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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2 12:18:27

고등법원(프랑스)


영어: Parliament of Paris
프랑스어: Parlement de Paris

1. 개요2. 역사3. 구조4. 기타

1. 개요

본 명칭은 파리 연설원이다. 13세기 프랑스에서 정무를 담당하는 국왕 위원회를 세분화하면서 파생된 사법기관 겸 입법기관이다. 카페 왕조 말기와 발루아 왕조 때는 왕권에 충성하며 로마법권위를 빌려 프랑스 각지의 제후들의 사법권과 여러 특권을 잠식해갔기에 대귀족들의 증오를 받았으나 절대왕정 시기에는 귀족들의 특권들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했고 종종 왕권과 대립하였다.

중세에 만들어진 기관답게 여러가지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칙령 혹은 등기하는 것을 거부하여 권할권 내에서 적용되지 못하도록 막는 권리이다. 이는 국왕이 특별 조치를 내리거나 직접 파리 연설원에 출현할때까지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지방 귀족들의 모임으로서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역할은 자신들의 특권들을 침해하려는 왕들을 상대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들은 개혁을 이루려는 왕과 관료집단의 최고의 방해물이었고 결국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극단적으로 악용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매우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 역사

정무를 담당하는 국왕 중심의 국왕 위원회가 세분화되면서 파생되었다.

최초에는 파리 시테 섬의 파리 연설원이 유일하였으나 백년전쟁이 끝난 이후로 각 지역마다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 연설원의 관할권이 가장 넓었고, 입김도 가장 셌다.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루이 14세는 파리 연설원의 권한들을 하나씩 박탈하였고 결국 폐지되는 듯 싶었으나 루이 15세가 즉위하고 나자 섭정오를레앙 공작은 이 권한들을 돌려주었고, 또한 루이 15세가 신권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치켜세우자 더욱 더 활개치게 된다. 말년에는 더 적극적으로 정사를 돌보면서 연설원들을 모조리 폐지했으나 루이 16세 치세에 부활했다.

여론에 민감했던 루이 16세시간이 지나면서 인기가 떨어지자 이를 회복하려고 이들을 부활시켰으나 특권들을 지키기 위하여 비난을 퍼부어 오히려 인기를 최악으로 이끌었고, 정부를 운영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징세청부업자들의 강력한 옹호자로서 일반 서민들을 과세지옥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 결국 이런 연설원의 막장짓에 분노한 국왕은 국새상서인 크레티앵 기욤 드 말제르브(Chrétien Guillaume de Malesherbes)를 내세워 연설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루이 15세 때 만들어진 전권법원으로 권한을 이전시켰으며, 연설원 판사들 중 강경파이자, 국왕 내각의 개혁을 좌초시킨 장 자크 뒤발 데프르메닐(Jean-Jacques Duval d'Eprémesnil) 판사와 안 루이 고이슬라르 드 몽사베르(Anne-Louis Goislard de Montsabert) 판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이들이 연설원 없이는 왕정도 없다(...)고 주장하고 민중을 선동하고 폭동을 일으켜 전권법원을 무너뜨리고 사법개혁을 망쳤다.

그렇게 나라가 파국으로 치달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파리를 포함한 각 지방의 연설원은 앙시앵 레짐의 잔재로 취급받아 폐지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들 연설원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포정치 기간 동안 데프르메닐 판사와 같은 최후, 그러니까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하지만 이들을 동정하는 이들은 산악파는 물론, 평원파와 같은 온건 부르주아지 세력을 포함해서도 전혀 없었다고.[1]

3. 구조

파리 연설원의 관직은 일반적으로 국왕에게 을 내서 구입하고, 약간의 돈만 내면 세습되었다. 이들을 '법복귀족'이라 불렀다.

파리 연설원은 일반적인 사법 기능 이외에도, 칙령의 발효와 관습의 실시를 선언하는 포고를 낼 수 있었다. 세습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법 기능 이외에도 어느 정도는 의회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들은 기존의 법률지방의 관습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면 칙령의 등기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과 국왕에게 조언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4. 기타

연설원들은 프랑스의 왕들의 골치를 매우 썩혔으나 말로 싸우는데만 강했지 실제로는 왕권에 비교할 것이 못 되어 루이 14세나 인기도 권위도 바닥에 떨어진 말년의 루이 15세가 으로 이들을 억누르려 하자 별 저항도 못해보고 한동안 사라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루이 16세는 당하고만 있다가 결국 최후의 반격을 시도했으나, 연설원 강경파 인사들의 여론 조작에 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파리 연설원의 전례는 혁명정부와 이후의 공화주의자들이 사법부기소권을 가진 검사들을 강하게 불신하도록 했고, 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기에 탄생한 프랑스 행정법과 사법체계에 큰 영향을 미쳐 아주 막강한 행정부를 만들게 된다. 다른 유럽 국가의 시민혁명은 왕과 싸울 의회와 사법부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프랑스의 혁명은 왕과 사법부를 동시에 타도하는 것이었다는 특수성을 가진다. 이에 따라 행정부에게 막강한 힘을 주되 국왕을 대체할 수장을 인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역사가 발전했고 이 과정에서 왕정복고의원내각제 도입 등이 있었지만, 의회가 중심이 된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4공화국의 난맥상과 염증이 겹쳐져 결국 대통령의 권한이 강한 체제로 정착했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는 입법부의 입법권과 사법부의 사법권에 대해 다른 민주국가보다 큰 제약을 가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헌법에 사법부가 대통령을 보좌한다고 명시했고, 헌법으로 정부의 강력한 행정입법권을 보장한다. 오늘날 프랑스는 총리 직권으로 의회(하원) 동의 없이도 제한적으로[2] 입법이 가능하며, 의회가 제정한 법률일지라도 그것이 정부의 행정입법과 충돌할 경우, 국사원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만으로 정부는 추가적인 행정입법을 통해 직권으로 해당 법률을 수정해버릴 수 있다. 행정재판 최종심, 입법부 감시기능을 행정공무원들로 구성된 국사원(Conseil d'ètat, 국사원 또는 국참사원)에서 진행하여 사법부의 개입과 입법부의 비대화를 막고 있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는 루이 14세가 특별히 선민의식을 가졌다기보단 이들과 맞서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문서에서 보듯 이 말 자체가 실제로 루이 14세가 한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1] 그나마 감옥에 수감되어 살아남은 고이슬라르 드 몽사베르 판사와 같은 이들도 완전히 권력을 잃고 몰락했다.[2] 하원 동의 없는 총리의 입법에 대해 하원이 내각불신임결의를 제출할 수 있다. 가결되면 내각과 법안이 동시에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