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01:17:07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

<colbgcolor=#C5E5EC,#5ABBBB><colcolor=#000000,#ffffff>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Élisabeth de France
파일:Vigée_Le_Brun_-_Élisabeth_of_France,_Versailles.jpg
이름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
(Élisabeth Philippe Marie Hélène)
출생 1764년 5월 3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94년 5월 10일 (향년 30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아버지 프랑스의 도팽 루이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형제 마리 제피린,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마리 클로틸드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통칭은 '마담 엘리자베트(Madame Élisabeth)'로 프랑스의 왕족이자 왕의 누이인 장공주.

프랑스의 루이 왕세자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오빠인 루이 16세가 즉위함에 따라 왕의 여동생 신분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올케 언니가 된다.

2. 생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후 19개월 만에 아버지 루이 왕세자가 사망했고, 3살 때 어머니 마리아 요제파마저 사망하여 고아가 되면서 마루산 후작 마리 루이즈가 대신 길렀다고 전해진다. 오빠인 루이 16세와 유독 사이가 좋았으며 언니 마리 클로틸드와 다르게 성장한 후에도 당시 왕족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결혼을 하지 않고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충성심이 깊고 온화한 성품으로 오빠인 루이 16세뿐만 아니라 올케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친밀한 사이였으며, 조카들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좋은 고모였다. 특히 프랑스에 왕세자비로 들어와 왕후가 된 후에도 왕족들과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원성을 듣느라 겉돌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유일한 편이 되어주던 엘리자베트는 고마운 시누이이자 여동생 같은 존재였으며 한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를 큰오빠인 요제프 2세와 맺어 주려 하기도 했다.[1] 그러나 마담 엘리자베트가 거절했고,[2] 이미 두 차례나 사별하고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천명한 바 있던 요제프 2세 역시 의사를 바꾸지 않아서 무산된 바 있었다.

루이 16세의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훗날 루이 18세)[3]과 아르투아 백작(훗날 샤를 10세)은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과 그 가족들을 외면하고 살 길을 찾아 국외로 망명했다. 그러나 여동생 마담 엘리자베트만은 끝까지 국왕 일가와 운명을 함께 했다. 1791년에 국왕 일가가 도주할 때에도 같이 갔으나 바렌에서 발각되어 체포된 후 역시 국왕 일가와 함께 탕플 탑에 감금되었다.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되기 전날에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으나, 이 편지는 결국 전해지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를 통해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자신들(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을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을텐데도, 끝까지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하면서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마담 엘리자베트와 아이들만은 살아남고, 아이들이 나중에 고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가족들 중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 살아남았기에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후에도 마담 엘리자베트는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함께 탕플 탑에 계속 감금 중이었으나[4], 1794년 5월 10일 결국 마담 엘리자베트도 30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된다. 30세 생일을 맞은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혁명재판소에서 마담 엘리자베트가 받은 죄목은 국외로 망명을 시도하고 국왕 일가의 도주를 도운 죄, 외부의 적들과 내통하였고 그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프랑스의 안전을 위협한 죄, 조카 루이 17세근친상간을 하였다는 죄였다. 그 중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선 한 나라의 공주가 왕세자인 어린 조카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죄목[5]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는 데다가 혁명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처형할 증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근친상간 혐의에 대한 의아한 점도 상당히 많았다. 루이 17세 문서 논란 문단 참조. 평소 신앙심과 충성심이 깊었던 마담 엘리자베트가 그럴 짓을 할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를 위협하던 외국 세력을 지원했다는 증거들이 나와서, 이후 재판에서 마담 엘리자베트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처형 당일 처형장으로 가기 전 함께 사형될 사형수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여담이지만 단두대에서 마담 엘리자베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숄이 흘러내렸고 그녀는 사형 집행인에게 숄을 다시 걸쳐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 부탁이 유언이 되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3.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Élisabeth of France)
<colbgcolor=#fff3e4,#331c00>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colbgcolor=#ffffe4,#323300> 루이 15세
(Louis XV)
부르고뉴 공작 루이
(Louis, Duke of Burgundy)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Marie Adélaïde of Savoy)
마리 레슈친스카
(Marie Leszczyńska)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Stanisław I Leszczyński)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Katarzyna Opalińska)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Saxony)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아우구스트 2세
(August II)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Christiane Eberhardine
of Brandenburg-Bayreuth)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요제프 1세
(Joseph I)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

(Wilhelmine Amalia
of Brunswick-Lüneburg)

4. 대중매체


[1] 한국 같았으면 겹사돈이라며 기겁을 하겠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겹사돈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1세와 이모부인 카를 알렉산더는 친형제지간이다.[2] 마담 엘리자베트에게는 고모들이 되는 루이 15세의 세 딸들도 프랑스의 공주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 끝내 결혼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은 바 있으니 고모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3] 단 루이 18세는 바렌 도주 사건 때 루이 16세와 다른 루트로 도주에 성공한 것이지, 샤를 10세처럼 혁명이 터지자마자 망명한 것은 아니었다.[4] 다만 어디까지나 같은 탑에 감금되어 있었을 뿐이고, 마담 엘리자베트와 마리 테레즈는 서로를 만나지 못했으며 마담 엘리자베트가 죽은 후에도 마리 테레즈는 고모의 죽음 소식을 듣지 못했다.[5] 당시 조카 루이 17세는 10세도 안 된 어린아이였다.[6] 기묘하게도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루이 18세샤를 10세 모두 혁명 이후 해외를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국에 돌아왔다. 그나마 왕위에 올랐다가 천수를 누리고 간 루이 18세와 달리 샤를 10세는 또다시 혁명 세력에 쫓겨나 살아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지에서 외롭게 죽고 시신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게다가 루이 18세는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후손 자체를 남기지 못했고 샤를 10세 역시 마지막 남계 후손인 앙리 5세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조의 남성 직계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그나마 샤를 10세의 여계 후손(친손녀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의 자손)은 꽤나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