국은 1166년에 반격했지만 격파당했고, 1167년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165년 헝가리에 충성했던 데사를 붙잡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낸 뒤,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분할하기로 하였다. 자비다의 장남 티호미르를 라쉬카 대공으로 삼고, 차남 스트라치미르를 서모라바 공작, 삼남 미로슬라프는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아의 공작으로 삼았다. 이때 네마냐는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레케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동로마 제국의 궁정 칭호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간 뒤, 네마냐는 위기에 직면했다. 라쉬카 대공인 형 티호미르의 동의를 받지 않고 쿠르슈믈리야의 성 니콜라오 수도원과 코사니카의 성모 수도원을 건설했다가, 형제들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체포된 뒤 영지를 몰수당하고 라스 인근 동굴에 감금되었다. 그는 동굴 안에서 며칠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네마냐의 지지자들은 티호미르가 교회 건축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성직자들이 이를 믿고 티호미르를 비난했다. 그러다 동굴을 탈출한 네마냐는 1166년 또는 1167년에 반란을 일으켜 티호미르를 폐위시키고 미로슬라프,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추방했다. 마누일 1세는 라쉬카의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에 티호미르에게 병력을 빌려줬고, 티호미르는 이에 힘입어 네마냐를 공격했지만 즈베찬 남쪽의 판티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시트니카 강에서 익사했다. 다른 형제들은 네마냐에게 항복하여 이전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마누일 1세는 어쩔 수 없이 네마냐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인정했다.

네마냐는 1171년 주르셰비 스투포비(Đurđevi Stupovi) 교회를 라스에 세웠다. 그는 자신이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성 게오르기의 은총 덕분이었다고 선전하였다. 그해 아드리아 해안 일대를 장악한 동로마 제국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이 접근하자, 그는 이들과 모의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반기를 들기로 하였다. 또한 일전의 패배에 이를 갈고 있던 헝가리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1172년, 네마냐는 모라바 계곡에 군대를 파견하여 니시와 베오그라드 사이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작센의 지배를 받는 라브노의 세르비아인들을 선동했다. 그 결과, 라브노 시민들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지배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까지 끌여들어 반 동로마 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전염병에 시달리다 작센 함대에 의해 라구사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 친 동로마 성향의 벨러 3세가 즉위하는 바람에 동맹이 무너졌다. 마누일 1세는 이 틈을 타 세르비아로 진격하여 네마냐의 군대를 격파하고 니슈를 포위했다. 네마냐는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찾아가 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검을 바치며 항복했다. 마누일 1세는 그를 수레에 실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하였다. 네마냐가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마누일은 그를 용서하고 세르비아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한 뒤 돌려보냈다. 제국의 위력을 실감한 네마냐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 탄압에 몰두했다. 그는 보고밀 지도자들의 혀를 자르고 추방해 다시는 "해로운 가르침"을 퍼트리지 못하도록 했고, 재산을 몰수하고 교리서를 소각하였다. 하지만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고, 몰수한 재산은 나병 환자와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리하여 보고밀파는 세르비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180년 9월 24일 마누일 1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헝가리의 벨러 3세는 친 동로마 정책을 접고 1181년 아드리아 해 연안의 북동쪽 도시인 스렘과 제문을 탈환했다. 뒤이어 118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포를 공격했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안드로니코스 람파르다스는 이에 맞섰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를 교살하고 알렉시오스 2세를 실명시킨 뒤 단독 황제로 집권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향후 거취를 놓고 의견 대립이 심해지는 바람에 헝가리군을 상대로 더 이상 통합된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성문으로 후퇴했고, 헝가리군은 약탈을 자행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네마냐는 지금이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1183년 벨러 3세와 동맹을 맺은 뒤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동로마군을 모라바 계곡에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라브노, 니시, 소피아를 연이어 공략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곧 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불가리아 서부 일대를 가로질러 돌아가야 했다. 1184년, 미로슬라프는 네마냐의 지시에 따라 코룰라와 비스 섬을 공략하러 함대를 출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18일 콜레셰프 인근의 폴지체에서 라구사 해군에게 격파당했고, 라구사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한편 스트라치미르 대공 역시 미로슬라프를 돕기 위해 출격했지만, 미로슬라프가 이미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야 했다.

1185년, 이사키오스 2세 황제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지만, 도중에 페터르 4세이반 아센 1세불가리아 제1제국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 봉기하는 바람에 회군해야 했다. 네마냐는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반란에 정신없는 틈을 타 스브르히, 라브노, 코첼지를 약탈하고 니시를 정복했다. 이후 1186년 두클랴의 마지막 통치자 미하일로 3세를 축출하고, 장남 부칸을 두클랴를 포함한 제타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제타의 가톨릭 포교를 중단하고 정교회를 도입했으며, 이 지역의 그리스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이후 1186년 9월 27일 라구사와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체결해, 라구사 상인들이 세르비아 영토를 자유롭게 통행하면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해줬다. 그 대신 라구사 공화국은 라쉬카에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지자, 그는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1188년 뉘른베르크에 사절을 보내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1189년 7월 27일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니시에 도착했고, 네마냐는 형제 스트라치미르와 함께 황제를 맞이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하려 애썼지만, 황제는 얼른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기에 거부했다. 한달 후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통행로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자, 네마냐는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스코페프리즈렌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 2월 헬레스폰트 해협 대신 다느다네스 해협을 건너는 것으로 이사키오스 2세와 합의를 맺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로 쳐들어갔다. 네마냐는 남모라바 전투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하였고, 제국군은 쿠르둠리야에 있는 스테판 궁전을 불태웠다. 하지만 네마냐가 동로마군의 보급선을 유격전을 통해 유린하면서 협상을 요구하자, 동로마 제국 역시 불가리아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협상을 받아들였다. 양국은 네마냐의 차남인 스테판 네마니치와 이사키오스 2세의 조카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은 세르비아에게 돌려줬지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분리하고 싶었던 이사키오스 2세의 의향 때문에 니시와 라브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1193년 헝가리의 벨러 3세가 세르비아를 침략하자, 네마냐는 즉시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1196년 3월 25일 둘째 아들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세르비아 대공 직을 물려주고 아내 안나와 함께 성 베드로 교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으며,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스투데니카 수도원으로 은거했고, 아내 안나는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쿠르둠리야에 있는 성모 수도원에 은거했다. 1199년 2월 13일 86세의 나이로 호데게트리아 성당에서 사망하였고, 힐란다르 수도원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200년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축일을 2월 26일로 정했다.

3. 가족



[1] 현재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2] 보스니아 반(Ban) 쿨린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