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팰컨 마샬[1]의 그림 "국왕 가족의 체포"[2] | 듀플레시 베르트랑의 그림 "파리로 귀환하는 국왕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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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a fuite à Varennes(프랑스어)Flight to Varennes(영어)
프랑스 혁명의 주요 사건. 혁명이 고조화되면서 왕권을 넘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루이 16세 일가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도주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바렌 도주사건" 혹은 "바렌느 배신사건"으로도 불린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무능하긴 했지만 폭군이 아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실책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소문처럼 사치가 심한 악녀도 아니었으나 왕과 왕비의 신분으로 조국을 버리고 외국으로 도주해서 자신들의 조국에 대항할 전쟁을 일으키려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사실상의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게 들통나면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과 왕실의 파리 복귀 이래 여전히 혁명의 기운은 높았고 루이 16세는 실권을 하나둘 빼앗기고 있긴 했어도 여전히 국왕으로서 존중받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루이 16세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오는 것도 바스티유 습격 이전 고위관료들에서 프랑스 국민의회 지도부 및 파리 시장으로 바뀌었을 뿐 계속되고 있었다. 아울러 혁명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인 미라보 백작은 왕정과 루이 16세에 우호적이었으며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6세도 미라보 백작과 비밀리에 연락하며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그러나 1791년 4월 루이 16세와 국왕 일가를 아연실색케 할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미라보 백작의 급사였다. 미라보의 급사로 국왕은 국민의회 및 혁명지도부에게 맞서서 자신을 옹호해 줄 사람, 즉 재판으로 치면 변호사를 잃어버렸고 그 대체자도 찾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파리의 최대 유력 주간지인 <파리의 혁명>은 4월 2주본에서 왕권신수설 및 왕의 신성설을 전면 부정하고 신성한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며 왕에게 부여한 신성성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슷한 시기에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군주제 헌법의 친구들 협회> 회원들이 과격파에 의해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국민의회는 성직자가 새 헌법과 왕에 충성하고, 일부 주교직을 없애는 등 성직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선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루이 16세는 교황의 답신을 기다려야 한다며 시간을 끌지만, 어쨌든 법안을 승인한다. 요약하자면 발언권, 정치력, 든든한 지지 세력 하나를 한꺼번에 빼앗긴 것이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부활절의 사건이었다. 루이 16세 일가는 일시적으로 튈르리 궁전을 떠나 생클루 궁전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는 의회와 파리 시 정부에도 통보가 되었고 이의제기가 없던 사안으로, 생클루 궁전에서 부활절 미사를 올린 뒤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보낸 뒤 올 예정이었다. 왜 굳이 튈르리가 아닌 생클루 궁전에서 미사를 올리려 했냐면 이른바 비선서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3] 그런데 이를 국왕의 탈출 시도로 오인한 군중들이 길가를 가득 메우며 왕가의 이동을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왕실 가족들은 성난 군중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들어야 했다. 왕실을 호위할 예정이었던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는 군을 동원해서라도 돌파하자고 제의했지만 루이 16세가 유혈사태에 대한 우려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 국왕은 바로 의회로 달려가 이런 사태에 유감을 표했고 의원들도 무지몽매한 군중들의 행위에 거듭 유감을 표하면서도 "폐하께서 (혁명정부 소속인 선서 사제들도 있는데) 비선서 사제들 편만 들어주셔서 그렇습니다."는 뉘앙스로 원인을 루이 16세 탓으로 돌렸다.
종합하자면 미라보의 죽음으로 정치적 환경이 급변한 상황에서 <파리의 혁명>지에 의하여 여론적인 환경조차 왕실에 불리해지고 있었고 <군주제 헌법의 친구들 협회> 테러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힘이 되어줄 친군주정 세력들조차 위축되었으며 의회에서 국왕의 권한들을 박탈하여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몰린데다 부활절 사건으로 실질적인 신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 국민의회 방문 과정에서 미라보의 사후 급변한 정치적 환경을 체감했기에 탈출이라는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3. 준비
많은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안 그래도 가능성이 낮은 탈출 계획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후술할 경과들을 보면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번이나 황당한 행각들을 벌이긴 했으나 결과론적으로 그런 철없는 행각들이 탈출 계획에 실패한 이유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애초에도 루이 16세가 탈출 결심을 굳히기 전부터 이미 탈출 계획은 준비되고 있었다. 스웨덴 출신으로 프랑스 육군 1개 연대의 연대장을 맡고 있던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이 평소 왕실과의 깊은 친분이 계기가 되어 그 중심에 섰다. 페르센은 동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부이예 장군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계획을 논의했지만, 전혀 들키지 않았다. 왕은 가만히 있지 않고 페르센 백작을 통해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전달했다. 브이예 장군은 보안을 위해 내용을 기억한 후 편지를 태워버렸다.
페르센은 해가 바뀌기 전인 1790년 12월에 이미 장인에게 탈출용으로 쓸 6인용 사륜 마차 제작을 의뢰했다. 공식적으로는 당시 파리에 거주 중이던 러시아 귀족의 과부인 코르푸 남작부인의 명의를 빌려서, 러시아로 귀국하기 위한 목적의 튼튼한 마차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다만 여기서 순진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황당 발언이 나왔는데 마차의 외관을 눈에 잘 띄는 초록색으로 도색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전달이 안 되었는지 아니면 페르센이 이건 아무래도 아닌거 같다고 생각했는지 최종적으로는 평범한 갈색으로 도색되었다.
3월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왕이 아직 탈출을 결심하지 못했음에도 주요 생활필수품 및 가구들을 사전에 빼돌리거나 왕자와 공주가 입을 옷을 사전에 구매하는 등 또다시 눈치 없는 행각을 감행해 주위를 뒷목잡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행위들은 감시자 측에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4월, 일련의 사건으로 드디어 탈출을 결심한 국왕은 처남이기도 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2세에게 탈출자금 1,500만 리브르를 꿔 달라고 했으나
6월 초~중순이 되자 준비는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코르프 남작부인 일행의 명의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가는 위장여권이 발급되었다. 최종적으로 탈출할 인원은 국왕 루이 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왕태자 루이 샤를, 공주 마리테레즈, 왕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그리고 왕비를 호종하는 루이즈엘리자베트 드 투르젤 부인(Louise-Élisabeth de Croÿ de Tourzel), 그리고 왕태자와 공주의 시녀 각 1명, 전령 4명이었다.
거의 동시기에 페르센 백작이 주문한 마차도 제작이 완료되어 시험주행까지 마쳤다. 말 12필이 동원됐는데 탈출 당시 국왕 일가가 탈 4륜 마차의 6마리, 시종 2명이 탈 2륜 마차의 3마리, 그리고 이들을 호종 또는 선행하며 인도하는 전령들이 이용하는 말 3마리 총 12마리였다. 참고로 4륜 마차와 2륜 마차는 각각 말 4마리와 2마리가 끌어도 충분했는데 조금이라도 말을 덜 지치게 해서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생각에서 보다 넉넉한 숫자로 말을 준비한 것이다.
아울러 마차 내부에 화덕이나 와인 저장고, 요강 등을 갖춰 마차 내부에서 식사를 해결하고[6] 요강 역시 같은 이유로 마차 내부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왜 마부에게도 얼굴을 보이는 걸 피하려 했냐면 마부들을 사전에 섭외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역참 제도를 활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안 유지를 위해서 일행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으며 말들 또한 마차를 이끌고 하루종일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7] 과감하게 역참을 이용하기로 한 것. 다만 국왕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대관식을 거행한 랭스를 생략하기도 했고 최종 목적지 몽메디로 가는 역참이 없기도 해서 일부 구간에서는 역참간의 구간을 넘어서는 거리를 운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 구간에서는 마부삯을 더 높게 쳐주는 걸로 해결하기로 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몽메디(Montmedy)였는데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왕당파인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François Claude Amour, marquis de Bouillé) 장군이 확실히 장악한 부대, 그리고 자체적으로 모집한 용병들로 장악하고 있던 곳이었다. 부이예 역시 겉으론 국민의회와 신정부에 충성했지만 루이 16세가 오는 대로 즉시 반혁명전쟁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레오폴트 2세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국경에서 군대를 움직여 부이예가 움직일 명분을 제공해주겠다고 한 당초의 약속을 깨는 바람에 부이예는 아무 지원도 없이 독단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면서도 파리의 전쟁장관과 프랑스군의 눈을 속이느라 고생했다.
4. 진행
1791년 6월 20일 밤 작전이 결행되었다. 밤 10시 루이 16세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온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 부부에게 그제서야 탈출계획을 말해주었고 동생 부부도 동의하면서 동생에게 추후 다른 루트를 통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뒤이어 페르센 백작, 왕비의 시종이자 왕자 및 공주들의 훈육관인 투르젤 부인이 움직였다. 페르센 백작은 마부로 위장하여 직접 마차를 몰고 투르젤 부인은 왕자와 공주를 자신의 치마폭 안에 숨기는 대범함으로 감시자들의 눈을 피했다.국왕 내외는 바로 탈출할 수 없었다. 상술했듯 파리시청과 국민의회의 고위 인사들이 국왕 내외에게 밤 문안인사를 올리기 때문이었다. 문안인사를 받기도 전에 도망치면 당연히 국왕 일가의 도피가 조기에 노출될 터였다. 루이 16세 내외는 태연하게 이들의 문안인사를 받은 후 그들이 돌아가자 바로 왕과 왕비, 엘리자베트 공주가 야음을 틈타 차례대로 움직였다. 도중 왕비의 안내인이 마차를 세워둔 곳을 까먹어서 약 1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국왕 일가는 무사히 탈출했고 파리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르센의 배웅을 받으며 훗날 다시 만나자는[8] 약속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 날로부터 딱 19년이 되는 1810년 6월 20일에 페르센 백작은 죽었다.
어쨌든 21일 새벽 1시에 출발한 국왕 일행은 계획대로 역참을 활용해 가며 빠른 속도로 파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상술했던 대로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식사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등 철저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침쯤 되어서부터는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아니면 파리에서 멀어졌다는 안도감인지 긴장이 풀어져서 정줄놓고 마차에서 내려 산책하거나 지역민 및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덕분에 마차를 끌던 몇몇 마부들도 자신들이 몰고 있는 마차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추격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더군다나 정오 무렵에 마차가 고장나서 수리한다고 귀중한 1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한편 국왕 일행의 긴장이 풀어지던 아침 7시경 아침 문안인사를 위해 온 사람들을 위해 왕을 깨우러 온 시종은 침실이 텅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왕궁의 사람들이 1시간 동안 왕궁을 뒤졌을 때는 국왕 일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국왕 일행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정식으로 국민의회에 보고되기까지 다시 1시간이 걸려 오전 9시경 국민의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민의회는 즉시 대응에 나섰다. 최우선적으로 앞으로 내려갈 모든 명령 및 법률에 들어갈 문구를 통일하기로 했는데 이는 루이 16세가 제2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뒤이어 국민방위군 총동원법령 및 무기반출법령이 통과되었고[9] 루이 16세가 방에 남긴 성명서를 후일을 대비한 증거물로 채택하기 위해 국회의장 보아르네 자작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마리(Alexandre François Marie, vicomte de Beauharnais)는 성명서 각 페이지마다 국회의원들이 서명하는 법안을 가결시켰다.[10] 그리고 이 사실을 전국에 알리는 파발을 띄우는 것과 동시에 추격대를 보냈다. 이들 추격대들은 역참을 향해 따라가면서 마차 2대가 새벽부터 동쪽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금 더 따라가다가 마침내 이들이 국왕 일행이라는 목격 증언을 받으면서 속도를 높였다.
밤 8시, 국왕 일행은 바렌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생트머누(Sainte-Menehould)[11]에 도착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부이예 장군이 보낸 부하 슈아죌스탕빌 공작 클로드 앙투안 가브리엘(Claude Antoine Gabriel, duc de Choiseul-Stainville)과 기병대 40명이 국왕 일행을 호종했어야 했는데 하필 이 마을 일대에서 세금 납부 거부 투쟁이 일어나는 중이었고 농민들은 군대가 자신들을 무력진압하러 온 거 아니냐는 공포로 병사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때문에 슈아죌과 기병대는 국왕 일행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기 때문에 국왕 일행은 생트머누의 역참에서 말만 교체하고 떠나야 했다. 그리고 생트머누의 역참에 근무하던 장바티스트 드루에(Jean-Baptiste Drouet)는 이전에 왕비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고 아시냐 화폐의 국왕 얼굴과 비슷한 사람이 왕비 옆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가장 중요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는 국왕 일행을 호종하던 4명의 전령 중 한 명이 출발하면서 "바렌으로 가자!"고 마부에게 외쳤다는 것이다.
한편, 루이 16세 일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장기를 느꼈고 "생트머누식 돼지족발찜"(Pieds de porc à la Sainte-Menehould)이라는 지역 특산물이 탈출극의 발목을 잡았다는 일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의 출처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미식가, 호사가이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뒤마가 저술한 프랑스 요리 대사전이란 서적이다. 재미를 우선시하는 뒤마의 성향을 생각하면 좀 많이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한 야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혁명이 있기도 한참 전인 과거에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시찰하던 중 이곳을 지날 때 족발찜을 수라로 맛보고 좋은 평을 내린 적은 있었고, 이러한 일화에 착안하여 "국왕이 죽기 전에 먹었던 진미"라는 스토리텔링을 기획하여 홍보한 것이다. 게다가 해당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바렌 사건은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단순히 맛있는 요리"만"이 원인은 아니다.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던 추격대는 생트머누에 도착한 후 원래 베르됭[12]으로 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생트머누의 역참은 베르됭을 거쳐 메스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루에는 목격 증언과 함께 국왕 일행이 바렌으로 향했다는 말을 추격대에 고스란히 전해주고 자신도 추격대에 합류했다.
밤 10시 바렌에 도착한 국왕 일행은 마부들의 파업이라는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혔다. 마부들은 역참 노선을 벗어난 데다 운행거리가 더 늘어나서 자기들이 속한 원래 역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상태여서 보너스 지급도 거부하며 돌아가겠다고 격렬히 저항했다. 어쩔 수 없이 국왕 일행은 잠시 여인숙을 빌린 다음 마부들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보너스를 더 주겠다고 설득(?)하여 마부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다시 출발 준비를 하던 밤 11시 바렌에 추격대가 나타났다. 드루에는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마차 주위를 인의 장벽으로 막았고 지역감찰관 소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스는 일단 문제의 손님들을 자택 2층으로 안내한 후 사정을 물었으나 이들은 국왕 일행이 아니라고 버텼다.
기세등등한 지역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부이예의 부하와 병사들이 강행돌파하여 국왕 일행을 말에 태우고 탈출하는 것을 논의했으나 그러기에는 국민방위군의 병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날이 바뀐 6월 22일 새벽 5시 단순한 추격대가 아닌 국회의 명령을 전달받은 라파예트의 참모진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국왕에게 절하며 "폐하께서 용상을 오래 비우시니 백성들의 슬픔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옵니다. 어서 돌아오셔서 혼란을 수습해 주시옵소서!"라며 파리행을 강권했고 국왕은 버텼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결국 국왕 일가는 마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갔다.
2시간 후 부이예는 자신의 용병들과 휘하 부대를 이끌고 급히 바렌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마차는 떠난 뒤였다. 부이예는 그저 탄식하며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에서 자신을 체포하려고 하자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1800년 11월 14일에 61번째 생일을 닷새 남기고 병으로 죽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5절에 '부이예의 공모자들은 아니로다'라는 가사가 나올 정도로 국가로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
한편 프로방스 백작 부부는 프랑스를 벗어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5. 결과
국민의회는 국왕 일가의 탈출에 대해 일시적인 왕권 정지를 끝으로 불문에 부쳤고 국왕을 모욕하거나 해를 입히려 할 경우 중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국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반혁명전쟁에 나서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분개했다. 이는 프랑스 내부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고 왕실과 반혁명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치솟아 결국 후일의 튈르리 궁 습격과 뒤이은 국왕 내외의 처형으로 이어졌다.이렇게만 보면 단순히 루이 16세의 무모한 자충수 정도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배경 항목에서 서술했듯 루이 16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탈출을 감행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의 방심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였지만 적어도 탈출을 시도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감행한 탈출은 결국 나쁜 상황과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이는 자신과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국왕 일가의 체포에 결정적 공을 세운 드루에는 국회의원이 되고,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스위스, 인도 등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도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1815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도 이름을 바꿔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1824년 평안히 최후를 맞았다.
[1] Thomas Falcon Marshall, 1818~1878, 영국의 화가.[2] 표현도 그렇고 실질적으로도 체포가 맞긴 하지만 감히 국왕 일가를 압송할 수 없었던지라 파리에서 온 관료들과 장군들은 "이만 파리로 돌아오셔야 하옵니다, 폐하아아아아!!"만 외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야만 했다(...).[3] 1790년 국민의회는 성직자들에게 국왕, 국민과 헌법에 충성 할 것을 요구하고 성직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상술한 국민의회가 루이 16세에게 서명하게 했다는 법률이 그것. 이에 반발하여 충성 선서를 거부한 사제를 비선서 사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파리는 혁명의 중심지로서 비선서 사제들이 활동하기 매우 어려웠고, 루이 16세가 희망하는 비선서 사제에 의한 미사가 이뤄질 환경이 아니었다.[4] 혁명이 일어나 왕실 친위 세력이 최소한 수도 파리에서만큼은 완전히 소멸했고 기세등당한 혁명정부와 시민들이 파리를 장악한 상황이었다. 애당초 루이 16세가 파리에서 탈출을 시도한 이유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였는데 그런 사람에게 파리에 남아 헌법 부정을 요구한다? 레오폴트 2세가 얼마나 루이 16세의 위기상황에 대해 무감각하고 현실감각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위협을 못 느끼니 저런 황당한 요구를 한 건데 레오폴트 2세 사후 아들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허구한 날 샌드백처럼 얻어터지고 수도도 함락당하고 국가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결국 장녀까지 빼앗겨야 했던 걸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레오폴트 2세뿐만 아니라 당대 유럽 군주들이 루이 16세에 보낸 기대치가 다 비슷했다. 굳건히 반란군들에 맞서 싸우고 프랑스 왕국의 국왕으로서 존엄을 보여달라는 것. 교황은 루이 16세에게 성직자법을 승인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루이 16세의 위험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맞서 싸우라며 부추긴 유럽 군주들은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다.(...)[5] 이러다 보니 페르센 백작이 탈출 비용을 거의 전부 댔다. 그 금액은 2012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억. 스웨덴 최고의 부호인 페르센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거액이라 본인 재산을 쏟아붓고 왕당파 귀족들의 원조를 받았으며 개인 빚까지 이리저리 내어 마련했다.(출처: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나카노 교코)[6] 이 시기의 와인은 음주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식사를 하면서 물을 마신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저 놈들은 도망가면서도 고상하게 와인 챙겨먹는데요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독일이나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가 물 대신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듯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는 식사시 물이 아닌 와인을 마셨다. 왜냐하면 고도화된 파리와 인근 지방의 도시화, 그리고 그에 따라가지못하는 상하수도의 발전이 수질을 현저히 악화시켰기때문이다.[7]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랬다간 조금만 지나도 말들이 지쳐 속도가 떨어지고 그럼 추격대에...[8] 이때 페르센은 국왕 일가와 끝까지 함께하려 했으나 루이 16세는 단호하게 그를 보냈다. 훗날 페르센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왕은 나와 함께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썼다.[9] 이는 루이 16세의 탈출이 필연적으로 반혁명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맞는 판단이었고 이는 후일 루이 16세 처형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10] 주제와 관련없는 이야기지만 이때의 국회의장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아내가 바로 후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여인이자 프랑스 제1제국의 황후가 되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다.[11] 생트메누, 생 므느울 등 여러 표기법이 난무한다. 일단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IPA 표기는 [sɛ̃tmənu\]이며, 프랑스어 위키피다아 문서에서는 해당 표기와 함께 [sɛ̃tmeneuld\]라는 발음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생트머누'로 표기를 통일한다.[12] 제1차 세계 대전의 격전인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그 곳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