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베르사이유의 장미 등장인물 | |||
주역 | |||
마리 앙투아네트 |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 ||
한스 악셀 폰 페르젠 | 앙드레 그랑디에 | ||
조역 | |||
로잘리 라 몰리에르 | 알랭 드 수아송 | ||
기타 등장인물 |
フェルゼン(ハンス・アクセル・フォン・フェルゼン)
성우는 호리 카츠노스케(극초반부)/노자와 나치/토미야마 케이(극장판), 카토 카즈키[1](신작 극장판)/김민석(KBS), 이정구(대원비디오판), 이규화(MBC 극장판), 양석정(EBS)
1. 개요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등장인물.실존 인물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모델이다.
2. 작중 행적
오스칼,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해인 1755년에 스웨덴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다. 첫등장은 집사와 함께 프랑스로 조명학을 배우러 유학가는 걸로 나오며 이때 집사로부터 프랑스 왕세자 부부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그뒤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빼어난 외모와 젠틀한 모습, 북유럽에서 온 귀공자라는 신비로운 이미지까지 더해 당시 프랑스 미혼 여성들이야 말할 것 없고 기혼 여성들도 애정을 표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남이 된다.그러다 파리 방문을 계기로 오스칼만 데리고 파리의 가면무도회에 온 마리 앙투아네트와 만나며 두 사람은 첫 눈에 필이 꽂힌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분이 발각되기 전에 도망치려 했는데, 페르센이 저지하다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위를 맡은 오스칼과 3자 대면[2]하며 이때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후 페르젠은 알현을 핑계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주 만나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고 동시에 오스칼과는 성별을 초월한 우정을 느끼며, 각별한 친구[3]가 된다. 이처럼 지고지순하게 마리 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하지만 프랑스의 왕비인 그녀와의 관계는 결국 불륜이었고, 측근인 노아이유 백작부인와 메르시 백작도 눈치챌 정도로 사이가 깊어져 갔다.
이를 보다 못한 오스칼의 조언으로 페르젠은 잠시 프랑스를 떠나지만 불행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젠이 떠난 빈 자리를 채우고자, 폴리냑 부인 등의 간신들의 부추김으로 국정을 멀리하고 패션과 도박에 빠지면서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자신의 평판을 스스로 깎아 먹는 짓을 한다. 게다가 뒤늦게 돌아온 페르젠을 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랫동안 감춰왔던 마음이 다시 불타올라 페르젠과 자주 만남을 가지거나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페르젠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총애하는 등 눈치 없는 행동을 벌였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레즈비언과 페르젠과의 관계를 홍보하는 악성 루머가 프랑스 전역에 퍼지고 평민들은 물론 귀족들도 왕비를 대놓고 조롱하는 최악의 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이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찾아와 폴리냑 부인들을 멀리하고 오스칼과 메르시 백작 등을 비롯한 충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충고하고, 페르젠 자신도 직접 프랑스 위병대에 입대하여 프랑스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알아보고 동시에 여동생 소피아를 통해서 왕실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여러 조언을 하며 물심양면으로 보필한다. 그러나 이런 페르젠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무지 해결 방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은 최악으로 떨어진지 오래였고[4], 이미 선대부터 쌓인 프랑스의 오랜 빚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이은 무능한 행보 때문에 왕실을 향한 프랑스의 여론은 떨어질대로 떨어진다.
결국 세금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삼부회도 실패하고 그동안 쌓여온 프랑스의 문제와 국민의회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각 신분들의 갈등을 조율하지 못한 무능한 왕실에 대한 민중들의 커다란 분노가 터져 프랑스 절대왕실과 앙시앰 레짐을 무너뜨려 시민 혁명의 시초가 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만다. 그럼에도 페르젠은 다른 왕족과 귀족들이 왕실에게 등을 돌리고, 해외로 도피하는 반면 끝까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왕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다 못해 왕실 일가의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임을 직감하고 결국 프랑스를 벗어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길 제안하며 그 도주 계획의 자금부터 준비까지 실행하는 총 책임자[5]를 맡는다. 그렇게 도피 날짜 당일 가까스로 파리를 벗어나는데 성공했지만 페르젠의 안위를 걱정한 루이 16세의 강권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남겨두고 홀로 벨기에로 떠난다. 하지만 페르젠이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중들에게 붙잡혀 죄수처럼 파리로 끌려와 튈르리 궁전에 유폐된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페르젠은 어떻게 해서든 루이 16세 일가를 구하려 애썼지만 마리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그 어느 나라도 페르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오스칼의 아버지인 자르제 백작의 도움으로 목숨을 걸고[6] 변장한 채로 찾아오면서 마리와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며 루이 16세에게 탈출을 제안한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내부의 여론이야 말할 것 없고 외국들도 자신들을 버린 현실을 직감하였기에 구차하게 사는 것이 아닌 왕과 왕비로서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며 페르젠과의 도피를 거절하는 동시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친 페르젠에게 고마움를 표하며 영원히 이 둘은 헤어지고 만다.[7]
그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당한다는 소식에 반쯤 미쳐서 죽을 각오로 프랑스로 가려고 하지만, 어릴 적부터 페르센을 손수 맡아 돌보던 늙은 집사가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며 그를 붙잡고 죽어라 놔주지 않는다. 분노한 페르센이 "안 놓으면 너부터 죽인다!"라고 소리치고 이에 집사는 울면서 "그럼, 이 늙은이부터 죽이고 가십시오. 백작님을 어릴 적부터 돌보며 손자 같이 느껴왔는데 그런 백작님이 죽으려고 가는 길을 이 늙은이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애원하자, 차마 집사를 건드릴 수 없어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의 구명을 포기하고 바렌느 도주 사건 때 루이 16세의 명을 거부해서라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울부짖으며 절망한다.
이후 2018년에 발매된 최종 에피소드에서 앙투아네트와 이별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간 뒤의 후일담과 페르젠의 최후가 상세하게 그려졌다. 마리의 죽음 이후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 4세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냉혹한 정치가로 돌변하여 평생 독신으로 사는 등 여동생 소피아의 말대로 동시에 살아있되 죽은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자르제 백작을 만나 마리의 유언과 그녀의 유품을 전달받고 동시에 오스칼이 프랑스 혁명에 투신하다가 전사한 것을 듣고 오열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세력을 막기 위한 스웨덴 왕의 요청으로 오스트리아의 외교 사절로 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외면한 합스부르크 황실은 궁정에서 마리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하며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에 할 말을 잃는다. 그순간 빈 궁정에서 프랑스 혁명 정부와의 포로 교환으로 오스트리아에 망명해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보며, 평생동안 사랑한 여인의 딸을 통해 오스칼과 앙투아네트와 함께하며 행복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 몰래 울음을 삼켰다. 이외에도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던 로잘리의 아들 프랑소와[8]를 왕립도서관 법률고문으로 취업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원작 마지막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페르젠의 살해 사건[9]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드러나는데 사실상의 자살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구스타프 아돌프 4세가 폐위되고 그의 숙부인 칼 13세가 즉위했는데 페르젠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측근이자 반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파였기에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다 칼 13세가 양자로 삼은 덴마크 왕태자 칼 아우구스트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는데 스웨덴 민중들 사이에선 페르젠이 왕태자를 죽였다는 헛소문이 돌았고 결국 왕태자의 장례식이 있던 6월 20일 페르젠을 살해하는 계획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마침 이 계획을 프랑소와의 친구 파비앙 노벨[10]에게 들은 로잘리 모자는 페르젠을 찾아가 내막을 알리고 장례식 참석을 말린다. 그러나 6월 20일[11]이 자신에게 어떤 날인지를 안 페르젠은 오랫동안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나타나서[12] 로잘리에게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며 동시에 아들 프랑소와에게 힘껏 살아남아, 우리의 시대의 결말을 지켜봐달라고 당부하며 굴욕적인 삶을 끝내고자 장례식 참석을 강행한다.
그리고 장례식 당일 날 분노하던 스웨덴 민중들에게 구타를 당해 살해당하며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오스칼과 앙투아네트를 보고 눈을 감는다. 죽기 전 살아생전 내내 프랑스 시민들의 흑색선전과 모욕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처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어지간히 한이 맺혔는지 민중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본다며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시민들을 비판하고 페르젠 자신도 거짓 소문에 선동된 스웨덴 민중에게 린치당해 죽는 모습을 통해 선동에 쉽사리 넘어가는 대중들을 비판한다.
3. 평가
작중에서 보듯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이 상냥하고 착한 성품이었으며 실제로 저지른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도 결코 완전무결한 선인은 아니었고 오히려 실책과 성격적 결함이 확실했다.마리 앙투아네트는 냉정히 말해 개인적으론 좋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왕비로서 온갖 특혜란 특혜란 다 누리고 살았으면서[13][14] 그 대가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등한시하고 급기야 프랑스 혁명이 본격화되어도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바렌느 도주 사건 등을 벌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서라도 백성들의 고혈 위에 세워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데 급급해있고 나라의 안위도 신경쓰지 않고 발악하던 일국의 왕비로선 실격인 인물이었다.[15]
물론 이런 마리의 결점을 미리 파악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먼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진작에 어린 딸의 단점을 파악하고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보내 마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았고, 메르시 백작 역시 먼 타국까지 따라가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을 어떻게든 만회하고자 동분서주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16] 특히 같은 또래이자 마리의 총애와 신뢰를 한몸에 받았고 그 자신도 마리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 오스칼은 그녀가 훌륭한 왕비가 되는 걸 누구보다 바랐기에 충언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리의 지나친 특혜를 칼 같이 거절하며 공사구분을 엄격히 했다. 그러나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던 페르젠은 단 한번도 마리의 결함을 제대로 마주보려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이 심화되었을 때도 그저 마리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 상황을 그 지경으로 만든 마리의 결점과 실책을 지적하거나 고치려들지 않았다.
더구나 마리 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하는 희대의 순정남으로 나오지만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페르젠과의 사랑은 심적인 위로를 제외하고 악영향만 줬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비였던 시절 페르젠은 마리를 보기 위해 알현을 핑계로 프랑스 궁정을 뺀질나게 드나들며 적절치 못한 행동을 벌였고, 당연히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시선이 늘어나자 보다못한 오스칼의 부탁으로 페르젠도 마리의 추문을 염려해 그녀의 곁을 떠났다. 결국 페르젠과의 이별에 극도로 상심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젠이 떠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폴리냑 백작부인 등의 여러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사치와 도박을 일삼고, 자신의 별궁에 갇혀 연극과 농가생활을 즐기며 왕비의 책무마저 방임하는 큰 실책을 범한다. 당연히 평민들은 자신들의 세금이 죄다 마리의 사치비용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분노했고 고위 귀족 및 방계 왕족들 또한 하급귀족에 평판이 좋지 않던 폴리냑 백작부인을 총애하며 법도에 맞지않는 특혜까지 퍼다주고, 그녀만 곁에 두고 별궁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타국에서 온 왕비가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들을 무시한다는 뉘앙스로 비추어져 자존심이 제대로 상했다.
뒤늦게 페르젠이 프랑스로 귀국하자 두 사람 모두 묻혀둔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페르젠에 대한 총애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여전히 알맞지 않은 처신을 보이자 결국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확신하게 된 귀족들은 마리를 가리켜, 대놓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험담하고 심지어 왕실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평민들 사이에서마저 마리와 페르젠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파리 시내 전체에 마리를 성희롱하는 팜플렛이 돌아다닐 정도로 그녀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진다. 결국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라는 대형사고까지 터지면서 그 반감과 증오가 하늘을 찌른 끝에, 마리는 어떻게든 실책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는데도 프랑스를 망치는 악녀이자 욕받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의 사랑 아닌 불륜으로 애꿎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까지 페르젠의 사생아라는 루머에 시달리며 온갖 뒷담화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고[17], 후계자의 정통성이 의심받자 예전부터 왕위를 노리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와 아르투아 백작 샤를부터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까지 득세하게 된다.[18] 이렇게 왕실의 후계 구도가 어지러워지자 그 누구보다 왕실을 지지해야할 귀족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벌어지면서 훗날 프랑스 혁명 세력의 득세 속에, 왕당파가 힘을 못쓰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가 왕당파와 혁명군 모두에게 버림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아무리 당사자들이 서로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고 마리의 남편인 루이 16세도 묵인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부도덕한 불륜이었으며, 특히 마리는 일국의 왕비로서 절대 해선 안되는 짓[19]을 저지른데다가 그 여파로 어린 자식들까지 욕을 먹게 만들었다.
즉, 페르젠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불륜은 개인적인 감정에 눈이 멀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은 민폐 투성이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젠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부도덕한 불륜을 비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진정한 사랑으로 미화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에 고통받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시민들을 적반하장격으로 증오하며 자신이야말로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듣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을 저지른다.
실제로 두 사람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던 오스칼조차 이 사랑이 절대 득이 되지 않다 못해,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는 걸 자각해 둘을 떨어뜨리거나 끊임없이 알현과 조언을 하며 어떻게든 파국을 막고자 여러 차례 노력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은 친우인 오스칼의 조언마저 무시하며 제멋대로 행동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자초했으니, 어떻게 보면 페르젠도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공인으로선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4. 여담
다카라즈카판 뮤지컬 버전에서의 페르젠은 오스칼과 앙드레 스토리를 제외하면 거의 작중의 진주인공으로 활약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기는 하나 초판과 2000년대 이전 공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페르젠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와 밀애하며 얼굴 비추고, 최후반부에 콩시에르쥬리에서 단두대 행으로 직행하는 것을 제외하면 앙투아네트의 비중은 밀리다 못해 거의 쩌리 수준으로 떨어졌다(...)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은 무성하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고 그저 깊은 정신적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만 남아있다.[20]
사족으로 원작과 애니판에서의 머리 모양 변화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고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는 장발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온 후부터는 단발로 쭉 유지하며 애니판에서는 고국으로 귀국하기 전에도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에도 쭉 장발로 유지하다 미국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뒤 초반에는 장발을 유지하다가 마리에게 돌아갈때 단발이 되었고 이후에도 시민들의 공격을 받은 오스칼을 구할때까지 장발이었다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튈르리 궁으로 끌려간 소식을 들을 때는 목을 덮는 정도로 다시 길렀다.
[1] 일본내 전국 투어 콘서트를 마치고 휴일을 맞이하자마자 내한하여 2024년 프랑켄슈타인 공연과 함께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초일 공연을 관극했다. 덧붙여서, 카토 카즈키는 같은 시대배경으로 흘러가는 극작이자 일본 엘리자벳(다카라즈카판, 토호판)으로 유명한 코이케 슈이치로가 연출한 프렌치 록 뮤지컬 <1789~바스티유의 연인들~>###에서 혁명가측에서 활약하는 주인공 로낭을 연기한 바 있다.[2] 이 자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은 물론 오스칼마저 페르센에게 반함으로서 4각 관계(앙드레 포함)가 시작된다.[3] 첫 만남때 페르젠은 오스칼을 남자로 착각했다. 그러나 오스칼이 여자라는 걸 알고 오스칼이 처음 여장을 한 무도회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지만 하지만 이미 마리를 사랑하고 있던 페르센은 오스칼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 한다.[4] 여기엔 페르젠의 관계도 한몫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차남 루이 샤를이 루이 16세의 자식이 아니라 페르젠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나돌고, 왕실을 가장 지지해야할 귀족들마저 마리를 가리켜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했다.[5] 당시 프랑스 왕실은 마차 하나 제대로 준비할 도주 자금도 없을 정도로 빈곤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2세마저 지원을 거절하며 여동생 일가를 외면했던지라 페르젠은 파리에 있는 본인 저택을 담보로 할 정도로 가까스로 자금을 마련했다. 준비 도중에 페르젠의 하녀 중 한명이 하필 혁명가와 연인 관계라는게 드러나고 준비한 마차에 차질이 생기는 등,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준비를 마쳤다.[6] 이미 마리 앙투아네트의 내연남으로 프랑스 전체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지라 혁명 정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였고, 이후 바렌느 도주 사건을 진두지휘하며 루이 16세 일가의 도주를 적극 도와주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현상금까지 걸린다.[7] 애니메이션판에선 바렌느 도주사건을 끝으로 루이 16세 일가와 이별하고 벨기에로 망명하는 걸로 그려지고 있다. 오스칼 사망 이후에도 이야기 전개에 상당분량을 할애했던 원작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판은 오스칼 사후의 이야기를 1화로 압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8] 페르젠이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오스칼의 미들네임에서 따온 이름이다. 당시 아버지가 알랭 드 수아송과 함께 나폴레옹 암살 미수로 처형당하자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었다.[9] 원작에선 냉혹한 정치가로 민중을 괴롭히는 삶을 살다 결국 분노한 민중들에게 살해당했다 라는 식의 짧은 글과 같이 길거리에서 맞아 죽은 모습으로 그려졌다.[10] 성도 그렇고 자신 빼고 가족들 모두 과학자라는 걸 보면 알겠지만 알프레드 노벨의 조상 중 한명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파비앙 본인도 공화파이지만 페르젠에 대한 소문을 민중들이 비뚤어진 선동에 넘어간 거라고 냉정히 판단하고 있었다.[11] 전술했듯이 바렌 도주 사건이 있던 날이며 페르젠은 그때 자신은 죽었다고 회고하였다. 로잘리도 파비앙에게 암살 음모를 듣자마자 바로 눈치챘으며 그의 선택을 이해했다.[12] 이때 페르젠은 얼굴에 주름이 지고 콧수염을 기른 과거와 180도로 다른 모습이었으며, 여동생 소피아도 스웨덴에 막 도착한 로잘리에게 예전과 달라져서 놀랄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13] 마리의 사치 비용과 노름빚부터 폴리냑 백작부인 일가에게 지급하던 연금까지 죄다 마리의 지참금이나 개인 재산이 아닌 프랑스 국민의 세금에서 지출되었다. 오죽하면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작가 이케다 리요코도 마리 앙투아네트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금이 쓰였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고 비판했다. 국가간의 정략으로 루이 16세와 반강제로 혼인했으니 페르젠과의 관계만큼은 봐줘야되는 게 아니냐고 두둔할 수도 없는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언니들이 수녀가 되거나 공국 또는 중소 왕국으로 시집을 간 것에 반해 당시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 대륙을 양분하는 강대국이자, 주변 나라들은 물론 적국인 오스트리아도 모방할 정도로 트렌드를 선도하는 문화 선진국이기도 했던 프랑스로 시집가 앞서 서술한 온갖 사치를 누렸고 시대상 그 흔한 정부조차 들이지 않을 정도로 가정적인 루이 16세에게도 사랑받으며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14] 작중은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의 문화 특히 가면무도회나 연극에 제대로 빠져서 매일 밤마다 측근들과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함께 밤새도록 무도회, 연극을 즐겼지만 정작 파리에 사는 백성들의 삶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늘 마리를 호위했던 오스칼조차 마리 님은 수차례 파리와 베르사유를 드나들었지만 정작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나 할까라고 한탄할 정도였다.[15] 당장 타국의 왕인 오빠 요제프 2세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프랑스의 현실이 심각하다 못해 혁명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인 걸 인지한 것에 반해 나라의 국왕과 왕비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던 걸 봐도 잘 드러난다. 오죽하면 작중 오스칼과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는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이뤄진 현대에서도 루이 16세와 결혼하지 않고 그저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남거나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나라의 왕비 혹은 평범한 귀부인으로 살았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란 평이 나올 정도이다.[16] 여담으로 작중에서는 안 나왔지만 큰 오빠 요제프 2세도 막내 여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아꼈고 어머니 못지않게 여동생의 상황을 걱정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아예 직접 프랑스까지 와서 매제인 루이 16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특히 요제프 2세가 한창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질책하고 걱정하며 보낸 편지에서 "왕과 왕비가 제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조심해라"라는 구절이 실제로 남아있다.[17]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숙부들인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마저 루이 샤를은 페르젠의 사생아라고 조롱해대고, 급기야 루이 16세에게 직접 루이 샤를은 당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내용의 무고장까지 날아드는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았다. 심지어 바렌느 도주 사건 당시 분노가 폭발한 평민 아낙네들에게 둘러싸여 "뭐가 왕태자냐?! 사생아지!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젠의 아들이겠지!"라는 모욕을 면전에서 들을 정도였다.[18] 특히 오를레앙 공작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과 입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서 진범인 잔느 발로아 드 라 모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격했다.[19] 과거 절대 왕정시대에서 왕비의 불륜은 사생활 문제가 반역죄로 취급되었다. 캐서린 하워드, 캐롤라인 마틸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항목 참조.[20] 페르센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이자 왕비라고 하거나 그녀의 처형 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고 수천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을만큼 모든 것을 다 바쳐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언급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