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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9><colcolor=#fff,#000099> 프랑스 왕국 제13대 수석국무장관 마자랭 추기경 Cardinal Mazarin | |||
쥘 마자랭의 자화상 | 피에르 미냐르 作 | |||
본명 |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노[1] (Giulio Raimondo Mazzarino) | ||
쥘 레몽 마자랭 (Jules Raymond Mazarin) | |||
호칭 | 레텔 공작 (Duc de Rethélois) | ||
출생 | 1602년 7월 14일 | ||
나폴리 왕국 아브루초 페시나 | |||
사망 | 1661년 3월 9일 (향년 58세)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추기경 임명 | 1641년 12월 16일 | ||
교황 우르바노 8세 주례 | |||
재임기간 | 제13대 수석국무장관 | ||
1642년 12월 4일 ~ 1661년 3월 9일 | |||
제94대 메츠교구장 | |||
1652년 11월 29일 ~ 1658년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99><colcolor=#fff> 묘소 | 프랑스 학술원 | |
작위 | 공작 | ||
부모 | 아버지 피에트로 마차리노 어머니 오르텐시아 부팔리니 | ||
형제자매 | 2남 4녀 중 첫째 (장남) | ||
학력 | 로마인 대학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법학) | ||
직업 | 성직자(추기경), 정치인 | ||
종교 | 가톨릭 | ||
문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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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추기경이자 정치인. 초대 레텔[2] 공작(Duke of Rethel).명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계자이자 프랑스 미술 부흥을 도모한 적극적인 예술 후원자로 유명하다.
2. 생애
나폴리 왕국의 아브루초 지방에 있는 도시인 페시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으로 본명은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노'(Giulio Raimondo Mazzarino)였다. 로마의 예수회 교육기관인 로마인 대학과 당시 알칼라데에나레스에 위치했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창 시절 그는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유명했는데, 예를 들어 그는 핼리 혜성에 관한 대중 강연을 진행했고, 연기 능력도 뛰어나 종교 연극에서 주연 역할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맡기도 했다. 또한 그는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서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전력도 있다. 이 특사 파견에서 당시 프랑스의 재상이자 실권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의 호감을 사게 되었고 1639년 결국 프랑스로 귀화하게 된다.이후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이 죽을 때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프랑스의 재상이 되었다. 능수능란한 외교 실력 덕분에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발탁되었던 것답게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30년 전쟁의 종결을 알린 베스트팔렌 조약을 프랑스 측에 유리하게 맺어서 숙적 합스부르크 가문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확립을 위해 나서다가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하는 프롱드의 난을 겪게 되지만 이를 진압하였고, 1651년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로부터 루이 14세의 섭정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어 1661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도 유리하게 이끌어감에 따라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게 하고, 루이 14세와 에스파냐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을 성립하게 만들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약화를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사후 후계자 레오폴트 대공의 즉위를 방해하고자 황제선거에서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와 밀약을 맺기도 했으나 결국 레오폴트가 레오폴트 1세로 선출되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런 업적을 보면 선임인 리슐리외와 함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 왕국의 절대왕정을 만든 인물이라 보면 되겠다.
3. 여담
- 문화 후원에도 나서서 마자랭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 현재 모나코 공국의 공들은 쥘 마자랭이 받은 레텔 공작 가문의 후손이다.[3] 1777년 제6대 여공작 루이즈(Louise d'Aumont)가 모나코 공 오노레 4세와 결혼했고, 그 후손이 현재의 그리말디 가문이다.
- 루이 14세의 생부라는 설이 있다.
- 돈을 열심히 챙겨두어서 죽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 무려 3,500만 리브르였다. 전임인 리슐리외가 죽을 때 가지고 있던 2,000만 리브르를 능가하는 액수였고, 당시 프랑스 연간예산의 50%에 가까운 액수였다. 심지어 프롱드의 난이 끝나던 때에는 800만 리브르였는데, 난이 진압된 이후 섭정에 올라서 죽기 직전까지 3,500만 리브르로 늘린 것이다. 마자랭을 믿고 있었던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비자금 액수를 보고받고 할 말을 잃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