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a0000, #cd0000 20%, #cd0000 80%, #9a0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사보이아 왕조 | ||||
아메데오 8세 | 루도비코 | 아메데오 9세 | 필리베르토 1세 | 카를로 1세 | |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 | 필리포 2세 | 필리베르토 2세 | 카를로 2세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 |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 프란체스코 자친토 |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 카를로 펠리체 | |
카를로 알베르토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
사보이아 백국 ·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 |
<colbgcolor=#CD0000><colcolor=#FFF>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Vittorio Amedeo I, Duca di Savoia | ||
이름 | 비토리오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 (Vittorio Amedeo di Savoia) | |
출생 | 1587년 5월 8일 | |
사보이아 공국 토리노 | ||
사망 | 1637년 10월 7일 새벽 2시 30분[1](향년 50세) | |
사보이아 공국 베르첼리 | ||
재위 |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 |
1630년 7월 26일 ~ 1637년 10월 7일 | ||
배우자 | 프랑스의 크리스틴 (1619년 결혼) | |
자녀 | 루이지 아메데오, 루이사 크리스티나, 프란체스코 자친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마르게리타 비올란테, 엔리케타 아델라이데, 카테리나 베아트리체 | |
아버지 |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카탈리나 미카엘라 |
[clearfix]
1. 개요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2. 생애
토리노에서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스페인의 카탈리나 미카엘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궁정으로 보내져 1598년에 펠리페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자랐다. 1605년 형 필리포 에마누엘레의 사망으로 부친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1619년에 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딸 프랑스의 크리스틴 마리와 결혼했다.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외교정책은 사보이아 공국의 대외관계에 불안정성을 불러왔다. 공국을 방어하기에 더이상 징병할 남성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용병을 쓸 돈도 없어서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프랑스에게는 토리노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피네롤로(Pinerolo)를 양도해야 했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통치자들은 이 땅을 되찾기 위하여 수 십년을 허비했다. 결과적으로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 영향력 하에 들어갔고 리슐리외 추기경이 주도하는 반 스페인 동맹에 가담했다.
1637년 9월 25일, 크레키 공작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갔으나 여기서 병에 걸렸고 며칠 만에 사망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치적 음모론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2.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사보이아의 루이지 아메데오 (Louis Amadeus of Savoy) | 1622년 | 1628년 | |
1녀 | 사보이아의 루이자 크리스티나 (Luisa Cristina of Savoy) | 1629년 7월 27일 | 1692년 5월 14일 | 사보이아의 마우리치오[2] |
2남 | 사보이아 공작 프란체스코 자친토 (Francis Hyacinth, Duke of Savoy) | 1632년 9월 14일 | 1638년 10월 4일 | |
3남 |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Charles Emmanuel II, Duke of Savoy) | 1634년 6월 20일 | 1675년 6월 12일 |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 |
사부아느무르의 마리 잔 슬하 1남[3] | ||||
2녀 |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게리타 비올란테 (Margaret Yolande, Duchess of Parma) | 1635년 11월 15일 | 1663년 4월 29일 | 파르마 공작 라누초 2세 |
3녀 | 바이에른 선제후비 엔리케타 아델라이데 (Henrietta Adelaide, Electress of Bavaria) | 1636년 11월 6일 | 1676년 3월 18일 |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슬하 2남 2녀[4] |
4녀 | 사보이아의 카테리나 베아트리체 (Catherine Beatrice of Savoy) | 1636년 11월 6일 | 1637년 8월 26일 |
결혼 자체도 당대 평균에 비하면 늦게 한데다, 후계자 역시 요절한 장남을 제외하면 너무 늦은 나이에 가졌다. 때문에 요절이 아닌 당대 평균보다 조금 짧은 나이인 50세에 사망했음에도 실질적 장남인 프란체스코 자친토는 5세밖에 안 되었고,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3세밖에 안 되었다.
[1] UTC+1 기준. 서울(한양) 기준 저녁 7시 30분[2]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4남이자 루이자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친동생으로 친숙부-조카간이다.[3]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4] 프랑스 왕국의 도핀 마리 안 빅투아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등