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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9:44:31

필리프 드 나바르

이름 필리프 드 나바르
Philippe de Navarre
출생 1334년 8월 10일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에브뢰
사망 1363년 8월 29일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베르농
아버지 필리페 3세
어머니 호아나 2세
형제 호아나, 마리아, 루이스, 블랑슈, 카를로스 2세, 아녜스, 루이스, 호아나
아내 욜랑드 드 담피에르
자녀 로비네트, 랜슬롯
직위 롱그빌 백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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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롱그빌 백작.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형제로, 카를로스 2세의 행보에 언제나 함께 하며 프랑스 국왕 장 2세, 샤를 5세에 대적했다.

2. 생애

1334년 8월 10일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지역의 에브뢰에서 에브뢰 백작이자 나바라 국왕 필리페 3세와 샹파뉴 백국 상속권자이자 나바라 여왕 호아나 2세의 다섯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호아나[1], 마리아[2], 루이스[3], 블랑슈[4], 카를로스 2세, 아녜스[5], 루이스, 호아나[6]가 있었다.

1349년 롱그빌 백국을 상속받았으며, 1350년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거행된 형 카를로스 2세의 나바라 국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형이 최근에 즉위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 1세와 회동하기 위해 부르고스로 갈 때 동행했다. 1353년 5월 또는 6월, 형의 권고에 따라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3세 드 담피에르의 딸이자 바르 백작 앙리 4세의 미망인인 욜랑드 드 담피에르와 결혼했다. 카를로스 2세는 동생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 북부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뤄졌으며, 몇 달간 비밀로 유지되었다.

그 후 필리프는 욜랑드가 전 남편 앙리 4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로베르 1세를 대신해 바르 백작령의 섭정을 맡을 때 바르 백국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바르 백국을 호시탐탐 노렸던 로렌 공국은 두 사람이 왕의 허가 없이 비밀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1352년 6월 5일, 파리 삼부회는 바르 백국을 왕의 손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장 2세는 1352년 7월 27일 바르의 잔에게 바르 백작령을 다스리도록 했다. 욜랑드는 이에 불복해 필리프의 지원을 받으며 잔에 맞서 싸울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1353년 7월 2일 장 2세의 압력에 굴복해 섭정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프는 바르 정부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피에르포르의 영주 앙리 드 바르에게 체포된 뒤 투옥되었다가 다시는 바르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1354년 1월 18일, 필리프는 형 카를로스 2세의 지시에 따라 장 2세의 심복인 샤를 드 라 세르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그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샤를 드 라 세르다의 몸에는 80개 이상의 상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1354년 8월, 필리프는 카를로스와 루이스 형제와 함께 장 2세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받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왕이 그들을 암살하려 한다는 경고를 받자 급히 파리를 탈출해 카를로스와 함께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했다. 이후 장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이 카를로스와 손잡고 자신을 도모하려 들 것을 우려해 카를로스에게 화해를 권했다. 이후 협상을 벌인 끝에, 양자는 1355년 9월 10일 발롱크스 협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화해했고, 필리프는 롱그빌로 돌아갔다.

1356년 4월 5일, 형 카를로스 2세가 루앙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가 장 2세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는 1356년 5월 노르망디 귀족들과 함께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장 2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노르망디에 파견했다. 1356년 4월,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대부분을 장악하고 항복을 거부한 노르망디 중부의 브레퇴유 요새를 포위해 브레퇴유 공방전을 치렀다. 필리프는 코탕탱 반도 북부로 도주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조속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356년 8월 18일,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지휘하에 코탕탱 반도 북동쪽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했다. 그들은 필리프가 지휘하는 200명의 노르만 병사들과 합류했고,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브르타뉴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800명의 추가 병력이 몽트부르에서 가세했다. 잉글랜드군은 6월 24일 몽트부르에서 출발하여 노르망디 서부 일대를 관통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7월 5일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브레퇴유를 포위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했고, 수비대는 1년간 동안 포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급을 받았다.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7월 4일 베르누이로 진군해 그곳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프랑스군이 베르누이에서 11km 떨어진 콩데쉬르이통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는 전투를 준비했다. 프랑스군이 콩데쉬르이통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낙오병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헨리는 그들과 3~5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장 2세는 헨리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헨리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는 애매한 답을 했다. 그 후 헨리는 밤에 숙영지를 철거하고 45km 떨어진 아르장탕까지 강행군했다. 장 2세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브레퇴유를 재차 포위해 악전고투한 끝에 수비대에게 코탕탱 반도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귀중품과 물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항복을 받아냈다.

1356년 9월 19일,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잉글랜드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후 장 2세의 큰아들인 도팽 샤를이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돌봤지만,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다.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왕자는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그 후 형이 파리에서 에티엔 마르셀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정계를 좌지우지할 때 옆에서 도왔고, 에티엔 마르셀이 도팽 샤를의 반격과 파리 시민들의 봉기로 무너진 뒤 형과 함께 노르망디로 피신한 후 도팽 샤를에 계속 맞서 싸웠다.

1358년 8월 3일, 필리프는 형 카를로스 2세와 함께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이끌고 생드니를 약탈한 뒤 파리로 이어지는 센 강 계곡에 근거지를 세우고, 우아즈 강변의 크레유, 마른 강변의 멜룬을 점령해 파리로 향하는 수상 운송을 막음으로써 파리를 굶주림에 처하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샤를 도팽이 반격에 나서 멜룬을 포위하자, 그가 이끌던 용병대는 그동안 급여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터라 샤를 도팽에게 쉽게 항복했다. 필리프는 카를로스 2세와 함께 간신히 탈출했고, 8월 19일 퐁투아즈에서 샤를 도팽과 협상해 평화 협약을 맺고 강변 요새들에 주둔한 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용병대는 그들이 통제하는 요새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그곳에 계속 남아서 해상 운송을 허용하는 대가로 선박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뜯어냈다.

1360년 프랑스, 잉글랜드, 나바라 왕국 사이에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해 협상했고, 나바라 왕국을 대표해서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형 카를로스 2세는 그를 프랑스와 노르망디 영지의 보안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필리프는 장 2세와 화해했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자유 용병대를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1363년 교황 우르바노 5세로부터 십자군을 이끌 사령관으로 임명된 장 2세는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고 사라센에게서 빼앗은 모든 땅의 소유자이자 영주로 지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프는 이에 따르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려고 노르망디의 베르농으로 갔지만, 그해 8월 29일 과도한 음주로 인해 사망했고 에브뢰의 노테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필리프는 욜랑드 드 담피에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정부인 자네트 데이지와의 사이에서 카를로스 2세에게 재산을 물며받은 두 사생아 로비네트와 랜슬롯을 두었다.


[1] 1326 ~ 1387, 롱상의 프란치스코회 수녀[2] 1329 ~ 1347,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왕비[3] 1330 ~ 1334, 요절[4] 1331 ~ 1398,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왕비[5] 1334 ~ 1396,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의 부인[6] 1342 ~ 1403, 로앙 자작 장 1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